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선교 여행기

몽골의 기독교 선교 역사

몽골 기독교 선교 역사

몽골 초원이 아직 통일된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부족이 흩어져 살면서 다투고 있던 그때 이 몽골 초원을 찾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다. 6세기경 러시아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러시아 영내 남쪽에 사는 몽골 계통의 토르구트(칼묵)와 부랴트 소수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으로 전해진다.

 

♣ 토르구트(Torgut) 부족

토르구트 부족은 원래 몽골 서부 지역을 지배하든 큰 부족 오이라트 지방의 일부였다. 오이라트(Oirat) 부족은 몽골의 서부 후브스굴 호 지역의 강한 세력으로 그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부족의 이름,“오이라트”는‘숲의 사람들’이란 뜻으로 그들이 살던 서북 몽골은 주로 초원 삼림 지대였다. 칭기즈 칸의 집권 시절 세력이 가장 강했던 오이라트의 수령 쿠투카 이가 칭기즈 칸에게 귀순하여 그의 측근이 되어 원나라 권력의 일부가 되었다. 토르구트 부족은 1628년경 살고 있던 일리(지금 준가르 분지)를 떠나 러시아 볼가강 변에 이주하여 살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남은 사람’을 의미하는 투르크어 ‘칼묵(Kalmark)’으로도 불려왔다. 러시아의 압박과 수탈이 심해지자 그들은 조상의 땅 일리로 돌아가기로 한다. 볼가강이 얼지 않아서 강 서쪽에 다수의 부족민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 떠날 때 17만여 명이었던 부족민은 이동의 과정에서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전사하여 일리에 도착했을 때는 고작 출발했을 때 인원의 절반만이 살아남아있었다. 1771년 1월 5일(건륭황제 36년) 볼가강 변을 떠나 7개월 만에 온갖 수모와 희생을 치르면서 150여 년 만에 조상의 땅, 일리로 돌아왔다. 그들이 돌아올 때 모라비안 선교사들에게서 받은 복음도 일부의 믿는 자들이 가지고 왔으리라 믿는다.

 

♣ 부랴트(Bryatia) 민족

부랴트 민족은 지금 바이칼 호수 남쪽에 자리 잡은 인구 백만이 못 되는 부랴트 공화국에 많이 살고 있다. 원래 몽골어계 유목민으로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의 일원이었다. 지금도 유목 생활이나 게르 생활 등의 풍습을 가지고 있다. 부랴트 공화국은 러시아 민족과 부랴트 민족이 혼합된 나라로 그들의 국기에 몽골의 상징도 들어 있다. 지금 부랴트 공화국에 436,000명으로 공화국 전 인구의 1/4을 차지하고 있고, 러시아에 400,000명, 몽골과 중국에 71,000명의 큰 민족이다. 부랴트 사람들이 여기 살기 이전에 부여 사람들이 바이칼 지역에 와서 정착하여 살아서 브랴트와 혼혈이 되었다고 전해져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부랴트인들의 외모가 한국인과 비슷하고, 유전자가 한국인과 매우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몽골 초원의 경교 선교

또 같은 6세기에 네스토리우스파 상인들과 선교사가 실크로드를 따라 당나라의 서울 장안에 도착하여 황제의 환영을 받으며 선교의 꽃을 피우다가, 10세기 당나라 말 도교를 숭상하는 황제의 박해와 뒤에 일어난 송나라의 배척을 피하여 몽골 초원으로 흘러들어와 선교하는 동안 여러 부족이 기독교화되는 과정을 거쳐서 몽골 제국을 이룬 칭기즈 칸 호의로 경교는 원 제국으로 이어지며 선교의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경교(景敎, Nestorian)

글자만 보면 중국의 종교 같은 느낌을 받는데, 서양에서는 Nestorian이라고 부르는 기독교의 한 분파다. 이 네스토리우스 파 기독교가 중국에서 “경교(景敎)”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렸고, 또 페르시아 교회라는 뜻인 “파사사(波斯寺)”라고도 불렀다. 경교라는 이름은 중국어로 “빛의 신앙”이라는 뜻이 있으며, 당나라 현종(玄宗) 때에는 경교의 교회당을 대진사(大秦寺)라 했다. 경교는 중국 선교를 하면서 중국문화에 너무 집착하여 마치 불교의 한 파 같이 보였다고 한다.

 

네스토리우스파의 유래

네스토리우스 파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있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에 의해서 생겨난 기독교의 한 분파로 시리안(페르시아)계 기독교로 동방 교라고 부른다. 물론 그리스 동방정교회와는 다르다. 네스토리우스는 촉망받는 신학자였다. 로마 가톨릭이 이 교화된 뒤에 소 아세아 종교의 아데미 여신 같이 마리아의 위격을 높여 여 신화하는 과정에서 신학적인 큰 다툼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 옳으냐 아니냐 하는 호칭 문제의 토론 중심에 네스토리우스가 있었다. 이교 화 된 가톨릭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낳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대세였지만, 네스토리우스는 반대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위격은 하나가 아니며, 신격과 인격이라는 두 개의 성격으로 구별해야 한다고 보았다(이성설二性說). 이것은 구세주(그리스도)의 신격은 예수의 복음서에 깃들고 인격은 사라진 육신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인성으로써 예수를 낳은 성모 마리아에게는 “하나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Θεοτοκος)”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마리아의 호칭 문제에 대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이 옳다. 그러나 그리스도의(단성론) 신성을 반대하고,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은 인간의 아들, 예수의 인성만 강조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아서, 결국 413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리비아로 추방당했다. 그러나 추방 뒤에도 네스토리우스는 많은 추종자를 얻었으며, 여러 세기 동안 번성하였고 특히 선교에 열성적이었다. 지금도 그들은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다.

 

경교의 당나라 선교

동방으로 퍼져나가든 578년 경교 상인들이 서방과의 활발한 교역의 Silk Road(비단길)를 따라 상품과 함께 복음을 가지고 당나라 서울 장안(지금 서안)에 들어오게 된다. 경교 상인들에 의하여 복음이 전해지자 635년 경교 수도사 Alophen(아라본, 阿羅本) 이 국제적 색채가 짙은 장안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듬해 알로펜은 당 태종의 환영을 받는다. 황제 자신이 성경을 연구하면서 알로펜에게 선교 활동을 하도록 허락한다. 그들은 주요 도시에 약 50개의 교회당을 세우면서 선교 지역을 넓혀가게 된다. 그렇게 4세기가 지나 당나라 말엽에 와서 도교의 영향을 받은 황제들이 도교를 숭상하면서 외래 종교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중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경교도 아울러 심하게 박해를 받았다. 845년 황제의 명령으로 외래 종교의 교회당, 사원 등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고 선교 활동도 금지되었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불교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경교는 그렇지 못하였다. 907년 당나라가 망하고 960년에 일어난 송(宋)나라에 의하여 경교는 더 심한 탄압으로 환난을 피해 경교의 그리스도인들은 북쪽 지방 몽골로 들어가 살면서 여러 부족 가운데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두 세기가 지나면서 몽골 초원의 세력 집단인 북 중앙부의 케레이트족, 서부 알타이산맥의 동서에 걸쳐 있던 나이만족, 그리고 남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웅구트족 들이 경교를 부족의 종교로 삼았다. 그로 인해서 종교가 같은 세 부족은 서로 통혼하면서 한 집안 같은 가까운 인척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 케레이트(Kerate) 부족

케레이트 부족은 테무친 가문의 인척으로 1206년 몽골 제국이 성립되어 칭기즈 칸(황제)으로 즉위하자 정치적으로 유력한 부족이 되었다. 칭기즈 칸은 그의 아들들을 기독교 여성들과 결혼시켰다. 셋째 오고타이는 케리이트 족의 토레게나(Toregena)와 넷째 톨루이는 케라이트족 공주 소르칵타니 베키(Sorqoqtani-Beki)와 결혼했다. 칭기즈 칸 사후 임시 대칸(1227-1229)을 지낸 막내 톨루이와 왕후는 몽케, 훌레구,쿠빌라이, 아릭부케의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황제가 된다. 몽케는 몽골 제국의 제4대 대칸(황제)으로, 훌레구는 이란에서 일칸국을 세워 황제가 되었으며, 쿠빌라이는 중원을 통일하여 원(元) 나라를 세워 첫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아릭 부케는 몽케를 이어 몽골의 대칸이 되었다. 칭기즈칸의 손자 손녀들에게도 기독교 신앙을 교육받도록 하였다.

♣ 나이만족(Naiman) 은 몽골 서부의 강자로 유목 튀르크계 부족이었으나 1203년 테무친에게 패하여 몽골에 흡수당했다.

♣ 칭기즈 칸의 셋째 딸 알라카 베키는 문무를 겸비했던 공주로 만리장성 일대의 웅구트 족과 결혼했다

 

경교 선교의 종말

칭기즈 칸의 호의로 경교 수도사들도 중요한 직위에 오르면서 경교는 몽골과 원 제국으로 이어지면서 번성하여 선교의 꽃을 활짝 피웠다. 그러나 원 제국의 멸망과 함께 경교는 중원에서 사라지게 된다. 원제국을 멸망시킨 한족 중심의 명 제국은 경교가 몽골의 종교라고 배척하여 살아남지 못하였다. 원 제국이 무너진 뒤 몽골 초원은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15세기 후 반에 라마 불교가 몽골 초원에 들어옴으로 1921년 공산화 이전까지 450여 년간 라마 불교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현대 몽골 선교

1990년 12월 14일 평화적인 방법으로 무혈 민주화 혁명으로 사회주의는 무너지고 자유민주주의 나라가 되었다. 세계를 향한 개방 정책으로 선교의 문도 다시 열리면서 억눌리고 움츠리고 있던 몽골 기독교는 기지개를 켜게 되었다. 몽골에서 선교와 구제 활동을 하는 비영리단체(NGO, NPO)의 80% 이상이 기독교 단체들이다.

개방 뒤 현대 몽골 선교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1). 초창기(1991년~1995년)

혁명으로 정치 체제는 민주화되었지만,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되어 있던 정치 지도자들이 정권을 잡으므로 사회가 유연하고 자유롭지 못하였다. 개방되자 선교사들이 들어왔지만, 정치적으로 사회가 아직 안정되지 못하여 어려움이 많았다. 몽골 한인 선교회의 통계에 따르면, 초기 5년 동안에 51개의 교회가 세워졌으며, 3,600여 명의 기독교인이 생겨났다고 한다. 몽골의 서울 울란바토르와 제2의 도시 다르항, 그리고 제3의 도시 에르트네트를 중심으로 도시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다.

91년 몽골 성서 공회가 세워졌고, 95년에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현지인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연합신학교를 세웠다. 1993년 국가와 종교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종교법이 발포되어 1994년부터 교회를 국가에 등록하도록 했다.

 

2). 발전기(1996년~2000년)

1996년 의회 선거에서 민주연합이 인민혁명당을 물리치고 승리함으로 더 많은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게 되었다. 1996년 미국의 선교사들이 세운 이글 텔레비전이 개국하였으며, 몽골 성서 공회에서 신약성경을 몽골어로 출판을 하였다. 사회, 경제적으로 많이 발전하게 되었으며, 한국 선교사들도 많이 들어와서 몽골 선교가 좀 더 활성화되었다. 2000년 여름에 신구약 성경이 몽골어로 출판되었다. 2000년 5월 한인 선교사 협의회에서 발행한 ‘몽골 선교 현황자료집’에는 당시 132개 교회, 12,373명의 기독교인이 있는 것으로 조사 발표되었다.

 

3). 몽골 지도력 성숙기(2001~ 현재)

1995년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세운 연합신학교 졸업생들이 배출되고,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지도자들이 몽골교회의 주축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99년 몽골의 현지인 지도자들이 연합하여서 몽골 복음주의협회(MEE)를 세웠다.

김제화

jewhakim@daum.net

 

'선교 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기독교 선교학교  (0) 2016.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