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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한 마당/조선 회상

Dr. Sherwood의 조선회상

† "조선 회상"

캐나다 출신 Hall 가문의 의료선교사로서 두 대에 걸쳐  한국 사람을 극진하게 사랑하다가 한국 땅에 묻힌 훌륭하고  아름다운 분들의 이야기이다. 

                          

 

▶ Dr.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5)

캐나다 출신으로 1887년 무디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 가난하고 불행한 아시아인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결심하고 뉴욕의 벨러뷰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빈민의료선교활동을 하다가 1891년 12월 미국 북 감리회 의료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는다. 1893년 평양 서문동에 땅과 집을 사서 진료소를 차리는데,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평양감사 민병석은 선교사 추방명령을 내려서 그의 의료선교활동을 방해했고, 평양 주민들의 반대도 심했다. 그러나 홀 선교사는 진료소를 열어 꾸준히 사랑으로 병자들을 치료하는 동안 점차로 주민들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 부상당한 군인들과 조선인들을 치료하다가 과로로 말라리아에 걸리게 되어서 결국 서울로 돌아오던 중에 발진티푸스까지 걸리면서 제임스 홀 선교사는 1895년 11월 24일,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34세로 아까운 삶을 마감하니 애석하기 이를 데 없다. 

 

 

Dr.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로제타는 의료 선교사, 교육자이다. 미국 출신으로 선교지에서 봉사하기 위하여 의대를 졸업하고  빈민의료 선교를 하다가  미국 북감리교 해외선교회에서 한국 의료선교사로 임명을 받는다. 25살의 처녀 의사로 1890년 10월 조선에 와서 조선 여성들을 위해 세워진 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에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윌리엄 제임스 홀과 조선에서 결혼한다. Dr. 로제타는 44년 동안 조선여성을 위하여 선교와 교육에 힘쓰며 살았다. 
♣ 보구여관(保救女館)은 지금 여대 자리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병원으로, ‘보호하고 구하는 여성들의 집’이라는 뜻으로 명성황후가 이름을 지어 준 곳이다.

              

                                      

아들과 함께 Dr. 로제타는 1895년 미국으로 돌아가서 딸을 낳는다. 그리고 남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미국에서 모금을 하면서, 조선의 눈먼 사람(맹인)들을 위하여 점자학교에서 점자를 배운 뒤 1897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다. 모금한 돈으로 평양에서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紀忽) 병원”을 세운다. 이것은 한국에서 첫 현대식 병원이었다. 그리고 세 식구는 이질에 걸리게 되는데 불행하게도 사랑하는 딸(에디스)을 잃는다. 이런 아픔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녀는 병원 일에 헌신하였다. 그녀는 맹인 농아학교를 새우고, 한글용 점자 개발, 서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도 세운다.(현 고려의대), 동대문병원(현 이화여대 부속병원), 인천 기독교병원, 인천 간호보건대학 등을 세우는 엄청난 일을 한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은 김점동(박에스더)이라는 한 조선 여성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서 의학대학에 보내어 1900년 에는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이렇게 43년이나 끊임없는 헌신의 노력으로 수많은 한국인의 영혼과 육신을 구원하는 일을 하다가 의료사역에서 은퇴하고 1933년 미국으로 돌아가 조선 선교를 지원하는 일을 하다가 1951년 86세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그녀는 "평양의 오마니"라 불렸고, 인도에 테레사가 있었다면, 그녀보다 50년 전 조선에는 Dr. 로제타가 있었다.  

            

 

   

Dr. 로제타의 노력으로 조선어 점자를 만들어져서 어둠에 갇힌 영혼들이 빛을 찾게 되었다. 

 

Dr. Sherwood Hall와 Dr. Marian 

Hall 가문의 2대 Sherwood Hall(셔우드 홀) 부부는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였다. Dr. 셔우두는 어머니가 선교사 자녀들을 위하여 평양에 세운 외국인 학교 중학교를 나온 뒤 토론토 의대를 졸업한다. 그가 특별히 결핵 전문의가 된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이모 같이 다르던 조선 첫 여의사 박 마리아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였다., 부인은 산부인과 전문의였다. 조선이 왜인의 발아래 짓 밝히며 신음하고 있던 1926년 미국 북감리교회의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황해도 지역에서 의료선교사로서 크게 활동하였다. 

             

 

1932년 처음으로 결핵 퇴치를 위하여 크리스마스 실(seal)을 만들어 기금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 공로로 왜국의 훈장까지 받았지만, 1940년 씰을 통해 모금하는 일들을 못 마땅히 여긴 일본의 음모로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벌금 5000엔을 물리고 추방시켰다. 그들은 인도에서 폐결핵 퇴치 활동을 하면서 일생을 보낸다. 

         

                                   ♣  Dr. 셔우드에 의하여 만들어진 첫 크리스마스 씰

 

국민훈장 "모란장"

늦게나마 1984년 한국 정부에서는 Hall 일가의 봉사와 헌신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국민훈장 ‘모란장’을, 그리고 서울시에서는 명예시민권을 수여하기로 결정한다. 인도에서 은퇴하고 캐나다 밴쿠버 부근 리치먼드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던 노부부에게 한국결핵협회가 이 소식을 전하면서 한국으로 초청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한다. 이 기쁜 소식을 듣고 평생 청빈하게 살던 노부부는 변변하게 입고 갈 옷이 없었다. 수 십 년 동안 변변한 양복 한 벌을 가지지 못했던 Dr. 셔우드 홀은 아는 분들의 모금으로 양복 한 벌을 마련하고, Dr. 메리언도 입고 갈 옷은 은퇴한 의대 동창 친구들에게서 빌렸다. 노부부는 44년 만에 공식적으로 다시 찾은 한국에서 감사와 우정 어린 인사를 받았다. 한국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으로부터 모란장을 받고, 서울에서 태어난 셔우드 홀에게는 서울시에서 증정하는 서울시 명예시민권을 받았다. 이런 기쁨을 잠시 누리다가1991년 캐나다에서 각각 98세와 95세를 일기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그들의 유언에 따라 한 줌의 재로 한국에 돌아와서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아들이 묻혀 있는 양화진에서 안식하게 된다. 한국 사람들을 극진히 사랑한 이 분들이야 말로 한국 교회사에 기리 남을 빛이며, 우리 신앙인들과 나아가서 이 나라의 큰 자산이다. 

♣ 사회에 기여한 공로로 받는 모란장은 2등급으로 이 분들에게는 1등급인 태극장을 수여해도 모자랄 것이다.  

 

양화진에 묻힌 홀(Hall) 일가

1.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 중 최초로 순직한 Dr. 윌리엄 제임스 홀(Dr. William James Hall)

2. 그의 아내인 Dr. 로제타 셔우드 홀(Dr. Rosetta Sherwood Hall)

3. 아들인 Dr. 셔우드 홀(Dr. Sherwood Hall)

4. 며느리 Dr. 메리안 홀(Dr. Marian Hall)

5. 셔우드 홀의 여동생인 에디스 마거리트 홀(Edith Margaret Hall)

♣ 어린 시절 사망한 에디스를 뺀 나머지 4명이 이 땅에서 봉사한 기간을 합치면 무려 73년이 된다.

◈ 사진과 일부분 자료는 사이트 제공 

김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