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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여행기/월남선교

2. 베트남 선교

 메콩 강 관광  9. 7 토  맑음/잠깐 소낙비
오늘은 메콩 강 관광하는 날이다. Mytho city로 가서 강가에 이르니 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 열 명을 태울 배를 52만 동(52000)에 계약했다. 여기는 개인적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모두 장악하고 있었고 안내원들도 영어는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훈련받은 자들이었다. 이 배는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Thoison Island에 내려 구경하고 섬 반대편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코스였다. 

 

 

메콩 강은 황토색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내린 비로 많은 물이 세차게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배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야자열매를 둔탁한 칼로 윗부분을 쳐서 한통씩 주었다. 메콩 강 한가운데를 달리는 배 위에서 신선한 야자를 통째로 들고 마시는 이 풍경은 남쪽 나라에서나 느껴보는 것이다. 신선한 야자 물은 갈증과 함께 더위에 지친 몸의 열기를 식혀 주는 듯하였다. 한 30분 올라가서 한 섬에 닿았다. 이 섬이 Thoison Island이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고무보트를 타고 정글 숲 속으로 나 있는 물길을 따라 올라갔다. 이 고무보트들은 미군이 베트콩들을 잡으려고 이 숲들에서 쓰던 것들이 이제는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물길은 가다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정글 속의 물길은 그리 깊지 않고 검은 진흙 펄로 되어 있었다.                              

 

 

각종 나무와 풀들이 좁은 물길을 덮고 있었다. 나는 고무보트를 타고 가면서 미군들이 이 배를 타고 베트콩들을 잡으려고 이 숲 속을 헤매고 다니던 그들을 떠 올렸다. 베트콩들이 입에 갈대를 물고 물속에 누워 있다가 보트를 기습하거나, 나무숲에서 수류탄을 던져서 미군들을 희생시켰다. 정글 속의 물길을 보니 양키들은 결코 베트콩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은 결코 이길 수 없는 무모한 전쟁을 했다. 얼마를 올라가 우리는 내려서 이제부터 걸어서 섬을 가로질러 가는 코스가 시작되었다. 안내자는 베트남어로 하고 신 목사 딸이 통역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개인적으로 영어로 몇 가지를 물으니 그는 나에게 영어로 안내를 할 테니 통역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목사 딸은 여기서 교육 대학에 다니고는 있지만 아직 회화가 그리 능숙한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사양했다. 가이드는 그러면 이 섬을 통과할 때까지만 해 보란다. 또 사양했는데 모두 하라고 밀어서 하기로 했다. 길가에는 2m 정도 바로 머리를 지나는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고 안내자는 가끔 뱀들이 나무 위에서 쉬다가 밑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한다고 나무 위를 살펴보면서 걸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남국의 꽃들이 핀 숲을 얼마를 걸어오니 휴식처가 나왔다. 이곳에서 남국의 각종 열매들을 마음대로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값은 계약금에 다 포함되어 있어서 마음 놓고 먹기만 하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에 자연의 풍성함을 주셨다. 인간들이 일으킨 탐욕의 전쟁으로 이 아름다운 자연이 오랜 세월 동안 지옥 세상을 만들었으니 불행한 일이었다. 인간의 본성은 정말 악 그 자체였다. 넘치는 과일은 달라는 대로 깎고 썰어서 접시에 담아 나오곤 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 남국의 오색 꽃들이 피어 있는 오솔길을 따라가는 동안 야자나무로 만든 수공예 품들을 만들어 파는 기념품 가게에서 부엌 용품(주걱, 등)들을 몇 개 샀다.

                         

 

작은 개울 다리를 건너니 한 가게 옆에 큰 나무에 큰 구렁이를 걸어 놓고 지나가는 사라들은 누구든지 만져보고 목에 걸도록 해 보라고 놔둔 것이었다. 나는 평생 처음 그 큰 구렁이를 만져 보는 것도 처음이지만 목에 걸고 사진도 찍으며 즐겼다. 내가 우리 팀에게 구렁이 뱀을 만져 보라고 권하는데 모두 겁을 내고 있었다. 한 젊은 목사가 용기를 내어 목에 걸어보고 싶다고 하여 내 목에서 내려걸어주었다. 보아 구렁이가 한 3m가 넘고 굵어서 무게도 만만치 않았다. 내 목에 걸었던 사진을 찾지 못하여 아쉽다.

 


 
우리는 또 야자열매로 엿을 만드는 공장에 들렸다. 엿 맛은 울릉도 호박엿과 큰 차이는 없지만 향이 달랐다. 몇 개를 샀다. 섬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남국의 자연 풍치를 느낄 만큼 모든 조건을 가진 곳이었고, 야자나무로 만든 수공예 품과 엿 등을 만드는 곳은 우리들의 입맛을 당기게 하고 있었다. 우리는 섬 반대편으로 나오니 메콩 강이 다시 보였다. 물 가운데 자리 잡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도록 되어있었다. 식당 주위에는 푸른 망고가 주렁주렁 달린 망고 숲을 이루고 있었다. 점심에는 메콩 강의 “코끼리 귀”고기 요리를 먹게 된다고 하였다.이고기는 아주 납작하고 큰 고기였다. 기름에 바싹 튀겨서 접시에 세워 두 마리를 내 왔는데 보기도 좋았고 맛도 좋았다. 물론 이 음식 값도 다 계약금에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즐거운 점심을 마치고 선창에 내려가니, 우리가 타고 온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저께 나는 몇몇 분들에게 오늘 메콩 강에서 수영을 하자고 했다. 젊은 두 목사가 목욕을 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분들은 시뻘건 황토물을 보고는 수영의 흥미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수영할 수 있는 모래밭도 없고 수영을 할 만한 환경도 아니어서 으스스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기념으로 수영을 한 번은 해 보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배에서 옷을 벗고 이 회장님께 5분이면 된다고 양해를 얻어서 계단을 내려가서 물에 몸을 담그고 헤엄을 쳐서 배 주위를 따라 한 10여분 헤엄을 치는데 젊은 이 목사가 사진을 찍어 주어서 기념이 되게 해 주었다.

                           

 

강 가득히 흐르는 물결은 워낙 세차서 나는 강 안쪽으로 나가기가 편치 못했는데, 악어도 메콩 강에 있다고 들은 말이 생각이 나서 겁도 나고 해서 나왔다. 우리를 태운 배는 이제 내려가는 물길을 타고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다시 야자열매 한 통씩을 안겨주어 마시면서 메콩 강 유람을 끝내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한차례 소나기가 뿌렸다. 저녁은 신 선교사님 댁에서 한국 식탁을 준비하여 주셔서 하루의 피로를 달래 주었다. 신 선교사는 이층으로 된 집을 세로 살고 있었다. 여기서는 집주인이 침대도 사 준다고 하는데 또 다른 습관이 있는 나라였다.  
 

◑  베트남 침례교회 예배  9. 8. 주일  맑음 


 

아침 주일 예배는 역사가 한 40년 된 베트남 침례교회에 참여했다. 예배 시간은 6:30이었다. 왜 이렇게 일찍 드리느냐고 물었더니 휴일이 따로 없는 이곳 사정은 일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모두 편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일찍 모이게 되었단다. 전국에서 침례교회로서는 유일하게 종교집회 활동 장소 허가를 받은 곳이었다. 

                             

                            

가득히 모인 회중 가운데 주님께서 살아 계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전쟁과 종교 핍박의 소용돌이를 이겨낸 늠름하고 꿋꿋한 믿음의 기상을 느끼게 해 주었다. 한 자매의 아름다운 찬양은 그 가사는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을 감동하고 있었다. 예배 뒤 우리는 한국 침례교 신 선교사님이 인도하는 한인 침례교회로 옮겨왔다. 아직 예배 장소를 정하지 못하여 임시로 식당의 회의실을 빌려서 쓰고 있었다. 정부에 외국인 교회의 허가를 신청해 놓고 있는 가운데 있었다. 예배 시간은 10:30으로 한 20명 이상이 모였고, 이 회장님이 막 8:1-10에서 제자의 도에 대해서 은혜로운 말씀을 하셨다. 예배 후 자체에서 준비한 한국 음식을 나누면서 교제들을 즐겼다. 모텔 사업을 하는 집사님이 많이 헌신을 하시고 계셔서 고마웠다. 베트남 전국에 널려 있는 많은 교회가 가정교회 형태로 허가 없이 모이며 시달리고 있는데 거의 침례교회들이라고 한다. 


 Cuchi(구치) Tunnel   


오후에 우리는 미국의 침략 전쟁으로 남겨진 Vietcong 혁명의 상징적인 유적지 Cuchi Tunnel을 보러 갔다. Cuchi Tunnel은 사이공 북서쪽 70Km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국해방을 위해 미 제국주의와 투쟁에서 승리한 역사적 유적지라고 한다. 

                         

 

원래 이곳은 우거진 자연 정글로 농민들이 살고 있었다. 베트콩들이 사이공을 압박하면서 이곳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미군이 이곳을 수색하면서 베트콩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자 농민들이 들고일어나 미군에게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로부터 지하 터널이 파지기 시작하였는데 총길이는 200km가 넘으며 베트남 사람들의 체질에 맞는 좁은 통로는 동서로 뻗어 있고, 땅 밑으로는 3층까지 내려갔으며 출구는 여기저기 수도 없이 많으나 숨겨져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 미군이 이 출구를 찾았다고 해도 몸이 큰 미국 사람 그리고 군 장비를 매고 이 터널을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미군이 수색할 때 앞에 베트콩을 보고 좇아가면 갑자기 뒤에서 총알이 날아와서 미군을 죽이 곤 했다. 지하에 사방으로 뚫린 통로는 이동을 빠르게 하고 사방에 설치된 통로로 신출귀몰하게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면서 수색하는 미군들을 많이 죽였는데, 누가 더 미군을 많이 죽이는지를 경쟁적으로 했다고 한다. 미군은 이곳을 초토화시키고자 고엽제를 뿌려서 자연 정글이 사라져 버렸다. 지하 동굴을 무너지게 하기 위하여 강력한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이층까지는 부서지기는 해도 지하 삼층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군이 사이공을 압박하는 이곳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패배의 잔을 마셔야만 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숲은 다시 자라 전에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안내자의 설명과 함께 그 터널을 따라 들어가서 무릎을 펴지 못한 채로 엉금엉금 기어서 몇 곳을 다녀 보니 오금과 다리가 대단히 힘들었다. 관광객을 위하여 원래의 동굴을 조금 넓게 팠다는데도 이렇게 힘든데 미국 사람은 근본적으로 들어가서 활동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몸체가 작은 베트남 사람들만이 활동이 가능한 터널이었다. 미군이 이 터널을 정복하고자 노력했지만 희생만 치른 채 실패하였다. 결코 이길 수 없는 곳이었다.

미국이 버리고 간 전쟁무기 잔해들이 여기저기 모아져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지더니 금방 개였다. 저녁은 중국식 뷔페식당에서 요엘교회, 떤협, 스위제 교회 목회자 세 부부를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면서 교제를 하였다. 떤협은 변소 지을 200불을 주었고 또 각 목사님들에게 사역 후원금으로 200불씩을 선물했다. 마침 중국 사람이 하는 식당이라 웨이터들과 중국말을 좀 할 수가 있어서 재미있었다.  
 

 

전쟁박물관 9. 9. 월 맑음 
오늘은 월남을 떠나 다음 방문지인 캄보디아로 가는 날이다. 오전에 일행은 전쟁 박물관에 갔다. 미군들이 버리고 간 헬리콥터, 탱크, 고사포, 그리고 각종 무기들을 마당가득이 전시해 놓았다. 이 고도화된 무기들 앞에서 맨발로 소총을 들고 싸우는 베트콩을 이길 수가 없었다니 그저 놀랄 뿐이다. 연합군이 베트남 전역에서 베트남 사람들에게 저지른 만행들이 사진들로 전시되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한국군들이 저지른 일들은 보이지 않아서 궁금해졌다. 전쟁의 소용돌이는 베트남을 벌거벗은 나라로 만들었다. 전쟁은 그 자체가 잔인한 것이며 악이었다. 이상하게도 미국이 돕거나 참전하는 공산 국가에서는 한 번도 승리한 적은 없었다. 중국 대륙이 그러했고 한 반도가 그렇고 월남이 그랬다. 월남에서 미국의 패배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미 제국주의자들의 패배를 뜻했으며, 적화통일을 꿈꾸는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크게 고무되는 일이었다.

           

공항에 온 우리는 들어올 때 맡긴 안경을 찾으려고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막상 찾을 수 있는 곳에 오자 11:30 점심시간이 되어 담당자가 없어서 날틀 시간 때문에 찾을 수가 없었다. 사회주의 베트남은 11:30이 점심시간이다. 결국 안경을 찾아서 신 선교사에게 주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서 아쉬웠다. 보관 표를 신 선교사에게 주고 헤어지기 섭섭해하는 그 가족을 뒤로하고 우리는 캄보디아로 가는 날틀에 올랐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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