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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여행기/쿠바선교

Cuba Vision Trip(1)

Cuba Vision Trip  3.63, 2019 

 

 

쿠바의 한인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여러 나라가 우리나라와 통상하려고 문을 두드렸지만,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대원군의 폐쇄정책으로 우리나라는 세계무대에서 한참 뒤떨어지면서 이웃 섬나라 왜구(Japan)의 식민지가 되기에 이른다. 조선의 이민사는 1903년 1월 13일 121명이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시작하여 1905년 8월 8일까지 7415명의 노동자가 하와이에 정착하게 된다. 뒤이어서 1905년 2월 28일 1033의 한인들이 Mexico 에네켄 농장 노동자로 보내지는 데, 여자와 아이들이 함께하는 가족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한인들은 하와이로 가는 줄 알았는데 일본인 악덕 소개업자(대륙 시민 합자회사)의 꾐에 속아서 본의 아니게 Mexico로 팔려 오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자연환경과 음식문화의 변화, 그리고 매일 땡볕 속에서 줄기 양쪽에 가시가 달린 에네켄을 다루는 생활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거기다가 굶주림과 학대 그리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야만 했다. 멕시코에 온 지 4, 5년이 지나면서 고용 기간도 끝나고 언어와 현실 적응이 된 한인들은 현지 여성들과 가정을 이루면서 독립적인 삶을 누리게 된다. 이들이 고국을 떠난 지 4년 뒤 대한제국은 간악한 왜국의 식민지가 되어 그들을 지켜 줄 고국은 없었다.

         

에네켄(Henequen, 영어, Agave)
한국말로는 용설란으로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신비로운 식물이다. 종류에 따라 꽃이 모양이 다른데 아래 꽃이 우리에게 낯익은 꽃이다. 멕시코 조선사람들은 ‘어저귀’라 불렀다. 추운 지방에서는 주로 화분에서 화초로 키우지만, 남미에서는 2m 정도 자란다. 에네켄은 멕시코 유타칸 반도에서 재배되는 특산물로 가시가 많고 독소가 있지만, 섬유질을 뽑아 밧줄, 포대, 모자, 옷감, 카펫, 해먹 등의 재료가 된다. 또  Green Agave라는 에네켄에서는 그 즙을 짜내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떼낄라'라는 술을 만들어 냈다. 마치 한국의 대마(삼)에서 실을 뽑아내어 베옷을 만드는 것과 같다. 특히 배에 쓰는 밧줄의 재료로 산업이 발전하였다.

 

     

         

                      

에네켄으로 만들어진 밧줄과 가방과 한복

 멕시코에 온 지 10년, 보다 나은 삶을 찾아 1921년 3월 25일 288명이 배를 타고 떠나 쿠바의 동해안 Matani에 도착하면서 쿠바 한인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들 가운데 얼마는 이미 멕시코 여자와 가정을 이루었다. 처음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할 것을 기대했지만, 여의치 않아서 Matazas 주 El bolo 지역 에네껜 농장에서 일하면서 정착하게 되었다. 석유산업 발전으로 나일롱 밧줄이 값싸게 생산되면서 에네껜 산업도 시들해져 버리자 모두 살길을 찾아서 흩어지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쿠바 일본대사관에서 한인들에게 일본 국적으로 등록하기를 요구했지만, 거절하고 얻은 국적 신분은 식민지 조선인(Colonia Coreana)이었다. 1946년 쿠바 정부의 허락으로 비로소 조선인들은 쿠바 국적을 얻게 되었다. 1949년 쿠바에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많은 한인 청년들은 사회주의가 살길인양 혁명에 가담하게 되고, 또 얼마는 자유를 찾아서 미국 마이애미로 탈출하였다. 

                            

 

쿠바의 한국인 후예들

 

♣ 독립유공자 임천택의 딸 Martha Lim Kim(임은희)은 마탄사스 교육대학의 철학 교수로 그리고 역사학 교수로 있는 현지인  남편, Raul Ruiz와  181쪽의 "쿠바 한인들" 이란 책을 스페인어로 썼다. 그녀는 아버지가 1954년 2월에 발행한 "쿠바 이민사"(태평양 주보사)를 토대로 이 책을 저술하였다. 10년 동안 쿠바의 공공기록보존서 자료, 언론 기사, 초기 이민 후손의 증언 등을 조사하여 정리한 뒤, 3년에 걸쳐 쿠바 한인 이민사를 재구성하여 저술하여 발간하였다. 2000년에 쿠바 문화부의 최고 학술출판 상을 받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피가 섞인 한인 후예들
하와이로 간 한국 사람들은 한국에서 신부들이 와서 한인 가정을 이루어 민족의 핏줄을 이을 수가 있었지만, 처음 멕시코로 온 조선인들은 조선 여자의 절대 부족으로 대부분 현지 여성들과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쿠바로 건너온 한국인들은 고국에서 신부를 데려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1980년대가 지나면서 일 세대가 세상을 떠나면서 순수한 조선인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지게 되었다. 피가 섞인 2세들은 얼굴 모습이 달라지면서 한국의 문화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지금도 멕시코 한인 후예들에게는 한국 부모를 둔 자손은 좀 있지만, 쿠바는 환경이 달랐다.

 

미국과 국교 회복 
우리가 2014년 1월 방문했을 때는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어서 미국 달러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고, 캐나다 달러를 환영하였다. 쿠바와 미국이 2015년 7월 1일 오바마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이 국교 정상화를 하면서, 54년 5개월여 만에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외교 관계를 시작하였다. 이번에 와서 보니 미국 달러가 크게 환영을 받고 있었다. 아바나 시내에 미국 성조기가 펄럭이고는 있지만, 아직 쿠바 경제가 그렇게 나아지고 있지 않았다. 예를 들면 미국 콜라가 아직 직접 들어오지 못하고 멕시코에서 간접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2014년에는 한국 차라고는 볼 수 없었고 중국 차만 보이더니, 이제는 현대 기아 차가 심심치 않게 보여서, 한국 차를 수입하느냐고, 물었더니, 아직은 국교가 되지 않아서 직접 못 들어오고 멕시코와 파나마에서 간접적으로 수입한다고 한다.

                        

 

선교활동 상황
다른 사회주의 나라같이 외국 사람의 종교활동은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지만, 쿠바 국민의 종교 생활은 자유로운 편이다. 믿는 사람들의 집에서 모이는 가정교회의 활동이 퍽 자유롭다. 가정교회 형태의 모임이 활성화하기 시작한 것은 1992년 석유가 없어서 대중교통이 거의 마비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먼 곳에 있는 중심 교회에 갈 수 없게 되자, 카스트로 정부는 어디서든지 10여 명 이상 모일 수 있으면, 알아서 모이라고 하여서 그때부터 자유롭게 되었다고 한다. 몇 한국 사람은 학생비자나, 업체 직원으로 있으면서 음성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동안 여러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한인 후예들에게 한글과 음식과 문화 그리고 성경을 가르치는 활동을 음성적으로 해 오고 있었다. 우리가 중국에서 양로원을 세워서 일했듯이, 교육과 복지 사업을 통해서 일 할 가능성이 내 눈에는 보였다.

                                         ☆☆☆☆☆☆☆☆☆☆☆☆☆☆☆☆☆☆☆☆☆☆

쿠바로 떠나면서, 3. 6 수

이번 선교여행을 위하여 모임의 Elena 자매 부부가 옷가지들을 많이 모아주었다. 그리고 모여진 선교헌금으로 학용품도 좀 준비했다. 쿠바 선교 여행을 위하여 기도와 지원을 하여 준 형제자매들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우리 팀 5명은 아침 6시 15분 눈 쌓인 영하의 토론토에서 Air Canada 편으로  2,547K를 3시간 45분 날아서 10시에 쿠바 동부의 명소 Holguin(올긴)에 내리자, 섭씨 30도의 한여름 무더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한 주간 인도해 주실 정경석 선교사님이 맞이하여 주셨다. 또 한 주간 우리와 생활하게 될 운전기사 요한 형제의 안내를 받으면서 Holguin 시내에 들어와 민박에 짐을 풀고, 준비된 식당에서 쿠바 음식으로 점심을 나누었다. 쉴 틈도 없이 바로 선교 일정의 첫 방문지로 떠났다.

 

말까네(Marcane)

초라하게 보이는 가난한 농촌이다. 이 가정교회는 건물을 쓰고 있었다. 마당의 나무 시렁에는 등나무 꽃과 같은 Fausto라는 꽃이 활짝 피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오늘은 침례식을 할 계획이 있어서 큰 차를 대절하여 침례식을 할 수 있는 물이 있는 골짜기 개울로 갔다. 버스에는 이 마을 가정교회의 주일학교 학생들이 함께 타고 가면서 찬송가 부르는 모습이 대견하고 귀여웠다. 한 굽이진 냇가의 깊은 물에서 다섯 명의 침례식을 하였다. 그리고 돌아와서 한 70명과 성경 모임을 가졌다. 이 가정교회를 인도하는 중년 자매는 영적으로 세련되어 보였다. 집회 전에 의자에 앉은 할머니들에게서 한국 할머니의 모습이 조금 남아 있는 몇 분을 볼 수 있었다. 또 김 씨 성을 가진 형제는 3대손이라는 데 얼굴에 한국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이름은 Jorge King Hostrope(Tel. 24280460)로 이 분의 원래 성이 김인데 King으로 쓰는 것은 스페인어 M자 발음이 잘 안 되어서 부르기 쉽게 Kim을 Kin, King이라고 부르며 써왔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Kim이라고 바로 쓰는 사람도 있었다. 가정교회를 인도하는 자매가 이 모임 장소를 세를 내고 있어서 불편하다고 하면서, 땅이 준비되어 있는데, 한 삼만 불이면 새로 건물을 지어 예배당과 지역주민들을 위한 복지시설로도 쓸 수 있다고 도움을 요청했다.

          

                     

 

집회 가운데 사회자가 한인 후예들을 일어서라고 하자, 70여 명 가운데 한 15명이 일어났다. 집회 뒤에 우리는 옷가지와 학생들에게는 학용품을 나누어 주었다. 늦은 밤 우리는 올긴 시내로 돌아왔다. 오늘 나 혼자 쉬게 될 민박은 아파트로 아주 좋은 환경이다. 주인이 영어도 좀 해서 편했다. 하루 숙박료는 미화 20불이었다.

 

마나티(Manati), 한인 첫 도래지  3. 7 목

              

                           

                              

마나티 가정교회에서 차를 하나 빌려서 침례 받을 사람들을 태우고 침례식을 하려고 마나티 포구로 갔다. 이곳은 멕시코를 떠난 한인들이 처음 도착한 곳이다. 작은 포구는 낡은 판잣집들로 이루어진 가난한 어촌으로 지금은 한 사람의 한인 후예도 살지 않는 곳에, 첫 한인 도래지 기념비만 쓸쓸하게 서 있었다. 겨우 배운 한글로 받침자가 좀 틀리기는 해도 한글로 쓴 표지판을 스페인어 표지판 위에 달아 놓았다. 찾는 이 없던 이곳에 최근에 와서 미주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심심치 않게 찾고 있어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 것 같다. 정 선교사와 내가 함께 바다에서 여섯 사람에게 침례를 주었다.

            

 

 마나티 마을에는 두 개의 높은 굴뚝을 가진 사탕수수 가공공장이 있고 사탕수수를 실어 나르는 철로가 놓여 있었다.

가정교회는 믿는 자의 집에서 모이고 있었다. 집회를 마치고 선물들을 나누어 주는 즐거움을 나누었다.

          

 

까마구이(Camaguey) 
읍내 외곽에 있는 가정교회로 낮에는 모일 수가 없었지만, 오늘 이 집주인 부부는 침례를 받기 위하여 오래도록 기다려 온 터라 오늘 침례를 받게 되어 몹시 기뻐하였다. 이곳은 침례식을 할만한 곳이 없어서 큰 물통을 하나 사 와서 침례식을 하였다. 이 가정 식구들과만 교제를 나누고, 나누어 줄 선물 보따리는 저녁에 모일 때 주라고 남겨 놓고 우리는 길을 재촉하여 떠났다.

           

 

약식 세례(sprinkle baptism)의 유래

물 몇 방울로 약식 세례를 주는 사람들이 볼 때는 좀 딱하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물 침례는 성경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약식 세례는 물 침례에서 인간의 편의에 따라 변형된 것이다. 복음이 이방 계로 퍼져나가면서 침례에 대한 미신적인 사상이 생겨났다. 즉 침례를 받아야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미신이다. 그래서 죽기 전에 침례를 받으려는 사람들, 특히 병이 중하여 도저히 침례를 받기 힘든 사람들을 위하여 물을 뿌리거나 붓는(적례, 산 수례) 것으로 침례를 대신하는 방법이 생겨났다. 기록에 보면 2세기 중반 독일 선교사 Magnus는 이 문제를 서머나 감독 Cyprian에게 물을 조금 부어 침례를 대신하는 일을 묻자, 그는 부득이한 경우라면, 가능하다는 조언으로 마그너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 "부득이한 경우"라는 것이 편법으로 교회에 자리를 잡는 잘못을 가져왔다. 또 병든 유아들이 죄 용서받고 천국으로 가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소원이 유아들에게 물을 뿌리는 적례가 행해지면서 유아세례가 생겨났다. 실제로는 침례를 받지 않아도 예수님이 흘리신 십자가의 피로서 죄 용서받은 것을 믿으면, 천국에 들어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미신적 사상이 이런 그릇된 형식을 낳았다. 이런 응급처방이 시간이 감에 따라 그 간편함 때문에 무분별하게 교회에서도 혼용하는 일들이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이교와 혼합된 천주교도 중세까지는 물 침례만 하다가, 가톨릭 종교회의에서 침례와 약식 세례를 병용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다가 1200년경 이르러서는 물 침례를 제거하고 아예 약식 세례만 하도록 결정하였다. 그 증거로 지금도 여기저기 가톨릭의 사적지나, 한때 기독교의 피난처였던 터키의 데린쿠유, 지하도시 등에도 침례탕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뒤로 로마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온 루터나 장로교 등 교파들은 변형된 가톨릭의 행습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하고 있다. 우리가 브라질에서 단기선교를 하는 동안 브라질 감리교도들이 강에서 침례식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감리교도인데 어떻게 물 침례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침례가 성경적이고 원형이라고 했다. 침례가 주의 돌아가심과 묻힘 그리고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한국 성결교의 법에도 침례나 약식 세례를 겸용하도록 하고 있다. 중국 종교 시행령에도 침례나 약식세례를 알아서 하도록 하고 있어서, 많은 중국교회가 물 침례를 하고 있다. 

                

 

깔데나스(Caldenas) 3. 8 금
가정교회는 안이 넓어서 활동하기에 편리하였다. 이 가정은 관광지 선물센터에서 파는 기념품을 만드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오늘도 침례 식이 있어서 먼저 집회를 하고, 바다로 나갔다. 대서양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함께 일곱 사람이 침례를 받았다. 모래사장 해변은 이름다웠다. 침례식이 끝나고 교회 식구와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식당에 가서 점심을 나누면서 교제를 하였고, 선물들을 나누어 주었다.   

     

     

끼에고대 데 알비아(Ciegode de Avila)
이제 이곳은 번화한 시내로 생활환경이 많이 발전된 곳이다. 가정교회로 모이는 곳은 길가 주택에서 모였다. 오늘은 내가 요 3:16. 고난 많은 중국과 이곳 한민족의 한과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으로 구원의 복음을 전했다.

                 

 

마딴사스(Matanzas) 3. 9 토
마딴사스는 아바나와 가까운 도시로 생활환경이 좋고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이런 환경 때문인지, 저 낙후한 마나티 같은 곳보다는 미주 한인교회들이 많이 찾아와 한국 음식도 같이 해 먹으면서 영육 간에 도움을 주고 있었고, 또 한국 정부의 장관이 찾아오기도 한 곳이다. 이 가정교회는 자매님이 주로 사역을 하고 있고 남편 되는 분은 공군 중령 출신으로 가정이 유복한 것 같다. 이 집은 지금 여섯 세대로 뻗어 내려온 큰 가족이다. 멕시코에 온 할아버지는 멕시코 여성과 결혼하여 쿠바로 와서 자손이 퍼져 오늘에 이르렀다.    

         

                                                                         선물 나누기

 

이곳은 한인들이 자주 오는 곳으로 다른 곳과는 다르게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라는 한국말로 인사하면서 맞이하여 주어서 친근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예배당 벽에는 큰 한국과 쿠바 국기를 벽에 걸어 놓고 한껏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많이 세련되어 있었다. 벽에 붙여 놓은 많은 사진이 이를 말해 주고 있었다. 이 가정교회는 실내 넓은 침례탕을 가지고 있어서 집회 뒤에 아홉 사람의 침례 식이 있었다.

          

 

이 교회 몇몇 할머니들에게서 한국 할머니의 모습이 조금 보이는 분들이 있었다. 김, 정, 한 박 씨들도 있었다. 침례식을 마치고 키가 좀 작고 얼굴에 한인의 모습을 지닌 중년 형제는 기타를 치면서 찬송과 애국가와 우리 민요들을 치면서 흥을 돋우며 즐겼다. 그리고 선물들을 나누어 주면서 동포의 정을 나누었다.

           

 침례를 받은 기타리스트 Kim 형제는 너무 기뻐서 나와 사진을 찍고 자기 연락처를 주었다.

Adelaida Kim Aleman /Angoma #863 % Sala y Tnenema / +53 54 76 4300(cell)/ +53 45 52 34 37(Home)

 

엘 볼로(El Bolo) 한인촌

 

애뜻한 민족의 한이 서린 봉선화 

 

이 마을 가운데 마나티와 똑같은 한인 도래지 기념비가 있다. 여기가 큰 에네켄 농장이 있어서 쿠바 초기 한인들이 100여 가구가 여기서 일하면서 정착하게 되었다.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장천봉 씨는 그 당시 한인들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한인 집단촌에 한인 공회당과 한글학교 이외에 교회당을 지어 예배를 인도하고 심지어는 교회에 모여 신앙으로 혹은 농악기를 함께 부르면서 고국을 떠난 설움을 달래 주었다. 그의 믿음의 씨가 어느덧 뿌리를 내려 큰아들 David Lee 씨는 교회 목회자로 전념하였고, 그의 아들까지 목회자로 만들어 대를 이었다. 이제는 교회당은 문이 잠긴 채 버려져 있었다. 여기서 사는 한인 자손은 없다고 한다. 마을의 한 모퉁이 거친 길가에 소복이 피어난 빨간 봉숭아 꽃은 이곳에 살던 한인들의 애환을 말하려는 듯 나를 반긴다. 간악한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애환을 노래하던 ‘울 밑에선 봉선화야,’ 내 마음을 울적하게 해 주었다. 

    

     

     

 

독립유공자 임천택(1903~1985)은 쿠바 한인 1세대, 독립운동가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1905년 두 살 때 그는 부모와 함께 멕시코 유카탄 반도로 왔다가, 1921년에 288명의 한인들과 함께 쿠바로 옮겨왔다. 한인들은 한인 조직을 만들었고 1922년 마탄사스 지역에 민성 국어학교를 세웠다. 1923년에는 카르데나스 지역에 진성 국어학교를 설립했다. 임천택은 이 학교의 교장으로 쿠바 한인들에게 조국의 언어와 풍습을 잊지 않도록 노력했다. 1922년 대한인 국민회 서기로 활동하며 학교장으로 민족운동을 벌였다. 1938년부터 독립자금을 모금해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며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1985년에 83세로 떠났다. 그의 자식들은 훌륭하게 자라서 한 아들은 기독교의 목회자가 되었고, 딸은 철학 교수로, 또 장남 임은조는 아바나 대학 법대 동창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의 공산혁명을 하였고 산업부 차관에 이르렀다. 은퇴 뒤 쿠바 한인회 회장으로 수고했다. 그의 이런 공로를 모르고 있다가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 장군이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가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낸 이름 가운데 쿠바의 임천택이 $500을 보내왔다는 기록을 발견하게 되어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1997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고, 2004년에 그의 유해가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폐허가 된 한민족의 교육 신앙의 증심지였던 감리교 예배당

         

                                               

-계속--                                           

 

김제화

jewhakim@daum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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