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천, 조ㆍ중ㆍ러 3국 꼭 지점 국경
훈춘시


훈춘 시(珲春市)는 중국의 동남쪽 끝자락에 있는 길림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로 조선족 중심의 지역이다. 인구 약 25만의 국경개방도시로 조선족이 42% 정도이지만 조선족 인구는 갈수록 줄고 있다. 훈춘은 옛날 고구려의 영토였고 발해 삼대 왕 대흠무는 발해 5경(서울)의 하나인 동경 용원부를 설치하여 바다로 세력을 넓히려 하였다.
♣ 발해는 행정적으로 전국에 5곳의 서울을 정하여 관리하였다. 목단강 발해의 상경용천부는 발해의 제3경이다.
훈춘 시는 중국과 러시아, 북한 삼국의 국경이 맞닿아 있고 또 두만강 하류는 동해를 15K를 앞에 두고 있다. 1990년대에 UN에서 두만강 유역의 삼각주 일대를 특구로 개발한다고 하여 한 때 개발 붐을 일으켰으나 별 성과 없이 끝났다. 중국이 태평양으로 바로 나갈 수 있는 동해를 지척에 두고도 소련 북한에 막혀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
사라지는 조선 민족의 흔적
동북 삼성은 가는 곳마다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의 흔적들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 왜곡과 조선족의 흔적을 지우려는 노력으로 조선족 중심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여러 곳에서도 그 흔적이 사라져 가고 있어서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족 인구는 줄어들고 한족은 그 수가 늘어나는 것도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훈춘지역은 조선 민족의 3.1 독립운동사의 역사적 자취가 있는 곳이지만, 도시 재개발로 그 흔적들이 사라지고 있다. 1919년 3월 20일 오전 조선 시위대 3천여 명은 일본영사관 부근까지 행진하여 독립 의지를 드높였다 3.1운동을 계기로 그해 9월 훈춘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하여 조선독립에 이바지하였다.
마적단의 훈춘 일본영사관 습격 사건
1920년 6월 왜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홍범도에게 그리고 청산리 전투(10월)에서 김좌진에게 패하면서, 왜군은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 독립군을 토벌하려는데 왜군의 대군단이 중국 국경을 넘을 명분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던 중 일본은 친일의 중국 마적단을 사주해서 훈춘시를 무정부 상태로 만들어 놓고 마적단이 마음대로 약탈하게 했다. 1920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훈춘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죽이고 납치하고 또 일본영사관과 일본 주거지를 습격하여 영사와 얼마의 일본인도 살해하고 영사관을 불태우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일본은 자국민의 희생도 감수하고 이 엄청난 일을 벌인 뒤 자국민 보호라는 명목으로 함경도 주둔하고 있는 이만 명을 출동시켜서 무고한 조선인 3천여 명을 학살하면서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이 일로 3.1운동의 기가 수그러지고 독립군은 북만주로 물러가게 된다.
도문에서 훈춘시 가는 길
도문에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산야를 마주 보면서 훈춘에 들어서면 일제가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잇는 두 곳의 다리를 놓다가 패망하자 그만둔 두 곳을 만나게 된다. 처음 만나는 곳은 훈춘시 영안진 사완자 촌과 한 곳은 중단된 철교의 교각이다.


훈춘-방천 가는 길
우리가 1994년서 몇 년 동안은 고속화 도로가 생기지 않아서 비가 오면 길이 질어서 앞차가 차가 빠지면 못 가고 기다려야 하는 불편한 길이었는데, 이젠 새 도로가 닦아져서 빠르게 편하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굴 입구에 들어서면 나가는 곳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다. 약 4K가 된다.
대반령 차 굴 위의 환영 문구
“삼국 풍경을 체험하러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경신敬信) 조선족 전(읍)
경신 전의 이 환영 문구를 한국말로 풀이하면 ”중국의 100대 생태 지역인 경신 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실제로 경신 전 지역은 큰 늪이 9개나 있는 곳으로, 중국의 100곳의 생태 보호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훈춘에서 경신 진은 30분 거리에 있으며 광활한 들에 조선족이 이룬 논들이 펼쳐져 있고, 진에서 조금 내려가면 방천과 북한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오는 권하 조선족촌에 이른다.
권하 촌(权河村)
나는 북한을 드나들면서 권하 조선족 교회도 찾아보고 또 조선 아주머니의 민박에서 머물기도 해서 이 지역은 익숙한 곳이다. 그리고 이 권하 촌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하얼빈으로 가는 길에 3개월을 머문 초가집이 있다. (지금은 벽돌 기와집으로 단장) 내가 처음 찾았을 때는 초가집이었고, 집주인 한족이 별로 차려 놓은 것도 없는 집안을 들러보는 데 5원을 받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석 달 머문 곳.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북한을 건너가는 두만강 긴 다리가 나온다. 그리고 곧장 내려가면 방천 가는 길이다.
북한으로 중국 해관, 출입국 관리소


이 선물 가게의 모든 제품은 소련제라고 팔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모든 소련제 물건을 중국에서 만든 것들인데 모르고 깜빡 속고 있는 것이다.

한 많은 두만강 다리

나는 1998년부터 북한을 드나들었다. 중국 쪽에는 아직 도로도, 출입국 건물 등 설비도 잘 안 되어있을 때여서 차가 없는 사람은 두만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다녔다. 몇 해 뒤 시설이 정비된 뒤부터는 다리만 건너다니는 버스가 생기면서 걸어 다니지 못하게 했다. 강바람을 맞으면서 한 많은 두만강 다리를 건널 때마다 한 많은 민족의 역사가 떠오르곤 했다. 나의 북한 방문기에 많은 이야기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북한 원정 출입국 관리소이다.

방천 풍경구
두만강을 바로 옆으로 끼고 방천에 이르는 길은 방천 풍경구아며, UN이 정한 세계공원으로 사구와 늪지대가 있는 자연보호지역이다. 여기서부터 방천 가는 길 왼편에는 철조망이 가까이 멀리 이어지는데 소련과의 국경선이다.


두만강 상류 숭선에서는 한발로 건너 갈만한 개울이 내려오면서 넓은 강이 되어 동해로 흘러가고 있다.

언덕 위 흰 석상이 청나라 장군이자 외교관인 오대징(吴大澂, WúDàchéng) 으로 소련과 조선의 국경선 문제를 협상한 장 본인이다.

모래 언덕과 습지




방천(防川) 조선족촌
방천은 훈춘에서 62km 거리로 중국 두만강 하류의 마지막 마을이다.


방촌 조선족과 두만강 시 조선은 같은 민족이지만 강을 사이에 두고 다른 국적으로 살고 있다. 한번은 도문에서 차를 가지고 있는 분과 북한 라진에 들어가려고 오후에 방천에 와서 밥집 겸 민박을 하는 조선분 집에서 하룻밤 지낸 적이 있다. 그때는 조용한 농촌 마을로 한족과 섞여 살고 있었다. 농사를 짓고 어떤 사람들은 두만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밤에는 슬쩍슬쩍 건너편으로 물건을 싣고 드나든다고 한다. 그 뒤 한족과 한국관광객들이 밀려오자 조선 민속촌과 음식점들과 유락시설 등을 만들어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망해각(望海閣)
세 나라를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전망대, 망해 각이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다.

망해 각에 오르면 동해를 바라보면서 왼쪽으로는 소련의 마지막 마을 하산 역이 오른쪽으로 북한의 두만강 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동해를 바라보면 소련과 조선을 잇는 철교가 길게 놓여 있다.
소련 하산 북한 두만강 시


두만강시는 북한 양식지원을 위하여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은 이순신 장군이 녹둔도 만호로 여진족과 싸우면서 근무한 곳이다. 방천의 망해각과 소련이 보이는 제일 높은 모래산 위에는 이순신 장군을 기념하는 숭전대 누각이 지어져 있다. 그곳에는 이순신 장군의 승전비와 4대와 7대 후손들이 만든 기념비도 보관하고 있었고 아름다운 누각들을 지어 기념을 하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이 장군을 몹시 추앙하고 있었다. 이곳을 구경하려고 중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었다.

중국 안내문에, 한눈에 보이는 삼국의 관계를 재밌는 글귀로 표현하고 있다.
“닭 울음소리 3국에 들리고
개 짖는 소리 3국을 깨우며
꽃향기가 사방에 풍기고
웃음소리 이웃 나라에 전해지는 곳”

토자 비(土字碑)
두만강을 가로지르는 긴 철교가 소련과 북한을 잇는 철교이다.

망해 각에서 두만강을 따라 3km 동남쪽 아래에 보이는 흰색건물이 중국의 마지막 국경선 초소이다. 초소 건물 왼쪽길 같이 보이는 거기가 소련 땅이다. 중국 땅은 초소 거기가지이다. 그 옆에 중소 국경선 표시의 토자 비가 있다. 이 토자 비는 1886년 오대징에 의하여 소련과 계약을 체결하고 세운 국경 석이다.


여기서 두만강을 따라 15km 내려가면 동해에 이른다. 저 멀리 동해가 보인다.

김제화
jewhakim@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