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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여행기/도미니카선교

Dominican Mission

♣ 도미니카 공화국(Republic of Dominica) 선교 2010

이번 도미니카 공화국의 선교 여행은 미리 생각하거나 계획하지 않았던 뜻밖의 축복이었다. 원래는 아이티만 가려던 생각이었는데 지도를 보다가 같은 섬에 서로 붙은 나라인 것을 알고 날틀 값을 보니 오히려 아이티 왕복보다는 도미니카로 돌아오는 것이 오히려 더 싸기도 했다. 아이티에서 건너가는 거리는 가까우니까 비용만 조금 더 들면 되었다. 그러나 도미니카에는 아는 분이 없어서 기도하는 가운데 도미니카 공화국 site에서 한국 침례교회에서 파송된 김영구 선교사와 연락이 되었다. 우리의 방문을 환영해 주어서, 우리는 도미니카 공화국 선교지도 방문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알지 못하는 두 개의 섬나라로 나아가게 되었다. 

 

▶ 도미니카 공화국은 어떤 나라?

중남미에 도미니카 이름을 가진 섬나라가 두 개나 있다. 국제적으로 구분하기 위해서 위쪽에 아이티와 붙은 나라를 '도미니카 공화국 '이라고 부르고 그 아래 섬나라는 그냥 도미니카라고 한다.   

                        

                  

크기 : 48,511㎢(한반도의 1/4)
인구 : 9,650,054명(2010년 현재)
정치형태 :대통령 중심제/국회는 양원 제
말과 글 : 스페인어 
서 울   : 싼도도밍고(Santo Doming)

 

▶ 역사

7세기 이래로 타이노 원주민이 거주했으나, 1492년 10월 12일 콜럼버스가 바하마 군도에 도착한 이래 무자비한 학살로 죄 없는 순수한 원주민들은 침략자들에 의하여 급격히 줄어들었다. 1795년 바젤 협약의 결과로 섬 전체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으나, 1809년 다시 스페인에게로 넘어갔다. 1821년 독립을 선포했으나, 곧 아이티에 의해 점령을 당했으나, 1844년 2월 27일에 아이티로부터 독립하였다. 살인집단의 두목인 콜럼버스가 1492년 바하마 군도에 도착한 것은 남아메리카 민족에게는 재앙의 날이 되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배운 역사 지식은 그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자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는 침략 제국주의 자들의 앞잡이며, 살인마이다. 백인들을 지난 수백 년 동안 10월 12일을 축제일로 기념하고 즐기지만, 원주민들에게는 저주와 혐오의 날로 기억하고 있다.

 

▶ 콜럼버스 가톨릭 집단의 살인 만행

1492년 콜럼버스가 남미 바하마 군도를 발견하게 되므로 Hispaniola(아이티+도미니카 등) 섬과 남미에서 금을 보고 눈이 어두워진 로마 가톨릭교도들은 점령하는 모든 곳에서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몰살하는 만인 공로 할 만행을 저질렀다. 할당된 금을 캐 오지 않을 경우 손을 자르거나 매달아 불에 태워 죽이는 천인 공로할 죄악을 저질렀다. 1493년 살인자 콜럼버스가 도착할 당시 그곳 원주민인 Tyno는 약 800만이었는데 50년이 지난 1542년에 와서는 겨우 200명을 줄어들다가 멸종되었다. 캐리비안의 마리엔 왕국(바하마)과 하라과(도미니카) 왕국은 사라지고,  1942년에 1500만이던 캐리비안 군도의 인구는 한 세기가 되기 전에 카리브해 원주민은 거의 멸종이 되었다. 

                    

▶ 활당된 금을 캐지 못한 원주민들의 화형식. 예수님 제자 12 사람 이름과 예수님을 위하여 한 사람을 더 해서 13명을 매달아 불에 구워 죽이는 잔인한 살육을 저질렀다, 무자비한 병사가 어린아이를 집어던지고 있다.                  

▶ 손을 자르는 형벌을 가하는 잔인한 가톨릭 군인들. 이 그림들은 그때 스페인 침략자들과 함께 한 가톨릭 신부가 그린 그림이 남아서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저지른 만행들을 생생하게 증거해 주고 있다.(임진왜란 때에도 왜군과 함께 했던 "게이넨" 중의 기록에서 많은 사실이 드러났듯이) 학살당하는 원주민들은 살기 위해서 살인자들의 종교를 받아 드리면서 자기들의 토착종교와 혼합시켜 버려 남미 가톨릭은 유럽과 또 다른 모양의 귀신 종교가 되어버렸다. 나아가서 전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의 딸들은 살인자들에게 주면서 혼혈이 되어가면서 살아남았다. 남미와 캐리비안의 인종말살에 대한 예 하나만 들었을 뿐이다.

 

▶ 민족
도미니카 공화국 국민 대부분은 유럽 계와 아프리카계 혼혈인 뮬라토(Mulato)와 백인계와 인디오 계 혼혈인 메스티소(Mestizo)이다. 백인계 인종은 16% 정도 된다. 독일계 유태인을 포함한 소수 유럽 민족과 콘스탄사 계곡에서 채소 농경을 하는 일본인, 호텔 및 식당업을 하는 중국인 등이 있다. 주민들은 일반적으로 낙천적이며 온화한 편이다. 성품이 온순하고 순박하면서도 춤과 음악을 즐기는 여유 많은 기질을 갖고 있는, 전형적인 카리브 연안국 주민들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하고 있는 아이티 계인들은 집단학살을 당한 때도 있었으며, 지금도 차별 대우를 받고 있는데 가난 때문에 국경을 넘어와서 불법자로 살면서 막 노동자로서 피곤하게 살고 있는 모습들을 우리는 볼 수 있었다.

종교-로마 가톨릭 94% /기독교 3% /기타 종교 3% 정도이다.

사회-교육·생활수준은 아직도 낮은 편이고 문맹률이 18%(2001)에 이르며, 의무교육은 8년이다.

          ♠♠ㅍ

 

◈ 도미니카 공화국 단기선교의 이모저모  12.13-20, 2010

▶도미니카로 12. 13  월 맑은
긴 밤에 비가 내려 무더운 열기를 식히는 듯하다. 오늘은 아이티를 떠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가는 날이다. 하늘 길로는 277Km이지만 육로는 376Km이다. 부정선거로 민중폭동이 일어나 공항이 폐쇄되는 바람에 육로로 가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마침 한국에서 온 김 간사가 돌아가는 길이라 우리와 같이 가게 되어서 반가웠다. 며칠 함께하던 수고 많은 그리고 친절한 GAP 식구들과 헤어졌다. 이 선교사가 우리를 데리고 Terra Bus Terminal로 갔다. 산타 도밍고까지 차 삯은 한 사람이 U$50이다. 그리고 국경선에서 입국 비 $20을 받는다고 한다. 9시 42분 떠난 버스는 그레이하운드와 비슷한 차로 자리가 좋고 화장실이 있어서 편했다. 사람이 절반도 차지 않았다. 고속도로 같은 것이 없는 데다가 길이 좋지를 않아서 차가 빨리 달리지 못하고 흔들거림이 심했다. 두 시간 여 아이티의 벌거벗은 산야들과 마을들을 보면서 가더니 이제는 호수가로만 달려 도미니카 국경선에 닿았다.

 

▶국경선 이민국

마침 잔비가 내리고 있었다. 국경선은 시장이 활발하게 서고 있었다. 아스팔트가 되어 있지 않은 보세구역은 ㅇ여기저기 물이 고이고 어지러웠다. 먼저 아이티 이민국에 가서 출국 도장을 찍고, 도미니카 쪽으로 건너가서 이젠 짐을 검사받아야 한다고 해서 모두 내리는 비를 맞으며 가방들을 끌고 가서 대충 조사를 받고 다시 차에 와서 실었다. 환전상들이 U$ 1:34 Peso로 해 주겠다고 바꾸라고 치근거렸다. 도미니카 입국 비자는 안내원이 Passport를 다 가지고 가서 받아다가 주었다. 국경선을 건너는데 비속에 모두 잠시 난리를 겪은 셈이다.

              

혼란한 국경선의 어지러운 모습 

 

한 시간 반 여 만에 차는 보세구역을 떠나 호수가로 한참 달리다가 드디어 산간으로 달리는데 길이 좋아져서 잘 달리고 안정감 이 있어서 편했다. 놀라운 것은 아이티에서 도미니카로 들어서자 자연환경이 달라졌다. 넓은 지역도 아니고 좁은 신작로 사이를 두고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지 상상이 안되었다. 저쪽 산야는 메마른 데 비해 이쪽 산야는 나무가 울창하고 풍요로워 마음마저도 푸근해지고 있었다. 마치 미국에서 멕시코 국경선을 넘을 때와 같은 현상이다.

       

            ♣ 길을 사이에 두고 왼쪽은 헐벗은 아이티 산야와 오른쪽의 푸름이 가득한 도미니카 산야 

 

차창에 스치는 마을들은 야자와 종려나무에 둘러져있고, 그 속에 늘어선 집들도 안정되고 깨끗해 보였다. 우선 사람들의 얼굴 색깔이 검은 데서 허여멀겋게 변하고 있어서 신기했다. 얼마를 달리니 고속도로가 나온다. 그리고 도시락과 펩시를 한 병씩을 준다. 노란색의 안남미 밥에 닭고기 요리를 얹은 것이었다. 맛은 없지만 먹어두었다. 차는 냉방을 세게 하여 겉옷을 안 가지고 타서 서늘하다 못해 쌀쌀해진다. 안내양에게 춥다고 온도를 내려 달라고 부탁했더니 안 된다고 미안하다고 한다. 왜 온도를 내리는 것이 안 되는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자연경관을 즐기면서 도미니카 서울 산토도밍고에 들어왔다. 오후 6시 30분에 터미널에 내렸다. 만나기로 한 김 선교사가 나오지를 않았다. 마침 함께 간 간사를 맞이하러 나온 분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김 선교사에게 전화를 해 주었다. 자기네가 지금 한국식당에 있다고 그리로 데리고 오라는 이야기이다. 참 무정한 사람 같았다. 처음 가는 우리를 맞이하기로 해 놓고 누구에게 부탁하지도 않고, 자기네는 편하게 식당에 천연스럽게 앉아 있다!!. 말도 모르고 처음 가는 나라, 사회 안전이 보장이 안 되어 있다는 나라에 가는 우리를 그렇게 맞이하는 것이 옳은지, 상상이 되지 않은 분이라고, 이렇게 한구절 남겨본다. 속 편하게 사는 아주 편한 분들 같았다. 젊은 형제들이 친절하게도 우리를 한국식당으로 데려다주어서 고마웠다. 한국 식당 문 앞에는 소총을 든 경비가 의자에 앉아 있어서 이곳 사회분위기도 그리 안전하지 못하다는 인상이었다. 김 선교사 부부와 반갑게 만났다. 순두부찌개로 저녁을 사주셨다. 화기애애한 상견례를 치르고 살고 있는 Isabel Villa라고 부르는 주택단지인데 Security가 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잘 사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살고 있는 독채 빌라는 세 집으로 한 달에 U$500 내고 살고 있다고 하는데 집이 좋았다. 선교에 대한 많은 교제를 나누면서 밤은 깊어갔다.

 

▶Sonoma Baptist church  12. 14 화 맑음
이곳은 열대의 이름다운 꽃들과 야자 그리고 종려나무들이 우거진 주택가로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동리를 한 바퀴 돌면서 아름다운 꽃들과 신기한 나무들을 보면서 즐거운 산책을 즐겼다. 오전과 오후는 김 선교사 부부와 아이티 선교에 대하여, 김 선교사의 간증과 우리 간증들을 나누면서, 주님께서 여기서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역사하시고 계심을 감사했다. 저녁에는 Sonoma Baptist church에 갔다.

       

       

스페인 어를 하는 아이티 계통의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다. 전기 사정이 안 좋아서 희미한 불빛아래 모인 성도들의 얼굴색이 검어서 더 어둡기만 하였다. 그러나 찬양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 주님이 함께 하시는 평안과 은혜가 넘치고 있음을 느꼈다. 김 선교사 사모님은 키보드를 치시고, 젊은 형제들이 드럼과 마치 부엌에서 쓰는 쇠로 된 강판을 둥근 나무에 감아 못 같은 쇠로 위아래로 긁으면서 나는 시끄러운 쇠 소리가 다른 악기와 어우러지는데 나는 아직 이런 소리에 익숙지 않아서인지 시끄럽고 어색하기만 하다. 케냐에 갔을 때는 주로 둥 둥 둥 하는 요란한 얇고 둥근 작은 북소리는 괜찮았는데 여기 소리는 이상한 괴음이었다. 나는 마태 복은 5장 12로 16절 말씀을 보면서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라고 격려했다. 사진들을 찍었는데 불빛도 어둡고 모두 얼굴이 검어서 사진이 잘 나오지를 않았다.

 

▶ Even Ezer Baptist Church  12. 15  수 맑은
오전에 김 선교사가 우리를 데리고 Even Ezer Baptist Church로 갔다. 소형 날틀들이 사용하는 국내 비행장이 가까운 지역인데, 아스팔트가 없는 길로 한참 와서 있는 빈민 지역이었다. 이 교회 목회자는 나이가 좀 든 여성이었다. 남편은 일하러 다니고 있다고 했다. 예배당이 지어졌고, 사택도 지어졌다. 나는 여 목회자에게 커피가 있으면 끓여 달라고 했다. 우리는 커피를 나누며 교제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김 선교사에게 여성 목회자에게 $5를 주고 싶은데 괜찮겠느냐고 물으니 좋다고 한다. 그래서 $5를 자매의 손에 쥐어주었더니 고마워했다. 마침 예배당 안에서는 몇 자매들이 악기로 찬송 연습을 하고 있기에 나도 연습을 좀 해 보았다.   

             

 

그리고 예배당 옆에는 Neighbor Share에서 자금을 대어 120㎡ 건물을 지었는데 한 10 여명 고아들을 수용할 계획으로 집을 지었다. 아이들 생활비를 대어 주기로 하고 여 목사 딸이 보모로 일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김 선교사가 여 목회자에게 생활보조금으로 $60 정도를 돕고 있다고 했다. 저녁집회에 다시 오기로 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선교사님이 운영하던 Monte de sion school에 들렸는데 적자가 심해서 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옆에 선교사님이 세우고 후원하는 교회가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은행에 가서 $100을 바꾸었더니 3,500 peso가 되었다. 환율은 U$1=350P 그런데 놀라운 것은 캐나다 $는 1: 27로 괄시를 하고 있었다. 

 

저녁 집회에는 전기 불이 너무 흐렸다. 너무 흐려서 집회에서 찍은 몇 장의 사진은 너무 흐려서 쓸수가 없었다. 전기 요금 때문에 이렇게 흐리게 켜고 집회를 한다고 한다. 여기도 화요일 저녁에 간 교회와 마찬가지로 쇠붙이로 된 타악기 소리가 몹시 요란했다. 찬송을 부르다가 형제들을 나오게 해서 찬송을 부르면서 예배당을 한 바퀴 도는 일을 한다. 마치 땅 발기 같이 온 세상에 전도하러 나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연출하고 있는 것이 색달랐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나와서 한 60여 명을 이루었다. 내가 설교를 하고 김 선교사가 통역을 했다. 주님께서 여기도 이렇게 믿는 자들을 모아주시니 고마웠다. 내 자매는 선교사 자매와 부엌에서 음식도 이것저것 같이 만들어 내면서 잘 어울리며 좋은 교제를 하고 있어서 좋았다.

        

▶성채와 박물관  12. 16 목 맑은
오늘은 김 선교님 부부가 우리를 데리고 시내 관광을 나가주었다. 이 도시가 처음 만들어 졌을 때 생겨 난 옛날 도시였다. 바다와 강에 인접한 곳에 옛날 성채가 있었다. 침략자 스페인 군인들이 들어와서 쌓은 성채였다. 건너편은 항구였다. 그리고 처음 지었다는 침략자들의 교당을 돌아보았다. 십자가를 높이 든 살인마 천주교도들이 평화롭게 사는 이 땅에 쳐들어 와서 노예로 부리며 학대하다가 결국은 모두 죽여 원주민을 사라지게 되었으니, 하나님을 믿는 나라 사람들이 악마의 사신으로 살인자들이었다. 침략 제국주의자들의 칼날에 쓸어져 간 무죄한 저 생명들의 억울함을 누가 풀어줄 것인지, 이 악랄한 죄악을 저지른 자들의 자손들이 길이길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저 억울한 생명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은 들으셨을 터인데, 그들을 위한 신원의 때는 언제인지?

              

 

그리고 우리는 박물관으로 갔다. 이 박물관의 유품이라는 것이 모두 침략제국주의 살인자들의 얼굴들과 유품들이었다. 하나님은 저들이 한 만행들을 잘했다고 하실까? 차려 놓은 원주민들의 생활모습과 살림도구들은 화려한 침략자들의 것에 비해 초라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더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우리는 양쪽으로 선물가게들로 늘어선 길을 한참 걸어보고 큰 선물 가게에 들어갔더니 주인이 마침 대만 사람이라 모처럼 중국어를 해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길옆에 늘어선 높은 야자나무 가로수들은 보기에 아름다웠다. 나는 김 선교사 내외분을 초대하여 바다 가에 자리한 아름다운 식당에 가서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이곳의 전통음식을 시켜 맛보는 즐거움을 누렸다.

 

▶ Grace Baptish Church School  12. 17 금  맑음
오전 우리는 Grace Baptist Church School에 갔다. 기독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세워서 기독교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오늘은 오전 8시에 전교생 예배가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히브리 11장 1절 에서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 희망을 가지고 살도록 격려했다. 나는 덴마크의 위대한 건설의 지도자이신 그룬트비히 목사님이 깨달은 빌립보서 6:38의 말씀과 위대한 선각자 달가스에 대한 예를 들면서 꿈을 가진 믿음은 주님께서 이루어진다고 강조면서 학생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꿈을 가지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미국의 강철 왕 카네기의 예도 들었다.

 

▶Boca chica Beach
오후에는 바다로 간다고 해서 반가웠다. 수영 준비를 하여 우리 모두는 바다로 갔다. 김 선교사님 부부는 우리를 beach에 있는 호텔 뷔페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넓게 터진 곳에 자리 잡은 식당은 아름다운 꽃들과 야자와 여러 가지 나무들이 두르고 있어서 남국의 정취가 물씬 넘쳐나는 곳이었다. 값은 좀 있겠지만 남국의 풀 채소들과 여러 바다 고기들이 있어서 나는 좋았다.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바다로 가는데 한 떼의 학생 무용단이 지나가는데 사진을 한 장 찍자고 하니까 와하고 모여들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 선교사가 여기 산지가 오래되고 손님들과 자주 와서인지 바닷가에도 단골집이 있었다. 모텔은 좀 싸게 하루에 $30이면 된다고 하였다. 주인이 나와서 선교사 내외를 극진히 모시고 있었다. 야자나무 아래 침대도 싸게 해 주었다. 철이 철인만큼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아서 좋았다. 바다는 저 멀리 축항 같이 돌들로 길게 막아서 대양의 파도가 직접 바다 가에 까지 오지 못하고 있어서 바다가 잔잔하고 안전은 하나 살아있는 바다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저 멀리 둑까지는 한 200 M거리는 되는데 물이 가슴 아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그곳까지 걸어갔다. 혹 기념이 될 만한 돌이라도 하나 있을까 눈 여겨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하였다.  산호 돌들인데 잔가시같이 날카로워서 발바닥이 아파서 다니기가 힘들었다. 둑 안에 같인 바다는 마치 호수 같은 느낌이었고 바다 밑에는 단단한 흙모래로 되어 있어서 조개 같은 것은 없었다. 푸른 바다풀들이 듬성듬성 있는 것 외에는 아무 거도 없다. 난 해파리를 한 마리 잡아서 가지고 놀다가 잘 못하여 쏘였다. 물론 강한 독을 가진 놈은 아니었다. 한국 동해에서 가지고 놀던 그런 종류였다. 작년에 온 단기 선교 팀의 학생 하나가 해파리에 쏘여서 응급실에 가기도 했다고 한다. 강한 독을 가진 해파리는 긴 촉수를 가지고 있는데 그놈은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긴 촉수가 없는 것은 쏘기는 쏘지만 그냥 모기에게 쏘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오후 내내 정말 남국의 푸른 바다에서 마음껏 즐겼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여기서 국제 비행장이 가깝다고 했다. 야자나무 잎 사이로 저 멀리 바다 너머로 지는 석양은 아름답기만 했다.

            

Botanical Garden 12. 18 토 흐림 약간의 비
우리가 와 있는 동안 바람도 불고 흐리고 온도가 좀 낮아져서 그런대로 지내기가 좋았다. 이곳도 사실은 년 중 온도가 제 일 낮은 겨울에 해당하는 철이라고 한다. 여기도 전기는 자주 정전이 되므로 집집마다 축전지를 여러 개 가지고 있어서 전기가 들어올 때에 자동으로 저장을 하도록 하고 있었고, 물탱크도 두 개씩이나 있어서 물이 나올 때 자동으로 받아 놓아야 물을 편하게 쓴다고 한다. 여기 사정도 아이티보다는 좀 낫기는 하겠지만 비슷했다.

             

 

 

선교사님은 우리와 Botanical Garden으로 데리고 갔다. 열대 식물원이라 신기한 식물들과 꽃들이 아름답기만 하였다. 모든 입장객들이 톨레이 차를 타고 공원을 한 바퀴 도는 재미도 괜찮았다. 이 공원 안에 일본서 돈을 들여 일본 garden을 차려 놓아서 이색적이었다.

           

           

그리고 침례교에서 운영하는 서점에 갔다. 내가 선교사님에게 드린 작은 선물을 드렸는데, 그것으로 찬송가 80권을 사면서 저녁에 선물로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다. 한국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중국 식품점에 갔다. 여기는 한국 식품점은 없었다. 신라면 값이 캐나다의 두 배나 되었다. 우리 집 사람이 떡 만드는 것을 선교사 사모에게 가르쳐 준다고 찹쌀가루와 팥 등을 샀다. 우리가 쉬는 동안 사모들은 부엌에서 맛있는 백설기를 해서 함께 맛있게 먹었다. 슈퍼에 들려 선교 비를 주신 고마운 분들을 위해서 커피를 10여 봉지를 샀다.

 

12월 19일 일 맑음 흐림
아침 학교 교회에서 예배가 있다고 하여 갔다. 먼저 그룹으로 성경 공부를 하고 거기서 헌금도 하고, 그리고 전체가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 내가 설교를 하고 김 선교사 가 통역을 하였다. 저녁에는 4개 교회가 연합으로 크리스마스 연합집회를 한다고 하는데, 음식들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함께 파티를 한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연합집회
연합집회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전기가 들어오지를 않아서 아주 곤란들 했다. 학교 선생님이 이럴 때는 자동으로 발전기를 돌리도록 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선교사님이 왜 발전기를 안 돌리느냐고 하니 기름이 없다고 한다. 이러 일은 말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일이 되어져야 하고 필요한 자금은 뒤에 받으면 되는데 여기 지도자들도 알아서 하기보다는 시키는 일만 하는 것 같았다. 한 참 뒤에 전기가 들어왔다. 선교사님이 몹시 답답해하는 것 같았다. 자기네 단독 집회도 아니고 크리스마스 연합집회인데 이렇게 준비성이 없으니 오죽 답답하랴. 우리가 중국에서 일하면서 천불이 나다 못해 나는 이제 만 불이 난다고 했다. 학교 화장실 수도꼭지도 고장이 나서 물이 나오지를 않는다. 학교 책임자들이 이런 것 하나 제대로 해결을 하지 못하고 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니 한심하다고 했다. 집회는 초만원을 이룰 만큼 많이들 왔다. 찬양에 이어 내가 말씀을 보았고 사모님이 통역을 하였다. 그리고 어저께 산 찬송가를 내가 교회 대표에게 선물로 주는 시간을 잠시 가졌다. 각 교회에서 만들어 온 이곳 음식들은 다양한데, 별다른 것은 돼지고기를 구운 것이다. 여기 풍속은 명절날 돼지고기를 구워 먹는 것이 특별한 음식이라고 한다. 나에게도 한 토막을 주었는데 너무 기름이 많아서 안 먹고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오늘 여기 사람들의 평범한 음식들을 맛보는 것 같았다. 재미있는 시간들이었다.

 

12월 20일 월 맑음
오늘은 떠나는 날이다. 아침에 일찍 나는 이 마을을 산책하다가 한국 아카시아 잎처럼 생긴 나무에는 핑크 꽃이 피고 열매가 얼마나 큰지 신기해서 가져가려고 두 개를 땄는데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 나무가 있는 곳에 가니 한 집에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말은 알 통하지만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말을 알아가지고 가서, “부에나스 디아스”라고 인사하자 모두 응답한다. 나는 그 나무를 가리키면서 저 나무가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처음 내 스페인어를 잘 못 알아듣다가, 드디어 알아듣고, 서로 물어보더니 한 분이 친절하게 적어 주어서 고마웠다. 나무 이름은 Sambloyan 이다. 이것이 바로 탕자가 먹던 쥐엄 열매 종류이다.

             

                           

오전에 김영구 선교사와 창조 과학에 대해서 말을 나누었는데, 창조과학에 대해서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대학생 때부터 강의를 들었다고 하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지 않고 과학책으로 대한다고 비판적이었고, 어떻게 하나님이 단시간에 모든 것을 창조했겠느냐는 것이다. 창조과학자들은 성경을 과학 책으로 여기지 않는다. 다만 무신론자들과 진화론자들이 성경을 공격하고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려는 시도를 과학적으로 대응하는데 대해서, 믿는 과학자들이 과학적인 지식과 자료들을 가지고 저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일깨워 주려는 데 목적이 있다. 김 선교사는 틀이 잘 잡혀 있고 바른 원리를 가진 정직한 분이어서 존경스러웠다. 두 분의 사랑과 보실 핌으로 좋은 교제 가운데 있다가 떠나게 되어서 고마운 마음이었다. 점심을 집에서 나누고 우리를 공항으로 데려다주었다. 고맙고 친절한 선교사님 내외를 뒤로하고 우리를 실은 날틀은 도미니카를 떠나고 있었다.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구름 저편으로 기울어지는 아름다운 해의 붉은빛은 검은 구름과 어우러져 검붉은 빛을 띠면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우리 인생도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색을 간직하다가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김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