선교 여행기/1.독일한인선교

제1차 독일 선교 여행(2)

김제화 2021. 5. 1. 02:21

하노버(Hannover)-남부 독일 순례  6.28-8.20 1979

오늘은 베를린 사역을 마치고  하노버로 가는 날이다. 아침에 백덕심 자매가 한국을 위해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 일을 물어서 방송 전도와 사역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부탁했다. 다음에 오면  Practical Church Life 에 관해서 교제해 달라고 하여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요한나 자매님이 백 자매와 나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어해서 설명하여 주었다. 자매들 모임에서  그동안 수고했다고 사랑의 선물 DM 700를, 그리고 정해월 자매가  DM 70 보태 주어서 모두 모두 고마웠다, 11 시  9 분 여러 날 동안 사귀며 정들었던 자매님들과 이별의 손을 흔들면서 열차는 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자리표를 미리 사지 못해서 자리는 없었다. 마침 쓰레기통이 있어서 그 위에 앉았다.  동베를린 구역인  Marienborn  역에서 열차가 서니 동독 이민 관들이 올라타서 통과 비자를 찍어주고 있었다. 나의  passport 를 보고 다른 종이에다가 도장을 찍어주었다. 이제는 쓰레기통에도 앉을 수가 없어서 서서 하노버까지 와야만 했다. 베를린 자매들이 이렇게 자리표를 사야 하는 줄 알면 왜 좀 미리 사도록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었다. 차창으로 스치는 동독은 가난하고 남루한 모습이다. 드디어 열차는 동독 땅을 벗어나서 달리더니  Hannover  역에 멈추었다.

 

하노버 역을 나오면 광장에 있는 높은 가로등 밑에 어떤 자매님이 나를 기다리기로 한 약속을 전화로 받았는지라, 역을 나와서 살펴보니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자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박복림 자매였다. 인사를 나누고 따께비 같은 그의 폭스바겐 차에 탔는데 자매의 분위기가 썰렁하다. 내가 베를린을 먼저 방문한다고 감정들이 났다고 하더니 이 자매한테서 그런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오는 도중 농담을 좀 걸어 분위기가 좀 부드러워졌다. Elisabeth  자매님이 머무는  Lons Park  수양관에 도착하였다. 침례교회가 운영하는 수양관으로 형제교회에서 독채 이층에 국내 선교사 엘리자벳을 살게 하면서 하노버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 독일의 한인들을 위한 선교 본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엘리자벳 자매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미 한국에서 몇번 만나서 구면이다. 준비된 내 방에 가니 미국에서 보내온 박준형 형님의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용은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 간다는 내용이었고, 강태훈 형님이 나를 미국으로 초청해 주겠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Elisabeth  자매님은 수간호사로 원래 동독 출신으로 국경 담장이 세워질 때 남독으로 탈출하였다고 한다. 서독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의 딸들을 포함하여 타민족의 여성들을 선교하기 위해서 하노버를 중심으로 하는 형제교회가 천거한 국내 선교사였다. 이제부터 이 분의 이름을   줄여서  “엘리스 ”라고 부르기로 한다. 피로도 가시기 전에 엘리스는 나를 데리고  Friendriken strass  병원 기숙사에 갔다. 그곳에는 한국자매들이 정성스럽게 음식들은 준비하여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 나그네에게 고향의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수고하는 자매들을 위로하면서 복음 찬송들을 힘차게 불렀다. 그리고 구속하신  주님의 은혜를 말씀으로 나누며 교제하였다.

 

 

Bach strass Gemeinde(박스트라쓰 모임)  7. 11 Wed

오전  11 시경 장한숙 자매가 연애 중인 친구 광부 아저씨를 데리고 왔다. 한 시간 정도 왜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를 성경을 열어서 전했다. 그 마음에 무엇인가 깨달아가는 것 같이 느꼈다. 저녁에는 이곳 자매들이 나가는 독일 사람들의 교회인  Bach strass(박스트라쓰)  교회에 갔다. 이 교회는 형제교회이지만 자매들이 수건을 안 쓰는 교회였다. 마침 파키스탄 선교사가 와서 슬라이드와 선교 보고를 해 주어서 감동이 되었다. 김학렬 자매가 나의 간증을 통역해 주었다. 학렬 자매에게  DM 800 을 집으로 부쳐달라고 부탁했다.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가정을 위해서 주님은 이렇게 물질을 축복해 주셨다. 학렬 자매는 우리는 이만큼 집으로 돈을 부쳐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하여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Medizinischhochochule(의과대학) 병원 기숙사  7.12 Thu
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정장숙자매님의 초청으로 그의 기숙사에 갔다. 그곳에는 한국에서 연수차 온  Mr. 조란 분이 있었다. 우리는 자매님이 손수 만든 만두 국을 나누면서 전통적인 한국 음식의 맛을 느꼈다. 차를 나누면서 그에게 예수님을 믿도록 전도를 하였다. 그리고 어저께 전도한 광부 Mr. 김도 마침 와서 거듭나는 문제에 대해서 다시 진지하게 나누었다.

 

                                                                                      Hamburg (함부르크)  

 

함부르크는 독일 북부에 있는 주이며 도시이다. 인구 180만으로 독일 제2의 도시로 가장 큰 항구 도시이다. 이 도시의 기원은 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함부르크는 일찍부터 개방되고 자유로운 도시로 밖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인구로 발전 번성한 도시로 옛날부터 외

국 사람이 많은 도시였다.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온 3천여 곳이 넘는 회사들이 수입과 수출 거래를 위해 함부르크에 상주하며, 한국

비롯해 각국의 영사관도 95개가 넘게 있다. 또 함부르크는 독일 스포츠의 중심지라고도 하는데 이 지역의 1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축구팀 함부르크 SV가 있다. 그리고 마치 미국 상품같이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햄버거가 유래된 된 도시이다.

▶ 햄버거(Hamburger)의 유래-함부르크는 전 세계 사람들이 즐겨먹는 햄버거(Hamburger)의 어원이 된 도시다. 함부르크를 비롯한 독일 북부에 고기를 다진 후 빚어서 구운 요리가 있었는데, 19세기에 독일 이민자들이 미국에 정착하면서 '함부르크의 스테이크'라는 뜻으로  햄버그 스테이크(Hamburg Steak)라고 불렀다. 그 뒤에 햄버그 스테이크와 채소를 빵 사이에 끼운 샌드위치가 만들어지면서 지금의 햄버거(Hamburger)가 되었다.  

 

이런 부유하고 아름다운 도시에 엘리스와 함께하는 자매들과 한인교회의 목회자 사이에 갈등이 생겨서 엘리스가 나를 중재자로 보내서 방문하게 되었다.

 

Hamburg 방문  7.13-21 Sat

오늘은 국제 항구도시  Hamburg로 떠나는 날이다. 교회에서 필요한 경비를 쓰라고  DM 150 을 주어서 고마웠다. 엘리스가 운전하여  Celle라는 도시에 들려 자동차 정비사를 하는 최 형제 가정에서 점심을 먹고, 여기서부터는 최 형제가 운전하여   Hamburg에 도착하였다. 소련 출신이면서 선원 선교를 하는  Budic이란 노 형제댁에서 여장을 풀었다. 국제항인 이곳에는 각 나라에서 오는 선원들을 초청 접대하면서 전도하시는 선원 선교사로서 귀한 부부였다. 특히 공산권에서 오는 선원들을 집으로 데려다가 먹이고 쉬게 하면서 집중적으로 전도하고 있었다.

 

Christlich Gemeinde(기독교인 모임(교회)
Hamburg에는 남사면이 고향이고, 노량진 모임서 생활하다가 온 김명섭 자매가 결혼하여 살고 있었다. 그 자매 병원 기숙사에서 우리는 점심을 나누고, 저녁에는  Christlich Gemeinde(모임)에 갔다. 나를 먼저 소개하고 나에게 간증을 하여 달라고 하여서  김명섭 자매가 통역하면서 한 10 분 간증을 나누었다. 기도할 때는 모두 의자에서 내려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다른 모임들과 또 달랐다. 한국과 나를 위하여 많은 분이 기도해 주셨다. 금요일 저녁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모였다. Budic  형제님 집으로 돌아오니, Budic 노형이 이스라엘 회복에 대하여 에스겔서 34-37  말씀으로 교제 해 주셨다.

 

Hamburg  한인 장로교회   7.14 Sat
오늘은 이곳에서 형제교회 계통 자매들과 좀 부딪히고 있는 한인 장로교회 목사를 만나서 문제를 알아보고 관계를 조정하려고 한인장로 교회로 가는 날이다. 여기 한인교회는 사정상 토요일 오후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전창숙 자매가 근무하는 병원 기숙사에서 여럿이 점심을 하는 동안 자매들이 한인 목사들의 권위주의 등을 비판하는 말들을 많이 하고 있었다. 교회로 가는 길에 이 도시에서 가장 음란하고 타락한 길이라고 불리는  St. Paul 이라는 길을 지나고 있었다. 거리 진열장에는 예쁘게 꾸민 아가씨들이 마네킹같이 전시되어있는 Window가 즐비했다. 길 이름은 사도 바울의 아름다운 이름이나 어느새 이 길은 이런 거리가 되어버렸다. 거리 한 골목 저 안쪽에는 로마 가톨릭의 십자가가 이 타락한 도시의 사람들을 구원이라도 해 줄 양 높이 서 있었다. 함께 할 수가 없는 두 세계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묘한 분위기를 가진 세속 도시였다. 또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대표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한인 장로교회는 서독 침례교회 건물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었다. 서독 교회는 한 달간 휴가 중이라 예배는 드리지 않고 목사만이 교회당을 지키고 있다고 해서 난 좀 충격적이었다. 교회도 휴가라니, 한인 예배 가운데 나에게 시간을 조금 주어서,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를 간증을 했다. 오후  3 시 반경 예배를 마치고 목사가 나에게 대화할 것을 청하여 그 교회 집사가 하는 중국집에 가서 음식을 나누면서 저녁  8:40 이 넘도록 대화했다. 형제교회에 대하여 알기 원하여 모든 것을 알려주어 그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영국 형제교회는 교회사에서도 말하고 있건만 그런 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나는 한국에서 군이나 교도소 같은 데서 하고 있는 집단 침례, 세례 문제점을 말하자, 그는 먼저 교인 만들어 놓고 그다음 심령 구원을 한다고 말했다. 이래도 되는 건지? 원래 물 침례가 어떻게 약식 세례로 변했는지 그 역사 과정을 설명해 주자 처음 듣는다고 했다. 그리고 만찬 예배에 대해서도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가 있었다. 그는 이런 점에 대해서 깊이 아는 지식이 없어서 신기하게 듣는 모습이었다. 

 

Evangelical Freikindri Gemeinde(모임) 7.15 Sun. 1980

우리는 주일  Evangelical Freikindri  교회에서 만찬 예배를 드리고 나서 나에게 한 10 분 정도 간증을 해 달라고 청해서 그렇게 했다. 방문하는 독일교회에서는 나의 간증을 듣고 싶다고 시간을 주어서, 나는 주께서 어떻게 이 인생을 변화시키시고 복음 사역을 하게 하시는지 그 은혜들을 나누는 즐거움을 누렸다. 오후에는 자매들이 나에게 전도해야 할 분이 있디고 한 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 집은  Hamburg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로 일하다가 회의가 생겨서 잠시 쉬고 있는 Dr.조명훈 교수duT다. 이 분은 정치학 교수로 북한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고국에도 못 가고, 보고 싶은 어머니도 못 가보는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 나는 성경으로 현상 세계의 죄문제와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청평 여성   7.17 Tu.
오후에 전창숙 자매와 함께 서독 사람과 결혼해 사는 청평이 고향인 여성을 방문하여서 그분의 인생사를 듣고 말씀으로 왜 예수님을 믿고 살아야 하는지를 전하면서 구원의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최 형제와 전 자매와 부두에 나와서 항구를 둘러보는 유람선을 타고 한 시간 정도 거대한 항구를 돌아보는데, 소련과 동구 권 배들이 제법 보였다. 저녁은 전 자매 기숙사에서 준비하였고 김명섭 부부와 엘리스 자매가 와서 함께 식사하면서 교제하였다. 

 

국제결혼 가정 상담   7.18 Wed

독일인과 결혼해 사는 가정을 방문하여 부부간에 편안치 못한 일들을 들으면서 힘든 삶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폭행도 있어서 경찰을 여러 번 불렀고, 이제는 정신적으로 힘들게 한다고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는지 한숨을 내 쉬고 있었다.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 것을 권하면서 말씀을 나누었다. 우리를 위해서 운전하는 최 형제가 오늘 점심을 초대하여 주어서  “복 ”이라는 한인 식당에서 모처럼 고국의 음식을 즐겼다.

 

이집트 형제자매의 간증
Budic  노형 집에 돌아오니 이집트인 부부가 와 있었다. 나는 모슬렘이었던 그분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너무 궁금해서 어떻게 믿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부인이 해산 후 몸이 안 좋았는데 영국에서 온 간호사가 계속 돌보아 주었단다. 부인이 한 달이 지나서 간호사에게 무슨 목적으로 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느냐고? 라고 물었더니 , 간호사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려운 이웃을 도우라고 하였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서, 그러면 당신이 기독교인이냐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는데, 부인이 나도 당신이 믿는 예수를 믿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간호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이년 후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침례를 받았다고 했다. 신앙 때문에 살기 어려워서 전자 기술자인 그는 취업으로 독일로 와서 지금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고 기뻐했다. 바로 출애굽 한 분들이었다. 주님은 얼마나 놀라우신가 ! 자기 백성을 어느 곳에서든지 부르시고 계심을 보게 되었다.

 

전자매 약혼자에게 전도  7.19 Thu
전창숙 자매가 나에게 자기 약혼자에게 전도하여 달라고 부탁하여 호수가 보이는 카페에서 만나 커피를 나누면서 복음을 전했다. Chelston에서 한 학기 같이 공부했던 은퇴한  Herman  노 형제가 여기에 살고 있었다. 그 노형은 방학 전에 나에게  Hamburg에 오면 꼭 연락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오늘 노형의 점심 초대가 있어서 우리 몇 사람이 가서 교제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저녁은  Budic 선교사 댁에서 엘리스와 전 자매가 한국식 저녁을 준비하였다. 이집트 부부와 일본서 온 유대인 형제 등이 함께하는 국제적인 저녁 식탁이었다. 중년의 유대인 형제는 일본에서 활동했다고 했다. 다양한 교제들을 통해서 주님은 여러 곳에서 역사하고 계셨다. 그리고 민족들의 문화 환경에 따라 주님을 섬기는 모습들이 조금씩 다르더라도 한 목적으로 일하고 있으며,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형제자매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Ulzen  교포 가정 방문   7.21 Sat
오전에 우리 일행은  Hamburg 에서  40Km  떨어진  Ulzen(울첸) 이라는 곳에 사는 교포 가정을 방문하였다. 직장 때문에 한인들이 없는 외적진 곳에 살고 있는데, 고향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우리가 가니 몹시 반가워했다. 나는 찬송을 가르쳐 드리면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할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전했다. 정성껏 마련한 점심을 나누면서 교제를 나누었다. 이렇게 한 주간의 함부르크의 사역을 마치고 Celle로 내려 가는데 김명섭부부가 차를 가지고 Celle까지 같이 가겟다고 나서자 전 자매도 함께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Celle  최 형제 집으로 돌아왔다. 최 형제 자매가 준비한 차와 간식을 나누며 휴식을 한 뒤 우리는 들녘으로 나가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 며칠 동안 교제하던  함부르크  식구들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돌아갔다. 창숙 자매가 나 모르게 내 안경집에  DM50든 선물  봉투를 넣어 놓았다. 김명섭 부부가 DM 200 이든 선물로 주었고, 자매가 내가 잔돈을 비닐봉지에 넣고 다니는 것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동전 지갑도 하나 주었다. 엘리스와 나도 피곤한 길을 달려서 하노버로 돌아왔다. 사랑하는 아내의 편지와 함께 딸 은하의 사진 두 장이 기다리고 있어서 기뻤다.

 

Bach strass Gemeinde(모임  7.22 Sun

하노버를 중심으로 남독 전역의 한인 선교를 주도하고 있는 교회이다. 이번 독일에 있는 한인 선교를 돕고자 나를 초청해 준 교회이다. 그동안 다른 일에 바빠서 주일에 Bach strass 교회에 참석할 시간이 없었는데 이번에 주일에 시간이 되어서 예배에 함께하였다. 만찬 예배를 드리기 전 말씀과 기도가 자유로웠다. 예배 시간에는 악기는 사용하지 않았다. 나도 로마서  5:1-11을 영어로 읽었고, 엘리스가 독일어로 읽었다. 기도할 때마다 일어나고, 떡은 한 덩어리를 네 접시에 나누고, 포도주는 각 잔이 아니라 이미 네 컵에 준비된 것을 사용하였다.

 

뜻밖에 찾은 종씨 조카, 김영남  

예배가 끝나고 김영남 자매가 몇몇 자매들과 나를 자기 병원 기숙사로 청하여 갔다. 잠깐 여가를 내서 김영남 자매가 나에게 본이 어디냐고 물어서 선성(예안) 김 씨라고 하자, 자기도 그렇다고 하면서 반가워했다. 이름 돌림자를 보니 아버지가 나하고 같은 항렬 (行列 )이라 김자매는 나에게 조카가 뻘이 되었다. 종씨 조카를 찾아서 기뻤다. 나올 때 박복림 자매가 나보고 현관문을 열라고 명령을 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열어줄려고 하였는데, 그렇게 말하자 안 열고 버티고 있으니까 보다 못한 영남이가 열어주었다. 가부장 가족제도에서 살던 한국의 딸들이 여기 와서 자유분방하게 살면서 스스로 서구화되어서 주관이 세져 있었다. 그리고 한국 남자들에 대한 무슨 한(complex)이 있는지 한국 남자들에 대해서 불평하는 말들을 제법 많이 하곤 하였다. 주로 남녘 시골에서 온 자매들이 많은데 봉건적인 가정에서 자라면서 남자들에 대한 피해의식은 아버지의 영향인지, 그 한풀이를 가끔 나에게 쏟아내곤 하였다. 나이가 차고 지나는 처녀 자매들인데, 은근이 한국 남자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나는 그들에게 그러면 독일 남자와 결혼하면 되겠다고 했더니, 그건 또 아니라고 해서, 저래서 시집이나 제대로 가겠는지 걱정이다. 자기들이 스스로 서구화 되었다고 생각해서 자기들의 대상자들도 어느정도 서구화 된 남자들을 기대하고 있는데, 그런 남자가 어디 흔해야 말이지! 자매들과 생활하면서 가끔은 나를 다루려고 해서 골려 주는 재미도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내가 더 잘해 줄 텐데, 바보들.

 

스타인벡 장로의 초청   7.23 Mon
오후에 파키스탄 선교사  Peter부부와 김학렬자매가 엘리스 댁으로 와서 함께 교제하며 한국 슬라이드도 보기 원하여 보여 주었다. 저녁은  조경 사업을 하는  Bach Strass  모임의 Steinberg 장로님 댁에서 큰 저녁을 준비하여 주셨다. 자매들 모두도 초청되었다. 스타인벡은 한국 자매가 선물한 한국 소주를 나누어 주면서 즐거워했다. 그리고 교제 가운데 박준형 형이 미국에 이민 가는 것에 대해서 크게 실망하는 말을 하면서 내가 학교 마치고 미국을 방문하려는 생각에 실망한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행  26:19-20 으로 간증을 하고 학교를 마치고 미국을 들러서  6 월  30 일까지는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장로님의 기분이 조금 풀어지는 것 같았다.  한 참 후에 스타인벡 장로님이 나에게 내 말에 부담이 되었으면 미안하다고 해서,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부담은 없다고 했더니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엘리스나 스타인벡 그리고 모두가 한국 형제들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아주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젊은 대ㅐ한의 아들들이 넓은 세계로 향하여 뻗어 나가야 하는 우리의 현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곧 독일인 수양회가 있는데 나에게 한국말로 설교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김학열 자매   7.24 Tue.
오전 김학렬 자매가 왔다 . 이곳 한인 모임을 주도적으로 인도하고 있는 영적 지도자 자매였다. 엘리스와 함께 교제하다가 출근 시간이 되어가는 자매를 병원까지 숲 속 길을 걸으며 바래다주었다. 숲속 길에는 오리들이 노는 호수와 사슴들이 있는 좋은 산책로였다. 이것저것 교제하며 가다가 문득 내가 입고 있는 세터를 누가 뜬 것이냐고 묻기에, 알려주지 않았다. 여름이라 더울 줄 알고 팔 긴 옷을 가지고 오지를 않아서, 7 월인데도 자주 비가 내려서 쓸쓸할 때가 많았는데 몸에는 좀 작았지만 쓸쓸한 이곳에서는 도움이 되었다. 이 세터는 베를린의 막내   문 자매가 처음 뜬 실패작 세터이긴 해도 이 나그네에게는 독일에 있는 동안 도움이 되어서 고마웠다. 저녁은 양양 김선미 자매 병원 기숙사에서 식사하는데 바닷가 여성이라 달랐다. 문어를 삶아 내놓았는데 아주 반가웠다. 식사를 마치고 둘러앉아 차를 나누면서 성경 모임을 가졌다.

 

                                                               남부 독일 여행  7 월  25 Wed. 1980

오늘은 엘리스 자매와  남부 독일을 한 바퀴 도는 장거리 전도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하노버 - 프랑크푸르트 - 슈투트가르트 를 돌아오는 여정이다.

 

김복림 자매가 와서 교제하다가 자매 모임에서 여행에 필요한데 쓰라고 DM 200를 주어서 고마웠다. 12시경 엘리스 차로  4 시간 거리인  Frankfurt 로 떠났다.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Autobahn(속도 제한이 없는 고속도로 )을 달리는 동안 차창으로 스치는 독일의 농촌과 들녘은 아름답고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산악이 아닌 평지에 나무 잘 가꾼 무성한 삼림과 수풀은 이 나라의 부유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Frankfurt  시에 들어와서  Dr. Wagnor 란 분의 집을 찾아갔다. 엘리스가 숨겨 놓은 열쇠를 찾아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빈집이었다. 모임의 형제님이신  Dr. Wagnor  주인이 휴가를 가면서 우리를 쉬도록 해 준 것이다. 나를 이 빈집에 혼자 쉬게 하고 엘리스는 그곳 교회 자매 집에 자러 간다고 한다. 아침을 몇 시에 먹겠느냐고 해서 피곤하니까 아침은 먹지 말자고 했다.

 

박용숙 자매 방문  7.26 Thu.

9 시가 되어서 엘리스가 왔다 . 하노버에 있는 주 형제가 나에게 주라고 보낸  DM50 에서 엘리스가 나의  T-shirt 를 하나 사 왔다. 우리는  Badsoden 지역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박준형 형의 동생 용숙 자매 기숙사로 갔다. 한국에서는 그리 얼굴이 익은 자매는 아니지만, 박 형의 동생이라는 점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사이같이 반가웠다. 자매가 준비한 점심을 들고 잠시 교제를 나눈 뒤 박 자매가 나를 데리고 백화점으로 갔다. 자매가 아들 혁이를 위해서 블록으로 된 조립식 장난감 한 통을  DM 25 에, 딸 은하를 위해 바둑이를  DM 19.90 에 샀다. 그리고 내 자매를 위하여  DM 25 짜리 지갑 하나와 그리고  Coffee  보온병을 하나 사주었다. 외국에 와서 힘써 일하는데 이렇게 많은 선물을 사주니 고맙고도 미안했다. 엘리스와 돌아오는 길에 한 병원에  들려서 아기를 낳은 한국 자매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여 주었다. 

 

푸랑크푸르트 식물원   7.27 Fri

 

오전 엘리스와 함께 유명하다고 소문난  Frankfurt 의 식물원에 갔다. 이상한 식물들이 가득한 식물원은 대단히 넓었다. 열대 지방에서 동물을 잎으로 감아서 잡아먹는 식물을 어렸을 때 만화에서 보았는데, 큰 동물을 잡아먹지는 못하겠지만 긴 잎으로 드르르 말아 올리는 그 식물은 정말 흥미로웠다. 그리고 건드리면 오그라드는 신경초와 곤충을 잡아먹는 식물들도 재미있었다. 식충식물은 수십종으로 이 식물원에 여러 종류가 있는데 두가지를 사이트 자료에서 올려본다. 내가 지금까지 그림으로 보았던 식물들을 직접 만져보니 실감 나는 세상이다. 독일 사람들은 여러 가지 꽃과 잎으로 된 차를 좋아하는데, 차밭 전시관은 볼만했다. 

 

▶미모사(sensitive plant, touch-me-not) 신경초-콩과 한해살이 풀로 높이는 30–50cm 자란다. 잎을 건드리면 곧 아래로 늘어지고 작은 잎도 서로 닫혀 합해지므로, 마치 부끄럼을 타는 것 같다고 하여 함수초라(含羞草) 라고도 한다.

 

 

밖으로 나와서 약속한 장소에서 우리는 홍 이란 자매를 만났다. 서독에 온 지  5년째라고 한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를 하였다. 그리고 우리 세 사람은 함께 불빛이 요란한 마인즈 강을 거닐면서 야경을 즐겼다. 어떻게 하다 보니 밤  2시가 넘은 시간 엘리스가 빠른 길을 찾아온다고 하다가 길을 잃어서 얼마나 헤매었는지 지칠 지경이었다. 주로 시내에서는 내가 지도를 보고 길 이름들을 보면서  Navigator  역할을 하는데 엘리스도 성미가 깐깐하고 좀 신경질적인 데가 있어서 함께 여행하는 동안 아주 힘들었다. 또 비서 스타일이라 너무 꼼꼼한 것도 피곤한 일이었다. 또 독일어가 문외한인 내가 여행을 떠나면서 엘리스가 나에게 준 한 장의 지도로 길 안내하기를 사 일째 이제 길 이름은 제대로 보긴 하는데 어떤 때에는 찾는 길이 나타나지 않아서 정말 힘들기도 했다.

 

 병원 방문  7 월  28 Sat
오늘은 폐결핵으로 요양 시설에서 요양 중인 오은숙 자매를 심방했다. 이 좋은 나라에 와서 어떻게 살아서 폐결핵에 걸렸는지 모르겠다. 만나 교제해 보니 그 자매는 육체의 병보다는 마음의 병이 더 중했다. 의대생인 두 독일 학생들을 사귀다가 이제 둘 다 버릴 수 없는 자기 혼란에 빠져서 방황하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많이 울었다고 했다. 성경 말씀을 나누어주며 복음 찬송가를 불러주었다. 나는 그에게 마음을 정리하도록 위로해 주었다. 헤어질 때  DM 20을 주면서 내 가방에 무엇인가 넣어주었다. 그것은 빵과 잼, 칫솔, 치약, 로마 산 작은 향수였다. 나그네를 살펴주는 마음씨가 고마웠다. 매일 엘리스가 만들어지는 계획에 따라 나는 움직이며 일하고 있는데,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는지 미리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하고 있는 그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엘리스는 나를 하루라도 놀지 않고 일을 시키기 위해서 부단히 한 사람의 한국 사람이라도 더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칭찬할 만하였다. 그래서 밤낮 할 것 없이 자매님이 가지고 있는  net work 를 최대한 동원하고 있었다. 귀한 주님의 시간과 물질을 헛되이 쓰지 않으려고 주님의 일에 충실히 하는 자매의 책임감과 열정에 나는 감탄하고 있다. 오늘 주일 오전은 어디 연결이 되지를 않아서 자연이 쉬게 되어서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기었다. 오후에는 Russeldorf로 갔다. 목적한 집을 찾는데 한 시간을 헤맸다. 나는 지도를 보고 길 안내를 하는 일이 좀 익숙해지기는 해도 에어컨도 없는 차에 더위에 지치고 신경을 너무 써서 눈도, 몸도. 그리고 마음도 피곤해서 고역이었다. 겨우 전화가 되어 찾은 집은 새로 난 짧은 길이어서, 길 이름은 지어졌는데 아직 지도에는 올라 있지 않아서 우리가 찾지를 못한 것이었다. 만난 여자분은 심령 서적을 읽고 신비한 사상에 물들어 있었으며, 유산한 일로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혼란한 가운데 있었다. 나는 히  9:12  말씀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영원히 용서해 주신 구속의 은혜를 전하자 그의 마음이 밝아지면서 평안을 얻고 있었다.

 

Russeldorf 교회 방문 (7.29 주일 )
주일 저녁이어서 이 부근에 있는 한 서독 모임에 갔다. 이 모임은 아주 폐쇄적인 모임에서 생활하다가 형제들이 나와서 개방적이 모임으로 새로 시작하고 있는 교회였다. 교회의 전통과 습관이 나라마다 또는 지방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기는 해도, 이 교회의 특징은 자매들이 기도할 때는 수건을 쓰고 기도가 끝나면 벗는 것이 다른 모임과 달랐다.

 

국제결혼 가정상담   7.30 Mon.

Darmstard 에 가서 말레이시아 사람과 사는 한국 간호사를 방문하여 구원의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Rechenbach 에 가서 독일 사람과 결혼하여 사는 박순자 씨를 방문하여 남편과의 갈등을 들었다. 남편이 가끔 때리고 해서 더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남편이 때릴 때 경찰을 불렀느냐고 물으니, 불렀단다 . 두 번이나 경고를 받았는데 자기가 구속하라고 동의하지 않으니까, 잡아가지는 않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때리지는 못하지만, 정신적으로 괴롭힌다고 한다. 많이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과 평안을 얻도록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라고 전했다. 같은 민족끼리 살아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문화가 다른 민족과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제 조금 알것 같다.

 

저녁은 종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산 나를 위하여 엘리스는 독일식 돼지 갈비구이로 저녁을 주문했다. 그리고 독일에서 제일 좋다는  Weinzen bier를 권해서 맛을 보았다. 독일은 물에 석회가 많아서 예로부터 맥주 가 발달하여 있어서 지방마다 특색 있는 맥주를 생산 선전하고 있었다. 12 시가 넘어서 돌아왔는데 대단히 피곤했다. 요즈음 깨다는 것은 체력이 곧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종일 차에 실려 가면서 길을 찾아야 하고, 헤매기도 하면서 피곤해지고, 더위에 좀 짜증스러운 감정이 생길 때 사람을 만나 교제하는 일들은 나 자신도 은혜가 되지 않아서 정말 미안한 마음이었다. 날씨는 더운데 차에 에어컨이 없어서 더 지치게 하고 있었다. 여기 유럽은 더운 여름이 짧아서 대개 차에 에어컨을 달지 않고 경제적으로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남부 독일을 엘리스 자매를 따라 헤매고 다니며 일하는 동안 우선 매일 나는 정신적으로도 건강해야 했다. 서로 문화가 다르고 이제 만나서 함께 여행하는 짧은 시간에 서로를 얼마나 알겠는가, 또 서로가 말도 시원하게 통하지 않는 데다가, 나이도 열 살 위여서 감정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체력 또한 중요했다. 강행군하는 엘리스에 비해 주어진 일을 감당해야 하는 내가 골골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피곤함을 보이지 않도록 순간순간 산책도 하고 심신을 새롭게 하느라 애썼다. 또 잠자리도 편하지 않아서 잠을 푹 자지 못한 다음 날 내색은 하지 않지만 정말 미안한 마음이었다. 내일은 또 어디로 갈 것인지는 엘리스가 아침에 와보아야 알 일이어서, 나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간호학교 학생과 한인 가정 방문 7.31 Tue.
오전 우리는 한참을 달려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병원 기숙사에 가서 간호학교 졸업반인 학생을 만났다. 그에게 전도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르쳐 주고 기도를 시키니까, 한없이 울면서 기도를 하여서 나는 많이 당황했다. 나는 처음 그가 왜 그렇게 우는지 감을 잡지 못하였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 때문인가! 아니면 외로워서인지? 기도를 마치고 그는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씻고 돌아와서 겸연쩍게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하여서 복음 송을 몇 장 함께 부르면서 그의 마음을 달래어 주었다. 왜 울었느냐고 묻지 못한 채 준비한 점심을 대접받고 나왔다. 이곳은 한국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곳으로 어린 여성이 혼자서 독일 사람들 틈에서 병원에서 일하면서 공부를 하는데, 정서적으로는 아주 외롭게 살고 있었다. 두 시간이나 떨어진 도시에 한국 식품을 사러 가지 않는 한 한국말은 한마디도 해보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그가 우리와 함께하면서 문득 고향 생각이 나서였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오후에는 한국에서 가족이 다 와서 사는 조 자매님이라는 가정을 방문했다. 아이들 둘은 학교에 적응하느라 애쓰고 있었고, 50대인 남편은 아무 할 일이 없어서 오히려 속을 썩이고 있다고 자매가 나에게 털어놓는다. 남편은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곳에 와서 무엇을 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으니 매일 술이나 먹고 부인 속 썩이는 일이 그가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부인이 나가 돈을 버는 대신 집안 살림을 잘 도와주는 형편도 아니어서 서독에 와서  10 여 년  살아온 부인으로서는 속에 천불이 나고 있었다 . 복음 성가를 가르쳐주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면서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얼굴이 굳어져만 있던 남편도 얼굴이 환해지면서 입가에 미소도 지으며 좋아했다. 부인은 이러한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독일에 와서 처음 웃는 얼굴이라고 하면서 기뻐하고 있었다. 예수님을 믿으시고 즐겁게 사시라고 격려해드렸더니 고맙다고 했다. 나올 때 자매님이 DM 50이 든 선물 봉투를 선물로 주었다. 오늘은 두 곳을 찾아보면서 하루가 다 갔다 . 방문하는 길들이 멀어서 매일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어느덧  7월이 다 가는 밤이 깊어가고 있다.

 

Stuttgart  방문   8.1-2 Thu

아름다운 남부의 도시 Stuttgart 로 갔다. 김성문 씨란 분을 만나 공원에서 성경 말씀의 교제를 나누었다. 다른 곳에 가서 이명숙 자매와 그 친구를 방문하여 말씀과 복음 송을 가르쳐 주었다. Turingen에 가서 김영 자매를 만나서 율법과 은혜에 대해서 교제해 주었다. 오늘은 하루에 자리를 옮겨가면서 세 번이나 만나 교제를 가지느라 보통 피곤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서 우리는 엘리스가 아는 여의사  Dr.Dopper의 집에서 하루 머물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 여의사도 아프리카 선교지에서 의료 선교를 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저녁에  Dr. Dopper와 우리가 차를 나누며 교제하다가 헤어지기 전에 엘리스가 기도하자고 제안하니까 의사는 별로 원하지 않았다. 엘리스가 한두 번 더 권하다가 원하지 않으니까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대로 헤어졌다. 처음부터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더 좋을 뻔하였다. 잠시 분위기가 어색했다. 남의 집에 와서 내 습관이나 기준대로 하려고 하는 것은 좀 무리인 것 같았다.

 

Wiedenest  Bibelscgule(비데네스트 성경학교) 방문   8.3 Fri. 1979

남부의 방문 일정을 마치고 11 시경  Stuttgart를 떠나  500Km 를 달려서 서독의 임시 서울인  Bonn 의 중심가에서 잠시 휴식을 하면서 번화한 시가지를 둘러 보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독일의 원래 수도는 베를린인데 전쟁에 패하고 나라가 동서로 갈라지면서 서독은 본을 임시 수도로 삼고 있었다. 우리는 도시 가운데롤 흐르는 라인강을 건너서  Kolong에서 잠시 쉬면서 1100년 전에 지은 웅장한 고대 사원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계속 북으로 달려서 오후 6시경에 학교에 다달았다.

 

Wiedenest  Bibelscgule(비데네스트 성경학교)

 

지금 이 학교에서는 두 주간 특별 세미나가 열리고 있는데 하노버 김정애 자매가 참석하고 있고 내일이 마치는 날이라고 한다. 오늘은 이 학교에서 쉬게 되었다. 비덴네스 성경학교 는 독일과 유럽에서 널리 알려진 복음주의 성경학교이다. 무명의 신학자  “에릭 사우어” 교수가 세운 복음적인 성경학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박사 학위를 가진 이름난 신학자도 아니요, 그저 그리스도 안에서 평범한 한 형제로 불리며 독일의 복음화를 위하여 일생을 바친 귀하고 귀한 분이시다. 이 학교의  설립자이며 첫 교장이었던 에릭 사우어 교수는 그가 쓴 세 권의 저서, "여명의 시대 , 십자가의 승리 , 영원에서 영원까지"로 영국에서 신학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독일 형제교회와 침례교회의 협력

학교는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잘 조경된 환경 가운데 있었다. 한국 모임은 이런 교육 시설을 언제쯤 가질 수가 있을런지, 그리고 이런 교육을 할 수 있는 학자들은 언제쯤 나올 수 있을까? 지금은 나 같은 사람을 포함해서 아마추어 실력도 안 되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선생을 하고 있었으니 하나님도 하늘에서 웃으시지 않을지 송구한 마음이다. 이 성경학교는 독일 침례교 형제들이 주관하면서 개방적인 형제교회가 함께 협력하고 있었다. 형제교회가 침례교회와 함께한다! 한국 형제들이 들으면 까무러칠 일이지만, 여기에는 그럴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히틀러 독재 시절 모든 종교가 국가 등록을 하라는 강제 명령에 형제교회는 응하지 않음으로써 정치적으로 핍박을 받고 있었다. 이때 침례교 형제들이 잠시 피난처를 제공해 주무로서 많은 모임이 침례교 우산 아래 머물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보호를 받았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선교와 교육 면에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폐쇄적인 형제들은 그대로 독자적으로 견디어 왔다. 독일교회는 초기에는 영국에서 폐쇄적인 성격의 선두자인 Darby형제가 여러 번 와서 많이 가르쳤지만, 교회들은 그 수가 많지 않고 크게 발전을 못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럽은 영국 계통의 형제교회와는 상관없이 유럽에서 일어난 다양한 복음주의 형제 무리에 뿌리를 두고(예:진젠돌프 형제 무리 등 ) 발전하면서 같이 교제하는 넓은 관계들을 유지하고 있어서 열려진 마음들이었다. 주안에서 구원받은 자는 경계를 떠나서 다 한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활짝 열려 있어서 서로 교제하고 돕는 일에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따라서 폐쇄적인 성향이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정애 자매
김정애 자매는 하노버 자매 모임의  Big Sister로 내가 하노버에 올 때 이 학교에 김자매는 이 학교로 두 주간 공부하러 오게 되어서 그동안 서로 만나볼 수가 없었다. 이제야 만나서 교제할 수 있게 되어서 반가웠다. 엘리스가 이 학교 선교 담당이신  Daniel  선생을 만나게 주어서 학교 소개도 받고 이 학교가 선교에 힘쓰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한국어로 에릭 사우어의 책들이 번역이 되어서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했더니 몹시 반가워했다. 그분은 지금 주님께로 가시고 미망인은 학교 안에 마련한 주택에서 살고 계셨다. 저녁에는  2 주간 세미나를 마치는 시간으로 기도회와 간증이 있었는데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기독교가 시들어져 가는 이 유럽에 아직도 주님을 사랑하는 이런 귀한 분들과 학교가 있다는 것이 고맙기고 다행스럽기만 했다. 엘리스가 김 자매에게 내가 너무 피곤하니 내일은 하루 쉬게 하자고 의논하기에 괜찮다고 일이 있으면 계속하자고 했더니 엘리스가 좋아했다.

 

Wetter  방문   8.4 Sat
이른 아침 새소리에 잠이 깨었다. 밝은 햇살이 자연을 푸르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여행에 지친 몸이 하룻밤 푹 자고 나니 몸과 마음이 새로워지고 가벼워졌다. 엘리스와 김 자매를 만나 학교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오늘의 계획을 들었다. 우리는 다른 지역에 가서 며칠 활동하다가 올라갈 예정이다. 세미나를 마치고 하노버로 돌아가는 김정애 자매를 기차역에 데려다주고 우리는 한국인 부부가 살고 있는  Wetter란 곳으로 갔다. 지도로 찾아가 만나보니 사는 곳은 좀 외적 진 곳이었다. 이 부부는 그동안 신앙과는 무관심하게 살아왔는데 종교가 지배하는 이 나라에서 살다 보니 아이들이 학교에 가게 되니까 법적 혜택을 받아 보고자 독일 국교인 루터교에 갔는데 교인되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고민하고 있다고 하였다.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위로여 주면서 많은 교제를 나누어주었다. 독일에서 국교 말고도 복음주의 교회에 속하여도 아이들 교육을 위하여 아무 차별 없다고 엘리스가 잘 설명하여 주었다. 마침 그곳에 있는 형제교회로 나오도록 소개하여 주면서 오는 주일 함께 만나자고 하였다.

우리는 그곳 교회의 장로님이신 율리 노형 댁을 찾아갔다. 절벽에 기대어   지은 삼층집은 숲으로 가려져 있었다. 율리 노형은 우리에게 독일의 지하수에는 석회가 많아서 그냥 마시지 않고 끓여서 먹는데, 마침 이곳 산골에서 나오는 샘에는 석회가 거의 없어서 좋은 물로 알려져 있다고 하면서 여기 있는 동안 물을 많이 마시라고 권해 주었다. 그동안 사서 먹는 물만 먹다가 생수를 마시니 시원함을 느꼈다. 아들 내외가 탄자니아에 선교사로 다녀왔고 여기서도 주님의 일에 힘쓰고 있었고, 아버지는 장로님으로서 인쇄업을 하고 있었다. 이 집에 머물면서 이 일대에 있는 한국인들을 찾아볼 계획이었다. 내일 주일 말씀을 부탁받았으나 언어 관계로 간증만 하기로 했다. 

 

Volmarstein Kohlerwald Strass Gemeinde  8.5 Sun

이곳 교회의 이름은  Volmarstein Kohlerwald Strass라는  긴 길 이름을 따서 지었다. 엘리스는 어저께 우리가 방문했던 한국 여성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문밖에서 집회기 시작된 뒤까지도 기다리시느라 수고를 하였지만, 그분은 오지 않았다. 9:15 에 한 시간 정도 만찬 예배를 드리는데 감사한 후에 형제들에 의해 네 접시의 떡과 넉 잔의 포도주가 뒤에서부터 시작하여 앞으로 옴으로 마쳐진다. 이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대개 앞에서 뒤로 갔다가 다시 앞으로 가지고 오는데, 떡과 잔을 아예   뒤로 가지고 가서 앞으로 오면서 끝나게 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10:30  말씀 시간에는 더 많은 사람이 많이 와서 자리를 꽉 메웠다. 한 형제분이 말씀을 짧게 보고 나에게 시간을 주어서 한국 소개와 함께 간증했다. 간증을 마치고 나니까 , 사회자가 한국 찬송을 듣고 싶다고 요청이 와서, “홀로 홀로”를 불렀다. 모두 너무들 좋아하면서 박수를 보내 주었다. 교회에서  사랑의 선물 DM 50을 그리고 아래층에 살고 계시는 노 자매님이 고맙다고 선물 DM20를 주셨다. 오늘 점심은 자매님이 달걀을 풀어서 만든 국수였는데 우리네 잔치 국수와 비슷하여서 맛이 괜찮았다.

 

Köln  간호사 방문 
오후에 쾰른(Köln) 시로 가서 30대 중반의 한국 간호사를 만났는데, 한국인 남편 때문에 마음 고생을 많이하고 살고 있어서 마음이 안되었다. 남편이  죄를 지어서 지금 감옥에 있는데 며칠 후에 나온다고 했다. 마침 한국에서 이곳 음악 대학에 유학 온 여학생이 잠시 머무르고 있어서   복음 송도 가르쳐주고 전도도 하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 

 

허탕 친 방문   8.6 Mon
율리 형제님이 한국 찬송을 한 곡 녹음해 주기 원해서 녹음해 드렸다. 그리고 또 그분 동서 되는 분이 내가 필요로 하는 찬송을 녹음해 주어서 고마웠다. 오전 만날 것을 기대하고 찾아간 두 곳은 허탕을 치고 말았다. 오후에는 나이 든 한국 간호사를 만나 점심을 함께 나누면서 예수님을 믿고 살도록 기초적인 전도를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어느 작은 마을을 지나가는데 신발을 잔뜩 실은 차가 마울 길에 세워 놓고 팔고 있어서, 우리는 차를 세우고 신발 구경을 하다가 나는 이탈리아제  Sandal을 하나 샀다. 평생 처음 사보는 남자  sandal이다. 아직 한국에서 남자들이  sandal을 신는 것이 일반화되지 않을 때여서, 더운 여름에 신어보려고 샀다.

돌아와 잠시 쉬고 엘리스와 함께 어저께 주일 내 노래를 들으시고  DM20 을 주신 아래층 노인을 찾아가 뵈었다. 그 할머니는 여덜살에 에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80세가 넘으시도록 홀로 살고 계셨다. 어저께 내 노래를 듣고 감동이 되었다면서 노래 지도를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어서 미안하기도 했지만, 내가 노래를 부르기는 잘 부르는 모양이었다. 율리 노형 가정에서 시간제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독일 여성에게도 잠시 전도를 할 수 있었다. 내 방에 올라오니 네 책상에 봉투 하나가 놓여 있어서, 이상하다는 마음으로 열어보니, 교회에서 보낸 사랑의 선물  DM150 이 들어 있었다. 어제 주일 교회에서  DM50 을 주었는데, 이렇게 또 격려의 선물을 주시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두 개의 자물쇠와 열쇠    8.7 Tue 1979

아침 식탁에는 이 집의 가장이신 율리 장로님께서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는 시간에 전통적인 독일 자물쇠와 열쇠 두 개를 가지고 오셔서 엘리스에게 하나, 나에게 하나를 주었다 . 자물쇠를 주신 뜻은 무엇일까? 그냥 쓰라고 준 것은 아닐 테고, 좀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그 자물쇠의 뜻을 알게 되었다. 마음 문들을 잘 단속하라는 뜻이었다. 우리가 비록 한  10 살 차이가 나기는 해도 매일 남녀가 붙어서 주님의 일을 한다고 긴 여행을 하고 있으니까 경고의 메시지를 주신 것이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경고로 알고 그분의 고마운 마음을 간직했다.

 

이제 14 일간의 전도 여행을 마치고 하노버로 돌아가는 우리를 위하여 율리 장로님께서 기도해 주셨다. 그동안 잘 쉬도록 돌 보아주신 것을 감사드리면서 길을 나섰다.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River 라는 곳에 들려 독일 침례교회 목회자와 결혼하여 사는 한국 자매 가정에 들렸다. 자매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차를나누며 교제하는데 자매가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물어서 대답하여 주느라 시간을 보냈다. 특별히 순복음 교회의 성령 운동에 관해 물어서 아는 대로 대답하여 주었다. 이 자매는 점심으로 콩나물국을 끓였는데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콩나물 국인지 속이 깨운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다니러 와 계시는 할머니에게도 전도하여 드리고 우리는 하노버로 향하여 달렸다. 돌아오는 고속도로 저편 들녘에 큰 무지개가 오래도록 펼쳐져 있는데 얼마나 아름다운지! 두 주간의 사역을 마치고 돌아가는 우리를 축복해 주시는 것 같이 느껴졌다. 노아에게 보여주신 약속한 무지개를 떠 올렸다. 또 만일 우리 사이가 연인 사이라면 저 아름다운 무지게에게서 무슨 뜻을 찾아내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문학적 상상을 해 보았다. 어두워져서야 하노버에 돌아오니 많은 편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