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do-China 반도의 선교여행 9. 5-14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는 나라들은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 캄보디아, 타이랜드의 다섯 나라들로 모두 연이어져 있는 나라들이다. 이 나라들 가운데 Vietnam, Cambodia, Thailand 세 나라를 단기 선교 팀과 가 볼 수 있게 된 것은 큰 축복이었다.
이 여행은 나에게 예정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중국에서 일하면서 Indo-China 반도에 있는 나라들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언제나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지도를 볼 때마다 언젠가 이 나라들을 한번 가보아야 할 텐데 하는 아쉬움 가득한 마음으로 지내왔다. 주님은 이 부족한 사람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려고 좋은 기회를 허락해 주셨다. Canada에 사는 손녀, 손자(주희와 하영이)가 돌아가는 길에 우리들은 그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나왔다. 그때 나는 은퇴를 하시고 선교에 열중하시는 존경하는 선배에게 안부 전화를 드렸더니 앞에서 말한 세 나라에 단기 선교 여행을 간다기에 따라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음의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게 되어서 기뻤고,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이 이렇게 시간을 맞도록 해주셔서 너무 고마웠다. 여행 일정은 9월 5일-14일 이다.여행비용은 총 131만 원으로선교지에 도와줄 조그마한 돈도 들어 있었다. 내게는 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얻게 될 영적 경험이 더 크리라 생각했다.
◈ 베트남(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국기의 빨간 색은 혁명의 피와 조국의 정신을, 별의 다섯 모서리는 노동자, 농민, 지식인, 청년, 군인의 단결을 나타낸다. 사회주의 나라에서 쓰는 발간 색과 별은 거의 같은 뜻을 가진 상징으로 설명한다.
나라 크기 : 326956㎢
인구 : 9,646만(2019) 수도 : 하노이(Hanoi)
말과 글베트남어 종족 : 베트남, 다수의 소수, 화교, 등
돈 : Dong(D)
종교 : 불교, 천주교, 기독교
1954. 5. 7. 프랑스로부터 독립
▶ 역사
베트남의 역사는 BC 200년 무렵 베트남어를 쓰는 민족 언어 집단이 남베트(NamViet, 南越)라는 독립왕국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이 왕국은 한동안 베트남 북동부와 중국 남부를 지배했으나 BC 111년 중국의 전한(前漢)에 점령되어 1000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역사과정을 지나다가16세기에 왕조 분열을 틈타 후에(Fue, 당시 수도) 지역의 유지였던 응우엔 가(家) 구엔푹안[阮福映]]씨가 프랑스 세력을 등에 업고 1802년 베트남을 다시 통일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자롱 황제이다. 왕조 성립에 관여했던 프랑스는 1874년 베트남에 군대를 상륙시켰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받게 된다. 응우엔 왕조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 명맥으로 이어왔다. 그러나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한 뒤 식민통치 세력이 사라지고 민중의 근대의식이 자라면서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드디어 1945년 8월 베트남이 독립을 하자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는 왕권의 상징인 황금보검을 베트남 독립동맹인 베트민에게 넘겨주므로 서 143년의 왕조를 마치게 된다.
1941년 일본군의 베트남 진주를 기회로 호찌민[胡志明]이 지도하는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이 결성되면서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45년 일본군이 퇴각함과 동시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공산주의자 및 민족주의자들이 호찌민의 지휘 아래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칠 년 동안 프랑스는 독립을 반대하였고 호찌민이 프랑스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제1 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남이 승리하면서 끝났다. 같은 해 7월 21일에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를 경계로 소련이 지원하는 북부와 미국이 지원하는 남부로 나누어졌다.
메콩 강과 홍하 - 베트남은 두 개의 큰 강으로 형성된 두 개의 큰 도시, 즉 메콩 강 하류 메콩 델타(Mekong Delta)에 있는 호찌민시(사이공)와 북부 홍하 델타(RedRiver Delta)에 있는 하노이(Hanoi)로 이뤄진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북베트남의 게릴라 활동과 연계된 남베트남 내 친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에 미국이 개입하게 됨으로써 제2 차 인도차이나 전쟁 곧 베트남 전쟁(1955-75)이 일어났다. 미국은 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65년 북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이래 75년 4월 공산군에 의해 사이공이 함락될 때까지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하였다. 69년 파리평화회담, 73년 베트남 평화협정의 체결을 거쳐 미국은 철군을 시작했으나 전투는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75년 3월 북베트남의 대대적인 공세에 남베트남은 그 해 4월 무조건 항복하였다. 1976년 4월 총선거를 실시한 뒤 남북이 통합하여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을 성립하였다.
▶베트남의 개방
베트남은 1989년의 개방정책 도이모이(DoiMoi, 쇄신) 이후 외국 자본 유치를 통해 개방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종교정책은 중국과 같아서 정부에서 허가제로 엄중하게 단속하고 있다. 중국과 같이 정부에 종교 국을 두어 모든 종교를 관할하고 있었다. 천주교와 불교는 그 역사성 때문에 유연한 것 같고, 정부의 허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복음주의 기독교(침례교, 등)는 중국보다도 더 탄압을 받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나는 월남에서 인상 깊었던 젊은 여성들이 입는 “아오자이” 옷과 맛있는 쌀국수 “포”를 소개하고 않을 수 없는데, 사실 이것들은 베트남의 특징인 2대 명물이기 때문이다.
▶ “아오자이”
아오자이가 베트남의 대표적 전통 의상으로 알려져 지게 된 것은 1802년, 국가 이름이 베트남으로 바뀌는 때에 한 화가가 중국 여성이 입는 “치파오”를 참고하여 무더운 베트남 지역의 환경 특성에 맞게 디자인한 옷이 아오자이이다. 치파오나 아오자이 모두 여성의 몸매의 윤곽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아오자이는 바지를 입음으로써 활동성이 있게 했다. 흰색은 시각적으로 가볍고 시원한 느낌을 주며 옆구리 부분에 바람이 통하도록 처리하여 무더운 기후에 적응하기 쉽게 했다. 베트남어로 “아오”는 옷, “자이”는 길다, 라는 뜻으로 어깨에서 발목까지 이르는 긴 옷이다. 키는 크지 않지만 몸매가 서양형인 베트남 여성들의 이 옷을 입으면 늘씬함이 강조되기도 한다. 아오자이를 통해서 여성들의 생태를 파악할 수도 있다. 아오자이 한쪽을 남자에게 깔고 앉게 하면 사랑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미혼 여성은 아오자이 안에 흰 바지를, 기혼여성은 감은 색 바지를 입는다.
▶ “포”
쌀국수 “포”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우리가 머무는 호텔에서는 매일 아침은 뷔페식인데 거기에 포인 쌀국수가 언제나 있었다. 나는 처음 먹어보게 되었는데 맛이 좋아서 매일 꿰미를 바꾸어 가면서 즐겼다. 베트남 음식과 포의 유래를 소개해 본다. 베트남 음식의 결정판은 “포”이다. “포”가 시작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프랑스 군인들이 고기만 먹고 뼈를 버리는 것을 보고 베트남 요리사가 그 뼈를 우려낸 국물에 향이 강한 소스를 넣고 쌀국수를 말아먹은 것이 첫 시작이라고 한다. 이후 찰기가 약한 안남미(安南米)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이 되어 나라 전역으로 퍼지면서 여러 가지 포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쌀국수로는 소고기, 닭고기, 해물을 덮은 “포보”가 있다.
베트남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깊고 둥근 프라이팬(중국말로 마샤오)을 사용하여 튀김을 만들지만, 재료는 고기보다 야채를 많이 쓴다. 육류의 경우 살코기 위주이며 중국 음식보다 비교적 담백하다. 여기에 야채와 과일로 국물 반찬을 만들고, 쌀로 밥이나 국수를 만들어 먹는 것이 베트남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 여러 가지 과일로 향이 강한 소스를 만들어 먹는데, 즐겨먹는 향신 채 중에는 코리앤더와 바질이 있는데, Coriander는 기름기가 많은 음식에 담백하면서도 매콤한 맛을 더하고 바질은 강하고 상쾌한 향을 낸다. 그런데 이들의 향이 몸에 배면 그것이 땀에 석여 나오면서 벌레들이 가까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
▶ Coriander는 무엇인가? 중국 말로는 향채(쌍차이, 香菜),한국어는 고수, 영어는 Coriander이다.
한국의 경상도 지역과 절의 스님들이 먹기는 한다. 그런데 이 나물이 건강에는 참 좋은 향신료이기는 한데 빈대 냄새가 나서 익숙지 않은 한국 사람들은 기겁을 하는 풀이다. 우리도 중국에서 18년 동안 살면서, 일 년 반이나 지나서야 익숙해졌다. (나는 월남 국수를 먹을 때에는 이 향채를 달라고 해서 함께 먹는다.) 미나리처럼 생겼으나, 향이 굉장히 강하고, 중국에서는 국과 모든 요리에 필수적으로 함께 먹는 향신료이다. 약용 효과도 있는데, 식욕을 돋우며, 해독효과가 있고, 입 냄새를 없애고, 위장을 튼튼하게 하며, 소화를 돕는 작용도 한다고 한방에서 말한다.
▶ 베트남 사람 이해하기
베트남 사람들은 옛날부터 ‘먼저 예절을 익히고 그 후에 학문을 하라(先学礼後学文)’는 덕목을 익히고 살아와서, 예절과 학문을 중요시하며, 스승과 어른을 존중한다. 농경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어 한국과 유사한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던 데서 비롯한 서양 문화가 자리 잡아 동·서양의 문화가 함께 있다. 남아선호 사상이 남아있는가 하면 더 오래 전의이어진 여성 숭배 사상도 있어 여성을 존중하고 귀히 여긴다. 이곳에서는 ‘여성의 날’을 매우 성대하게 치른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항상 이 땅에 공존해 왔기 때문에 베트남인은 서로 다른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른 문화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다. 베트남 문화학자들은 베트남인은 근면하고 인내심이 많고, 부지런하면서도 느긋하고 선량하며 창조적인 능력보다는 모방을 잘하고, 예의를 중시하면서도 풍자와 해학적이기도 하며,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모든 환경에 쉽게 적응, 화합하며 낙관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평가한다.(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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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etnam 단기선교 여행 9. 5-9
인도차이나 단기 선교팀은 저녁에 베트남으로 가는 아세아 날틀을 타려고 인천공항에 모였다. 모두 일곱 명으로 남자 목회자 다섯 분(회장님이신 이진선, 서정섭, 이선규, 이명희 그리고 나) 여 전도사 두 분(김옥연, 이미연)이었다. 두 여전도사와 이 회장님을 제외하고는 세 분 목회자들은 모두 처음 만나게 되는 분들이었고, 젊은 두 분은 내 신학교 후배였다. 주님을 섬기시는 귀한 종들과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되어서 마음이 기뻤다. City 여행사에서 나와서 우리를 Executive class에 태워 주려고 노력하다가 안 되어 세 사람만 자리를 얻어 주었다. 서 목사님이 나에게 1등석 자기 자리를 주면서 편하게 앉아가라고 하여서 고마웠다. 우리를 태운 아세아 날틀은 20시에 이륙하여 어둠을 가르며 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1등석에서는 service도 좋고 마실 것과 먹을 것도 많이 주어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넘쳤다. 4시간 날아 드디어 호찌민시 공항에 내렸다. 입국 과정에서 중국 같이 사회주의 냄새가 물씬 나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이 Custom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 회장님이 색안경 한 상자(100개)를 선물 받아 가지고 오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렇게 많은 물건은 세금을 내야만 통과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팔 것이 아니고 월남 친구들에게 줄 선물이라고 해도 안 되고, 반을 그냥 주겠다고 해도 안 통한다. 관리하는 세관원에게 우리도 써야 하니까 필요한 만큼 꺼내는데 허락을 받아서 한 20개 정도꺼내고 세관원에게도 하나를 주었다. 돌아갈 때 다시 가져가기로 하고 보관증을 받아 가지고 한 시간 여 만에 밖에 나오니 현지에서 수고하시는 신현우 선교사님과 숙박업을 하고 있는 집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늘 경험하는 것이지만 같은 물건은 항상 나누어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나는 미처 몰랐다. 우리를 위해 준비된 숙소는 Epco-hotel이었다. 호텔로 가는 밤 시내 길에는 오토바이가 많이 다니고 있어서 다른 나라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설이 깨끗한 이곳은 하루에 $30이라고 했다. 우리 일행이 7명이어서 나에게는 독방이 주어졌다. 한 사람이 더 있었으면 경비도 절약되고 좋았을 텐데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월남의 첫 밤은 오토바이의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깊어갔다.
9월 6일 금 맑음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에 잠을 더 청하지 못한 채 월남의 첫 아침이 밝았다. 7시에 7층에 있는 식당에 가서 월남 음식이 궁금하여 두루 살펴보았다.대체적으로 중국 음식과 비슷한 면이 많고 기름을 적게 사용한 음식들이라 담백하여 먹기에 좋았다. 서양식 continental break fast도 있어서 동서양의 음식이 골고루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특히 내 마음을 끈 것은 남방의 열매들인데 붉은 껍질에 흰색 살에 검정깨 같은 검은 씨가 박힌 dragon fruit(용과, 龙果)이란 선인장 열매가 좋았다. 별 맛이라고는 없지만 약간의 달달한 맛이 좋았다. 파파야도 좋았고, “포”라고 하는 즉석 쌀국수를 말아 주는 그 맛도 한국 시골 장터에서 먹던 국수 맛과 비슷해서 별미였다. 신 선교사님이 딸을 통역으로 데리고 왔다. 세를 낸 van으로 우리는 시내를 가로질러 하노이 가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시내 도로는 좋은 편이 아니었고, 도로 공사로 교통이 불편하였다. 시내 주택은 2-3층짜리가 주로 많았고 집 넓이는 4-5m를 넘지 않으면서 길게 지어져 있었다. 열대 지방이라 방열 작용을 위해 여러 개의 구멍들이 뚫려 있는 붉은 벽돌이 기본 건축 자재로 사용되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 없으니 방한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집 짓는 일은 간단하고 쉬운 일인 것 같았다. 겉으로 보는 이곳 생활수준은 중국보다도 못한 것 같았다.
요엘 교회
우리가 도착한 곳은 요엘 교회로 한 형제 집의 이층에서 모이고 있었다. 한 50여명이 모이는데 정부의 허가는 없지만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모이고 있었다. 우리는 응웬항 목사님으로부터 교회의 역사와 현황을 소개받고 합심하여 주님께서 월남 교회를 지켜주시기를 기도했다. 응웽항 목사님은 강에서 침례를 주다가 잡혀서 벌금 50만 동(한국 돈 약 5만 원 정도), 그리고 교회는 100만 동을 물었다고 했다. 공산 월남도 종교를 근본적으로 허용하지 않다가 개방을 하면서 법을 통해 허용하기 시작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종교를 틀어쥐고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월남에서 정부의 허가를 받고 운영하는 복음 교회가 있고 그 외에는 무허가로 압제와 핍박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중국 같이 자치, 자전, 자양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없지만 종교를 관리하는 방법은 같았다. 응웽항 목사님이 영어를 해서 직접 교제를 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 더 오래 머물면서 교제하고 싶었지만 스케줄 때문에 아쉬운 마음들을 뒤로하고 더 북쪽으로 올라갔다.
떤협교회
큰길에서 옆으로 빠져 샛길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고무나무 숲 속에 묻혀버렸다. 주위가 가려진 채 고무나무 숲을 얼마 들어가니 밖에서는 볼 수 없는 곳에 붉은 벽돌에 슬레이트를 덮은 떤협 교회당이 나타났다. 도엔 푹(47세) 목회자가 사모와 아이들 셋이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다. 날이 덮고 건조해서인지 모두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분들은 원래 다른 곳에서 사역을 하다가 핍박으로 이곳으로 와서 사역을 하게 되었는데 현재까지는 아무 핍박이 없었다고 한다. 38명 정도 모이는 농촌 처소로서 그분들이 가장 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일은 변소를 짓는 일이었다. 우리가 화장실이 없어서 아주 불편했다. 그래서 화장실을 지을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 우리도 볼일을 보아야 하는데 주변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고무나무 숲 속에 가서 알아서 볼일을 보아야 했다. 여 전도사가 나에게 가까이 와서 화장실을 묻기에, 나는 장난으로 저 쪽에 가서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니 깜짝 놀란다. 목사 딸을 불러서 물었더니 어딘가로 데리고 가더니 한참 뒤에 왔다. 화장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한참을 가니 한 집이 있는데 거기에 판자로 둘러친 화장실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목사는 우리에게 전화를 놓도록 도와 달라는 부탁도 하였다. 전화선이 가까이에 들어와 있지 않아서 전화를 놓는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선 화장실 지을 자금 $150을 주면서, 전화는 다음에 생각해 보자고 했다. 이제 점심시간이 되어서 푹 목사를 데리고 고무 숲을 나가 읍내로 갔다. 식당으로 가서, 그분으로 하여금 점심을 시키게 했다. 게와 새우등 바다 해산물 중심의 식사를 주문하여 주어서 맛있게 먹었다. 식후 푹 목사 식구들을 위한 음식과 과자도 한 보따리 사서 드리고 데려다주었다.
여위야이 교회
오후에 우리는 침례 식을 기다리고 있는 여위야이 교회로 향했다. 시내 쪽으로 내려와서 다시 메콩 강 쪽으로 향했다. 교회는 길가 상가가 있는 집 사이로 안으로 쑥 들어간다. 안쪽으로 큰집이 없는 것 같은데 들어가니 생각보다 넓은 집이 있었다. 이곳의 집 구조가 그렇겠지만 어떤 면으로는 밖으로 잘 들어 나지 않아서 숨어서 모이기가 좋은 장소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교회는 역사가 있는 교회로서 은혜로운 목사님이 한 평생 목회를 하시다가 얼마 전 주님께로 가시고 그 아들이 아버지 뒤를 이어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 아들이 성찬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감동적이었다. 침례 식을 위한 집회가 주어지고 4명의 침례 받을 사람들은 가까운 고무농장에 있는 스위제 교회 사람들이었다. 침례 탕은 마당 한 구석에 두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로 만들어져 있었다. 침례 식은 이진선 회장님이 베푸셨다. 이곳에서도 주님을 영접하고 침례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 땅에 충만해 있음을 볼 수가 있었다.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월남에서도 신앙인들은 그늘진 곳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중국과 같았다. 어서 주께서 사회주의 정치제도에 변화가 올 수 있게 해 달라고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월남 그 땅에서도 기도했다. 이미 있던 교회는 없애지는 않고 그대로 놔두고 있는 형편이다. 이들이 핍박을 받는 것은 정부가 허가한 기독교교(중국의 삼자교회 같은)에 들어가지 않게 때문이다. 침례 후 만찬 예배가 있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그 몸 버리시고 그 보혈로 우리 죄 씻어 주신 떡과 잔에서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다시 보면서 구원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했다. 월남 형제자매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첫 경험이었고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성령 안에서 무언의 미소 짓는 그 속에 우리의 교제는 충분하였다.
스웨제 교회
침례 식을 마치고 우리는 또 다른 고무농장에 있는 스위제 교회로 갔다. 침례를 받은 그곳의 형제자매님들과 사역자를 태우니 차는 터질 것 만 같았지만 함께 하는 즐거움은 그 무엇에 비할 수 없었다.
울창한 고무나무 농장이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다. 이곳의 주민들은 고무 농장에서 일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이었다. 노동자들의 한 달 월급이 미화 20불 정도로서 최저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론 온 식구들이 다 나아가서 무엇인가를 하여서 생활을 보태고 있었다. 그래도 집집마다 들여다보면 채색 텔레비전들이 다 있는 것을 보면 문화생활 정도는 누리고 사는 형편은 되는 것 같았다. 집 앞뒤에 있는 바나나 나무에는 노란 바나나가 달려 있었다. 자연은 바나나, 파파야 그리고 각종 열매들을 내어주고 있었다. 일 년에 세 번씩이나 벼를 거두어들이는 이 나라는 잘 살 수 있는 자연의 풍성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념투쟁이라는 전쟁의 악이 이 나라를 이렇게 황폐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을 잘 간수하고 살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저주를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베트남 사회주의는 이상만 먹고살다가 결국은 영양실조에 걸려 인민과 나라가 가난의 병이 들어 이렇게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사역자 형제 집에서 Dragon Fruit 등 과일들을 나누면서 이곳의 형편을 들었다. 집회는 사역자 가정에서 드리는 데 예배당 건물이 필요하다고 도와줄 것을 청했다. 그들을 위하여 합심 기도를 하여 주고 헤어져야 만 했다.
♣ 손님이 왔다고 목회자 딸이 통과와 바나바를 차리고 있는 부엌
어두워져 오는 길에는 비도 한 때 쏟아졌다. 여기는 비가 갑자기 쏟아지고는 그치는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이곳의 날씨는 몹시 무덥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선선한 바람기가 있는 것이 특이했다. 그래서 살기 마련인가 보다. 저녁은 베트남 음식을 먹기 위해 신 선교사가 안내했다. 우선 신선한 야자열매 한 통을 주어서 마시니 마음조차도 시원함을 느꼈다. 북방 사람이 남방의 향수를 누린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월남의 전통 음식은 맛이 있었고 먹을 만했다.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좋은 경험이었다. 오늘은 하루에 네 곳의 교회를 방문한 바쁜 하루였다. 시간이 너무 짧고 아쉬운 점들도 있었지만 월남을 많이 배우고 느끼는 시간이 되었다. 가고 오는 차 여행에서는 젊은 이선규 목사와 이명희 목사가 이미연 전도사를 자꾸 치근거려 시비를 걸어서 말싸움을 하는 쇼를 벌려서 쉽게 피로를 느끼는 여행자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기도 하였다. 우리 여행에 이런 재미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분위기가 즐거웠다. 주께서 하루를 이곳에서 고난과 시련을 견디며 투쟁하고 있는 복음주의 형제들을 보면서 시들지 않는 면류관들이 바로 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느꼈다. 감사하고 보람 있는 하루였다.
김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