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네수엘라 단기 선교 7.17-25, 2011
나라 이름 :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República Bolivariana de Venezuela)
나라 크기 : 916,445 km²
인구 : 29,275,460명(2015 통계)
언어 : 스페인어
서울 : 카라카스
민족 : 메스티소 51.6%, 백인 43.6%, 흑인 약 2.6% 등
종교 : 가톨릭 79%, 기독교 13%, 기타 종교 2%
통화 : 볼리바르
▶ 역사
16세기에 스페인의 베네수엘라의 식민지화가 시작되면서 토착 원주민들의 저항하였으나 원주민들인 아이카이푸로(Guaicaipuro), 타마나코(Tamanaco) 같은 원주민들은 무참히 살육당하였다. 1811년 7월 5일 독립을 선언하면서 독립전쟁이 시작하여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먼저 독립하였다. 1819년에 콜롬비아, 에콰도르와 함께 대 콜롬비아 공화국을 이루다가 1830년에 분리를 선언하였다. 콜롬비아로부터 1845년에 분리 독립을 승인받았다.
베네수엘라 단기 선교여행 7. 17(일) - 25(월) 2011
Dixie 캐나디안 교회의 venezuela 단기선교 팀에 우리는 손자 손녀인 주희. 하영. 하늘을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이번 단기 선교여행을 통해서 아이들이 주님께로부터 좋은 은혜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가 타고 갈 날틀은 Air Canada로 바로 베네수엘라 수도 Caracas로 가는 것이었다. 저녁 7:05분 우리를 태운 날틀은 힘차게 활주로를 벗어나 푸른 하늘로 올랐다. 온타리오 호수를 지나 미국의 산야를 나는 동안 어두음이 온 세상을 덮는다. 날틀은 밝게 비추이는 달님과 함께 점점이 떠가는 구름을 헤치며 남쪽으로 달리는데, 날틀의 엔진 소리가 창공의 고요를 깨고 있었다.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거의 5시간 반을 달려 밤 12시 25분경 깊은 밤의 카라카스(Caracas)에 내렸다. 베네수엘라 시간은 캐나다 보다 30분 늦게 가고 있어서, 나는 시계를 1:00에서 12:30으로 맞추었다. 이제 짐들을 가지고 나가야 하는데 우리 가방에 든 많은 약품들을 문제 삼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오는 동안 했다. 짐을 찾아서 나는 모두에게 우리 가족이 약을 든 가방을 다 가지고 나가다가 혹 한 사람이라도 검사를 받게 되어 우리 모든 짐을 검사받게 되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약품들이 안 든 가방을 가진 분들과 우리 가방을 좀 바꾸어서 가지고 나가자고 하여 그렇게 하였다. 모두 X-Ray검사대를 잘 나가는데 나와 내 자매 가방만 조사를 하자고 사무실로 데리고 간다. 우리 가방을 열어 보니 별 것이 없었는데 한 가방에서 10갑의 약봉지가 나오니 더 보지도 않고 자기네 돈 400 볼리바를 내란다. 그런데 문제는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문제였다. 그 이민국 직원이 일부러 영어를 모르는 척하는지 의심스러웠다. 몇 캐리비안 자매들이 왔지만 모두 캐나다에서 태어나서인지 스페인어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우리 선교사가 일하는 학교와 교회를 도우러 가는 길이라고 해도 안 통한다. 우리가 왜 베네수엘라에 가는지 그 목적에 대해 스페인어로 쓴 편지가 있어서 보여 주었더니 읽어보더니 안다고 하면서, 그래도 400Bs을 내란다. 제니스 자매가 흥정을 하여서 300을 내고 나왔다. 짐을 찾아서 바로 국내선으로 가는 통로로 가야 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겨서 하루 밤 고생을 하게 된다. 밖에 나오니 porter들이 짐을 실어주겠다고 붙는데 언어가 안 통하여 국내선까지 실어다 주는데 얼마인지 잘 이해가 되지를 않아서 나는 우리 짐들은 끌고 가려고 하는데, 큰 짐을 가진 몇 사람이 porter를 쓰려고 $20에 흥정이 된 모양이다. 내 짐도 실으라고 하여서 생각도 없이 실은 것이 잘못된 일이었다. 포터는 우리를 이층 출국장으로 데리고 가지 않고, 자기들이 가기 편한 데로 엘리베이터로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청사 밖으로 나와서 국내 청사 일층으로 가서 짐을 부려주고는 가버렸다. 우리가 의자가 있는 출국장에서 쉬어야 하는데 그들은 우리의 이런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일층에서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문이 잠겨서 갈 수가 없어서 찬 시멘트 바닥에서 저녁도 먹지 못한 채 모두 불편한 하루 밤을 보내게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 팀 리더인 Mrs. 안이 정 선교사가 보낸 안내를 잘 이해하지 못하여서 생긴 일이었다. 청사 일층에는 경비 한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먹을 곳은 문을 다 닫았다. 자동 판매대에는 물과 간식거리들이 있지만 여기 돈이 없어서 아무것도 살 수가 없다. 얼마를 있다가 나는 목이 알라서 미화 일 불을 경비에게 내 보이고 목이 마르다고 영어로 water 그리고 스페인 어로 “아구아”가 필요하다고 섞어서 말하고 여기 돈으로 바꾸어 주기를 청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보더니 없다고 나보고 잠 시기 다리라고 하고 떠난다. 나는 청사를 돌아볼 겸 저쪽으로 내려가니 다른 경비들이 있어서 같은 방법으로 말했더니 한 사람이 지갑에서 10Bs를 주어서 바꾸었다. 경비가 돈을 넣고 물을 한 병 사주었다. 물 한 병이 5Bs였다. 한 병을 더 사서 나누어 마실 수가 있었다.
▶찬 시멘트 바닥에서 한 밤
이제 밤 2시가 지나고 있었다. 찬 바닥에 수건 같은 것을 펴고 잠시 누워 잠시 졸기는 하였지만, 배기고 불편하여서 쉴 수 없었다. 처음 선교 가는 어린 사람들은 즐거운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리더의 소홀로 인하여 팀원들이 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힘을 빼는 일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모두 불편한 한 밤을 보내고 6시가 넘자 국내선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우리도 대열을 정비하여 check in 할 준비를 하고 서 있는데 한 여성이 와서 미화를 바꾸어 주겠다고 하여서 여러 사람들이 바꾸고 있었다. 국가 공시가는 1 : 4.50인데, 이 여성은 1 : 8로 바꾸어주고 있어서 $5를 바꾸니 40Bs였다. 긴 밤을 기다린 끝에 check in을 하고 국내선 날틀을 탔다. 한 시간을 날면서 이곳의 산야와 바다를 보면서 목적지인 Cumana(꾸마나)에 내렸다. 그저 조그마한 시골 공항이었다. 짐들을 찾아서 나오니 정경석 선교사와 미리 와 있던 안석환 목회자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밖에 나오니 열대의 열기가 작란이 아니었다. 세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시내의 일부 거리를 보면서 정선 교사님이 사역을 하고 있는 신학교에 왔다. 내조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신 사모님이 우리를 반가이 맞이하여 주시고 음식 준비를 하시었다. 집안에 들어서자 시원한 바람이 우리의 열기를 식혀 주었다. 이곳은 바닷가여서 신선한 물고기들이 많아서 인지 회와 함께하는 점심식사를 하였다. 이곳 시간으로 오후인데도 어젯밤에 잠을 자지 못하여서 인지 몸과 마음은 아직 밤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내일부터 활동하기로 하고 마음대로 쉬었다. 밤 날틀로 경비가 얼마나 절약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한 주간의 계획에 이렇게 하루를 소비하는 것은 생산적인 것 같지 않았다. 어제 무거운 약 가방들을 옮기고 하느라 허리가 좀 안 좋아졌고, 밤새 날틀에 앉아 와서인지 허리가 많이 불편해졌다. 이곳은 망고가 많아서 사모님이 많이 사다 놓으셨다. 노랗고 작은 망고들은 맛이 아주 좋았다 오자마자 우리 일행은 캐나다에서 흔하게 먹지 못하는 망고를 마음껏 먹도록 준비해 주었다.
▶Iglesia Bautista Quaan La motainita 교회 7. 19 화 맑음
아침 정선 교사님이 늦었다고 좀 걱정을 하면서 서들고 있어서 모두 마음들이 바빴다. 우리가 처음 찾아 간곳은 시내를 벗어나서 산골 어구에 자리를 잡고 있는 Iglesia Bautista Quaan La motainita 교회였다. 담이 쳐진 안에 예배당과 사택이 딸려 있었다. 정 선교사님이 세운 개척교회였다. 목회를 하고 있는 형제는 Daniel은 백화점에 경비 일을 하다가 주님께 성실하여 예배당에 살면서 교회를 돌보도록 있었다. 예배당 천정에는 몇 개의 선풍기가 돌아가지만 무더웠다. 이 교회 형제자매들이 이미 선전을 하여서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간호사가 상담을 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온 약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나는 사역자 형제에게 어떻게 하고 사는지 보고 싶어서 Daniel과 함께 그의 집에 들어갔다.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작은 창문은 집을 어둡게 하고 있었다. 형제에게 볼펜 하나 하고 $20을 쥐어 주었더니 고마워했다. 살림살이는 아주 간단한데 TV와 Computer가 돋보였다.
현지 형제자매들과 함께 골 안으로 들어가면서 전도지를 돌리면서 그들이 사는 모습들을 돌아보았다. 오전에 온 사람들은 간호사와 건강 상담들을 하고 오후 집회가 끝나면 그때 약들을 나누어 준다고 한다. 12시가 되자 간호사가 오후 3시에 다시 모인다고 알려주고는 아직 상담을 하지 못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있었다. 여기 사람들은 이렇게 하여도 불평 없이 갔다가 오후에 또 온다고 한다. 점심은 교회에서 Tuner(참치)와 “유까”라는 것을 썰어 넣고 죽을 끓였는데 맛이 괜찮았다.
“유까”는 뿌리는 마치 고구마 같이 생겼는데 이곳 사람들의 주식과 같은 것인데 감자와 비슷한 맛이 나는데 영양은 감자와 같다고 한다. 하나님은 온 지구 상에 어디서든지 인류가 먹고살 수 있도록 해 놓으셨다. 캐나다에서도 팔지만 한 번도 먹은 본 적이 없는데 여기 와서 이렇게 먹어 보게 되었다. 다시 3시에 사람들이 모이는데 날은 덮고 그 시간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주 힘들었다. 판자로 된 좁고 긴 의자에 누워도 보지만 편하지가 않았다. 3시에 모여서 찬송과 설교가 있었고, 집회가 끝난 다음 오전에 진찰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약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오늘 하루 일과가 끝났다. 더운 온도에 적응이 되지 않은 첫날은 모두에게 힘든 하루였다. 저녁은 잠시 모여서 오늘 하루를 돌아보고 교제하는데 주희도 하영이도 참여하여 대화하고 있어서 좋았다.
▶ Viva New 새 생명교회 7. 20 수 맑음/한 때 소나기
이번 Dixie 교회 단기선교 팀은 조직적이지 않았다. 아침 청소와 설거지 등 아무 순서도 짜여져 있지 않았다. 나는 아침에 일찍 마포 질을 하였다. 집사람은 부엌일을 거의 전담하고 묵은 때를 벗겨주고 정리하여 주고 있어서 선교사 사모님이 몹시 고마워하고 있었다. 어제보다 오늘은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이었다, 나는 아침에 사모님에게 복음 팔 거리를 만들려고 하는데 구술을 꿸 끈을 좀 사도록 해 달라고 의논드렸다. 우리는 사모님의 차로 가다가 액세서리 가게에 들여서 끈을 20m 정도 샀다. 각종 구슬들 액세서리 부속품들이 모두 중국제로서 중국에서 흔히 보든 가게와 같았다. 오늘 간 교회는 생명교회(Church Viva New)이다. 차가 달리고 있는 길가 탁 터진 곳에 철 빔으로 예배당을 지었지만 벽은 막지를 않았다. 아직 자금이 없어서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의자와 전자 기구들은 길 건너 집에 맡겼다가 가져오곤 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우리가 축호전도는 하지 않았다. 여기는 더운 나라여서 우선 지붕만 잘해 놓으면 모이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간호사 자매가 유효 날자가 지난 약들이 있다고 불평을 한다고 사모님이 나에게 말해서, 나는 약을 하나하나 검사하여 날자가 지난 것들을 골라내었다. 대개 날자가 지나도 6개월 안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아서 사모님에게 버리지 말고 따로 가지고 있다가 쓰도록 하라고 했다. 기부를 받다 보니 안 팔리는 것 오래된 것들을 처분하려고 주어서 버리는 것도 적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다섯 가지 색깔, 검은색(죄), 붉은색(피), 흰색(깨끗함), 초록색(자람), 황금색(천국)으로 손목 거리를 만드는 법과 그 뜻을 설명하여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하느라 두 시간 정도를 보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가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후덥지근한 가운데 견디고 있는 우리들을 달래주고 있었다. 12시가 지나자 남은 사람들에게 오후에 오라고 하고 보낸다. 우선 언어가 안 통하니까 누구와 더불어 교제하는 일이 힘들지만, 어울려 교제하면 그런대로 다 통하기 마련이지만 왠지 더위에 지쳐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고등학생인 레베카가 말은 안 통하지만 사전을 가지고 같은 젊은이들과 제일 잘 어울리고 배우고 알려고 노력하고 있어서 보기에 좋았다. 저렇게 활동하여야만 선교지에서 큰 경험을 하게 된다.
▶이레 빠, Erepa
교회에서 fast food으로 점심을 준비하였다. 안남미 쌀밥에 이런저런 튀김을 부패 식으로 먹도록 준비했다. 눈에 띄는 색다른 음식은 “이레 빠, Erepa”라는 것이다. 옥수수 가루로 만든 흰색의 동그란 군 빵이다. 느끼는 특별한 맛은 없지만 먹을 만했다. 중국은 옥수수가 땅을 뒤덮고 있지만, “이레 빠”를 만들어 먹을 줄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옥수수 국수를 만들어 내었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민족마다 먹는 방법이 이렇게 다른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여기는 차진 쌀이라고는 전혀 없다. 한국 사람들은 밥맛을 즐기는 편이지만 안남미는 맛은 없지만, 영양은 똑같고 소화는 더 잘 되는 쌀이다. 오후에 한참 비가 내리면서 시원한 바람결이 불어와서 더위를 식혀주어서 내리는 비가 고마웠다. 여기는 비가 길게 오지를 않는다고 한다. 3시가 되자 사람들이 오기 시작한다. 집회를 하고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우니 살 것 같았다. 저녁에 경건의 시간을 가졌다. 원래 올 때 여기서 하루는 부엌에 페인트칠을 해 줄 계획으로 roller brush들을 사 왔다. 그러나 정선 교사는 오는 팀들이 거의 자매들이고 5명은 어린 학생들 이어서 페인트칠은 쉽지 않다고 여기고 교회나 방문하는 것으로 계획을 했다고 하였다. 사모님이 만들어 주시는 망고 주스는 하루에 몇 번이고 마실 수 있어서 고마웠다. 식탁에는 항상 파인애플, 바나나 등 열대의 과일들을 먹도록 해 주셨다. 오늘 저녁은 하영이가 주도하는 메뉴였다. 주희, 하영, 레베카 이렇게 돈을 모아서 한 것이다. 아침 식사는 사모님과 장을 봐 놓은 것으로 만들었다. 모두 맛이 좋다고 칭찬들이었다. 하영이가 이런 음식을 만든다고 모두 칭찬하여서 대견해했다.
▶ 재래시장 7. 21 목 맑음
아침 6시에 선교사 사모님을 따라 야채 도매 시장에 나갔다. 몹시 분비고 있는 시장을 볼 수 있게 되어서 반가웠다. 중국 사람이 하는 가게에 가서 200g들이 15봉이 든 커피 한 자루를 샀다. 커피 생산지여서 인지 값은 미화 10 여불 밖에 되지 않았다. 오이, 당근 닭을 사서 돌아왔다. 영어도 스페인어도 잘하시는 사모님은 말씀도 잘하시고 약방 감초 같으신 분으로 식견도 넓으시고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에게 약도 주면서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어느 나라에 가든지 시장에 가보는 것을 즐기는데 나는 이 아침에 좋은 경험을 하게 되어서 반가웠다.
▶ Iglesia Unidos 새 생명 교회
아침은 제니스 흑인 자매가 빵을 구웠다. 솜씨가 있었다. 이번에 교회에서 바이오 빵을 만들어 선교자금도 좀 마련하였다고 한다. 오늘 우리가 가는 교회는 Manatial 지역에 있는 Iglesia Unidos, 새 생명교회로 학교에서 30분 거리에 있었다. 여기는 새 생명교회라는 이름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넓은 터에 높은 벽돌담이 둘러있고 입구에 사택이 있고, 예배당은 철 빔을 새우고 지붕만 가리고 벽은 하지 못한 채였다. 사역하는 부부와 인사를 나누고 자매에게 철통에 $20이든 손지갑을 넣어서 주었다. 많이는 돕지 못하지만 수고하는 일꾼들을 조금 위안해 주고 싶었다. 하영이가 어제부터 설사를 하고 건강이 안 좋았다. 의자에 누이고 기도하고 마사지를 해 주는데 사역자 부인 자매가 크림을 가지고 와서 발에 바르고 마사지를 도와주었다. 이 일로 하영이는 점차 좋아졌다. 현지 형제자매들과 짝을 이루어 축호 전도를 나갔다. 우리도 꼬마 딸을 데린 자매와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교회 앞 동리를 한 바퀴 돌았다. 현지 자매는 캐나다에서 약을 가져왔다고 소개하고 약을 타러 오라고 하면서 기회가 되면 짧게 전도를 하였다. 나는 그저 “벤디가”(보통 인사)하는 정도의 인사하고 전도지를 건네주고는 그저 웃는 얼굴로 대했다. 이 동리 언저리에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빈민촌이 있었다. 거의 두 시간 동안 따라다닌 자매의 어린 딸에게 얼음과자도 사 먹으라고 10Vb를 쥐어주었다. 오전에 제법 사람들이 왔다. 다시 3시에 만나기로 하고 오전 일은 마쳤다. 오늘은 축호전도다운 전도를 한 셈이다. 오늘 점심은 take out box(밥곽)로 준비되었다. 점심을 먹은 뒤 정선 교사는 긴 의자를 마주 부쳐놓고 한잠씩 자자고 하여서 그렇게 했다. 우리가 신발을 베고 누웠는데 어떤 형제가 베개를 가져다주어서 정말 고마웠다. 이곳은 바람도 잘 불고 지난 이틀보다는 환경이 좋았다. 선선한 바람과 함께 한잠 잘 자고 나니 몸이 가벼워졌다. 여기서는 좀 가볍게 하루를 지낸 것 같다.
▶ 공원에서의 집회 7. 22 금 맑음/ 비
오늘은 어디 가지 않고 학교 앞 조그마한 공원에서 신학교 학생들의 주최로 집회를 하게 되었다. 아침부터 신학생들이 와서 작은 텐트를 치고 준비를 하는 동안 우리는 현지 형제자매들과 함께 집집마다 들리면서 초청과 전도를 나갔다. 우리 팀에는 이곳 형제들이 셋이나 되었다. 한 집에 들여서 전도를 하는데 나머지는 둘러 서 있어서, 나는 팀을 셋으로 나누었다. 전도하는 두 사람은 놔두고 레베카에게 한 형제와 다른 길로 나가게 하고 우리도 한 형제를 데리고 집집마다 돌다가 마을 안에 작은 공원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곳에 사람들이 많아서 초청과 전도하는 일이 신나게 했다. 여기 사람들은 우선 거부 반응보다는 들어주고 맞이한다는 것이 편하고 좋았다. 그리고 공원에서 청소부 아저씨들을 만나서 초청과 전도를 하고 나니 한 분이 검은 큰 쓰레기 봉지 여러 개를 주면서 우리가 집회를 하고 나면 나오는 쓰레기들을 담으라고 하였다. 점심을 먹고 나니 이게 웬일인가 소낙비가 오후 늦게까지 내리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더위에 시달린 몸을 푹 쉴 수 있었다. 비는 저녁이 되기 전에 그쳤다. 그래서 저녁 집회를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공원에 전등을 밝히고 집회를 하게 되었다. 오전에 건강 상담을 받은 사람들과 주위 교회 형제자매들이 와주었다. 이것으로 여기에서의 마지막 봉사와 사역이었다.
내 자매가 선교사 사모를 도와서 부엌일을 도맡아서 했다. 널려 있는 부엌살림을 정리 정돈해 드리고, 깨끗하게 해 놓으니 현지 사모님이 너무 좋으셔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계셨다.
▶ Muchima(무치마) Beach 7. 23 토 맑은/한때 비
오늘은 바다에 가는 날이다. 우리 팀은 정선 교사와 사모님 차에 나누어 타고 Beach로 가는 길에 선물가게들이 늘어선 곳에 가서 토속 기념품들을 샀다.
그리고 가다가 모래사장이 넓은 Beach에 들려서 잠시 돌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넘어 수도 카라카스로 가는 국도로 가다가 산길로 나가 바다에 이르니 조그마한 포구가 나오는데 요금소가 나온다. 정 선교사가 잠시 말하더니 몇 푼 건네주기에 입장료를 내는 줄 알았는데, 입장료는 없고 환경 관리를 위하여 알아서 내 달라고 한단다. 원래는 입장료를 받았다는데, 차베스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입장료를 없앴단다. 그 뒤부터 관리를 잘 안 하여 지저분해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곳은 Muchima Beach인데, 발음이 '묻지마'와 비슷해서 재미있었다. 여기에 해양연구소가 있어서 정 선교사가 이곳 수산 대학에서 교수 현역 시절에는 이곳을 자주 찾던 곳이라고 한다. 정 선교사님이 한 배를 흥정하여 우리를 실은 작은 배는 멀리 포구 밖 까지나 가 대서양에 연하여 있는 아름다운 한 섬에 이르렀다. 나는 이 아름다운 대서양에 몸을 담그고 헤엄을 치며 하루를 즐길 수 있었다. 수영을 마칠 즈음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와 함께 바다에서 노는 것도 한 멋이었다. 사모님이 그곳 음식점에서 우리를 위하여 몇 가지 음식을 해 오셔서 모두 즐겁게 나누어 먹었다. 음식을 해 파는 곳에 가니 커피도 파는데 플라스틱 컵이 너무 작아서 그저 몇 목음 밖에 되지 않았다. 두 잔을 사 가지고 와서 정 선교사와 함께 마셨다. 오후 3시 반경 우리를 데리러 배가 왔다. 흩날리는 빗방울을 맞으며 우리는 다시 오지 못할 아름다운 섬을 뒤로 보면서 떠나고 있었다.
밝은 낯에 시간이 있어서 밖에 나가 주위를 돌아다녀 보려고 해도 큰 철문을 열고 누군가 또 닫고 잠가야 하고 다시 또 열어 주고 닫아주고 하는 불편도 있고, 나가면 연락할 수 있는 손전화가 없으니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어서 불편했다. 또 더위서 활동을 하다가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안에 들어오면 맥이 풀려서 다시 나가고 싶지 않기도 했다. 형편이 되는 사람들은 에어컨이 있는 생활을 하지만,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겨우 선풍기나, 아니면 그냥 지내고 있었다. 한국의 LG나 삼성 에어컨과 TV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저녁은 우리가 가지고 간 잡채를 하는데 정 사모님이 자기는 한국서부터 직장생활만 해서 음식을 잘할 줄 모른다고 하면서 잡채 만드는 것을 배운 적이 없는데 오늘 배워야겠다고 했다. 정 선교사 내외가 100g짜리 커피를 사서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 Iglesia Bautista Quaan La motainita 교회 7. 24. 주일 맑음
아침 우리는 정 선교사 차로 이틀 전에 갔던 개척교회를 가는데 길에 군인들이 검문들을 하고 있어서 교통이 복잡해지기도 하였다. 주일예배 전, 성경공부 시간이어서 인지 많이 모이지 않았다. 사역자 어린 딸이 찬양을 하는데 얼마나 은혜롭게 부르는지 가사를 전혀 몰라도 은혜가 되었다. 정 선교사가 나를 불러서 생각도 없이 앉아 있다가 나갔다. 한 10여분 시간을 주어서 마치니, 다른 교회로 가야 한다고 급히 떠난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오늘 주일 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하루 알정을 알려주지도 않은 채 당신 마음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20여분 달려온 교회는 처음 온 교회로 교인들이 많아서 작은 건물에 꽉 찼다. 찬양할 때 한 무용수가 긴 수건을 들고 앞에서 흐느적거리며 무용을 하고 있었다. 대단히 활발하고 잘 짜여진 교회 같았다. 예배를 마치고 교회에서 음료수와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들어 손님들을 대접해 주어서 고마웠다. 나는 이 교회 십 대 청소년들과 함께 잠시 거리에 나가 거닐었다.
▶ Cumana를 떠나다
점심을 나누고 오후에 우리는 가까운 도시 Bacelonia로 가서 국내선 날틀로 카라카스에 가서 밤 12시에 토론토행 날틀을 타도록 계획이 되어 있어서 떠날 준비를 하였다. 2시에 버스가 왔다. 80Km 거리이지만 산을 타고 오르내리는 길이어서 두 시간 반이 걸려서 이곳 공항에 닿았다. 이 나라는 수도로 가는 고속도로는 없다. 차베스가 대통령이 되면서 정치는 좌경화되면서 국민들이 잘 먹고살기 위해서 고속도로 건설과 관광지 건설보다는 복지사회를 이루는데 역점을 두어왔다고 한다. 석유 대 생산국임에도 불구하고 가난은 전 정권 때보다도 못하다고들 한단다. 바다가 보이는 산 엽을 따라 굽이굽이 돌고 돌아 내리면서 산과 바다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가다가 몇 곳은 잠시 서서 사진을 찍도록 해 주어서 모두들 기뻐했다. 카라카스와 꾸마나 가운데 있는 도시 바로세로나 시내를 지나면서 새로운 도시를 볼 수 있는 것만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정 선교사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다주느라 수고하셨다.
우리 일곱은 표에 있는 대로 2번 gate에서 기다리면서 공항을 들러보고 커피를 한잔 사 마셨다. 한참을 기다려 우리 날틀 시간에 2번 gate에 사람들이 줄을 서므로 우리도 섰다. check in 하는데서 우리를 따로 한쪽에 있게 하고 뭐라고 스페인 말로 하는데 우리 가운데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다. 우리 모두는 자리가 앞자리어서 좀 늦게 태우려 나 하고 기다리다가 다시 들어가려고 하니까 1번 Gate으로 가서 기다리라고 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왜 이런 말을 처음부터 모두 알아듣지를 못했는지 의아했다. 처음 직원은 스페인 말로 손짓으로 저쪽을 가리키니까, 앞에 있던 분들이 카운터 옆에 서니까 모두 다 그렇게 된 것이다. 1번 Gate에 가서 한분에게 물으니 그분이 영어를 잘해서 이곳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분들도 우리와 같은 날틀이었다. 여기는 Gate와 상관없이 날틀이 어디에 와서 서는지를 보아야 한단다. 이제야 모두 이해가 되었다. 한 시간이나 늦게 떠나 한 20분 날아 카라카스에 내렸다. 가방들을 끌고 국제선으로 갔다. 토론토행 check in 줄이 얼마나 긴지 한심하기만 했다. 여기는 또 다른 나라와 달라서 check in 하기 전에 미리 여권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자외선 기계로 검사를 하고 페이퍼에 쓰고 딱지를 여권에 붙이고 가방에도 스티커를 붙여준 뒤에야 check in counter로 가게 한다.
우리 팀이 마지막 몇 사람 앞에서 일이 끝났는데, 문제는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은 자리가 예약이 안 되어 있다고 주희를 포함하여 몇 사람이 stand by를 시킨다. 우리 팀 주관자가 똑 같이 예약을 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되는지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되었다. 잠시 기다린 뒤에 자리가 되어서 저녁을 먹을 시간도 없이 들어갔다. 탑승구 가까이에 chicken 집이 하나 있는데 사람들이 몰리고 있었고 시간은 없고 먹기는 해야 하고 가장 빨리 되는 것이 감자 칩이어서 그거 한 봉으로 우리 모두는 저녁을 대신했다. 지금은 7월 25일 월요일 0시 5분 Air Canada는 북으로 향하여 밤하늘 길을 달리고 있었다. 졸며 자며 깨며 오는 밤길은 몹시 피곤하였다. 밤 3시가 되어서 시장도 하고 잠도 안 와서 가지고 간 컵라면을 먹고 싶어서, 안내양에게 뜨거운 물을 좀 부어 줄 수가 있느냐고 물으니 친절하게 가져가서 물을 담아 쟁반에 담아 가져다주어서 고마웠다. 나는 기내에서 컵라면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고 아주 반가웠다. 입국 신고서는 가족이 한 장만 쓰면 되니까 주희에게 물으니 자기도 용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스스로 쓰고 싶어 해서 하늘이와 함께 쓰도록 했다. 이렇게 아이들이 다 커가고 있었다. 처음 경험하는 단기 선교 여행으로 아이들이 좋은 영적 경험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6시 50분 Pearson Air Port에 내렸다. 이렇게 일정을 마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웠다.
김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