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dochinese peninsula(인도차이나 반도)의 선교여행 9. 5-14 2002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는 나라들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 타이랜드의 다섯 나라들이다. 이 나라들 가운데 Vietnam, Cambodia, Thailand 순서로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선교 팀과 함께 선교여행을 할 수 있어서 큰 축복이었다. 두 번째로 Cambodia를 찾아보았다.
◈ Cambodia(캄보디아)
정치 : 입헌군주국
크기 : 181,040㎢ 인구 : 1200만(2001)
수도 : 프놈펜 언어 : 캄보디아(크메르)어
종족 구성 : 크메르 족 95%
화폐단위 : Riel(리알) GDP : $ 275
종교 : 소승불교 95%, 기독교 1% 미만
1953년 11.09 프랑스로부터 독립
역 사
1∼6 세기 경 현재의 캄보디아에는 중국과 인도 사이의 무역로를 차지하고, 번성하던 후난 (Funan) 왕국이 있었다. 건축과 조각에서 두각을 나타낸 앙코르 시대는 800년 경 자야바르만 2세 (Jahavarman II)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의 재위 기간에 정교일치의 권한을 가진 데바라자 (Devaraja; (신왕)의 크메르 통치가 성립되었다. 앙코르 주변에 관개 시설을 이용한 집약적인 농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크메르인들은 고도로 중앙 집권화된 국가에서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캄보디아는 앙코르 시대 (9-14세기)에 현재의 캄보디아 영토뿐만 아니라 베트남, 라오스, 태국까지 지배했던 강력한 크메르 제국 (Khmer Empire)의 계승자이다. 그들의 조상은 1세기 남인도에서 이주해왔으며 크메르는 A. D. 10세기까지 전체 인도차이나 반도를 지배할 만큼 고도로 정교한 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했다. 1863년부터 90년 동안 프랑스가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식민지 통치했으며, 1953년 캄보디아는 독립을 선언했다. 그 후 15년 동안 노로돔 시하누크 (Norodom Sihanouk) 왕이 캄보디아 정치를 좌지우지하다가 1970년 군부에 의해 쫓겨나 북한으로 망명했다.
크메르루주 사회주의 혁명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주 사회주의 혁명으로 국가를 장악한 폴 포트 (Pol-Pot)의 지휘 아래 지금까지 행해진 것 중에서 그 어떤 것보다 급진적이고, 잔인한 사회개조가 시도되었다. 목표는 캄보디아를 농민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농업협동조합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뒤 4년 동안 지식층을 포함한 대부분 도시인이 농촌 지역으로 재배치되었으며, 고문을 당해 죽거나 처형당했다. 특히 크메르루주 (Khmer Rouge)의 4년 통치 기간에는 (1975-1979) 대량학살이 자행되어 7백만 캄보디아 인구 중 약 2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혁명 이전에 존재했던 캄보디아의 문화가 완전히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최근 크메르 족은 20년 이상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관계로 경제가 파탄지경이어서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1998년 8월 UN의 감시 밑에 치른 선거에서 훈센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되찾으면서, 그동안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많은 혼란을 일으켰던 크메르루주 군도 투항하여 이제 정부군으로서 혹은 사회에 복귀함으로써 정치와 사회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노로돔 시아누크 왕도 북한에서 다시 돌아와 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폴포트 정권(1975-1979)이 거의 모든 의료인을 죽였기 때문에 현재는 전국에 700명의 의사, 치과의사, 약사가 있을 뿐이다. 풍토병인 장티푸스, 말라리아, 이질 등으로 많은 사람이 죽는다. 265명 가운데 한 명이 매달 지뢰로 인하여 지체를 잃어버린다. 캄보디아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아시아에서 최저인 49.7세이다. 전 인구의 5%만이 안전한 식수를 공급받을 수 있다. 크메르인들은 동남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사귀기 쉬운 사람들이다. 태국에서처럼 캄보디아 사람은 손을 기도하듯이 앞으로 모아 허리를 굽히면서 인사를 한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부를 때는 손바닥을 아래로 해야 하며, 어린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안 된다.
캄보디아는 98%가 불교이며 정령 숭배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1975∼1979년 사이 수많은 캄보디아 승려들이 크메르루주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3천 개가 넘는 절이 파괴되었다. 1990년대 많은 절들과 모스크가 복원되었으며 스님들의 탁발이 다시 일상적인 모습이 되었다. 폴 포트 정권의 붕괴 이후 종교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불교의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동남아의 여타 국가와 마찬가지로 모슬렘이 부흥하고 있고, 힌두교도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기독교는 1970년대 초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크메르 족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였다. 공산주의가 정권을 장악하기 전까지 한 3년 동안 교회 성장은 괄목할 만하였다. 제한된 종교적 자유가 최근 들어 다시 회복되고 있으며 크메르 족 가운데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좋은 기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무한한 선교의 가능성을 가진 나라이다. 타일랜드에 있는 크메르 난민촌 피난민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
기독교 선교
지난 15년 동안 캄보디아의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아왔다. 크메르 족은 기독교를 서구의 종교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과 사회적 혼란으로 인한 민족주의와 불교 사이의 등지고 있는 현상으로 인하여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개방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1954년에 전체 성경이 크메르 언어로 번역되었다. 크메르 어로 된 신앙 서적이 있으며 영화 '예수'가 크메르어로 번역이 되어 있다. 그리고 김장한 목사님의 노력으로 세워진 복음 방송국이 정신적 필요를 채워주리라 믿는다. 크메르 제국의 영화는 이제 전설적인 앙코르 사원의 유적에서 만 볼 수 있고, 이 유적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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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mbodia 단기 선교여행 9. 9-11
▶ 프놈펜 9. 9. 화. 맑음
Vietnam은 Cambodia와 이웃하고 있다. 날틀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캄보디아의 자연은 월남과 같다. 그러나 점점 캄보디아 안으로 들어오면서 나무 숲보다는 탁 트인 평야가 펼쳐진다. 그리고 홍수로 인하여 아주 넓은 지역이 물에 잠겨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50분 정도 비행한 뒤 인구 약 150만의 서울 Phnom Penh 공항에 내렸다. 입국비자를 20불씩 내고 받았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김윤근 선교사의 안내로 그가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Center로 왔다. 큰 이층 집을 빌려서 교회 겸 학교를 하고 있었다. 막 수업을 마친 학생들은 한국말도 몇 마디 했고 영어는 기본적으로 조금씩은 다 하는 수준이었다. 이곳의 날씨 또한 몹시 무더웠다. 잠시 휴식을 한 후 김 선교사의 안내로 미 남침례회의 NGO Team이 하는 사업장에 갔다. 이 팀은 지하수 검사와 수질 개선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 지어주기 운동도 하고 있었다. 특히 농촌 지대는 화장실이 없이 사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그저 아무 곳이나 알아서 볼일을 보고 살아왔다. 학교에도 학생들을 위한 화장실은 없다. 여학생은 3∼4명이 함께 짝지어 나가서 나무 밑에서나 풀숲에 가서 볼일을 보고 남자아이들은 알아서 한다고 한다. 이렇게 들에 버려진 오물들은 가끔 내리는 기습 폭우가 내리면 순식간에 다 사라져 버린다고 한다. 변소 없이 사용하는 이것이 원인인지는 몰라도 전국의 지하수가 비소(Arsenic)에 중독이 되어 있어서 지하수를 먹을 수 없는 형편이지만,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의 현실이다.
캄보디아 사람들의 집 처마 밑에는 통통한 독들이 집마다 유난히 많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어서 궁금했는데, 빗물을 받아서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서란다. 차라리 빗물이 지하수보다는 더 깨끗하다고 한다. 우리는 화장실을 지어주고 있는 한 학교를 방문했다. 화장실 두 칸에 손을 씻을 수 있는 간이 펌프 시설도 되어 있고, 오물은 지하로 가지 않고 저장 탱크로 보내져서 정화되도록 했다. 이렇게 만드는데 미화 500불 정도가 든다고 했다. 우리 팀이 한 곳의 화장실 건립을 위해서 도와주기로 했다. 여러 곳에 지어진 화장실에는 기증자의 이름 또는 교회, 회사 이름들을 달아 주고 있었다. 이 팀의 Boss는 남침례교 NGO에서 파송된 화학박사로서 수질 개선 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귀한 선교사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일하는 Medical Doctor, 그리고 여러 선교사가 있었다. 이들은 캄보디아 청년들이 CD로 가라오케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착상하여 Youth 들에게 간접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 예수 이름은 들어가지 않으면서 성경 이야기를 대중들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 그저 나누어 주고 있었다. 또 공중위생을 위한 만화도 만들어 방송에 내 보내기도 한단다. 그들은 작은 Studio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녹음하고 있었다. 영상으로 그분들이 하는 일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곳 주민들의 육류 공급을 위해 미국에서 레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타조 알을 가져다가 냉장고로 만들어진 부화기에서 부화를 시키고 있었다. 레이 알은 쉽게 말해서 공룡 알같이 크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이 레이에 사람이 타고 달리기 시합도 하는 키가 2-2.5m나 되고 무게는 135Kg 정도 된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타조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종류이다.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기가 힘든 이 나라가 일 년에 세 번이나 벼를 거둘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식량이 모자라서 국민 영양이 기본 이하이며, 국민 평균수명이 50세 전후라고 한다. 이 모든 가난과 고통은 내전 때문이었다. 우리가 오가는 길에 내 눈길을 끄는 것은 길은 높은 데 비해 양옆은 낮은 곳으로 물이 고인 늪으로 되어 있었다. 거기에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집을 지어서, 수상생활을 하는데 흘러가는 강 같은 데는 물이라도 깨끗하겠지만 이 늪들은 물이 고여 있어서 썩어서 냄새가 심하게 났다. 거기에 오물을 버리고 빨래를 하고 아이들이 물에서 놀고 있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오염된 이 늪에 이 물을 정화하는 큰 역할을 하는 "빼오라"라고 부르는 물 상추(Water Lettuce)가 많아 자라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빼오라는 어디든지 쉽게 잘 자라고 번식하는 식물로 물의 환경이 이렇게 열악한 나라에 있어서 자연의 정화를 돕고 있으니 하늘이 내린 귀하고 귀한 식물이다.
오염 믈 정화 식물, "빼오라"(물 상추, Water Lettuce)
이곳의 선교는 이곳의 종교문화와 context(맥)를 같이하고 있었다. 이곳 절간은 종교만이 아니라 인민의 교육활동 장소이기도 하다. 시골서 올라오면 무조건 절간에 가서 기숙하면서 배우다가 또 갈 일이 생기면 떠나간단다. 즉 인민과 함께 사는 종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선교하는 모든 기독교가 교회와 함께 교육활동을 하는 것이다. 이곳 center에서는 영어, 컴퓨터, 태권도, 등을 가리키고 있었다. 왕정 사회주의 나라이면서도 선교사들의 활동을 허가하여 주고 있는 것은 경제적 이익 때문이라고 한다. 교회 허가는 국가에서 인정하는 교파 그룹에 들어가면 쉽다고 한다. 하루 만에 이 나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지식을 얻고 눈으로 보았다.
▶ 폴 포트의 고문실 9. 10 화 맑음
무더운 한 밤을 그런 데로 보내고 캄보디아에서 둘째 날을 맞이했다. 우리는 환전소에 가서 돈을 조금씩 바꾸었다. 우리는 Twl Sleng 대학살 박물관을 보러 갔다. 고등학교였던 Twl Sleng은 폴포트 정권 기간 동안 크메르루주의 고문실로 사용되었다. 약 2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 고문실을 거쳐 갔다고 한다. 크메르의 지도자 Pol-pot가 왕정을 뒤집고 혁명에 성공하자 급진적이고 잔인한 사회개조가 시도되었다. 캄보디아를 농민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농업협동조합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4년 동안 지식 분자들은 고문을 당해 죽임을 당했다. 지식인들의 수난의 시대였다. 도시인들은 농촌 지역으로 재배치되었다. 1975-1974 사이에 약 200만의 캄보디아 인들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이런 일들은 중국의 문화혁명 10년 동안 수많은 중국의 지식인들이 사라져 간 것과 같다. 무식한 사회주의자들은 지식 분자들을 무조건 혐오하고 적대시하였다.
학교 교실 여러 방에는 감금실, 고문실, 그리고 고문에 쓰던 각종 기구가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때 갇혀 있다가 살아난 화가에 의하여 그 당시의 잔인한 고문 모습들을 화폭에 담은 것을 전시하여 놓아서 그 당시 이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Killing field에서는 어린아이를 공중에 던져 놓고 총으로 죽이는 그림은 악마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있었다. 인간이 그것도 동족을 그처럼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일 수 있는 인간은 얼마나 악한가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독재주의 사상과 이데올로기, 권력은 사람의 생명을 너무 쉽게 빼앗고 있었다. 계급투쟁 그것은 비이성적인 집단의 행동으로 인간의 존엄한 자유를 빼앗고 이데올로기에 굴복시키는 수단이었다. 사상과 이념을 앞세운 독재 파쇼 주의자들이 이 땅에서 사라지도록 우리는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 관람실에서 크메르루주의 만행 자료를 편집한 영화를 보았다. 헤아릴 수 없는 무고한 인민들이 고문을 받은 후 손을 뒤로 묶고 눈을 가린 채 차에 실려 그들의 무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옮겨진다. 깊이 파진 구덩이 앞에 한 사람 한 사람 내려 무릎을 꿇고 앉게 하거나 또는 세워 놓고 총알이 아까워서 도끼 등으로 머리를 쳐서 구덩이에 떨어지게 하는 방법으로 죽였다. 마치 짐승을 잡듯이 인간 백정들이 그렇게 참혹하게 죽이고 죽였다.
Killing Field(대학살 단지)
프놈펜에서 한 14Km 지점에 크메르루주에 의해 학살된 100만 명의 사람들 가운데 8000명이 희생되어 집단으로 묻어진 곳이다. 유리 벽으로 된 삼각 아치형 기념비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희생자의 해골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제일 아래 칸에 있던 해골들은 누군가가 다 가져가고 없고 두 번째 칸도 열려 있어서 해골들을 쉽게 꺼내서 가지고 마음대로 볼 수가 있었다. 층층에 해골들은 많이 쌓아 놓기도 하였다. 나도 이름 모를 해골 하나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해골마다 자세히 보면 둔기로 맞아서 생긴 상처들을 하고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이 원혼들의 한은 어떻게 풀 수가 있을까? 이들의 희생으로 흘린 피가 이 나라의 평화와 자유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이렇게 많은 생명을 앗아간 자들이야말로 지옥의 밑바닥에 가고도 남을 것이다. 우리는 killing Field 여기저기 집단으로 묻은 무덤들이 파헤쳐진 곳들을 돌아보면서 나는 독일에서 가서 본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가 죽은 벨젠 유대인 수용소 생각이 났다. 그곳은 250-500씩 묻은 긴 무덤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빈민촌 예배당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도시에서 쫓겨나서 빈민촌을 이루고 사는 곳을 가 보았다. 미국에서 온 의사 부부가 이들의 건강을 돌보고 있었다. 오는 길에 한 식당에 들러 음료수들을 마시면서 그곳 사람 사는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저녁에는 왕궁과 전통적인 춤을 선보이는 곳이 있다기에 우리는 바람도 쏘일 겸 나섰다.
시내 야경도 볼 겸 왕궁 쪽으로 가는 길은 점점 상류층들이 사는 곳 같이 화려하고 휘황찬란했다. 사람들이 왕궁 광장에 모여서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한 큰 식당에 들어갔다. 매머드 식당이었다. 가수들이 노래하고 우리가 기대하는 전통 민속춤은 오늘 저녁은 없어서 섭섭했다. 우리는 오자마자 지금까지 이 나라의 너무 가난한 면만 보아서 어디든지 가난한 모습만 있는 줄로 여기다가 저녁에 잠시이지만 여기에 와보니 좋은 차들도 많이 오고 중상류 사회를 보면서 소수의 가진 자들의 한 면을 볼 수가 있었다. 돌아와서 내일 앙코르 와트를 가는 일을 의논하였다. 이 회장은 김 선교사를 같이 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내용을 알고 보니 언어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내가 대신할 테니까 선교사는 학교 수업이나 하게 하라고 하니 좋다고 했다. 나 때문에 선교사가 편해졌고, 아멘 선교회는 왕복 비행기 등 경비가 절약되었다.
♣ 다음 달부터 한국에서 프놈펜까지 하늘 길이 열린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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