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한 마당/부서지는삶

깨어진 옥합 마가복음 14:3-9

김제화 2016. 2. 16. 04:41

“깨어지는 삶을 살자” 마가복음 14:3-9/ 마 26:6-13/요 12:1-8

열면서...
미국 대륙 횡단 열차에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함께 앉아서 여행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차가 떠나기 전부터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 그 옆에 앉은 사람은 같이 이야기도 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여 심심했다. 한참 뒤 성경을 읽던 사람은 샌드위치를 꺼내서 먹으면서 계속 성경책을 읽고 있다. 얼마 뒤에 또 샌드위치를 꺼내서 먹는데 옆에 앉은 사람이 속이 좀 틀리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 여보시오! 선생님, 성경에는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두 번째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이웃 사람에게 먹어보란 말도  한마디 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퉁을 주었다. 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던 사람은 안경테 너머로 옆 사람을 보면서 성경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도 있지만, “네 이웃의 물건을 탐내지 말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하고 점잖게 응수했다. 때때로 신앙인들이 말씀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이 생각하여 성경을 자신에게만 편하도록 적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도 한다. 꼭 말씀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면 마음에 걸어야 한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한 주간 동안 기억하시고 살 한마디를 드리고 싶다. 다 같이 따라 해 보자.  “자아가 부서지는 삶을 살자” 

 

1. 베다니에 머무시는 예수님 : 3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전 마지막 머무실 곳으로 찾으신 곳이 베다니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예루살렘 맞은편 감람산 남동쪽 기슭으로 2.7Km 정도 내려가면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이나 지명들의 뜻을 풀어보면 흥미 있는 결과를 얻을 때가 있다. 히브리말로 “베다니”란 마을의 이름은 “고뇌하는 자들의 집”또는 “슬픔이 기숙하는 집”이란 뜻이다. 이 마을의 이름이 뜻하는 것 같이 이 마을에는 고뇌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사랑하는 오라버니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오누이들이 있는 곳이며, 죄 많은 여인의 고뇌가 있는 곳이며, 문둥병자 시몬이 병의 고통을 받으면서 살고 있는 곳이다. 마을 이름같이 고뇌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여러분, 이 베다니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도 죽음은 날마다 찾아오고 있다.

 

사랑하는 자를 잃은 가족의 슬픔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인생이 여기서 태어나서 생을 고뇌하고 갈등하다가 여기서 죽어 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는 죽음의 두려움이 있는 곳이다. 전쟁과 죄악의 공포가 있는 곳이다. 우리 마음이 원하는 것을 다 채우지 못하는 허전함이 있는 곳이다.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다 죽음으로 돌아가는 헛되고 헛된 세상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줄 수 있는 곳은 없다. 몇 년 전 유엔에서 이 지구 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가운데 하 나라가 캐나다라고 발표한 적이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는 2016년에도 5위 안에 들고 있다. 그러나 이 나라에도 이 베다니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갈수록 온갖 흉악한 범죄가 일어나고 있고, 날마다 죽음의 행렬이 나가고 있다. 죄와 죽음이 있는 이 세상에는 살기 좋고 안전한 곳은 없다. 가장 살기 좋은 나라는 하늘나라 밖에 없다.

 

놀라운 변화
그런데 슬픔이 기숙하는 베다니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 시몬과 식탁을 마주하고 음식을 나누고 계십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이 아름다운 장면을 화폭에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감동적이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과 하신다는 것이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슬픔과 비탄에 빠진 베다니는 이제 기쁨이 넘치는 마을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거기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기적과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셔서 슬퍼하는 누이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죄에 매여 고통하는 여인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제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도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집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은 곧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자 세상은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시면 내가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가정에 오시면 내 가정이 변화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교사로서 하늘나라에서 베다니와 같은 세상에 구원의 은혜와 생명의 기쁨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천국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셨다면 마음 문을 여시고 예수님을 마음의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영접하는지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 한복음 1:12

 

2. 예수께로 온 여인 :10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실 때 예수님 등 뒤로 한 여인이 손에 향유 한 옥합을 들고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 향유 옥합을 예수님 머리 위에서 깨뜨렸습니다. 향유는 예수님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아름다운 향기가 온방에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두 가지 가정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만일 이 여인이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데 이런 행동을 했다면 필시 미친 여자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둘째는 만일 이 여자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가 있다면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가 본문과 관계가 있습니다. 다른 복음 서에는 이 여인은 죄 많은 마리아라고 합니다. 여인은 일생을 죄에 매여 마음의 고통을 받으면서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마을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그녀는 매인 죄에서 풀려나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받은 죄 용서함의 엄청난 은혜를 기쁨에 고마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에게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가장 아끼는 것을 예수님께 드리게 된 것입니다.  

 

은혜에 대한 반응  
은혜에 대한 반응은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행동에서 신앙의 큰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서 구속의 큰 은혜를 받았다면 그 은혜에 감사하는 즉각적인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영적으로 받은 축복을 물질적으로 나타냄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값없는 구원의 은혜를 받은 다음에 주님께 드린 첫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고맙습니다,’라고만 했습니까? 나 같은 인생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버려주신 예수님의 이 엄청난 은혜의 축복에 대하여 여러분이 그 응답으로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예;
- 사도 바울께서는 자기 인생을 주님께 헌신함으로써 복음이 처음 이방과 유럽으로 전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 Livingston의 헌신으로 검은 대륙에 생명의 빛이 비치게 되었습니다.
- Hudson Taylor의 헌신으로 중국 대륙에도 구원의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 Judson의 헌신으로 버마에도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 대동강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토마스 선교사,

- 수많은 캐나다 선교사들의 희생으로 한국은 진리에 깨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 물질적인 헌신으로 각종 교육시설, 의료사업, 사회복지시설, 등을 세워서 복음 선교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 내 나이 21살에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은 뒤 주님을 위하여 내 인생을 어떻게 살까를 깊이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제 나이 23세 때에 저는 사도 비울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하자마자 경기도 평택시 청북면 율북리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면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진리 강릉 두 곳의 교회를 개척하고 나아가서 중국에서 선교사로서 17년간을 복음을 위하여 사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이제 제가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권하여 드리고 싶은 말씀은  주님 앞에 영원히 남을 일들을 위하여 사시기를 바랍니다. 땅에 사는 날도 보람이 있고 주님께 가서도 칭찬받을 수 있는 일들을 하시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이 더 늦기 전에 주님께 헌신하셨으면 합니다.

 

3. 깨어진 옥합

아무리 좋은 향유라고 하더라도 옥합에 들어 있는 한 아무도 그 향유의 가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 진가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옥합이 깨어져야 합니다. 향유를 기득이 담고 있는 옥합이 아무리 아름답고 비싸고 좋을지라도, 깨어지지 않는 한 진정한 그 향유의 진가를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옥합이 왜 깨어져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도 옥합같이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깨어져야 하겠습니까? 만일 우리 자신이 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1) 깨어지신 예수님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사랑의 마음을 전하시고자 노력하셨지만, 백성들은 더 멀리 이방 신들에게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취하신 방법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의 삶으로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14 
그리고 영원한 사랑의 깊은 관계에 들어가시고자 우리에게 있는 죄를 없이하여 주시려고 우리의 죄 짐을 지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즉 그 몸이(옥합) 부서질 때에 보혈(향유)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아름다운 향기가 온 세상에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서지심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보여주셨다.”로마서 5: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서진 것은 우리를 단번에 죄에서 구원받게 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2
이제 여러분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게 되었는지 아시게 되었습니까?

 

2) 우리도 깨어지자
 '깨어진다, 부서진다’는 뜻은 ‘헌신, 희생’이란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6:4에 “...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때문에 매 맞고 터지고 찢긴 흔적

 

이 그 몸에 그림 같이 남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의 그 몸이 그렇게 찢길 때에는 그 분 자신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음을(갈 2:20) 설명하여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께서 우리를 향하여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은 자가 되라고“(고전 11:1)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열들이 다 이렇게 살았습니다. 우리 자신이 깨어지지 않고서는 저 큰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위하여 아름답게 살려면 우리 자신이 깨어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나타나는 좋은 도구로서 사용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1) 자아가 부서져야 합니다.           
자아는 육신의 중심입니다. 나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나타내 주는 기관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저 사람은 속도 없다. 저 사람은 자존심이 강하다. 자아는 그 사람의 주체성을 말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자존심을 빼놓으면 송장입니다. 자기를 돋보이고 싶어 하는 것,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아는 척하고, 있는 척하는 것은 다 자존심의 허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아라는 것은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자아가 살아 있는 한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신령한 은혜를 담을 그릇이 되려면 자아가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천 년 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하루가 시작되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선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가 낭패에 부딪힐지도 모릅니다. 자아가 죽은 자에게서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가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사람들이 나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아가 죽어야 육신의 정욕과 세상을 향한 모든 욕망을 헌신짝 같이 버릴 수가 있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으면 육신의 정욕이 발동하여 주님의 마음을 온전히 닮기 어렵습니다. 세상 권세와 명예를 구하는 사람은 능히 고난 받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육신과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린 자만이 영원한 것을 사모하게 될 것이며, 복음을 위하여 역경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성령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다. 자기가 살아있는 사람은 주님보다는 세상을 더 두려워하게 되어서 주님을 위하여 생명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은 네가 나를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느냐고,라고 물으신 것이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한다면 여러분 삶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제 어떻게 주님께 헌신하시겠습니까?

 

2) 재물에 대한 욕만도 깨어져야 합니다. 
마리아는 300 데나리온의 값이 나가는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쏟아부었습니다. 그 시대에 장정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가난한 여인에게는 대단히 큰돈이며, 이 여인에게는 재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소중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를 복음화하는 일은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희생적인 헌신이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화를 낸 사람 :4-5  
향유가 예수님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화를 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유다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내게 맡겼으면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텐데, 왜 그렇게 허비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아쉬워했을 까요? 그는 제자들의 헌금 관리자였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도적이라고 말합니다. 실은 저가 가난한 자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사욕을 채우지 못한데 대한 서운함이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계시던 예수님은 가만두어라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알 것은 사람이 보기에 합당치 않은 일이 주님이 보시기에는 합당한 일일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헌신하려고 하면 영과 육신의 마음이 갈등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리아와 같은 마음일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유다와 같은 마음일 때도 있습니다. 때때로 같은 믿음을 가진 부부도 마음이 이렇게 나뉘어서 주님에게 헌신해야 하는 일에 다툴 때도 있습니다.

 

장례를 예비하다 :8
주님은 지금 이 시간 고난 받으러 가실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땅에서 왕 노릇 하실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인의 기름 부은 일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여인이 나의 장례를 예비하였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다가오고 있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고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죽을 사람을 둔 사람들은 관을 준비하고 장례를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 : 고대 중국의 장례 습관-옛날이야기 -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좋은 관을 준비해서 방에 들여놓는 것이 효 중에 하나라고 한다. 그러면 그 관에 들어가 누워서 시간도 보내면서 좋아하신다고 한다.

 

그의 죽음과 장례는 예수님 자신을 가장 낮추시는 겸허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행동이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저 감사함으로 드렸을 뿐입니다. 이 여인의 헌신이 주님의 장례를 예비하는 일이 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큰 교훈은 우리의 적은 헌신이 주님의 큰 뜻을 이룰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우리가 드리는 적은 헌신을 주님께서는 크게 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망설이지 말고 주님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이 여인의 행한 일을 기억하라 : 9  
예수님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이 여인의 행한 일도 전하여 기념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기억하라는 것은 천주교가 베다니에서 찾았다는 향유 옥합 깨어진 조각을 상자에 담아서 기념하는 것 같이 기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마리아의 헌신도 함께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시대가 열리고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기 위해서는 은혜받은 자들의 즉각적인 헌신으로만이 이 놀라운 역사가 가능해졌습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세요. 그들의 자신과 소유를 다 드림으로서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마치면서...       
귀한 향유는 옥합이 깨어졌을 때 흘러나왔듯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그 귀한 몸이 깨어지므로 서 구속의 은혜가 흘러나왔습니다. 우리도 깨어져야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아멘

김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