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눔의 한 마당/Dr. 손치과진료

Dr. 손 화진 치과의사 진료기 2007

아래 글은 우리 선교지에 의료봉사를 오셨던 치과의사 손화진 선생님이 쓰신 글이다. 보고 듣고 느낀 소감을 꾸밈없이 나타내 주고 있다. 한국에서도 무의촌 진료를 하신 경험이 있으신데 놀라운 인연은 우리의 개척지 강릉 사천진리 마을에서도 무의촌 진료를 한 적이 있다고 하여서 반가웠다.

 

 

 

중국 목단강 치과진료 봉사기                        
그때가 탈레반에 의료봉사단 23명이 납치된 지 20여 일이 지난 2007.8.10일 즈음이었다. 그 시기에 중국 헤이롱장 성 목단강시로 무의촌 진료를 떠나기로 했다. 탈레반에 납치된 의료봉사단 중 이미 두 사람은 희생되고, 남은 생존자들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때였다. 그러니 가족들 모두가 가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4박 5일 일정이니, 별일 없을 거라며,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떠나기로 했다. 정박민 선배님, 최종기 원장과 함께, 셋이서 별일 없으리라 믿으며, 또 별일 없기를 기대하면서 하얼빈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얼빈 공항을 내리니 조선족 이홍국형제가 통역 겸 마중 나왔다. 공항을 나가려니 치과 기구와 발치 감자 등에 통관세를 내란다. 양로원에서 보내준 중국어 초청장을 보여 주며, “당신네 국인들을 도와주려 왔고, 출국 때 가지고 나갈 것”이라 하여도 막무가내로 통관세 2,000위안을 내고 나가란다. (이때 이홍국 형제가 목단강 김 원장에게 전화를 하여 의논하니 게네들이 돈을 얻어먹자는 것이니까 영수증이 필요 없다고 하고 500원 정도를 주고 해결하라고 했다. “예치금을 내었다가 출국 시 찾아가겠다”. 하여도 “안 된다”라고 하여, “통관 않고 보관할 것”을 요구하니 그때서야, 돈을 요구하면서 이 형제가 500원을 주겠다고 하자 1000원을 내라고 하여 결국 800위안으로 깎아 내고 공항을 나오니, 오후 4시 넘어 목단강행 버스는 끊겼다. 택시로 1,000위안에 가기로 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바나나와 과자로 택시 속에서 요기를 하며 서둘러 목단강 시로 향해서 떠났다. 악의적이고 부패한 중국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씁쓸하다. 하얼빈에서 목단강시까지 80Km 거리 정도로만 알았으나, 공항에서 무려 350Km가 된단다. 서울 부산 간 거리다. 가도 가도 끝없는 벌판에는 온통 옥수수와 콩밭이다. 민가는 안 보이 것만 모두 경작지이고, 노는 땅이 없다. 해가 지니 온통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정적뿐이다. 간간히 마주 오는 차들이 보일뿐 어둠과 정적의 연속이다. 인천-목단강시로 직항 항공기가 주2회 있으나, 그것을 몰라 350km 떨어진 하얼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산이라곤 보이지 않는 벌판이다. 모두 경작지다. 헤이롱장 성 넓이가 한반도보다 2.5배 크단다(인구 4천만이 넘고). 왜 우리 조상은 저 넓은 고구려, 발해 벌판을 버리고,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한반도로 밀려 나왔나 한스럽다. 옛 고구려(그리고 발해) 땅을 포함하면 한국 국토는 5~6배는 더 큰 동북아의 강국이 되었을 터인데……. 5시간 동안 좁은 택시 속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자니 오금이 저린다. 밤11시가 넘어서야 목적지 양로원에 도착한다. 허허벌판에 차라도 고장 났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하니 아찔한 생각이 든다. 무사히 도착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택시비 1,000위안에 200위안을 더 보테 주고, 서둘러 늦은 저녁을 하고, 잠을 청했다. 창가에는 뒷산에서 내려오는 서늘한 산들바람이, 에어컨 바람과 비교할 수 없이 시원하다. 8월 초의 서울은 무덥고 밤에는 열대야의 날씨에 에어컨이 필요하지만, 목단강시의 날씨는 낯에는 서울과 비슷하나 밤은 가을 같은 싸늘한 찬바람에 스산함을 느끼게 한다.

 

다음날 양로원에서 한식으로 아침을 하고, 50km 떨어진 산시(山市)전(읍)의 양로원에서 간략히 진료했다.(산시 진료를 가기 위해서 원장 차와 한 대의 택시가 준비되었는데, 떠나려고 하는데 김 원장의 Pick-Up차가 앞 타이어가 바람이 빠져서 타이어를 빼서 택시로 시내에 나가서 수리를 하여 가지고 와서 가다가 해림시에서 종교를 담당하는 조선족 강주임을 태워서 함께 갔다. 이 종교 주임은 김 원장과 관계가 좋아서 감원장이 하는 기독교 선교 일을 보호해주는 특별한 관계에 있었는데 교육, 사회봉사에 언제나 이 강주임을 내세워서 주선하게 하고 일하고 있었다.) 

        

 


몇 사람을 치료하고 환자를 데리러 나오니 한 사람도 없다. 내가 중국인 양로원 원장에게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고 물으니 다 갔다고 하면서, 지금 읍(전)정부 영도자들이 식당에서 기다린다고 하면서 식사하러 가자고 하여 황당했다. 
(에피소드 : 원래 산시 읍 진료는 이곳 양로원 노인들을 중심으로 촌민 40여명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우리가 이 환자를 다 치료하고 나면 점심을 우리와 함께 먹을 시간이 맞지를 않으니까 몇 사람 치료하는 동안 촌민들은 다 돌려보내었고, 양로원 노인들은 다 방으로 들어가 있게 하고는 다 갔다고 치료하는 일을 끝내게 하는 웃기는 일이 생겼다.) 이곳 정부 지도자들은 인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편한 데로 움직이고 있다는 한  면을 또 보게 해 주었다.

우리를 초청한 김제화원장님은 산시중학교에 들러 키보드 한대를 선물하고, 김좌진 장군의 생가이며 서거하신 장소인 금성 정미소를 들러보았다. 김좌진 장군을 한족들도 많이 존경하였지만, 그 당시 집권층은 일제와 결탁하여 많은 괴로움을 드렸단다. 그리고 동족의 흉탄에 비명에 돌아가셨다니 슬프고 슬픈 일이다.

        

 

 

산시 면 정부에서 마련한 식당에서 간부들과 점심 식사를 나누고 우리는 강주임과 함께 60Km를 달려서 그 옛날 대조영 장군이 동북을 장악하고 다스리던 발해의 세 번째 수도였던 발해 읍에 있는 발해왕궁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다음날 (우리는300Km 떨어진 해림(海林) 시 차이허(柴河) 읍에 있는 교회에서 80여 명을 진료하고 교회에서 마련한 점심식

사는 이 교회에 나오는 조선족이 하고 있는 식당에서 즐거운 교제들을 나누면서 들었다. 그리고 또 깊은 산골로 40Km를 달려서 알잔(二站, 이참) 촌에 도착하여 그곳 교회에서 70여 명을 진료하는 강행군을 하였다. 이틀간 뽑은 이는 모두 165개였다). 150여 명을 진료하였다. 진료라 해 봤자, 발치(이 뽑기)가 대부분이고, 상담이 고작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상당히 고마운 일인가 보다. 두세 시간도 마다하지 않고 기다리는 그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진료를 하면서 외모는 우리와 비슷하나 말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들 한족들에게 친근감이 생기며, 한편으로는 측은한 생각이 든다. 점심 후 20~30Km를 더 가서 또 다른 교회에서 120여명을 진료하였다. 70년 초 군의관 시절, 고국에서 무의촌 진료하던 일이 떠오른다. 이곳은 헐벗고 굶주린 시골 풍경은 아니다. 이곳은 경작지가 넓어선지, 농산물이 무척 싸다. 쌀 20Kg에 한화 10,000(16000) 원 정도이고, 수박은 작은 것이 260원이면 살 수 있다. 그러니 먹을 것은 풍부하여, 거의 모두가 건강하게 보이나, 거의 모든 마을이 무의촌 마을이다. 몸이 많이 아파서 진료받으려 도시로 나가려면, 2~3시간 걸린다. 더 큰 병원은 하얼빈 같이 먼 곳으로 가야 하는데 돈 때문에 엄두도 못 낸 단다. 충치 같은 것은 읍내에 가면 치료를 쉽게 받을 수 있는데도 무관심하여 root rest가 되어 저절로 빠질 때까지 방치하는 것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통상 관례이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치료 중이라는 사람을 한 사람 보았으나, pulp를 open 하여 cotton으로 막아 놓았다. 치료 중이니 그것도 건드리지 말란다. 보철한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치과의사라고는 대도시에 나와야 치과의사를 만날 수 있고, 그나마 작은 도시에는 치과에 종사하던 보조원이 치과의사 흉내를 내고 있단다.(중국은 정규의대, 치대도 있지만 고등학교 과정인 위생학교(간호과, 치고. 의사, 등)가 있어서 기초 의료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양성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오래 하면 노하우가 생겨서 잘하기도 하고 저질의 의료가 되기도 하지요. 사회주의는 고도로 훈련된 의료진도 필요하지만 우선은 누구든지 의료혜택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일차 진료 차원의 의료진들을 많이 양성해서 그 넓은 중국에 무의촌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나라에서는 사회의 특권층이나, 부를 누리는 소수 계층이 없도록 한 사회제도는 좋은 점도 많이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치료받은 사람들에게 항생제와  칫솔을 나누어 주며 충치 예방을 권해 보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으려는지 의심스럽다.

 

다음 날 목단강시를 관광했다. 넓은(강변) 공원에는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던 여인 전사인 여덟 여전사의 “팔녀투강, 八女投江”이란 탑을 공원 입구에 커다랗게 만들어 놓았다. 일제 총부리에 끝까지 항복을 않고, 헤이룽 강 강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에 눈시울이 젖어온다. 팔녀전사 중 나이 어린 조선족 여인이 2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점심 후 하얼빈시로 기차여행이다. 5시간 걸린다. 숙소에 두고 온 이과두주와 설원(중국술 30도)으로 무료함을 달래려 준비하였으나, 떠나오면서 못 가져와 아쉽다. 어쩔 수 없이 캔 맥주 몇 개로 대신하고 잠을 청해 본다. 5시간이 지나 하얼빈에 도착하니 어두워졌다. 호텔에 들르니 3층 11개 방을 조선족이 빌려, 한국인들 상대로 영업한다. 아침에는 간단한 한식을 곁들이니, 불편한 줄 모르겠다. 중국은 우리와 한 시간 시차가 있다. 중국 동쪽 끝 훈춘에서 서쪽 끝 신강까지 표준시간은 북경시간이다. 그러니, 북경은 아침 9시면, 훈춘이 아침 10시경이고, 신강은 새벽 6시 정도 이건만, 모두 9시로 통일된 북경 시간을 쓴다.

 

中央大街 라는 러시아 풍 거리를 거니니, 마치 유럽에 온 것 같다. 가로변의 유럽풍의 건물들과 바닥의 모자이크 돌로 포장되었고, 차 없는 거리를 만들어 하얼빈의 명물 시가지이다. 유명하다는 보이차를 사고, 돋보기를 샀다. 안경은 거짓말처럼 싸다. 휴대용 돋보기 비슷한 일제는 15만원 정도 하는 것이, 고작 만 원 정도이다.

 

         

 

수량이 줄어든 송화강을 둘러보고, 간략한 점심을 마치고 공항을 향한다. 공항에 안내인이 없으니 바쁘기만 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우왕좌왕이다. 도대체 한국말도 안 통하지만, 영어도 안 통한다. 국제공항 이라며 영어 표시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고도 관광대국을 꿈꾸고 있다니 한심하다.            

          

 

           

 

             

 

닷새 만에 모국에 도착하니 답답하던 가슴이 확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모국이 좋은가 보다. 그런대 물가가 너무 비싸다. 이번 여행에 기획과 자금을 댄 최종기 원장에 감사를 드린다. 우리를 초청한 김제화 원장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1941년생이니 67세이시고, 출생지는 이곳 중국 목단강이다. 캐나다 시민권을 갖고 있으시며, 캐나다에서 13년 전, 하나 있는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고향인 이곳으로 와서, 국경을 넘어선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참다운 신앙인이시다. 아들을 잃고 받은 보상금으로 선교 사업을 하다 보니, 이제는 자금의 바닥이 보이나 보다. 이제 은퇴연금이 나오면 선교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목단강 주위에 여러 교회를 설립하느라 김제화 원장님의 자금이 상당히 많이 들어갔나 보다. 존경스럽게 사시는 분이 있어 세상은 더욱 밝아질 것이다. 
2008.9.15.(쓴날)

손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