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훈 형제님은 인천 부평에서 사모님과 함께 선한 사마리아 원을 세우시고 원장으로서 그리고 구원을 받으신 뒤로는 원 안에서 부평교회를 세우신 목회자로, 한국 형제교회의 첫 복음 전도자로서, 극동방송의 총무로서 방송 설교자로서, 활동하시면서 복음이 널리 전하셨다. 소개하고 있는 강 형제님의 간증은 강 형제님이 돌아가시기 전 4년 전에 제가 직접 인터뷰를 한 것이다.
강태훈 원장은 1932년, 1월 24일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셨다. 모친께서는 가장 율법적인 장로교 재건 파(신사 참배 거부로 고난 받은 분들이 만든 교단) 권사님이셨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리어 엄한 종교생활을 하셨다.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마치시고 돌아오시면 온 가족을 깨워서 다시 자녀들과 아침예배를 드리시고, 하루에 아침, 11시, 오후 3시, 저녁, 이렇게 4번의 가정 예배를 드리셨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장남인 태훈이는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를 빼놓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엄한 율법 밑에서 구원의 확신이 없었든 강 원장님은 그 어머니의 기도가 싫었다. 그분은 군대에 들어가면서 “교회여 안녕”하게 되었다고 한다. 군에서 친구들이 주일이면 교회로 가자고 하면, "나는 20년이나 다녔기에 교회는 졸업을 하였다고 답하곤 했다고 한다.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가지 않고 부평 미 Ascom 부대에서 악단을 운영하면서 믿음을 버린 세상적인 사람이 되었다. 사모님과 결혼한 뒤 부평에 선한 사마리아 원이라는 고아원을 설립하셨다. 어느 날 고아원을 후원하던 미군부대 군목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에, Earl Novak이라는 군목 조수를 만났는데, 그는 강 원장에게 "당신은 크리스천이냐? 고 물어서, 강 원장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더니, Novak병사는, 그럼 지금 죽어도 천국으로 갈 수 있습니까? 하고 물어서, 강 원장은, 그것은 미래의 일이기에 죽어봐야 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요한복음 3:16절은 미래형으로 되어있는데,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답했다. Novak병사는 자기 영어성경을 펴서 보여 주었는데, 그때, 그 자리에서 강 원장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 영어 성경에는 "믿는 자는 지금 영생을 갖고 있다, (have eternal life, 현재 완료형)"라고 써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강 원장의 머리에는 말할 수 없는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렇다면 왜 20년 동안을 교회에 다녔는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지금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는 말인가? 강 원장은 그때부터 Earl Novak과 함께 서울 불광동의 Christoporus 선교사 집을 방문하면서, 열심히 성경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9년 3월 29일, 그는 부평 Ascom 군부대의 Chapel에서 선교사 Tom Watson(극동방송 설립자)의 전도 집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게 된다. 그때부터 그의 가슴에는 죄인을 사랑하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과 전하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게 되었다.
인천 연안 도서 선교와 방송국 총무
다음 글은 강형이 제게 한 말씀을 직접 옮겨 놓은 것입니다.
"나는 선교사들과 성경공부를 하는 일과 전도하는 일에 동참하고 매일 극동방송국 영어 방송에서 나오는 미국인 방송 목사들의 메시지를 열심히 듣고 책자들을 신청하여 성경 공부를 하였다."
그때 TEAM(The Evangelical Alliance Mission) 선교사 중에 Reloy Johnson 선교사는 배를 가지고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들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나는 그분의 설교를 통역하고 다니게 되었다. (그 섬들 가운데 무의도 개척교회가 있었고, 차갑술 형이 구원을 받는다)
극동 방속국 총무
그러든 가운데 어느 날 나는 Johnson 선교사에게 극동방송국의 한국어 방송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많은 선교자금으로 방송국을 세우고 막대한 운영비를 쓰면서 방송을 하고 있는데 방송 목사의 설교가 복음이 아니라니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마침내 나의 이 말은 Team 선교사들의 회의에 올려져서 한국어를 능통하게 하는 선교사들로 하여금 아침마다 전해지는 설교의 내용을 검토하게 했다. 그 결과 나의 말이 옳다는 결론이 났다. 십여 년을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방송국장은 한국인 총무를 해고시키고 방송 담당자 김용범 전도사의 방송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방송국장은 나에게 방송국 총무를 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고아원 일에도 바빴지만 총무 직책을 맡게 되었고, 아침 은혜의 시간 프로를 통해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않고 표준어를 쓴다는 것이 어떤 청취자는 내가 선교사인데 한국말을 배워가지고 방송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김용범 전도사를 해고는 시키지 않고 방송만 중단을 시키고 성경공부를 하라고 복음을 가르치는 책자를 사주었다. 뒷날 김용범 전도사는 복음을 깨닫고 목사가 되어서 목회생활을 하게 되었고, 우리는 서로 아주 가깝게 교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 김용범 목사는 지금 뉴욕 Flushing에서 Chiropractor(척추전문 교정사)로 일하면서 주님을 섬기고 있는 정형모 형제의 장인이시다.
부평교회 개척
그리고 그 주님의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전하기 위하여 고아원 안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주님의 뜻이 계셔서 1965-67까지 극동방송 총무로 재직하면서 은혜의 시간을 통하여 구원의 복음을 전하셨다. 그리고 1967년 당시 시카고에 있던 엠마오 성경학교에 가셔서 일 년 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나오셔서 남사에 캠프장을 만들어 처음 한국 모임에서 처음 캠프를 시작하셨다. 그러다가 1971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시게 되어 복음이 왕성하게 전해지던 그때 강 형의 미국 이민은 우리에게 많은 섭섭함을 남기기도 했다. 시카고에 자리를 잡으면서 자매들이 수건을 쓰지 않는 독립교회를 개척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면서 교회로 발전하였다. 생업으로는 세탁소를 하시면서 어려운 이민 동포들을 많이 돕기도 하셨다. 그리고 복음의 동역 자들을 필요로 하시던 강형은 한국의 몇몇 형제들을 초청하였지만, 강형의 사역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교회를 소란하게 하고 분열시키는 일을 하면서 배은망덕한 수치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강형은 미 남 침례교 목사가 되면서 침례교회로 발전하였다.
시카고에 신학교 분교도 설립하여 운영하셨고 뒤에는 캘리포니아 남쪽 끝 San diago에서 한인 침례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시다가 은퇴를 하시고 자녀들이 있는 LA에서 사시다가 2014년 4월 2일 82년간의 나그네 길을 마치시고 주님의 안식에 들어가셨다. 또한 사모님께서도 강형이 떠나신 지 이틀 뒤에 긴 병환 끝에 2014년 4월 4일 78년간의 나그네 길을 마치시고 주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두 분이 부부의 연을 맺고 해로하시다가 함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시니 happy ending이었습니다.
강형의 장례식
2014년 4월 5일 10시
Lakforest, LA
Reverane Bible Church
시카고 중앙일보에 기고한 임용민 형제의 추도 글
♣ Chicago에서도 강형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분들이 안영배 목회자의 아가페 교회에서 수십 명이 모여서 강형을 기리는 추도식을 가졌습니다.
jewhakim@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