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 유역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에 있는 선사시대 구석기 유적지는 세계 인류 고고학계의 판도를 뒤집은 곳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의 유적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으로 사적 제2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계고고학계가 발칵 뒤집힌 사건
1978년 4월 한탄강 유역인 전곡리에서 전기 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인 돌도끼, 즉 주먹도끼가 발견된 일로 세계 인류 고고학계가 발칵 뒤집히는 일이 일어났다. 돌도끼가 무엇이길래, 그토록 충격이 컸을까! 의아하게 된다. 왜 그런지 그 역사적 배경을 잠깐 알아본다.
▶전기 구석기 시대-구석기 시대를 세 단계로 나누는 데 전기 구석기 시대는 인류가 처음 활동하던 때를 일컫는다.
▶돌도끼-주먹도끼라고도 부른다. 인류가 처음 만들어 쓰던 생활 도구.
그동안 고고학은 서양학자들에 의하여 주도되어왔으며, 특히 하버드 대학교의 고고학자 모비우스(Movius) 교수의 학설이 유력하였다. 전기 구석기 시대에 인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어디로 이동하였는지를 그때 인류가 처음 만들어 쓰던 도구가 발견되는 지역을 따라 추적하여 연구되어왔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전기 구석기 시대 인류가 쓰던 특징적인 도구 가운데 하나가 돌도끼(주먹도끼)이다. 이 돌도끼 문화가 발견되는 아프리카와 인도와 서유럽 지역을 아슐리안 문화권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는 돌도끼가 1970년까지 전혀 발견되지 않음에 따라 모비우스와 학자들이 돌도끼가 발견되는 지역과 발견되지 않는 지역을 나누어 고인류 문화권을 크게 둘로 나누는 이원론을 주장하면서 모비우스 라인을 설정하였다. 그의 이런 학설은 동아시아는 문화적으로 좀 열등하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1978년 한탄강 유역인 전곡리에서 아슐리안식 석기인 주먹도끼 등이 발견됨으로써 이전까지 정설로 인정받던 모비우스 학설이 한순간에 뒤집혀 버리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를 계기로 연이어 중국에서도 아슐리안형 석기가 발견되면서 모비우스 학설은 완전히 파기되었다.
주먹(돌) 도끼의 우연한 발견
사연인즉, 1978년 4월 경기도 동두천 주한미군 공군부대에 근무하던 그렉 보웬(Greg Bowen, 1950~2009) 상등병이 동두천 미군 부대의 가수이던 한국인 애인 이상미(1954년생, 현 아내)와 1월에 한탄강에서 데이트하던 중 커피를 마시려고 코펠(pot)에 물을 끓이려고 돌을 주워 모으는데, 이상미가 주워 온 ‘이상한 돌’을 본 보웬은 뭔가 느끼는 것이 있어서 주변에서 몇 개를 더 찾아서 편지와 함께 그 돌을 프랑스의 고고학자인 프랑수와 보르도 교수에게 보냈다. 프랑스 교수는 다시 서울대 인류학 교수인 김원용에게 유물을 보내 조사를 요청하였다. 그 결과 그 돌들은 수만 년으로 추정되는 전기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 ‘주먹도끼’로 밝혀졌다. 이로 인해 서울대(1~6차)와 한양대(7~11차)의 발굴을 통해 한탄강 유역의 전곡리에서 6000여 점의 선사시대 유물들을 발견하였다. 미국 버클리 대학의 아프리카 구석기 권위자인 데즈먼드 클라크 같은 세계적인 학자들이 한국에 와서 유물들을 감정하고 진품임을 인정했다. 이로써 동아시아도 고고학계에서 말하는 아슐리안 문화권에 들게 되었다. 그때 한반도의 선사시대 역사는 증거가 없어서 그저 2만∼3만 년으로 추정될 뿐이었는데 주먹도끼의 발견으로 선사시대 역사가 수십만 년 전으로 올려놓게 되었다.
▶그렉 보웬(Greg Bowen)이 이런 눈썰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군에 입대하기 전에 Arizona University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덕택이었다. 그는 학비를 벌려고 군에 입대해서 한국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 세계고고학계를 완전히 뒤엎는 사건의 장본인이 되었다.
▶코펠-캠핑용 도구로 물 끓이는 그릇(pot). 독일어를 한국어로 만든 국적 불명의 단어
주먹도끼(Handaxe, 手斧, shǒufǔ)란 무엇인가?
돌의 양쪽 면을 모두 쳐서 만들어 손에 쥐고 쓸 수 있는 도끼 형태의 모양으로 구석기인들에게는 만능 도구였다. 이 돌도끼는 뗀석기로 전기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다용도 도구로 주먹같이 생겼다고 해서 주먹도끼로 부르며 손에 들고 자르고, 두들기고, 땅을 파는 등 다양한 도구로 사용했다.
▶뗀석기-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돌을 깨서 만든 돌도끼. 후일 갈아서 날카로운 칼이나 끝을 뾰족하게 만든 찍개류 도끼로도 발전하였다.
▶아슐리안형 주먹도끼-프랑스의 생뜨 아슐(St. Acheul) 유적지에서 주먹도끼가 많이 발견돼 붙여진 이름)
아슐리안 문화(Acheulean culture)-인류의 선사시대인 전기 구석기 시대 석기를 제작하는 고고학적인 공법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한쪽은 둥글게, 반대쪽은 뾰족하게 날을 세운 좌우 대칭의 획기적인 뗀석기다.
대박 난 연천군
온 나라 지방단체들이 지방 발전을 위하여 관광자원을 개발하고 있었지만, 전방지대인 연천은 내놓을 만한 것이 없는 초라한 지역이었다. 선사시대 유물이 발견됨으로 구석기를 개념(concept)으로 공공시설에 원시인 캐릭터와 원시인 모형으로 장식하면서 연천군 마스코트를 구석기인으로 하고 전곡읍으로 진입하는 3번 국도 구간을 구석기 원시인들로 온통 장식하면서 대대적인 선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 결과 2011년 4월 25일 전곡선사박물관이 개관되면서 한 해에 95만 명이나 다녀가는 곳이 되었다.
그렉 보웬과 이상미의 삶
그는 1978년에 제대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 고고학 석사학위를 받고 애리조나 나바호 인디언 국립 박물관의 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상미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악성 관절염으로 시달렸다. 그런 가운데 그는 ‘곤히 잠들어 있는 유적들을 너무 많이 깨워서 벌을 받는 것 같다’는 농담을 하면서 웃었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그는 2009년 2월 11일 59세의 나이로 고고학자의 생을 마쳤다.
축제에 초청받은 보웬부부
보웬 부부는 1978년 이후 27년 만인 2005년에 제13회 연천 구석기 축제에 초청받아 방한하였다. 그때 서울 대 이선복 교수는 ‘당신이 아니었으면 전곡리의 역사는 지금도 잠들어 있을 것’이라며 유적 이름을 보웬 유적지로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라고 하자, 보웬은‘황량한 벌판에서 주먹도끼를 봤을 때 내가 무슨 일을 해낸 것인지 믿을 수 없었고,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전기 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자, 열 받은 한 일본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후지무라신이치(藤村新一)’ 란 아마추어 고고학자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하여 발굴에 참여하면서 자칭 아마추어 고고학자로 알려졌다. 그는 조작된 유물 발굴로 자기 조국 일본을 망신시키고 세계고고학계를 농락한 장본인이다.
한국에서 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자 그는 당연히 일본에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전국을 다니며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래서 그는 석기시대의 유물을 조작하기로 마음먹는다. 고고학 지식이 있는 후지무라는 가짜 석기시대 유물을 만들어 그럴듯한 지역에 묻었다. 그리고 전곡리 유물이 발견된 3년 뒤인 1981년 그는 미야기현에서 구석기 유물을 발견하였다고 하면서 기원전 4만 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한다. 어이없게도 일본 고고학자들조차 이 가짜를 알아보지 못하고 속아 넘어간다. 일본 열도는 후지무라의 유물 발굴에 흥분하였고, 덕분에 그는 고고학계 스타로 떠오른다. 그 뒤로 그는 같은 조작극으로 20년간 190여 개가 넘는 유물을 발굴하면서 그는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으면서 ‘신의 손(神の手)’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그의 발굴 유물은 일본 교과서에 실리며 토호쿠 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라는 자리에 오른다. 그러자 일본 극우파들도 자기들의 교과서에 그의 유물을 실으면서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연대가 앞선 문명이 일본에 존재했다고 주장하며 일본을 세계 4대 문명 가운데 하나로 끼워 넣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이렇게 20년 동안 사기극을 벌이면서 영광의 절정을 누리고 있던 2000년 어느 날, “그가 발견한 유물이 조작된 것”이라는 한 통의 제보가 마이니치 신문사에 들어온다. 신문사에서는 보도부장 사나다 카즈요시(真田和義)가 취재팀을 꾸려 조사에 착수한다. 조사팀은 10월 22일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여 그의 조작된 유물을 묻는 과정과 발굴 과정을 몰래카메라 촬영에 성공한다.
며칠 뒤 그는 묻어둔 그 가짜 유물을 파내서 57만 년 전의 유물을 발견했다고 발표한다. 신문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11월 5일 자 신문에 특종으로 “구석기 발굴 날조” 란 제목으로 그의 사기극을 폭로한다. 그리고 이어서 인터뷰와 함께 조작현장 영상을 공개하면서 그의 조작극을 폭로하자 일본 열도는 공황상태에 빠진다. 조사에 따르면 1970년대 이후 그가 발굴했다는 유적 198곳 중 90%가 조작된 것이고, 10%도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일본 고고학계는 그동안 이 거짓을 밝힐만한 실력자가 없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이 조작극을 두둔한 것인가! 일본 고고학계는 그를 영구히 제명하면서, 문화재로 지정된 그의 유물은 모두 해제하고 교과서에서 그와 관련된 내용은 모두 지운다. 이어서 그와 관계된 모든 책과 기록물들 그리고 그의 유물들을 거두어서 없애 버렸다. 2001년 국제 고고학회에서는 일본 역사학자들의 진실성을 믿을 수 없다고 세계고고학회에 참가를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 우리가 알아야 하는 한 가지 사실
일본 사람에게는 왜곡되고 조작된 황국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일본은 한국에 대해서만은 역사적으로나 무엇으로나 한국보다 우월하고 선진적이라는 피해망상적인 선입관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해서라도 일본은 한국보다 낫다는 것을 주장하는 일을 지금까지 해 오고 있는데 아마 역사가 끝날 때까지 열중할 것이다. B. C. 3세기경 한반도에서 토기제작 기술, 벼농사 기술, 금속기 문화를 전하여 일본을 수렵시대에서 농경 시대로 이끈 도래인이 바로 고대 한국 사람이다. 저들의 천황이라는 일본 왕족에게 한국의 피가 흐르고, 불교도 전해 주었고, 백제 왕인(王人) 박사에게서 글을 배웠고 여러 가지 지식과 문화를 전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본분을 모르는 백성들이, 바로 일본 사람이다. 구석기 시대 유물 조작사건도 그렇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 학자가 한국 동관진에서 선사시대 구석기 유적을 발굴했음에도 조선의 구석기 시대가 일본보다 앞서면 안 되기 때문에 밟히지 않고 일부러 덮어버린 사실도 황국사관이 낳은 부끄러운 일이다.
※ 사이트에서 제공된 자료를 축소 편집한 것임
김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