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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여행기/소련연해주선교

2. 우수리스크 고려인 선교지

♣ 블라디보스토크  9. 21 1995

하바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거리는 650Km인데, 열차는 밤새 달려서 아침 9시 열차는 종착지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에 도착했다. 떠나기 전 김 선교사가 준 성경책들이 욕심이 나서 보따리 하나를 더 만들었더니 얼마나 무거운지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역 밖으로 나오는 데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왜 이리 무리하게 고생해야 하느냐 하는 후회도 해 보지만 받을 자들의 즐거워하는 모습들을 보니 또 힘이 났다. 밖에 나와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젊은 감리교 박 선교사가 나와 주셨다.

                     

그 분 차에는 학교로 가는 사모님과 신학교에 입학을 시키고자 하는 소련 형제가 타고 있었다. 사모님을 학교에 내려주고 신학교를 찾아가다가 한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았다. 내가 도착 후 24시간 안에 등록을 하지 않았다고 55,000 루블(U$11) 벌금을 내야 한다고 해서 물고 영수증을 받았다. 사실은 하바롭스크에서 등록을 하고자 김 선교사님이 나의 소련 비자를 학교 사무직원에게 주면서 경찰서에 가서 등록을 받아 오라고 했는데, 그분이 내 비자를 보더니 여기 방문 행선지가 기재되어 있어서 안 받아도 된다고 해서 그런 줄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여기도 무슨 원칙보다는 돈을 뜯어먹는데 더 열을 올리고 있는 듯싶었다. 시내를 돌아보지는 못했고 김 선교사가 신학교를 찾느라고 헤매고 있어서 한 시간 정도 여기저기 헤매는 동안 시가지를 돌아보았다. 소련 형제는 나보고 등록을 하지 않으면 비자를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해서 무슨 비자를 빼앗기는 일도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밧 선교사는 신학교를 찾아 헤매다가 찾지를 못하니 답답해하고 있었다. 나에게 오늘 중국으로 가겠느냐고 묻는다. 원래는 여기서도 며칠 머물면서 돌아보고자 했는데 방금 벌금 무는 것을 통해서 받은 굳은 인상과 몰려오는 피곤함이 나를 번거롭게 하고 있었다. 어디 여관 같은데 데려다 달라고 하고 싶지만 눈치를 보니 나를 하루라도 데리고 있으려고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여기서 나 혼자 움직이다가 또 검문을 당하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서 중국으로 갈 수 있으면 가겠다고 했다.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 (브라디보드스크에서 우수리스크까지는 100Km

신학교 찾는 것을 그만 두고 나를 어디 역으로 데려다주는 줄로 알았는데 아주 오래 달려서, 조심스럽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우수리스크로 왔단다. 여기가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했다. 박 선교사가 나의 계획을 물어서 내가 일하고 있는 중국 선교지가 소련 국경선 쪽이라 소련 쪽의 중국 국경선 부근의 사정을 돌아보고자 하는데, 우수리스크에 가서 머물고자 하는데 아는 분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분은 지금 나를 어떻게 인도하여야 할지를 몰라서 한참 생각하다가 우선 우수리스크에서 고려인들을 위하여 선교를 하고 있는 자기 교단 황 선교사 아파트로 갔다. 선교사 사모만 있었는데 목사였다. 급히 온 우리들을 위하여 점심 대접을 잘해 주셔서 고마웠다. 선교사님은 어디를 가셨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는 눈치가 이상했다. 오는 길에 박 선교사는 나에게 남편 목사는 여성 관계로 이혼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한국에서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고려인 여자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단다. 그래서 지금은 부인 목사가 고려인 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하면서 선교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교회 사무실에서 두 고려인들에게 칼로 위협을 받고 36만 루블(U$ 110 정도)을 강탈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점심 뒤 김 선교사는 좀 부드러워져서 이야기도 하고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 졌다. 이 분은 담배를 피우는 목사로 기회가 나면 어딘가 사라졌다가 오기 바빴고, 가까이 오면 담배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나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담배를 배워서 고등학교 태권부에서 활동할 때는 담배를 피우는 우리들은 자주 학교와 시달렸고 드디어 며칠 정학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전쟁을 겪은 우리로서는 그때 그런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은 지 6개월 뒤에 담배를 끊게 되었다. 이 분이 담배 피우는 그 마음을 나는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국 기독교의 문화가 금연 금주를 하는 전통이 있다고 보면 목사님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끊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분 자신은 모두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게 그늘지게 살고 있어서 안 되었다. 한국 교회는 금연 금주가 율법 화 되어 있어서 오히려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되기도 하고, 기독교 믿음을 거부하기도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먹고 마시는 일에 자유로운 천주교를 좋아하기도 한다. 마침 황 선교사가 중국서 온 조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양 선교사를 소개하여 주셔서 박 선교사는 나를 그분에게로 데려다 주어서 그 분과 함께 일주일을 머물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 우수리스크 조선족 신학교

우수리스크시에는 선교사들이 네 분정도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양 선교사는 이곳 사범대학에서 한국어 책임자로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선교 일을 하고 있었다. 극동 지방 소련 학교에서는 한창 한국어를 배우려는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사범학교에 한국어과를 두고 한국어를 가르칠 학생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양 선교사는 넓은 밭이 딸린 주택을 하나 사서 예배당과 성경 학교를 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우수리스크로 장사나 일하러 온 조선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2년 과정으로 공동체의 생활을 하면서 가르치고 훈련하고 있었다. 여덟 사람들이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중국 가정교회를 위하여 지도자들을 가르치는 귀한 일을 하고 있어서 고마웠다. 이곳까지 데려다주느라 수고한 김 선교사와 소련 형제를 보냈다. 오후 1시 수업이 있어서 들어가 강의를 들으면서 바로 이런 일을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양 선교사로부터 그분이 하는 중국 선교에 대한 말을 들으면서 바로 내가 하고자 하는 말들이었다. 양 선교사의 8인승 차는 소련 기사가 운전을 하고 있었다. 양선 교사의 아파트에 돌아오니 어머니와 사모님이 반갑게 맞이하여주셨고 한식 저녁을 준비하여 주셔서 고마웠다. 양 선교사는 사범대학에서 한국어 선생으로 비자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오늘 양 선교사를 통해서 소련선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양 선교사가 손님을 위하여 준비된 옆 아파트에 가서 쉬도록 해 주었다. 벽에 붙은 지도를 보면서 양 선교사에게 여기저기 가보고 싶으니 내일 할머니나 누구든지 한 분을 부쳐 달라고 청했다. 내가 한 손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여기도 가서 보고자 했더니, 자기가 그곳에 교회를 시작했는데 너무 멀고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내가 우수리스크에서 일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어렵지 않다고 했다. 비자는 적당한 고등학교에 한글 선생으로 취업을 하면 된다고 했다. 만일 내가 그곳에서 일하기를 원한다면 전에 자기가 얻어 놓은 예배당 건물과 사람들을 소개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소련에 온 뒤로 처음 느껴 보는 희망스러운 마음이기도 했다. 과연 여기에서 내게 향하신 주님의 뜻은 무엇인지 몹시 알고 싶어 져서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다. 양 선교사님의 어머니는 한국 침례교회에서 보냄을 받은 분으로 든든한 동역 자셨다. 손님인 내가 있어서 인지는 모르지만 아드님을 꼬박꼬박 목사님이라고 받들면서 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어쨌든 존경할만했다.

 

우수리스크 돌아보기  9. 22 금

오늘은 김금숙 할머니를 모시고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이 할머니로부터 어렸을 때 부모와 함께 중앙아시아로 끌려가서 버림을 받으며 고생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려인들의 삶의 애환을 짐작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 우수리스크지역은 항일투쟁을 하던 독립투사들의 활동 무대여서 많은 흔적들이 남아 있을 텐데, 아주 어렸을 때 떠났다가 이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아낙네여서 아는 분들이 그리 없었다. 그러나 자료에서 항일투사 이재만 선생의 생가가 있다는데 찾아보지 못하여 섭섭했다. 그 집은 유적지로 보호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로부터 여기 사정도 듣고 많은 이해를 하게 되었다. 여기도 중국 시장이 있어서 가 보았다. 중국서 온 조선족 장사꾼들이 역시 많았다. 나는 중국 국경 도시인 수분하 시에서 온 조선 아주머니에게 그곳 사정과 형편을 묻고 또 소련 국경 도시인 거청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여기도 소련사람들이 입고 쓰는 모든 생필품들이 중국산들이었다. 넓은 시장을 돌아보는 일은 재미있었다.

 

소련침례교회

거리를 지나다가 조그마한 소련 침례교회가 있어서 들어가니 낯에 소수가 모인 집회가 끝나고 있었다. 소련은 기독교회 중에 그리스 정교회가 소련으로 들어가 소련 정교회가 되었다. 제정 러시아 때부터 정교회는 소련의 국교회 역할을 했다. 그리고 소련에는 침례교회가 정교회 다음으로 지배적인 복음 교회였다. 소련도 교회에 대한 핍박이 컸는데 소련 정교회는 레닌이 주도하는 볼셰비키 혁명 후 사회주의 시녀 노릇을 하는 종교로 타락했다. 정부는 모든 종교에 대하여 정부에 등록하도록 했다. 그때 침례교의 일부는 등록을 하여 정부의 그늘에 있게 되었고 정부의 지배를 받으려고 하지 않는 복음주의 침례교도들은 순교하거나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지면서 신앙의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 특히 스탈린 시대에 와서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극심했는데 그 때 정부의 종교 정책을 반대하고 등록하지 않은 침례교도들은 상당히 핍박을 받았다고 한다. 내가 서독 교회의 초청으로 한인 간호사 광부 아저씨들을 위하여 선교 일을 하고 있던 1980년에 서독 복음주의 연맹에서 지하 감방에 갇혀 있는 소련 침례교 지도자를 소련 정부에서 요구하는 돈을 주고 서방으로 데려온 적이 있다. 소련의 핍박 속에서도 복음은 전해지고 믿는 자는 계속 늘어만 갔다. 그들을 수용소에 격리시켜 놓고 힘든 노동을 시키지만 거기에서 복음을 전하여 수용소는 또 하나의 교회의 집단으로 만들곤 했다. 영하 40-50도의 엄동설한에 회심 자들은 말씀을 순종하고자 감시의 눈을 피하여 밤 2시경 연못이나 강의 얼음을 깨고 침례를 받는 일들이 일 년 내내 끊이지 않고 있었다고 하니 용감한 소련 신앙인들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등록을 하지 않은 무리들은 공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으므로 이번 주는 여기 다음 주는 저기서 숨어 모이면서 긴 세월을 인내하면서 투쟁하여 왔다.

 

내가 처음 방문한 교회가 소련 개혁 침례교회로서 이런 고난을 받던 교회인데 지금은 자유롭게 모이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했다. 8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공산주의가 무너지던 그 날, 그 땅에 자유의 세상이 오던 그 날, 고난과 역경에 처해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목 놓아 울면서 오늘의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미칠 듯이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형제들이 고난 받고 있는 동안 권력의 시녀가 되어 진리를 접어두고 자신들의 현세적 안녕만 추구하던 세속적인 신앙인들은 부끄럽고 후회막심한 날이었다. 어두운 장막이 거치고 밝은 해 아래서 악의 세력과 싸우던 믿음의 사람들이 악의 세력에 아부하던 자들을 받아 주지 않음으로써 형제들이 서로 하나 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안게 되었다. 연해주 지역 40여 명의 선교사들이 소련 목사들을 초청하는 특별한 자리를 마련했는데 이 두 진영의 사람들이 서로 악수도 하지 않고 말도 하지 않더라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한 시대의 정치 상황은 우리를 참 어렵게 할 때가 있다. 일본 침략 주의자들 아래서 신사 참배를 함으로써 일신의 영달을 누린 사람들, 중국 삼자 연맹에 가입하여 현세의 안녕을 누린 사람들, 월남에서 정부 정책에 충실한 사람들이 진실한 형제자매들을 핍박하고 죽음에 넘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주님은 무신론 주의자들의 시녀노릇을 하면서 세상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그들에게 아무 징계나 심판을 하시지 않으신다. 세월이 지나면 그때 고생한 사람만 바보 같고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것 같아 속상할 수 때도 있다. 마치 하박국이 공의로우신 하나님,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따져 묻는 불평이 떠 올랐다. 소련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고 기다리는 고내의 세월을 보낸 훌륭한 교회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9

 

사도 바울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고린도전서 11:1) 말씀하신다. 역사는 한 시대 그리스도를 배반한 자들을 비판하면서 역사의 교훈으로 삼으신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은 종들의 모습들을 통해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이 배우고 따라가야 할 빛으로 삼으신다. 고난 받은 종들의 아름다운 이름과 영예를 천추에 남게 하시며 그 자손들도 복을 받게 하실 것이다. 배신한 자들에게는 주의 날에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충성한 자들에게는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진리를 팔고 육신의 영광만 구한 자들의 비겁하고 어리석은 행동들은 그들의 자손들이 사는 날 동안 부끄러움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침례교회당 건축현장

오후에는 예배당 건물을 건축하고 있는 다른 침례교회를 방문하였는데, 이 교회가 지난날 국가에 등록했던 교회로 알고 있다. 온 교인들이 나와서 예배당을 짓고 있었다. 다음날은 나 혼자 영. 소사전을 가지고 가서 알고 싶은 한두 가지를 겨우 이해하고 돌아왔다. 한 형제가 영어 단어를 조금 아는 형제가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그다음 날은 내가 밤새도록 사전을 보고 영어를 소련어로 번역한 글을 가지고 가서 소련 목사에게 읽어 들려주는데 고개를 갸웃 둥 거리면서 어떤 것은 이해를 하고 어떤 것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긴 시간 이해에 이르고자 애쓰기도 하였다. 신축하는 예배당 지하실에는 자매들이 와서 음식을 만드는데 저녁이 준비가 되었다고 알려왔다. 소련 형제들이 같이 식사를 하자고 청하여서 따라갔다. 식탁은 아주 간소했다. 감자를 잘게 썰어 넣은 국과 볶음밥 같은 것 그리고 순 밀 빵과 오이를 소금에 절인 것이 전부였다. 소련 음식을 몇 번 먹어 보았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의 음식은 단순하게 먹는 것 같았다. 유럽 사람같이 감자를 주식으로 많이 먹고 있었다. 그런대로 이 분들과도 몇 번 만나서 친밀감이 생겨서 손짓 발짓으로 통하면서 재미있었다. 소련 침례교회는 매월 한 번씩 주의 만찬 예배를 드리며 구원받고 결혼한 자매들은 고린도 전서 11:1-15에 따라서 머리를 가리는 수건이나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건축을 위하여 미남 침례회 선교사들의 재정 후원을 받고 있었다.

 

시민공원

이 교회 옆에는 넓은 공원이 있는데 온갖 놀이 기구들이 다 있어서 한 때는 굉장한 놀이터였던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다 녹슬고 망가지고 뜯어가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왜 이 좋은 곳이 이렇게 폐허가 되었는지 물으니 개혁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잘 운영이 되었다고 한다. 개혁 뒤부터 운영을 하지 못하고 내버려 두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고르바초프와 옐친 때문이라고 원망들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공원을 사이에 두고 양 선교사의 아파트와 교회가 있다. 나는 이 공원을 가로질러 다니고 있었는데 모친 한 분이 나에게 그 길은 위험한 길이라고 혼자 다니지 말도록 권했다. 나무가 많고 후미진 곳이 많아서 가끔 강도를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개혁 전에는 강도들이 없었는데 개혁 후에 강도와 좀도둑이 많아져서 조심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소련 정교회

오후에 김 할머니와 함께 소련 정교회를 보러 갔다. 교회당 안은 천주교회와 비슷하게 꾸며 놓았고 매점에는 각종 성화와 책들을 팔고 있었다. 마리아상 사진을 나에게 보이면서 이것을 집에 걸어 놓으면 도적이 들지 않고 병이 들지 않고 행운이 온다고 설명해 주었다. 소련 정교회는 이렇게 귀신같은 종교가 되어 있었다. 이 교화(異敎化) 된 정교회의 마리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여신이었다.

 

고려인 기독교회  9. 24 주일

주일은 두 곳에서 모이고 있었다. 양 선교사는 예술원 강당을 빌려서 조선 사람들 모임을 가지고, 사모님은 성경학교에서 모이면서 초등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들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8:20분 양 선교사와 택시로 예술원이 갔다. 오늘로 서머타임이 해제되는 날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에 혼돈이 생겨서 제시간에 예배를 시작하지 못하고 전에 시간대로 예배를 시작하고 광고 시간에 다음 주부터는 새 시간에 맞추어서 예배를 시작한다고 광고를 하였다. 여기서 사시는 분들은 자기 나라인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무관심하게 사는지 의아했다. 한 30여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오후에는 성경학교에서 함께 점심을 나누고 오후 4시에 다시 예배를 드렸다. 오전보다는 많이 왔고 소련 젊은 여성들도 4명이나 왔다. 축복되고 좋은 집회였다. 집회 뒤에 여러 모친들과 함께 교제하는 시간들을 가질 수가 있었다. 약 30분 거리에서 나오는 노 자매들이 살고 있는 동리에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곳인지 한번 가보기로 했다. 나는 연세가 많은 할머니들을 통해서 중앙아시아로 끌려가던 그 시절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스탈린 시절 인구분산 정책이 시작되던 해 연해주에는 여기저기 고려인들이 집단 부락들을 이루고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쳐서 동리 앞뒤를 막고 무조건 주민들을 차에 태웠는데,

 

그 당시는 살림 세간도 꾸릴 만한 시간적 여유도 주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저 간단한 소지품과 간단한 살림 도구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탔다고 하는데, 그때 자기는 13살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화물칸 열차에 실려져서 그때부터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길을 밤과 낯으로 두 달을 달려서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에 내 버려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곳 주민들도 고려인들이 정착하도록 받아주지 않고 내쫓아서 고생들이 말이 아니었다고 했다. 도착하던 그 해는 땅 굴을 파고 시베리아의 추위를 견디어야 했고 그 뒤로도 여러 해 동안 땅굴 생활은 계속되었다고 했다. 많은 어린아이들이 병들어 죽고 추위와 굶주려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 민족의 수난이었다. 다음 해에 그 지방에서 황무지라도 개척하도록 허락해서 정착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모진 세월들을 돌아보면서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얼굴에 굵게 패인 줄음을 타고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은 그곳에서 기름진 옥토를 일구고 살고 있지만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여 옛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하였다. 지금 우수리스크에 있는 고려인 협회에서는 옛날 빼앗긴 땅들을 정부로부터 찾고자 하는 것이 큰 과제라고 한다.

 

 

거듭되는 경찰 검문  9. 25 월

오늘은 중국 가는 국경선에 있는 마지막 도시인 뽀끄라뉘시뉘를 가 보기로 했다. 7시경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기다리는데 오지를 않아서 공원을 가로질러 정류장으로 갔다. 표 파는 창구에 가서 종이에다가 8시 소련어로 뽀끄라뉘시뉘라고 쓴 것을 보여 주었다. 그랬더니 ‘net’라고 대답한다.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종이에 10시 30분 차가 있다고 써 준다. 몇 마디 배운 소련 말로 차비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차비가 얼마라고 하는 소련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종이에 써 달라고 시늉을 하니까 18,500 루블이라고 써준다. 대합실 주위를 돌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일단의 경찰들이 두 그룹으로 대합실 주위를 돌면서 검문검색들을 하더니 나에게 와서 경례를 부치고는 뭐라고 하는데 다큐멘토(여권)라는 말 한마디를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여권을 주었더니 캐나다 여권을 처음 보는지 한 참을 들여다보다가 어깨에 금줄 하나에 별 셋(대위)인 조장되는 사람에게로 데리고 간다. 한참 들여다보더니 비자를 보고 벌금 낸 영수증을 보고는 돌려주었다.

 

나를 못 본 경찰이 오면 또 검문하여 버스를 타기까지 3번이나 검문을 받아야만 했다.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정류장 주위를 3인 조로 된 3조가 휩쓸고 있었다. 세 번 검문을 받고 나니 이제는 다 알아서 상관하지 않았다. 대합실 안에 화장실이 없어서 매점 여자에게 “그제 뚜알레뜨”하고 물으니 손으로 뒤 밖을 가리키면서 뭐라고 한다. 내 소련 말을 알아들어주어서 반가웠다. 공중화장실은 건물 뒤에 있었고 사용료는 1000 루블이었다. 버스를 탔는데 옆자리에 연변 사는 조선 아주머니가 앉아서 이야기하면서 갈 수가 있어서 좋았다. 왜 경찰들이 저렇게 설치고 다니느냐고 물었더니, 어젯밤에 중국 시장 창고에서 중국인들끼리 싸움이 있었는데 무슨 큰 사고가 난 것 같다고 하면서 범인을 잡으려고 그러는 것 같다고 했다. 머리가 까만 사람은 예외 없이 검문을 하고 있었다. 버스는 중국 버스보다 자리 간격이 넓고 중국같이 사람들과 보따리들이 없어서 편했다. 2시간 반쯤 오는 길은 광활하게 넓은 들이었고 밀 추수가 끝난 들에는 밀집들이 높이 쌓여 있었다. 서구식 농촌 주택들이 낯설지 않고 모처럼 연해주의 자연 경치를 즐기게 되었다. 연해주 이 넓은 땅에 내년부터 한국 기업이 들어와 대단위 기업 농사를 하게 되고 생산의 50%를 한국으로 가져가기로 계약을 했다고 한다.

 

뽀끄라뉘시뉘-거청-

이 국경 도시 ‘뽀끄라뉘시뉘’는 중국 사람들은 ‘거청’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인구가 그리 많지는 않은 곳이지만 기독교회라고는 한 곳도 없는 곳이었다. 얼마의 사람들이 우수리스크로 다닌다고 한다. 이곳은 중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국경선 역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만나서 이 지방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봐야 한다는 마음으로 시장 입구에 서서 기다리는 데 조선 아주머니 같은 분이 오기에 조선 분이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이 아주머니는 부부가 연변에서 와서 여기서 장사를 하고 있는 분이었다. 지금 수분하에서 오는 열차에 물건이 오고 있어서 가지러 간다고 하여 같이 구름다리를 넘어 역으로 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 어디에 음식을 사 먹을 데가 있느냐고 물으니 여기는 음식 사 먹기가 어려운 곳이라고 한다. 아주머니는 나중에 같이 자기 집에 가서 점심을 해 먹자고 했다. 아주머니는 중국서 오는 역무원에게서 물건을 사느라 바쁜 동안 나는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역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리고 역 안에 들어가서 표 사는 것 출국 수속하는 것들을 알아보았다. 아주머니와 다시 구름다리를 넘어와 시장에 와서 아주머니가 여기에 살고 있는 고려인을 한 분 소개해 주었는데 중앙아시아로 내 쫓긴 그곳에서 태어나 살다가 왔다고 했다. 나이가 40대 초반인데 조선말이 너무 서툴러서 아주 겨우 의사소통을 할 수가 있었다. 여기는 조선 사람이 두 가구가 살고 있다고 했다.

 

물건을 팔고 있는 소녀도 고려인인데 조선말을 전혀 몰라 말을 붙여보지도 못했다. 아주머니와 이곳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곳에 대한 어느 정도 정보를 얻을 수가 있었다. 조선족도 전에는 여기 시장에서 장사를 하였는데 이제는 우수리스크에서 장사를 하기 때문에 여기에 사는 조선 사람들은 없다고 했다. 아주머니 집에서 하루 쉬면서 이곳을 더 살펴보고자 했지만 이 정도로 충분한 것 같아서 아주머니에게 감사를 드리고 헤어졌다. 너무 배가 고파서 간이 시장 안으로 들어와서 무엇인가 좀 사 먹으려고 하는데 과일이나 빵들은 팔지만 음식점이란 것은 이 주위에 없었다. 소련은 돈을 가지고서도 원할 때 음식을 사 먹기가 힘든 곳이었다. 중국은 어떤가, 어디든지 쉽게 음식을 사 먹을 수 있지 않은가! 버스 타는 곳에 오니 2:30분 버스가 사람을 태우고 있었다. 운전수가 현금으로 차비를 받고 있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17500 루블이라고 해서 100 루블 짜리 한 움큼을 주었더니 세어 보지도 않는다. 우수리스크에서는 내가 소련 말을 모르는 외국인인 줄 알고 표를 파는 여성이 1000 루블이나 더 받아먹은 것이다. 이곳은 고려인도 없고 조선족의 활동도 없으니까 자연히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토론토 집에서 중국이 가까운 이곳을 지도상에서 보고 많은 기대를 했었는데 허망해지는 마음이었다.

 

소련 침례교회당 신축 공사장

우수리스크로 돌아와 바로 침례교회 신축 장으로 가려고 공원으로 가로질러 갔다. 녹슬고 망가진 각종 놀이기구들은 뜯어 갈 수 있는 것들은 다 뜯어가고 망가졌다. 지금은 비록 폐허가 되기는 했지만 사회주의 한창 시절에는 인민들이 좋은 시절을 보냈음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유토피아를 꿈꾸던 이상은 어디로 가고 이제 배고픔과 절망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버스터미널에서 교회당 신축 장에 가니 이제 안면이 있는 목사와 여러 형제자매들이 웃음으로 맞이하여 주었다. 지하실에 내려가니 저녁을 먹고 있었다. 같이 먹자고 하여 함께 앉았다. 음식은 감자, 당근, 야채를 잘게 썰어 넣은 국과 밀 빵 그리고 쌀밥에 햄을 섞어 넣고 만든 복음 밥은 맛이 좋았다. 하루 종일 별로 먹은 것이 없는 나에게는 별미였다. 한 노 자매님이 따라주는 소련 차는 향긋하고 맛이 좋았다. 말은 서로 안 통하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주고받는 이심전심이었다. 어떤 분들은 영어단어를 드문드문 알아서 단어 하나로 서로의 뜻이 통했고, 아주 힘들면 나는 사전을 열어 보여주면서 뜻을 전했다. 우수리스크에 있는 동안 연해주 지방의 선교 현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양 선교사는 내가 만일 이 쪽으로 선교하러 오겠다면 비자 문제와 선교지를 알아주겠다는 의논을 해 주어서 고마웠다. 중국에서의 불편한 점들을 생각하면 여기에서 주님의 일을 도모해 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이제 이곳에서 우선 고려인 대상으로 선교를 하면서 소련어를 배워서 점차 소련 사람들 선교를 해 볼 것이냐, 아니면 중국 선교에 내 삶을 바칠 것이냐를 주님께 맞기고 앞으로 나아가 보기로 했다. 매일 성경을 읽는 동안 힘이 되고 빛이 되는 귀하 말씀들을 주시고 계셨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예레미아 42:3

“주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 하니이다”  예레미아 11:23

 

소련 침례교회의 분열

돌아오는 길에 전에 가보았던 침례교회를 다시 가 보았다. 스탈린 정교 억압정책 때 소련 침례교회가 두 파로 나누어졌다고 한다. 등록을 하지 않고 핍박을 받으며 사회주의가 무너질 때까지 견디어 온 보수적인 교회는 짓밟힐 대로 짓밟히고, 맞을 만큼 맞아서 인지 잘 피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개방된 지금 상처투성이의 몸을 추스르고 있는가 하면, 독재자의 허수아비 노릇한 쪽은 활개를 펴고 다니고 있으니 이것이 꼴불견이 아닌가! 독재자와 타협하지 않고 싸우며 믿음으로 산 희생자들은 위대한 승리자들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희생자들이 받고 누려야 할 모든 좋은 것들을 변절자들이 더 누리고 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화가 난다. 이것은 모순이다. 공평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세상이다. 믿음의 승리자들이 누리게 될 영광은 썩어질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역시 영원한 주의 날에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가 보다. 이런 일들은 복음주의 기독교를 탄압하던 천주교 암흑시대, 왜정 시대 신사 참배 사건, 중국 공산당의 기독교 핍박 등 근세에 벌어진 일들은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은 마음 아픈 일들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골로새서 3:1-4

 

70여 년간의 환난과 핍박을 견디며 승리한 믿음의 용사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우리 삶의 가치는 하나님의 더 좋은 자식이 되기 위하여 사는 것이라는 소박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소련 침례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형제교회와 비슷하다. 자매들이 예배 때 머리를 가리는 수건이나 모자를 쓰고 만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한국 침례교 선교사가 한동안 이 교회당을 쓰면서 고려인 교회를 하였다고 한다.

 

소련 침례교 형제자매들과의 교제  9. 26 화

나는 내일 중국으로 가도록 결정했다. 아침 소련 침례교회를 가서 공사를 돕고 있는 여러 형제자매들에게 한국 사탕을 나누어 주면서 잠시 교제하고 목사님이 기도한 뒤에 헤어졌다. 양 선교사가 하고 있는 성경학교를 찾아가느라 길을 좀 헤매면서 찾아갔다. 조선족 일꾼 양성을 위하여 희생적 정열을 기울이는 양 선교사 부부의 사랑과 정성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서 과연 기대만큼의 일꾼들이 되어 줄 것인지는 그들 자신들이 현실적인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수년 뒤에 여기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돌아가 교회 일을 한다고 했지만 기존 믿는 그룹과 어울리지 못하는 일들, 그리고 생활문제 등으로 흐지부지 되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오후 쉬는 시간에 나는 소련에서 중국 선교에 대하여 양 선교사와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거듭 나에게 소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고 하면서 일터는 어디든지 있고 그 가능성에 대해서 나에게 도움말을 해주었다. 나는 우리 민족 고려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면서 중국 조선족을 위해서도 일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알아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아직 소련 사람들을 위하여서는 선교의 동기가 생기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중국 선교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좀 더 주님의 확실한 인도하심은 내가 중국 땅에서 무릎을 꿇을 때 주께서 말씀하시리라고 믿는 마음이었다. 하바롭스크에서 무겁게 끌고 온 옷가지들과 책들을 이곳 조선족 친구들에게 주고 나니 짐이 줄어서 마음 또한 가벼워졌다. 또 중국으로 가지고 들어가야 할 찬송가와 책 30여 권을 무사히 가지고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이다.

 

중소 국경선 열차에서,  9. 27

오늘은 우수리스크를 떠나 중국으로 가는 날이다. 친절하고 고마운 양 목사님 가정과 헤어지면서 얇은 봉투 하나를 드렸더니 나의 여정을 위하여 기도해 주셔서 고마웠다. 여기 있는 동안 연해주 소련 선교의 전반에 대해서 많은 지식과 견문을 가지게 된 것이 큰 보람이었다. 뽀끄라뉘시뉘(거청)로 가는 10시 30분 차를 타러 나왔다. 거청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 분들도 많이 있어서 아주 좋았다. 표를 사려고 만 루블 짜리 두 장을 주었더니 3000 루블의 거스름돈을 내준다. 며칠 전에는 18,500 루블이라고 했는데 이상했다. 물론 직원은 다른 사람이었다. 조선 분들에게 요금을 물으니 17,000 루블이라면서 내가 소련 어를 못하니까 속여먹은 것이라고 한다. 대합실에는 식빵을 파는 데가 있는데 포장도 하지 않은 채 거친 나무 선반에 올려놓고 파는데 파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식빵이라고 부르는 소련 어를 조선 사람들은 헐레바리라고 하는데 어떤 소련 사람이 하나를 사더니 물 한 모금 마시지 아니하고 옆구리에 끼고는 뜯어 입에 넣고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거청 역에 오는 동안 찬송가와 책이 든 무거운 가방을 연길서 온 분이 들어다 주어서 고마웠다. 거청 역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대단히 혼잡하였다. 이곳으로 오면서 알게 된 조선 분은 매주 수요일은 송출하는 날이라고 해서 불법 체류자들을 모았다가 내 보내는 날이어서 이렇게 많다고 했다. 이 분은 나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미국 돈 400 달러를 좀 건네다 달라고 부탁을 한다. 감추기는 하지만 만일 발각되면 이유도 없이 뺏는 단다. 나는 나도 처음 이리로 가는데 어떻게 될지를 몰라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괜찮다고 자꾸 숨 가쁘게 부탁하여 그러면 내 뒤에 서서 나오라고 하고 만일 나도 빼앗기면 그때는 받을 생각을 안 한다는 약속을 했다.

 

역 입구에서 기차를 타기까지 여권을 3번이나 검사를 하는데 무질서하여 밀고 닥치고 전쟁이었다. 줄 서기를 할 줄 모르는 중국 사람들 틈에 끼여 무거운 가방과 함께 표를 사기까지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세관 검사대에서는 중국 사람들의 가방은 구석구석 안 뒤지는 데가 없다. 내 차례가 되자 캐나다 여권을 보고는 영어 한마디를 하고 입국할 때 기록한 현금 표를 보더니 내가 신고한 돈과 차이가 나니까 돈을 어떻게 했느냐고 묻는다. 나는 차비, 호텔과 음식 비, 등이라고 하니까 오케이하고 가방은 조사할 생각도 하지 않고 통과시켜주었다.불법 자들은 이것저것 여러 가지 트집을 잡아서 10만 루블(약 U$ 30)의 벌금을 물리기도 하고 있었다. 통관하는 모든 과정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그리고 가방들을 아예 다 쏟아놓고 검사를 하면서 골라내고 있었다. 열차에 올라 자리에 앉아 그분에게 돈을 전해 주었더니 고마워했다. 열차에는 소련 사람들을 욕하는 화난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 세관을 통과하여 열차를 탄다는 것은 큰 홍역을 치르는 일이었다. 그 조선 분은 나에게 우리 여권이 나쁩니다. 한국 여권만 같아도 소련 사람들이 대우를 해 주는데, 중국 여권을 가지면 막 대한다고 하면서 중국 사람들이 소련에 오면 위신이 안 서고, 값(가치)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국 사람들이 소련에 와서 가래침을 함부로 뱉지, 휴지를 아무 곳이고 버릴 뿐 만 아니라, 질서와 공중도덕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야만인 같이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경찰들이나 세관 등 관리들이 중국 사람에 대해서는 횡포가 심한 것 같이 느껴진다.

 

중국 조선 사람들은 소련 사람들을 “마우제”라고 부르는데, 소련 사람들을 부르는 별명인데 “도둑놈” 이란 뜻이다. 그리고 사회 전반이 주는 인상은 여러 가지로 불안한 감을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출입국이나 여행에서 느끼는 것은 중국이 오히려 더 편하고 간편하고 안정감이 있는 것 같다. 열차는 중국 열차인데 일 년씩 양국이 번갈아 가면서 운행한단다. 열차가 중소 국경선에 와서 서자 소련 쪽 열차 검사원들이 열차에 무슨 이상이 있는지 조사를 마치는데 반시간 이상이 걸렸다. 열차는 험한 산을 돌아 국경선 터널을 나와 중국 쪽에 들어와서 첫 역에 서자 중국 경찰들이 올라오자 모두 좋아서 내 집에 온 듯이 기뻐하면서 소련에서 주눅이 들었던 중국 사람들이 활개를 펴는 듯했다. 차를 타고 오면서 내 앞에 앉은 두 분은 소련 지주와 계약을 맺어 수입의 반반씩 가지기로 하고 채소 농사를 했는데 올해 비가 많이 와서 채소가 안 되어 돈도 못 벌고 그냥 간다고 했다. 내 가방을 들어주던 분은 왕청에 사는데 딸이 한국에 가서 어떤 사장 집에서 일하는데 한 달에 한국 돈으로 100만 원(한국 돈 백마원)씩 받는다고 대견해 했다. 이곳으로 장사하러 왔다가 한 달 만에 4000원이나 밑지고 간다고 하면서 다시 안 올 것 같이 소련에 대해서 나쁘게 말들을 하고 있었다. 수분 하역에는 저녁이 되어서 도착했다. 불법 체류자로 추방당해 오는 사람들은 벌금을 내고 입국을 시키고 있었다. 나는 성경과 찬송가가 든 가방을 무사히 들고 역밖에 나와서 가게에서 공중전화로 목단강에 전화를 하는데 자동녹음이 나오면서 안 된다. 내가 가게 주인에게 번호를 보여주니 내가 캐나다 갔다가 오는 사이에 중국의 전국 지역번호가 새로 바뀌어져 있었다. 새 지역번호를 돌리니 리쥔이가 받아서 오늘 밤 11시경에 도착할 것을 알려주었다.

 

목단강 표를 살려고 하는데 기차를 타는 본 역은 여긴데 기차표를 파는 데는 한참 걸어가야 하는 저쪽에 있어서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니기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서툰 중국어로 목단강 표를 한 장 달라니까 여자 직원이 뭐라고 말을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거듭 물어서 몇 번이고 들었는데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표를 주지 않는 것을 보니까 없다는 말인지 궁금해 하고 있는데 소련서부터 함께 온 조선 청년이 온다. 내가 반가워서 사정을 이야기하니까 자기도 목단강에 간다고 하여 표를 부탁했더니 자리가 없고 중간쯤까지는 자리가 있고 그 뒤로는 서서 가야 된 다는 말이었다. 그런 표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수분하에서 하얼빈까지 열차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이 젊은이는 소련에서 산 즉석 사진기와 카세트를 빼앗기고 벌금까지 물었다면서 화를 내고 있었다. 우리가 자리에 앉아서 중간쯤 오니까 그곳에서 탄 자리 주인인 젊은 중국 여자 둘이 와서 자기네 자리라고 하여서 자리를 내주고 일어서서 가는데 자리 주인들이 우리를 보고 5원씩을 내고 자리를 사겠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5원에 자리를 사서 다시 앉아서 편하게 올 수가 있었다. 탁한 담배연기에 시달리면서 목단강 역에 내리니 리화와 리쥔이 기다리고 있어서 반가웠다. 이제 마음 편하게 맞아주는 식구들이 있는 목단강에 온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이때로부터 주님은 우리를 17년 동안 중국 선교 사역에 나아가게 하셨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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