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교/2000-2002

딱한 사람들 2001

김제화 2021. 2. 28. 07:35

공안에 붙잡힌 한국 여전도사 2. 
한국 부천에서 와서 목단강 조선족 교회에 머무는 조라는 성을 가진 여성 전도사가 있었다. 우리 나눔의 집에 쌀을 가지고 가끔 오곤 해서 알고 지내는 사이다. 그런데 오늘 영안에서 조선족 집회를 하다가 공안에 잡혀갔다고 미화가 기도해 달라는 전화를 해 왔다. 그 집회에는 조선족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탈북자들이 여럿이 있어서 국제관계 죄목으로 체포가 되었단다. 며칠 뒤 내용을 알아보니 내부 고발로 빚어진 일이었다. 하여간 조선족 가운데서 잘 못 움직이면 이런 일을 당하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 허다했다. 내부 고발자들의 근원을 따져보면 애국도 아니고 거의 시기 질투 때문이다. 여권을 빼앗기고 열흘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풀려나자,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서는 다시 중국에 오지 않았다.

 

목단강 공안국 경고 3.29 2001

강남 촌 동서기가 전화를 했다. 정보국에서 경로 원에서 종교 활동을 한다는 제보가 들어왔다고 하면서, 정보국에서 동 촌장에게 너희 지역에서 시끄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단다. 정보국의 경고이니 경로 원에서는 종교 활동을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면서 다시 이런 제보가 들어오면 정보국에서 직접 조사를 하게 된다고 하였다. 촌 반공 실(사무실)에 우리 종씨 조카 볼 되는 친구가 있어서 어디서 이런 소식을 들어왔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다음 날 도문 공안국으로부터 접수된 제보라고 한단다. 연변 친구들을 불러올려서 학습을 몇 번 하였는데, 그 사람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꼬장질(일러바침)을 한 것이다. 대충 짐작해 보면 나에게 경제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는 심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일들로 그들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나는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동안 정식으로 두 번 경고를 받았다. 그때는 경고를 받을 때마다 여권에 별을 하나씩 찍어주기도 하였는데 별이 세 개가 되면 추방되었다. 추방되면 일 년 뒤에나 다시 중국을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추방되면 재입국이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여권에 별이 찍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말로 경고로 주의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나눔의집에서 학습하지 못하고 밖에서 하곤 했다. 좋은 장소를 주님 일을 위하여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선족이 망치고 있어서 답답하기가 이를 데 없다.

 

미국 한신 교회 선교팀
미국 한신 교회 팀이 와서 12명의 처소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학습을 하였다. 학습이 끝나는 주말 우리는 함께 연길로 내려갔다. 주일에는 조선족이 목회를 하는 한족 교회로 갔다. 그리고 장 목사는 가난한 세 학생의 장학금을 전해주었다. 나에게는 교회에서 보내온 선물 1000원을 주었다. 훈춘시 양수진 석두 촌 처소에 갔는데, 사역하는 형제가 개 한 마리를 잡아서 학습하는 동안 모두를 푸짐하게 대접해 주었다. 그곳에 탈북 한 여성이 조선 사람과 결혼하여 사는데 교회에 나오고 있었다. 이 여성은 북한 여군 하전사(부사관) 출신으로 8년 동안이나 근무했단다. 군에서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으니, 휴전선에서 ‘개나발이’를 했단다. ‘개나발’이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대남 방송하는 일이라고 해서 모두 한바탕 웃었다. 이 여성이 얼마나 말을 잘하고 웃기는지 재미있었다. 어서 북한도 이런 사람들이 마음 놓고 말하고 웃는 세상이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반 화룬궁(法论功) 정치 교양 학습 2.

목단강 시 동안구에서는 모든 종교 지도자를 모아놓고 반 화룬궁(法论功)(法论功) 정치 교양 학습을 하는 날이다. 목단강 시 동안구 주임이 나를 동안구 종교 회의에 참여하게 하려고 차를 보내와서 억지로 참여했다. 최근 들어 공산당을 비난하고 항거하는 화룬궁 무리가 천안문 광장에서 분신자살하는 사건으로 정부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그래서 시 정부 종교 사무처에서 모든 종교 지도자들과 영도들을 모아놓고 정치사상 교육을 하고 있었다. TV 방송국에서 이 교육현장을 촬영하고 있었고, 화룬궁에 속해서 피해를 본 두 사람의 간증을 하게 함으로써 화룬궁의 유해성을 선전하고 있었다. 나하고 충성 형제가 뒷자리에 앉아 있는데 주임이 내가 싫다는 데도 억지로 앞 단상으로 나오게 하여 놓고는 무엇이든지 말을 좀 하라고 하여서, 간단하게 말하고 마쳤다.

 

눈에 묻힌 할매2.2001

시내에 사는 조 형이 전화가 왔다. 2주 전 눈이 펑펑 내리는 밤 1시에 파출소에서 눈 속에 빠져 죽어가는 한 할머니를 나눔의 집에서 보호하고 돌보아 준다는 소식이 목단강 TV 뉴스 시간에 나왔다고 알려 주었다. 목단강 TV 뉴스에 난 내용은 이렇다. 눈이 펑펑 내리는 밤 1시경 신롱 전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다. 눈 속에 파묻힌 노인을 우리가 보호하는데 며칠만 보호해 달라는 부탁이 왔다. 저들이 말하는 며칠이라는 것은 영구히, 라는 뜻이 있어서, 어쩔까 잠시 망설이다가 데려오라고 했다. 병원 구급차에 태워온 노인을 담요로 싸서 들것에 들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데, 나는 복도에서 그들을 멈추게 하고 담요를 열어보았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알기 위해서였다. 경찰과 의료진이 살아있다고 안심하라고 하였다. 내가 손의 맥을 잡아보니 뛰고 있어서 일단 받았다. 추워서 석탄 아궁이 같은 데서 자서 온몸과 얼굴이 석탄재로 검었다. 우리 목욕탕으로 데리고 와서 집사람과 직원 자매가 씻기는데 탕의 물이 검은 석탄 물이 되어 몇 번이나 갈았다. 여러 번 씻고 씻어내니 이제 사람 같았다. 새 옷을 입혀서 침대 눕히고 쉬도록 했다. 다음 날 새벽에 가보니 눈을 뜨고 나를 보고 고맙다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이때부터 고 씨 성을 가진 이 노인은 우리와 살면서 예수님 믿고 찬송도 배우면서 즐겁게 사셨다. 그리고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오늘 주말 학습(2박 3일)을 하려고 알잔 교회에 들어갔다. 토요일 저녁 한 시간을 마치고 쉬는데 집에서 전화가 왔다. 고 씨 한족 할머니가 돌아갈 것 같다는 소식이다. 학습을 다음으로 미루고 11시경 돌아왔다. 고 씨 할머니 방에 가니 아직 숨은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내가 손을 잡고 죽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으니, 갈 수 있다고 한다. 어떻게 갈 수 있느냐고 물으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서 자기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신 것을 믿기 때문이란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고 할머니의 영혼을 평안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다. 이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2003년 2월 주일 오전 3:40에 주님의 나라에 가셨다. 3년 전 여기 들어올 때도 눈이 내렸는데, 떠나는 날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전에 그 방에서 장례식을 하고 얼어붙은 뒤 산 언덕을 파서 묻었다. 중국 장례법은 화장해야 하지만 여기는 화장터보다는 산이 더 가까웠다. 양로원을 시작하고 처음 노인이 돌아가셨다.

 

조선족 노숙자 4.2 2001
조선족 노숙자 한 분이 들어왔다. 이 사람의 사연도 딱하기만 했다. 부인이 이혼하고 한국에 나가서 한국 남자와 결혼하여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실의에 빠져 술 마시고 추운 밖에서 자다가 풍이 일어났다. 이런 분을 우리가 보호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풍이 일어나서 대소변을 못 가리고 있으니 난리가 났다. 내 자매와 일하는 한족 자매가 돌보느라 애를 많이 쓰고 있었다. 링거 주사와 약을 일주일 분을 사다가 맞히기 시작하면서 치료에 마음을 썼다. 한 달이 지나면서 좀 나아져서 모두 좀 편해졌지만, 한쪽 다리 팔은 여전히 마비 상태에서 풀어지지 않고 있었다. 몇 년 뒤 한국에 나가서 돈을 벌어 들어온 여동생 부부가 와서 데리고 갔다.

 

탈북 청년
민주 조선족 촌 처소 윤 자매가 북조선 청년을 데리고 왔다. 중국에 온 지 거의 2년이나 되었고 민주 촌에 제법 오래 머물고 있었다. 민주 촌은 조선족 촌장이 이 탈북자들을 머물게 하면서 농사일을 하게 하고 돌보아 주고 있었다. 키도 크고 일도 잘하는 편이다. 부부가 아들을 데리고 탈북하여 중국에 와서 어느 한족 식당에서 일하면서 이 청년은 개 잡는 일을 하면서 잡일을 하는데, 시간이 가면서 마누라가 한족 주인과 눈이 맞아서 아이와 함께 빼앗기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그를 우리 양로원에서 일을 시켜보니 탈북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여기로 팔려 와서 한족과 사는 여자도 오고 은근히 저들의 집결지같이 되어 가고 있어서 오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한족 남편은 마누라만 없으면 양로원으로 찾으러 와서 신경이 쓰였다. 질이 안 좋은 탈북자 청년이 한족 집을 털다가 잡히는 일이 생겨서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한족과 조선족들이 탈북자들을 도와주려고 하는데 이렇게 질 나쁜 인간들 때문에 모두가 피해를 보고 있었다. 민주 촌 촌장은 농사철에 마을 사람들에게 일품을 쓰게 하고 일당을 벌도록 해 주고 있는데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한 일을 하고 있었다. 지난겨울에는 자기들끼리 노름을 하다가 서로 싸움이 벌어져서 병원에 실려 가는 일들이 생겼다. 촌장의 도움이 아니면 모두 잡혀갈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또 한 녀석이 동리 노인의 머리를 때려서 다섯 바늘이나 꿰매는 일들이 일어나면서 얼마는 도망가고 얼마는 잡혀가면서 이촌에는 다시 그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자는 조선족들에게 공갈 협박같이 하기도 해서 시간이 가면서 동족이라는 점에서부터 경계하는 외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분위기가 이쯤 되면 저들은 여기서 발붙일 수가 없게 된다. 여기가 어디라고 정신을 못 차리고 막가는 사람들 같이 사는지, 참 이해가 안 되었다.

이들은 내가 북조선을 드나드는 것을 알고 나를 조심들 하고 있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목단강에서 30Km 남쪽 영안에는 좀 모자라는 탈북 여자가 한족에게 팔려 와서 부부가 홀시아버지와 한방에서 사는데 남편이 변소에 갈 때도 따라와 지키고 담뱃불로 몸을 지지기도 하는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이웃 한족들이 이 사실을 알고 너희가 이렇게 계속하면 우리가 공안국에 신고하겠다고 하여 담뱃불로 지지는 않지만 다른 일로 고통을 준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아들이 없을 때는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데리고 논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아이를 낳았다는데 실제로는 누구 아이인지 모른다고 하면서 주위에서 한족들이 수군대고 있었다. 주위에 고통받는 탈북 여성들의 소식을 들으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들을 어떻게 그 고통에서 건질 수 있는지 답답한 노릇이다. 어서 빨리 그곳에서 멀리 도망가기를 바랄 뿐이다. 자기 인민이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데 저 나라 지도자는 아는지 모르는지? 인민에게 고통을 주는 저 악의 정치집단은 왜 망하지 않는지?

우리 민족의 고통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보고 있다. 1982년 일본 교회의 초청으로 한 달간 일본 교회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일본은 자유의 나라이고 문명의 나라라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민족은 그곳에서도 법적으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이등 국민으로 괄시를 받고 있어서 아픈 마음이었는데, 이 중국에서 지금 우리 민족이 짓밟히고 유린당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볼 때 아픈 마음 이를 데가 없다. 우리 민족의 불행은 조선 왕조부터 나라 지도자를 잘 못 만난 덕분에 왜국에게 짓밟히는 고통을 겪었다. 그 왜국이 망하자, 우리 민족이 화합하고 번영하기는커녕 이념 때문에 남북으로 나누어져서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한민족의 가장 큰 고통이며 불행이다.

김제화/jewhakim@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