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선교

(100)
목단강으로 1996 목단강 정착 10. 30, 1996 목단강시 牡丹江(Mǔ‧danjiāng) 아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허전한 우리의 마음은 중국 선교에 대한 기대로 채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모든 염려와 시름을 뒤로하고 서울로 나가는 날틀에 몸을 실었다. 마침 우리 옆자리에는 사고 차에 탔다가 중상자가 된 홍현주 어머니와 함께 자리하게 되어서 위로해 드리며 태평양을 건넜다. 한국에 머무는 두 주 동안 양가 형제들과 주안에 형제자매들로부터 위로와 사랑의 선물들을 받도록 해 주셨다. (동생 정희와 은영 100만, 이희만 10만, 김종덕 $200, 김명근 10만, 강북교회 10만, 박상호 30만, 박영호 10만, 박석호 50, 큰 처형 7만, 수원 처형 10, 순호 처제 10만) 김포공항 9.30,1996 정교수와 그 교회..
나의 살던 고향 1997 1997년 새해가 밝았다. 그토록 목메던 중국 선교를 위하여 지난 3년간은 너무나 많은 고뇌와 인내의 시간이었다. 목단강은 내가 5살까지 살았던 동심의 세계가 있는 고향으로 55년 만에 중국 사람이 되기 위하여 고향에 돌아왔다. 조선분들은 나가지 못해서 환장들인데, 이 썩어질 중국은 뭐하러 왔느냐고, 묻는다. 육신의 눈으로 보아서는 현실은 한 걸음도 나아갈 길이 열릴 것 같지 않지만, 주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영의 눈으로 보이는 현실은 그저 희망과 가능성이 넘치고 있었을 뿐이다. 낯설고 물선 이곳에서 이제부터는 기도와 믿음으로 현실을 해치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유치원을 지으려는 환쟈향도 지리적으로 좋은 곳도 아니다. 그래서 조건이 좋은 곳이 있다면 옮기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지만, 빈손으로 ..
1. 씽롱전 경로원(兴隆镇敬老院) 3. 1999 1. 새해에 바라는 소원 중국에 정착한 지 세 번째 해를 맞이하지만, 아직 합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조건을 찾지 못하고 있어서 간절한 기도를 주님께 드리고 있었다. 올해도 바라는 소원을 다음과 같이 적어본다. - 합법적인 정착지를 허락해 주시기를 - 한족 학습 반을 정기적으로 가지도록 - 북한 빵 공장 계약이 잘 이루어지도록 - 이 겨울 동안 중국어 실력이 나아지도록 ♣ 주님의 응답 주님은 새해 둘째 달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정착의 길을 열어주셨다. 목단강시 씽롱전(읍) 정부에서 우리와 경로원 문제를 의논하고 싶다는 소식을 목단강 시 정부 화교연합회를 통해서 전해왔다. 이 씽룽전 중예허촌(中也河村) 은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가 망하기 전에 살던 곳이다. 화교연합회 간부와 함께 전 정부에 가서 전장..
2. 싱롱전 경로원 수리 싱롱전 경로원(兴隆镇敬老院) 수리 1999-7 강남촌의 식당은 산 밑 외진 곳에 있는데, 중국의 국가 간부들(공무원)의 부패가 만연하여 그 도가 넘치던 때를 맞추어 차려진 이 식당은 말이 음식점이지 실은 밤이면 음란한 요지경의 요식업체였다. 주룽지 총리 시대가 열리면서 부정부패 척결 운동이 강화되자 이 식당은 문을 닫게 되었다. 이 건물의 수리는 사실 지붕과 기초를 내놓고는 전체를 다시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길이가 70m이고 폭이 10m의 건물이었다. 이때는 몹시 가물어서 농작물도 시들고 있었고 공사하기에도 힘든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집은 나날이 좋은 모양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식당에서 헐어낸 벽돌을 다시 쓰려고 다듬느라 수고했다. 우물 파기 원래 식당을 할 때 판 우물은 20m 정도 판 것인데 ..
1. 자급자족 자급자족(Self-sufficiency, 自给自足) 1999-2012 우리는 믿음 선교를 하는 자원 선교사로서 약속된 충분한 선교 지원금이 없어서 무료 양로원을 하는 일은 무리였다. 그래서 중국에서 선교하면서 살아야 하는 길은 자급자족이었다. 앞마당은 당 년에 개간하여 그해 가을부터 겨울에 먹을 것은 거두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울타리 밖은 2년에 걸쳐서 개간하여 모두 4000여 평으로 3년째부터는 30여 명이 먹을 양식의 절반 넘게 자급자족이 되기 시작하였다. 1. 농작물 년 년이 4~5월에 씨와 모를 심고 가을이 올 때까지 가뭄과 황사 그리고 우박피해도 컸지만, 자연은 상처 받은 작물들을 회복시켜주어서 가을이면 생각보다 넘치는 열매를 거두도록 해 주었다. 우리 밭이 거름기가 많지 않은 개간 땅이어서 봄..
3. 자급자족 3. 가축 기르기 1999 닭과 오리 거위 그리고 토끼를 키웠다. 닭은 일 년에 세 번 정도 부화시켜 병아리를 키우면서 불려 나갔다. 봄부터 가을까지 달걀과 오리 알은 사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토끼와 닭 그리고 오리는 우리의 식탁을 넉넉하게 해 주었다. 속아 산 오리 새끼 양로원 수리하는데, 오리 새끼 파는 장수가 왔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암수 35마리씩 70마리를 샀다. 얼마를 키우다 보니까 모두 수놈들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안이 벙벙한데 한 분이 말하기를, 우리가 속아 샀다는 것이다. 중국은 값을 미리 주지 않고 암수 구별이 될 때 돈을 준단다. 중국을 몰라서 처음 당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 많은 오리가 한 마리도 죽지 않고 살았다. 바로 옆에 조그마한 호수가 있어서 오리 키우기는 딱..
나눔의 집 꾸미기 2001 나눔의 집 꾸미기 1. 2001 양로 원의 중국 이름 "兴隆镇敬老院”인데 이 이름을 그대로 놔둬달라고 하여서, 우리 만이 부르는 “나눔의 집, Sharing Home”이라는 새 이름을 지었다. 2001년이 밝으면서 나눔의 집은 지난 두 해의 노력으로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우리도 이 외적 진 곳에서 두 겨울을 살면서 이곳에 사는 데 익숙해졌다. 봄이 되면 가축을 키우기 시작할 계획이다. 울타리 안 한 1000평은 이미 개간이 되어서 과일나무들을 심었고, 바깥 2000여 평도 올해 개간하여 절반이라도 자급자족할 계획이다. 그리고 지난해 여러 번 학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족들을 위한 학습이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데, 올해에는 한족 학습이 정착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유엔유엔..
처형 부부 방문 새해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한국 미국 그리고 캐나다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한국과 캐나다 방문 1.13-14 인천 자유공원 강릉 진리에서 올라온 김제현 동생과 인천에서 유람선으로 월미도 영종도 무의도를 돌아보면서 그 옛날의 감회에 젖어 보았다. 자유공원 밑에 있는 China Town에 가서 중국 사람들이 하는 짜장면을 먹어보면서 한국 전쟁 뒤 겪었던 산동 중국 사람들의 고생스러웠던 시절들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다. 중국이 공산화되자 인천 건너편 중국 산동에서 많은 중국 사람이 가까운 인천으로 피난 왔다. 한국도 말할 수 없이 가난한 데다 6.25 사변이 일어나면서 화교들의 생활도 몹시 힘들었지만, 이들은 채소장사 중국 특유의 가락국수 짜장면 호떡을 주 무기로 삶을 꾸려나가면서 오늘날 잘 사는 화교들이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