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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Tour

2. 베이징 명십삼릉

                                                                                          2. 베이징, 명십삼릉(明十三陵)

                                                                                 정릉(定陵, dìnglíng) 5. 1994

정릉은 만력제(萬曆帝)와 두 황후 효단현황후((孝端顯皇后)와 효정황후((孝靖皇太后)의 합장 능이다. 13 릉 가운데 3번째로 크며 호화로운 지하궁전의 정교한 건축과 3,000점의 귀중한 유물을 품고 있었던 보고였다. 정릉은 만력제 13년에서 18년까지(1584.11-1590.6) 6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이 공사에 투입된 은은 800만 냥이며, 연인원 6,500만 명으로 하루에 3만 명의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이것을 쌀로 환산하면 100만 명이 6년 반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하며 당시 가구당 5~6명의 노동력을 바친 셈이라고 한다. 당시 일 년 국가 재정 수입이 4백만 량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자기 무덤들을 짓다가 국가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어리석다 아니하랴! 아울러 백성들의 피폐한 삶과 고달픔이 어떠했는지 상상할 만했다. 완성된 무덤은 30년이나 비어 있다가 1620년 7월 21일 만력제의 삶이 다하자 비로소 정릉은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방탕하고 살인적인 황제,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병한 만력제가 여기에 묻혀있다.

 

                                                                                                 정릉 발굴의 비참한 결과

베이징 부시장 우한(吳晗)은 역사학자로 장릉 발굴을 제안했다. 중국 과학원 고고학계는 아직 고궁을 발굴할 지식과 기술 부족을 이유로 발굴을 반대했지만, 주은래의 허락으로 발굴은 하되, 기술 부족을 우려해 규모가 작은 '정릉'을 시험 삼아 발굴하기로 했다. 1956년 발굴을 시작하여 1957년 9월 19일 거대한 지하궁전의 문을 열고 만력제와 두 황후의 관곽 및 3,000여 점의 부장품을 발견했다. 그러나 우려한 대로 고고학적 발굴의 지식과 기술 부족으로 뼈아픈 고고학적 참상을 불러왔다. 그것은 수백 년 동안 밀폐되어 있던 만력제의 용포와 수많은 직물류(비단)와 수천 점의 보물들이 외부 공기와 접촉하자마자 순식간에 색이 바래고 바스러져 버리는 재앙이 일어났다. 또 발굴된 유물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채 그대로 버려두어 훼손되어 못 쓰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이 발굴을 주도한 부시장 우한은 고대 능을 발굴하려는 의욕만 컸지, 고고학적 발굴의 지식이나 기술을 갖춘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사람이 발굴을 주도하였으니 발굴 참사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 고고학 발굴의 참사 이후로 오늘까지 중국 정부는 고궁 발굴은 허락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발굴 과정

발굴단이 발굴은 시작했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길과 문을 차지 못하여 일 년을 헤맨 끝에 겨우 지하 궁전에 이르는 길을 찾아서 드디어 궁전의 문에 다 달았다. 그러나 문은 외부의 침입과 도굴 방지를 위하여 문이 닫히면 안에서 잠기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밖에서는 열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 문을 열려고 하는 자에 대한 저주와 죽음에 대한 소문으로 무척 조심스러웠다. 수백 년 동안 닫혀 있는 비밀의 문을 열기 위하여 연구를 많이 하였다. 그래서 한 분이 허리에 줄을 매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자 노력하였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연구원들이 문 틈새로 무엇을 건들자 드디어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수많은 수장품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지하궁전 투시도

지하 궁전은 깊이가 27m, 넓이가 1,195㎡로 지하 궁전은 다섯 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고 7개의 커다란 돌문들로 연결되어 있다.

전과 전을 잇는 문들과 동굴은 순백색의 고급 대리석인 한백옥석(漢白玉石)으로 조각되어 있어서 호화롭게 보였다.

 

                                                                                         최상급의 국보급 유물

발굴단이 지하궁전의 마지막 전인 후전에서 이 무덤의 주인인 만력제와 후궁들의 관곽을 발견하였다. 만력제의 관은 황금빛이 도는 최고급 목재인 금사남목((金丝楠木)으로 만들어졌고, 관들은 삼중관으로 되어 있었다. 가운데 높고 큰 것이 만력제 관이고 그 왼쪽이 정궁인 효단현황후이며 오른쪽이 후궁인 효정황후이다.

연구원들이 조심스럽게 관을 열었을 때, 면력제는 금관을 쓴 채 생전에 사용했던 각종 보석과 진귀한 부장품과 함께 백골로 발견되었다. 발굴 당시 찍은 흑백 사진에 따르면, 유해는 비스듬히 옆으로 쓰러진 모양으로 누워 있었으며 왼쪽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짧았다고 한다. 심각한 비만이었으며 아편을 복용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두 황후도 황후 관을 쓰고 금은보석과 진귀한 부장품들과 함께 백골로 발견되었다.

1956년 발굴되면서 관곽의 실물이 세상에 공개되었지만, 원래 황제와 두 황후의 관과 시신은 광기에 취한 홍위병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관은 바깥에 버려졌는데 어떤 농민이 주워가서 자기들을 위해 두 개의 관을 만들었는데, 그 부부는 6개월 만에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 그 자리에 놓인 관곽들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복제품이다.

▶관곽(棺槨)-시신을 넣는 '관(棺)'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에 또 하나의 관에 넣어 시신을 안전하게 안치하기 위한 이중 구조의 관.

▶금사남목(金丝楠木)-중국 황실에서만 사용되던 최고급 목재로, 빛을 받으면 나무 표면에 금색 실(金丝) 같은 광택과 무늬가 나타난다. 중국 명 청 시절에는 황실 전용 목재로만 사용되었다. 구이저우 성과 쓰촨 성 등에서 자라며 국가 2급 보호 나무이며 벌목이 금지되어 있다. 지금도 이 목재로 만든 제품은 금값을 뛰어넘는다.

                                                                                           홍위병들의 만행

중국은 근세에 들어와서 청일전쟁·아편전쟁·내란 등으로 중국 역사의 귀중한 많은 사적이 훼손되고 보물들이 탈취당하는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거기에다가 문화 대혁명으로 사대 구습 타파의 행동대로 나선 철부지 홍위병들의 막무가내 파괴에 대륙은 한동안 몸살을 알아야만 했다. 홍위병들에 의해 입은 피해는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며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다. 중국이 개방된 뒤에 그때 상처 입은 유적들을 싸매고 고치는 모습들을 여기저기서 보면서 마음 씁쓸했다.

1966년 8월 24일, 수십 명의 홍위병 전위대들이 정릉 박물원으로 쳐들어와서 지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만력제와 두 황후의 관을 열고 유골들을 꺼내어 박물원 앞 광장에 놓고 돌로 찍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 위에 보관 중이던 국보급 유물들과 그동안 연구한 소중한 자료와 사진들을 쌓아놓고 모두 불태워 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다행한 것은 홍위병들이 정릉 내부를 잘 모르는 데다가 금붙이나 옥, 돌로 된 유물들은 좀 떨어진 곳에 있어서 환난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유물들을 쌓아 놓고 불 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모습이다.

 

                                                                      정릉 박물관(定陵博物館)

그동안 지하에 대충 전시하던 유물들을 2012년 지상에 새로운 박물관을 지어서 2014년에 정릉의 유물 3,000여 점을 전시하게 되었다. 좋은 환경 가운데서 청나라의 귀중한 보물들인 금은 제품들, 만력제의 금사관(왕관) 황후의 봉관 장신구 도자기 비단 그림 등의 귀중한 유물들을 감상하면서, 명나라의 정교한 세공 기술과 화려한 문화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니 다행한 일이다. 이때부터 촬영이 자유로웠는지 많은 자료가 사이트에 올라와서 필요한 자료들을 인용할 수 있어서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다.

 

발굴된 수많은 유물 가운데는 청화매병(靑花梅瓶) ‧ 황후관과 ‧ 복식‧황제의 금사관‧옥새 및 장신구 같은 최상급의 국보급 유물들이 있었다.

                                           

       황제의 금사관(金絲棺)-금실로 엮어 만든 왕관이다.                                                      익선관

 

                                                                                   황후관(구룡구봉관)

화려한 황후관은 봉황관으로 무게가 2kg 정도 되고, 봉환관의 장식품은 많은 물총새 깃털, 붉은 보석 115개, 진주 4,414개로 꾸며져 있다.

 

                                                                                   당시 화폐로 쓰던 금화 은화

 

                                                                            직조기(織造機) -화루기(花樓機)

명나라 시대에 비단을 짜던 대표적인 직조기계이다. 직조기는 다층(누각)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꽃누각 기계'라는 뜻을 가진 이 직조기는 복잡하고 정교한 문양의 고급 비단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해 준 중국 고대 직조 기술의 최고 걸작품이다. 이 직조기는 두 사람이 비단을 짜는데 섬세한 꽃무늬 수를 놓는 기술은 세계 제일이었다.

 

                                                                                       우리가 명 십삼릉을 찾았을 그때

1994년 5월 정릉 지하 궁전을 방문하여 그 옛날 청나라의 섬세하고 호화로운 문화를 경험하면서 소중한 보물들이 잘 보관되어 있어서 감동적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쉬운 것은 지하 궁전 전시장 전체에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어서 아름다운 비단과 공예품 등을 담을 수가 없어서 서운했었다. 그 시절에는 스마트폰이 없던 때라 사진을 쉽게 찍을 수도 없었다. 특히 내 눈길을 끈 것은 중국 비단의 아름답고 우아한 색상과 섬세한 무늬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이러한 비단을 만들어내는 직조기인 화루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아름다운 무늬의 비단을 짜다만 직조기를 배경으로 기념으로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촬영 금지여서 너무 아쉬웠었다. 이 직조기를 보면서, 한국의 시골 어머니들이 베틀로 옷감을 짜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옛날 중국 여인들도 이 정교하고 고급스러운 비단을 짜느라 얼마나 고달픈 삶을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황제의 용포

Jewha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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