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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한 마당/Ross와한글성경

John Ross의 조선성경

John Ross선교사와 조선 성경 번역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는 스코틀랜드 북부 바닷가 마을 Rarichie(라리키)에서 태어나다. 그는 글래스고 대학교와 에든버러의 신학교에서 수학을 하고 1872년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 해외선교부의 중국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 30세로 갓 결혼한 아내 Stewart와 그 해 8월 23일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중국 개척 선교사 윌리엄슨 선교사의 안내로 요령성 우장에 머물게 된다. 우장은 지금 영구(營口) 시로, 그때 그곳은 해외 교역의 중심지요, 조선 선교의 교두 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 고려문이라는 장터가 설치되어 있어서 조선 장사꾼들이 모이는 곳으로 로스 선교사는 이곳에서 조선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가 있었다. 1873년 가을, 처남이자 동료인 맥킨타이어 선교사와 함께 한 달 정도의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우장(영구)에서 봉천(선양)을 거쳐 압록강 상류인 임강(臨江)에 이르렀다. 임강은 장백현 가까운 곳이며 백두산이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로스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바라보면서 조선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배를 빌려 조선으로 데려다 줄 안내자를 구할 수 없었다. 로스 선교사가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의 대동강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외국인이 조선에 들어가는 것은 생명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할 때였다. 그래서 로스는 봉천(선양)에 정착하여 한족 선교에 힘쓰면서 조선어 성경을 번역하게 된다.

                                 

John Ross 선교사

 

조선어 성결 번역 동기
로쓰는 봉천(심양)에 정착하면서 중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지금의 동관 교회를 개척한다. 아울러 학교와 사회복지 시설을 세워 중국인 사회 깊숙이 들어가 선교활동을 한다. 그리고 그는 비록 한국은 못 가지만,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조선어로 된 성경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조선어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조선어를 배워야 된다고 생각한다. 조선어 선생을 찾기 위하여 1876년 봄에(4월-5월) 조선 사람들이 모이는 우장의 고려 문을 두 번째 방문하여서 기적적으로 이응찬을 만나게 되어 조선말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연이어 이응찬 김진기, 서상륜, 백홍준 등이 개종하여 예수님을 믿는 한국의 첫 기독교 사람들이 되어 성경번역에 함께한다. 로스 선교사가 한국어를 배워 외국 선교사들을 위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조선어 문법책(Corean Primer)과 조선 역사책을 펴냈다. 그는 중국어도 열심히 배워서 중국어 공부를 시작한 지 5개월 만에 중국어 설교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스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가운데 가족을 잃는 큰 슬픔을 겪는다. 결혼 한지 1년 만에 그의 아내를 잃고, Isabella와 재혼하여 여덟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한국어 성경을 번역하는 동안 네 명의 자녀를 잃었지만, 복음의 열정은 꺼지지 않았다.

 

번역 대본?
조선어 성경 번역대본은 모리슨이 번역한 중국어 문리역 성서(文理譯聖書)이다. 먼저 조선인 번역자가 중국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로스가 그리스어 성경과 영어 성경을 대조하여 고치면서, 그리스어 성구 사전 등을 참고해 조선어 환경에 맞는 단어나 어휘를 통일적으로 고쳐서 완성했다. 그러나 문제는 첫 조선어 성경은 로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준 이응찬과 번역자들이 모두 평안도 사람들이어서 성경본문은 평안도 사투리 어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완성되었고, 신약전서는 1887년 번역이 완료되어 조선으로 보내져 “예수셩교젼셔”라는 이름으로 펴냈는데, 이것이 첫 조선어 성경이다.

            

              

♣ 평안도 사투리로 번역된 누가복음 제 1장

 

존 로스 선교사가 번역한 첫 한글 성경은 1882년 만주의 봉천(선양) 문광 서원(文光書院)에서 펴낸 <예수셩교젼서 누가복음젼셔>이었다. 1887년에 가서야 신약 전권이 번역되어서 <예수셩교젼서>란 이름으로 펴내 졌다. 

 

문리역 성서(文理譯聖書, Wenli Bible)
중국의 첫 성경이다. 영국 성서공회에서 보냄을 받은 중국의 첫 기독교 선교사 모리슨(Robert Morrison,馬禮遜, 1783~1834)이 킹 제임스 영어 성경을 대본으로 하여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는 1807년 중국에 도착한 뒤 성경 번역을 시작하여 1913년에 신약성경 번역을 완성하였고 1919년에 구약 번역을 끝내고, 1923년에 중국어 신구약 성경인 “신천 성서”를 펴냈다. 그리고 1839년에 1차 개정 역이 나오고, 1856년에 2차 개정 역으로 완성된 중국어 성경이 “문리역 성서(文理譯聖書, Wenli Bible)”이다. 지금 중국교회가 사용하는 성경이다. 중국어 성경 번역 대본이 King James Version이어서 문리역 성경의 본문은 King James 성경과 같다. 1885년 일본에서 이수정도 이 원리 신약성경을 대본으로 하여서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다.    

                                  

新約全書, 聖書公會印發, 400p, 1904년 549쇄 (중국 첫 신약성경)/ 新約聖書 文理串珠(신약성서 문리관주), 458p, 1906. 영국성서공회 686판

 

조선으로 보내진 첫 한글성경

1882년 조선어로 된 누가 복음과 요한복음이 번역되어 조선으로 들여보내기 시작하였다. 검문검색이 심하던 때여서 성경 책 낱장들을 뭉쳐서 공 같이 둥글게 만들어 짐 속에 숨기거나, 낱장들을 솜과 함께 바지 속을 만들어 입고 조선으로 건너가서는 산속에서 낱장들을 다시 맞추어 성경책을 만들어 돌리곤 했다고 한다. 이렇게 성경을 조선에 들여보내던 중 1885년 조선과 미국이 국교가 맺어지자, Ross선교사는 서울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1887년에는 3만 권의 성경을 들여왔고 12분의 장로를 장립 했다. 그 뒤 그는 한국 선교의 모든 권한을 미국에 넘겨주고 1888년부터 중국 선교에 전념하였다. 1889년 10월 22일 800명이 앉을 수 있는 동관 교회 예배당을 지었다. 동북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역사적인 교회가 되었다. 지금은 약 6000여 명이 몇 부로 나누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렇게 한 곳에 많이 모이는 것은 가까운 곳에 교회를 허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Ross 선교사의 마지막 삶

조선과 중국을 사랑하여 일생을 바치던 Ross선교사님은 노환으로 고향에 돌아가 요양을 하면서 영국과 중국 문화 선교 지원에 힘쓰다가 1915년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동관 교회는 Ross선교사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비(1.6m×1m)를 세웠다. 이 기념비를 보고자 했지만 볼 수는 없었다. 문화 혁명의 거센 바람이 불어올 때 이 기념비를 보존하기 위하여 강대상 벽을 뜯고 그 안에 비를 넣고 벽을 발라서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이 기념비가 반세기 동안 어둠 가운데 있다는 것은 복음은 중국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어두움 가운데 가려져 있음을 뜻하고 있었다. 이 기념비가 밝은 빛을 보게 되는 날, 신앙의 자유가 오게 되는 날이라고 믿는다. (지금은 이 기념비가 빛 가운데 나와 있다)

나는 너무 아쉬운 마음에 노 목사님에게 기념비에는 무슨 글을 쓰여 있느냐고 물었더니 비문에 적힌 글을 한 장 주셨다. 목단강 사범학교 조선족 교수에게 부탁하여 번역하여 보니 너무 귀한 내용이어서 모두와 나누어 보려고 여기에 옮겨본다. 

                   

Dr. John Ross 선교사 추모 비문

번역된 추모비문
신학 박사 John Ross는 스코틀랜드 사람이다. 1841년에 탄생하여 신학교를 졸업한 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멀리 바다를 건너 중국에 와서 전도하였는데 그때가 31세였다. 교회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 같이 천신만고를 다하였으며 도학(道學)의 기업(基業)을 닦는데 까지 많은 공적을 쌓아 올렸다. 그는 봉천, 요양 그리고 서울 등지에 교회당을 설립하였으며, 그는 멀리 조선 등지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또 고아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아동들을 교육 양성하였다. 그리고 성경책을 많이 번역하였으며 거기에다 많은 해석 문을 달아 주었다. 신학교를 설립하여 졸업하고 고시에 합격한 중국 목사를 10여 명이나 길러 냈다. 선생님께서는 고생과 피로의 과도로 70세에 귀국하여 휴식하였다. 귀국한 후 계속하여 피곤을 아랑곳하지 않고 중국 선교에 정진하다가 1915년 가을 75세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 소식이 동광교회에 전해 오자 교우들은 추모의 감정을 금치 못하였으며, 밤낮으로 그를 잊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찬송 시를 써서 그의 불후의 일생을 기념하고자 돌비에 새겼다. 


         

                                                         

위대하다 선량한 목자여

당신의 본성은 인의하고 자애로우며

하나님께 충성하고 교우를 사랑했으며

 

복음 사역을 위하여 용감히 헌신했노라

자기의 조국을 멀리에 두고 38년을 하루와 같이

구원의 은혜를 전파하려 멀리 요영, 심양으로

전도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은혜를 전하니

방방 곳곳에서 모두 모여들었더라

 

천신만고로 사방을 돌며

고생을 무릅쓰고 마음 변치 않으니

동북 삼성의 모범이라 할지어다.

그 은혜와 덕성을 우리 세대에 비춰 주고

우리를 가르쳐 미로에서 나오게 하였으며

하나님의 복음을 온 누리에 전파하다가

70 고령에서야 휴식하셨네.

 

덕망이 고상하고 은혜가 하늘 아래 깔렸으며

사역은 성취되고 사람은 세상을 떠났네,

고이 잠드시라 광명정대한 목사님이여

영은 하나님께로 갔으니 하늘이 기뻐할 것이며

당신의 선행은 모범이 되어 만세에 널리 전해질 것이로다.

도학의 수많은 제자들은 당신을 길이 추모하며

당신의 위업을 돌에 새겨

문장 지어 읽어보니 감개무량하고

마치 당신의 웃는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듯,

당신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며

또한 당신의 풍채가 새로워지는 것 같구나

그리하여 이 찬송 시를 써서 스승님께 드려 우리의 추모의 정을 표하는 바입니다.

 

♣ 나는 이 비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떠난 뒤 형제자매들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사진자료 사이트에서 

 

김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