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밍-항조우-상해-원조우
▣ 운남성(云南省) 쿤밍(昆明) 여행 11.28-12, 2
쿤밍에서 한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가보기로 하였다. 마침 날틀 표가 활인이 되어서 침대 열차 값밖에 되지 않어서 우리 여행을 편하게 하여 주었다. 마침 우리는 북경을 경유하여 하얼빈으로 가는 길에 하얼빈에서 형제들과 교제하기 위하여 이 형제 아파트에서 쉬기로 했다. 형제 집에 도착하자 심각한 일들이 벌어졌다. 송화강 상류에 있는 벤젠 공장이 폭발해서 송화강이 심하게 오염되어서 식수가 중단되고 보일러조차 돌지 않고 화장실 물도 없어서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이미 감기가 좀 들었는데 밤새 아파트가 너무 추워서 지내기가 힘들었다. 이 오염된 송화강물은 흐르고 흘러 소련 하바로프스키 까지 가는 수백 킬로의 도시들이 물난리를 겪고 있었고 중국 소련 두 나라의 문제로 번지고 있었다.
▲ 쿤밍(昆明, 곤명) 11.29
하얼빈서 북경을 경유하여 쿤밍에 내리자 김 형제가 우리를 맞이하여 주어서 반가웠다. 이곳은 남쪽 지방이라 날씨가 좀 푸근할 줄 알았는데 바람결이 쌀쌀한 초겨울 날씨였다. 내복을 가지고 올 걸 하는 아쉬운 마음이었다. 여기 아파트는 중앙난방이 근본 없어서 아주 써늘했다. 전기장판은 우리 등을 따뜻하게 해 주기는 해도 겉바람(외풍)이 세어서 콧등이 시렸다. 북방에서 내려 온 우리에게 이곳은 더 쌀쌀하였다.
▲ 소수민족 민속공원 11. 30

김 형제 부부를 데리고 다양한 볼거리들이 많은 소수민속 공원에 갔다. 여기 온 김에 라후(拉祜)족이 있는 지역에 가보려고 했는데 너무 멀고 교통이 나빠서 못 가게 되어서 라후족 촌이 있다는 소수민족 공원에 갔다. 소수민족 공원은 정말 볼거리들이 많았는데, 우리가 라후족 촌에 가까이 가자 통기타를 치면서 부르는 민속 노래 소리가 우리를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중국어로 인사하고 다가가 앉아서, 그에게 내가 라후 족말을 할테니 들어보라고 미리 배워간 라후 족 말로, "나래 베이징 까이요"(나 베이징 간다) 하니 알아듣는다. 그들의 사는 곳에 대해서 물어보자 자세히 설명하여 주었다. 한국에서 기독교 사람들이 와서 많이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전자 기타로 복음 송을 부르는데 프로였다. 외국인을 포함하는 중국 방문자들이 가득히 모여들었다. 예수님을 믿느냐고 물으니 안 믿는 단다. 복음 송은 그저 흥행을 위해서 배워 잘 치고 있었다. 라후 족들이 사는 곳은 가지 못했지만, 여러 라후 남녀와 함께 한참 동안 좋은 시간을 가졌다.
▲ 라후족(拉祜族)

중국에 온지 몇 년 되지 않아서 라후 족에 대해서 글을 읽고 큰 흥미를가지게 되었다. 너무나 우리민족 같은 이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서 마음을 가지게 되었지만, 나는 내 고향 목단강에 매여 있었다. 이번 쿤밍에 오는 길에 라후 족 마을을 가보고자 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지만 쿤밍에 와서 보니 교통 환경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은 한국 선교사들이 와서 그들의 말과 글로 성경도 번역한 것으로 듣고 있고 또 선교와 사회복지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일하는 것으로 들어서 기쁜 마음이다. 라후 족에 대해 마음이 있어서 자료집에서 간단하게 모아 보았다. 라후 족은 중국에서는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이며 주로 산에 자리 잡고 살아서 산족으로 알려져 있다. 운남성에 한 25만 명이 살고 있다. 그러나 미얀마 서북부 15만, 태국 북부 4만, 라오스 서북부 1만 명 정도 그리고 필리핀 북부에도 일부가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라후족은 원래 티벳과 가까운 중국의 운남성 일대에서 살아오다가 한족의 압제에 견디다 못해 대부분 미얀마나 태국과 라오스로 넘어가 정착하게 되었다. 특히 문화대혁명 기간의 핍박으로 그들은 자유를 찾아 더 많이 떠나게 되었다.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는 태국 치앙마이와 매홍손 등지에 살고 있는 이들은 벌써 19세기에 들어와서 정착하였다. 라후족은 신기하게도 우리와 말의 문법계통이 90%가 같고, 생활습관이 (고구려)많이 비슷하다. 그리고 유전자와 체형이 우리민족과 같아서우리민족이라는 심증을 가지게 된다. 새 애기들에게 있는 몽고반점도 우리와 같다. 우리민족과의 종족적 동질성에 대해 국내 대학에서 라후족 현지에 가서 유전자 등 검사를 하여 우리와 같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과정을 한국 TV에서 현지에서 직접 중계도 하였다. 우선 그들의 말과 생활습관을 살펴보자.


▲ 라후족 말과 우리 말의 비교
라후족말 우리말
나 (1인칭) 나래
너 (2인칭) 너
나르(1인칭 복수,we) 우리
너흐(2인칭 복수 You) 너희들(당신들)
나래 너 서울로 까이요? 나와 너 서울로 간다. 또는 갈래?
나래어 도죠베요 나는 너 좋아해
나티 너티 나도 너도
서울에 방콕까가 까이요 서울에서 방콕까지 가요
나래 서울 까이요 나는 서울로 가요
까이라 라에라 가려나 오려나
오빠 아빠
나흐어이 언니 우리 언니
나게 라오 나에게 와요
▲ 라후족의 음식습관
- 인절미 만들기 - 절구통에 찐 찹쌀과 깨를 넣고 찧는 것이 우리의 인절미 만들기와 같다.
- 안남미 보다는 우리와 같이 찰기가 있는 쌀밥을 즐겨 먹는다.
- 콩을 쑤어서 된장을 만들어 먹는다.
- 야채를 소금에 절인“와찌”라는(고추 가루가 없는 하얀 김치) 것을 먹는다.(원래 한국의 김치도 고추 가루가 들어오기 전에는 흰 김치였다)
- 명절에는 찹쌀을 대나무 통에 넣어 술불 속에 넣어 쪄 먹는다.
▲ 라후족의 생활습관
- 여자들은 어릴 때부터 자수를 비롯한 뜨개질을 배운다.
- 음악과 춤이 몸에 배어있다.
- 결혼습관도 처가살이를 하며, 결혼 때 닭을 옆에 두고 식을 올린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다(형사취수).
- 어린이의 놀이(공기놀이) - 작은 돌 던지며 노는 것이 우리의 공기 놀이와 아주 똑같으며, 1단에서 5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같다.
- 비석치기 방치기-우선 손바닥 뒤집기로 편을 정하고 가위 ,바위, 보로 순서를 정한다. 우리는 납작한 돌을 이용하여 놀이를 하는데 비해 이들은 열대의 납작한 열매를 사용하는 것이 다르다.
- 팽이치기 아이들은 우리의 전통 팽이치기와 같은 놀이를 한다.
- 그리고 세계적으로 우리민족에게서만 볼 수 있는 색동옷, 씨름, 호랑이 숭배, 소도(蘇塗,하늘 신에게 제사드리는 제단)와 의식이 비슷하고 정선 아리랑 같은 가락을 부른다.
▲ 라후족의 밭벼 재배와 추수
벼의 원산지는 중국 윈난성으로 원래는 야생종이며. 논벼는 개량된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밭벼를 재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 라후족은 어디서 왔을까?
라후 족에 대해서 고구려 역사에는 말이 없지만 적은 부분 당나라가 고구려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간 기록들이 있다. 또 중국 사기에도 고구려 유민들이 어디에다 살게 했는지를 말하고 있지만 라후가 고구려 후손이라는 증거는 업고 추정을 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많은 고구려 사람들을 잡아갔고, 신라 당나라 연합국이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가 물러갈 때 몇 십만의 고구려 사람들을 잡아 가서 중국 서쪽 여러 지역에 살게 했다.(고구려 역사 기록에는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인 3만8천3백호를 잡아가 중국의 남쪽 광막한 땅에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 고구려인들은 중국인들이 있는 곳에서 섞이어 살면서 그 존재자취가 사라졌다. 그러나 한 민족이 문화와 언어를 보존하려면 집단으로 한 곳에 오래 살아야 한다는 이 점에 대해 역사연구가들은 중시하고 있다. 그래서 라후 족은 글은 없지만 문화와 말이 있는데 그것이 한민족과 아주 비슷하므로 우리 민족 계열이라고 볼 때 언제 이곳에 살게 되었는지를 연구하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라후족이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당나라에 잡혀 온 포로의 후손들일 것이라고 본다. 라후 족의 구전에 따르면 조상들은 눈이 내리는 곳에서 왔다고 한다. 중국 기록에는 그곳을 농우(農右)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의 청해성 청해호 주변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은 한족들이 없는 불모의 땅에서 개척하면서 마을을 이루고 정착하였을 것이다. 라후 족은 이 지역을 자기들의 옛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라후 족의 조상들은 그곳에서 적어도 300-600년 정도 살다가 운남성으로 옮겨왔을 것으로 보고 있다.
▲ 석림(石林)
오늘은 김 형제부부와 함께 석림을 보러 가는 날이다. 원래 우리가 계약한 여행사는 아침 7시에 데리러 오도록 약속이 되어 있는데, 6시에 전화가 왔다. 지금 나오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일찍 왔느냐고 물으니 그렇게 되었단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는 채 서둘러 차를 탔다. 15인 승 소형버스는 한두 군데 더 손님을 태우고 시내를 벗어나고 있었다. 한 시간이나 달렸을까 김 형제에게로 어제 우리가 여행 예약을 한 여행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차를 타러 내려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차를 타고 석림으로 가는 중이라고 하자,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이 많이 오갔다. 결과는 이랬다. 우리가 예약한 사실을 지금 우리를 데리고 가는 여행사가 미리정보를 알아내어 이렇게 일찍 우리를 빼내어 데리고 가고 있는 것이었다. 기가막인 일이었다. 우리야 어쨌든 가고 있으니까 싸울 일은 없었다.
▲ 옥(玉, Jade) 공장

가는 길에 여행사의 일상 코스인 커다란 옥(玉)가공공장에 들렸다. 유럽에서 유태인들의 다이아몬든 가공공장은 두 번 가본 적은 있지만 옥 가공공장은 처음이다. 옥으로 된 아름다운 장식품들이 가득했다. 중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통적으로 옥은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다이아몬드는 중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옥은 권력과 부의 상징이며, 행운 석이다. 아름다운 색깔의 옥들은 그 자체가 귀함을 나타내며 우리 눈을 황홀케 하고 있었다.
▲ 옥(玉 Jade)
옥은 비취(翡翠)라고도 부른다. 비취옥은 짙은 또는 연한 초록색의 연옥으로 빛이 아름다워 보석으로 쓰인다. 옥은 색깔도 초록색만 있는 것은 아니라 오옥(五玉)이라 해서 다섯 가지 빛깔의 옥. 곧 창옥(蒼玉), 적옥(赤玉), 황옥(黃玉), 백옥(白玉), 현옥(玄玉)이 있다. 옥으로 만든 제품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팔찌(bracelet) 몇 개만 실어본다.






그리고 한참 가다가 이번에는 커다란 절당에 들린다. 김 형제와 우리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자, 안내양이 집체(단체)활동을 함께 해야하는 것이 아니냐고 나무라자, 김형제 자매가 우리는 기독교인이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안내양을 나무라고 있었다. 우리 뜻과는 상관없이 반 강제로 하고 있었다. 나는 궁금하여 절당에 들어가 보았다. 역시 돈이 들어야 한다. 향도 사고 불에 태울 부적 같은 붉은 종이도 사도록 하고 있었다. 이것이 다 여행사의 부수입이 되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길고 큰 향대에 불을 붙여 들고 향단에 부적을 태우면서 몇 번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속으로 소원을 말하고 있었다. 120km나 되는 먼 길을 오는 동안 때가 되자 한 곳에 있는 묘족의 식당에 들려서 그들의 전통 음식인 대나무 통에 담아 만든 쌀밥을 먹도록 해 주었다. 이렇게 지루한 여정을 마치고 드디어 석림에 도착하였다.
▲ 석림(石林, 바위 숲)

입장료는 80원으로 우리 여행비와 같다. 우리를 맡은 가이드는 이족 여성으로 저들의 전통적인 옷을 입고 예쁘게 꾸민 모자를 쓴 예쁘장한 여성이다. 석림을 돌아보는 코스는 차를 타고 볼 것이냐 걸으면서 볼 것이냐를 선택하여야만 했다. 우리 팀은 걸으면서 돌아보기로 하였다. 풍화작용과 침식으로 이루어진 넓고 넓은 돌 숲은 자연의 신비로움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석림의 코스를 다 마치고 잘 꾸며진 찻집으로 안내 되었다. 피곤한 다리를 잠시 쉬기에 아주 좋았다. 전통 옷을 차려입은 묘족 여성이 몇 가지 차를 끓여 마셔보게 하면서 차와 건강의 좋은 점을 선전하고 있었다. 차를 마셔보며 음미하는 하는 일을 마치고는 아무도 차를 사려고 하지 않자, 아가씨는 울상을 한다. 그러자 한족들은 집에 다 있다고 하면서 아가씨의 사정을 뒤로하고 나간다. 나는 그녀가 딱하게도 보이고 차도 필요해서 기념으로 두 가지를 한 봉씩 사 주었더니 좋아했다. 어떻게 이런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연이 만들어 졌는지 천지조화의 신기神技)로움을 신의 조화라고 해야할 것 같다.




▲ 아름다운 석림(Stone Forest)의 신비
석림은 윈난성 서울 쿤밍 시에서 남쪽으로 120km 지점 해발 2,000m 높은 곳에 거대한 돌기둥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가장 넓은 바위 숲이라고 한다. 이런 석림지대가 이루어진 것은 지각변동으로 바다 속에 잠겨있던 석회암층이 솟아올라(융기)와 오랜 세월동안 풍화와 침식작용으로 약한 부분들이 깎이고 녹아나가면서 이 넓은 바위 숲이 만들어졌다는데 이런 지형을 지질학적으로 카르스트(Karst)지형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땅을 파면 조개파편들이 나오고 있어서 오래전 이곳이 바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50㎢의 넓은 곳에 5-10m 돌기둥들이 나무줄기처럼 하늘로 치솟아있는 것이 마치 삼림모양을 이루고 있다. 1984년 국무원에 의해 국가풍림 풍경 명승구로 지정 되였고 2007년에는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오늘은 우리끼리 쿤밍시내를 돌아보았다. 농촌에서 어깨에 메고 온 광주리에 가득히 담긴 열대지방 과일도 사먹으면서 거리 구경을 하였다. 거리는 깨끗하고 질서가 있어서 우리가 사는 북쪽 동네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문화수준을 누리는 도시였다. 쿤밍 역에서 내일 항조우(杭州)가는 날틀 표를 샀다.
▲ 항저우(杭州 항주) 12. 3-4
항조우로 가는 날틀은 계림에 내려 40분 쉬는데 자매는 300원 달라는 사기로 만들어진 코끼리를 150원에 샀다. 말도 모르면서 반으로 깎아 사서 신기했다. 날틀이 하늘에 오르자 이 지방의 독특하게 생긴 둥글고 높은 산이 늘어선 들을 보면서 계림(桂林)을 돌아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기는 했다. 항조 공항에 내리니 비가 오고 있었다. 공항에서 시내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안내양에게 물어서 소개해준 호텔에 들었다. 다음 날 소산 대학에서 한국말을 배우는 펑친 자매의 아들 순순을 불러서 함께 유람선을 타고 아름다운 서호(西湖)돌아보았다.


▲항저우 서호

항저우는 저장성(浙江省)의 서울이며, 상해에서 남서쪽으로 약 180km 정도 거리이며, 고속철도로 1시간 정도 걸린다. 인구는 2021년 통계에 따르면 1220만 4000여명이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이런 속담으로 표현하고 있다.
"上有天堂 下有蘇杭" (위에는 하늘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에도 널리 알려진 관광지로 도시 중심에 위치한 '서호(西湖)'는 유네스코 지정한 세계 유산으로 1년 내내 많은 방문객이 줄을 잇고 있다.


▲상해 12.5-7
급행열차로 2 시간 만에 상해 토착했다. 열차는 이층으로 승객들은 보따리를 가진 시골서 오는 초라한 차림의 사람들도 많았지만 공중위생은 잘 지키고 있어서 차안의 환경이 아주 좋았다. 동북 사람들과는 근본이 달랐다. 미리 연락해 둔 민박 아주머니가 우리를 맞이하러 나왔다. 하루 세끼 200원에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전에 서출선 친구가 준 “북경에 오신 하나님”이란 책을 보면서 왕민도 가정교회 형제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들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이곳에 온 김에 원죠우(温州)에 가서 왕민도(王民道)가정 교회 형제들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주 자매에게 연락하여 산동 리 형제에게 알아보라고 하였다. 상해에서 한족가정교회 사역을 하고 있는 양 형제 부부를 인민광장에서 만나 큰 백화점에 들어갔는데 귀에 낯설지 않는 음악이 흘러 나와서 무슨 노래인지 한참 생각하다가 알게 된 것은 이 경음악이 ‘대장금’ 주제곡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 대륙에 그리스도 복음의 바람이 불어야 하는데, 대장금의 한류가 전국을 휩쓸고 있었다. 소개해서 알게된 한족 사역자 양형제부부를 만났다. 언어관계로 속 깊은 충분한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그가 하고 주님의 일과 형편들을 알 수 있었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형제를 격려하였다.

▲난징지에(南京街)
남경지에는 서울 명동 같이 걷는 길로서 푸동(蒲东)강변에 이르는 길로서 관광사업이 번창한 곳이다. 강변공원에 나가서 걷다가 유람선을 타고 푸둥 항을 돌아보았다. 외세의 침략에 많이 시달린 상해, 이제 그 아픈 역사는 외세들이 남겨 놓은 건축물들에 새겨져있다. 상해는 부유하고 아름다운 도시이다. 인민광장에서 우리는 지하철로 돌아왔다. 양로원 주 자매에게서 반가운 소식이 왔다. 산동 왕 형제로 하여금 원죠우에 있는 형제들에게 우리의 방문을 의논한 즉 오는 것 환영한다고 한다. 그래서 주 자매 그리고 산동에 있는 두 형제도 상해로 내려오도록 했다.


원조우 12. 8 목.
우리가 먼저 원조우로 내려가서 기다리려고 밤 침대 열차로 떠났다. 침대차는 생각보다 깨끗했다. 열차가 두 시간이나 늦게 도착하여 정말 피곤한 밤이기도 했다. 원조에서 내려 열차에서 알게 된 젊은 중국 청년이 우리를 값싸고 좋은 호텔(185원)로 안내하여 주어서 고마웠다. 다음 날 아침 9시에 주 자매와 두 산동 형제들이 도착하였다. 나는 원죠 시내에서 누구를 만나게 되는 줄로 알았는데, 차를 타고 어디론가 한참 가다보니 바다 가에서 내린다. 어디를 가려고 하느냐고 물으니 배를 타고 왕환(王环)이란 반도로 건너가야 한다는 것이다. 배는 ferry같이 만들어져서 차도 싣고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게 중국 남부의 바다를 건너보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수’라고 부르는 형제가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다. 그분이 하는 사업장에 가니 전기 부속 전문점을 하고 있었다. 수 형제자매님과 함께 식당에서 해물로 된 점심을 대접해 주어서 잘 먹었다. 구(邱)라고 부르는 다른 형제 가정에 가서 오후 내내 처음 보는 여러 형제들과 교제하였다. 내가 책에서 본 대로 원조우 사람들이 상업에 능하고 어디에 가든지 장사를 하면서 교회를 이루는 원죠 사람들의 좋은 점을 이야기를 하니까 모두 좋아했다. 나는 농촌을 근거지로 하는 곳에 경로원을 세울 계획을 의논하였다. 자기들이 알아보아주겠다고 하였다. 이 자리에는 삼자교회 한 구역장을 하던 형제가 삼자교회에서 나와서 가정교회를 이루고 있다고 했는데 40대 중반인데 불행하게도 북경 말을 할 줄 몰랐다. 저녁때가 되자 이 집에서 풍성한 해물 저녁을 준비하여 대접해 주어서 너무 고마웠다. 이곳은 섬이어서 그런지 해물 음식이 많아서 좋았다.
저녁에 100원 짜리 여관에 들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큰 바퀴 벌레가 득실거려서 우리는 놀랬다. 한국이나 북방에서 볼 수 없는 큰 바퀴벌레로 나도 처음 보는 것이다. 아침에 다른 여관으로 옮겼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의 왕민도 형제들의 가정교회는 삼자교회보다 말씀 중심이고 교세가 더 세었다. 가정교회 자녀들이 사회구석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곳은 중국 어느 지역보다도 특수한 지역이다. 목단강에서는 가정교회가 있는지도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다. 비록 공식적으로 허가는 받지 못하고 있지만 대개 이층 예배당을 가지고 있고 2-300명이 모이는 왕민도 형제교회의 가정교회는 중국을 대표하는 교회라고 말하고 싶다. 이 가정교회는 목사제도를 가지지 않고 신학교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저 모두 형제자매로 부르면 서 은사 중심으로 모이면서 복음에 대한 열정들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교회 모두가 그렇듯이 매월 한번 만찬예배를 드리며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열심히 전하고 있었다. Watchman Nee 형제의 교회와 비슷하지만 자매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이 달랐다.
이 교회가 사 놓은 산 위에 있는 땅을 가 보았다. 자기네도 여기에 양로원을 지어서 수양관 겸 운영을 하고 싶은데 아직 경험 있는 사람들이 없어서 엄두를 못 내고 있다고 했다. 왕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과 환경이 좋은 곳이다. 산위에는 공동묘지가 많고 드문드문 농가들이 있었고 납골당 공도묘지도 있었다. 그리고 귤 종류 나무들이 있어서 따 먹으며 자연의 풍성함을 누렸다. 그리고 다른 곳에 있는 그들의 건물을 가 보았다. 당장 수리하여 양로원을 해도 될 집이다. 여기서도 교회로 모였는데 정부에서 모이지 못하게 하여 지금은 노 자매님이 집만 지키고 있었다. 이곳은 이곳 지방 어를 주로 쓰는 곳이라 우리가 오드라도 중국 안에서 만다린 외에 또 새로운 언어권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많이 부담스러웠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한 가정교회를 잠시 방문하였다. 시내에도 여기저기 교회가 많았다. 저녁은 수 형제 댁에서 준비하여 주었다. 남매를 두고 있는 가정은 화목하고 믿음으로 무장된 가정 같이 보였다. 주의 사랑으로 영접하여 주고 교제하여 준 친절과 형제의 사랑이 고마웠다. 나는 수 형제에게 우리가 돌아가는 길에 원조 시내 교회를 한번 가보고 싶고 교제하고 싶다고 했더니 연락을 해 보겠다고 했다. 여기는 불과 200KM 사이를 두고 여러 지방 어가 있는데 수 형제는 만다린과 함께 두 개의 지방 어를 하고 있어서 가끔 전화에 여러 가지 말로 하고 있었다.
가정교회 예배 12. 11 주일
아침에 젊은 형제가 차를 가지고 여관에 와서 우리를 데리고 교회로 갔다. 친 형제인 두 사람은 쾌활하고 기분 좋은 형제들이었다. 이곳에는 젊은 형제들이 자기 차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사는 것이 넉넉한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사업하는 형제들은 대개 차를 가지고 있었다. 목단강 교회에는 자전거가 많은데 비하여 여기 교회 주차장에는 자동차, 오토바이 스쿠터가 많아서 북방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잘사는 곳이었다. 예배당이 써늘해서 춘추 내복을 입은 우리는 추위를 많이 느꼈다. 습한 지대가 되어서 목단강 보다는 더 쌀쌀함이 피부에 스며드는 것이 북방과 다르다. 예배 시간은 은혜로운 가운데 설교자가 북경어로 하고 지방어로 통역을 하고 있어서 외국에 온 기분이었다. 원래는 이 지방어로만 설교를 하였는데 개방 뒤에 북경어 지역에서 많은 노동자 등이 오므로 부득이 통역하는 일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점심은 교회에서 애찬을 준비하여 수백 명이 모두 먹고 있었다. 오후에는 다른 교회로 갔다. 이 교회는 오후에 성찬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습관이 좀 다르기는 해도 은혜로웠다. 저녁은 그동안 고마웠던 분들을 청하여 저녁을 대접해 드렸다. 음식 값은 480원이었다. 즐겁고 은혜로운 주일이었다. 우리는 여관으로 돌아와서 산동 두 형제와 교제를 나누고 차비를 하라고 500원씩 사랑의 선물을 주고 헤어졌다.
오늘(12.12) 아침에 원조우에서 더 큰 지도자 세 분이 들어왔다. 나는 원조우에 가서 그곳 교회들과 형제들을 만나보고 싶었는데 당신들이 들어왔다. 외국 사람들을 많이 조심하고 있어서 인지 원조에 있는 교회로 인도하지 않고 들어와서 나를 만나고 있었다. 이 분들은 다 자기 사업을 하는 분들로 일제 차들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수 형제 집에서 두 시간 정도 관심 있는 일들로 교제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규모가 작고 투자가 적은 농촌 경로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서는 어렵다는 의견을 내 놓았다. 함께 점심을 나누고 고마운 분들과 헤어졌다. 우리는 버스로 원조우로 나왔다. 상해가는 밤 침대 버스표를 샀다. 남은 시간을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우리는 은행을 좀 살 수 있을까 하여 농산물 시장으로 찾아다녔지만 살 수 없었다.
청두(城豆) 교회
이 교회는 절름발이 영국 선교사의 희생과 봉사로 세워진 역사적인 교회였다. 이 목발을 짚은 영국 선교사가 이 낯선 곳에서 전도를 하는데 수년간 놀림과 괄시를 받으면서 주님의 따뜻한 사랑으로 중국 사람들을 섬겼다. 주님이 역사하셔서 드디어 기독교회가 이루어졌고 많은 회심 자들이 일어났다. 교회는 탄압과 모진 시련을 받으면서 문화혁명의 어두운 세월을 견디어왔다. 원래 이 교회의 개척자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지금은 삼자교회를 이루고 있었다.
어두워지는 시간에 우리는 와장 강변으로 나가서 아름다운 야경을 즐겼다. 그리고 우리는 밤거리 시장으로 소문난 우냐오지에(五鸟街)로 가니 그곳은 정말 왁작 지껄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곳 특유의 음식으로 된 저녁을 먹어보았다. 시간이 되어서 우리는 10:50 밤 침대버스 차를 타는데 먹을 간식과 물 한 병이 든 비닐 봉투를 나누어 주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이층침대 버스는 흔들거려서 나는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 5:20분 상해 역에 내려니 바람은 차고 피로가 몰려들어 힘들었다. 상해 역에서 안후이 성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주 자매 아들 김호가 내려온다고 하여서 만났다. 여관하나를 정하여 잠시 쉬었다. 김호학생을 위하여 성경교제를 한 뒤에 우리는 푸동 공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는데 잘못 탔다. 우리는 시간이 바빠서 내려서 택시로 공항에 오니 check in을 하고 있었다. 하얼빈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와서 오후 5시 버스로 목단강으로 돌아왔다. 길고 긴 여행이었다. 아름답고 좋은 곳에서 즐거웠어야할 여행이 감기와 쌀쌀한 날씨로 번거롭기도 했다.
헝도(横道) 교회 자매들의 방문
해림 종교국 강주임, 해림 한족 교회 김 전도와 헝도 한족 교회 자매들이 과일들을 잔뜩 가지고 왔다. 헝도 교회는 하얼빈 가는 철로변의 깊은 산골에 있는 교회인데 자기네들 교회에서 양로원을 시작하였는데 우리 양로원을 돌아보고 운영과 노인들 관리에 대한 조언을 듣고자 왔다. 우선 교회에서 운영하므로 환경이 상당히 좋은 점이 있지만, 나는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돈을 내든 안내든 중국의 양로원은 밥이나 먹이고 보호하는 마치 수용소 같은 시스템으로 개인의 자유가 좀 제한되기도 하고 정서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무관심한데 이 부분에 대해서 좀 교육적으로 발전시킬 필요성에 대해서 나누었다. 교육적이란 부분에 대해서는 무슨 소리인지도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산골의 순진한 자매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비록 시설은 별 것 아니라도 모두가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자기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도록 힘쓰라는 도움말을 주었다.
저무는 한해
오늘은 12월 31일 또 한해가 뒤안길로 물러가고 있는 시간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장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마음이 떠오르곤 하였다. 언제 떠날 것인지, 아닌지,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 내 고향 땅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자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데 왜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지 나도 모르겠다. 외로움에 지쳐서인가!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런 때도 있었지만 이제 영적 열매가 얼마인가! 보람이 있지 않은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그런가! 좀 어렵기는 해도 그렇지는 않다.
그럼 왜?
김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