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ba Vision Trip 3.6 –13, 2019 (2)
Varadero 휴양지 3. 9 토
아바나로 향하여 가다가 날이 어두워져서 이름난 휴양지 바라데로 바닷가 호텔에서 쉬게 되었다. 바라데로는 쿠바 마탄사스 주에 있는 휴양도시로 플로리다 해협과 접하고 있고 아바나까지는 140km 이다. 바라데로는 대서양 바다로 길게 뻗은 반도로 많은 리조트들이 연이어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우리가 2014년 1월에 이 반도 중간쯤에 있는 리조트에서 한 주간 쉰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바라데로 시내에 나와 보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시내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아침 9시경 우리는 바다에 들어가서 푸른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며 대 자연의 신비로움에 젖었다. 시간 때문에 바다에 더 있지 못한 아쉬움이 가득했다. 계획을 만든 분이 바다에서 시간을 크게 생각하지 않아서이다. 내가 계획을 했다면, 멀리서 온 팀이 그동안 매일 강행군을 해 왔는데 이 지점에서 적어도 시간을 넉넉히 했을 것이다. 수영을 마치고 따뜻한 Coffee 한 잔을 나누고 아바나로 떠났다. 아바나로 가까이 갈수록 길은 점점 좋아지고 푸른 대서양을 끼고 달리는 여행길도 편해졌다. 나는 Havana에 두 번째 오는 길이어서 눈에 익은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바나 외곽에 있는 예정된 민박에 들었다. 피곤한 몸들을 좀 쉬고 해가 질 무렵 하바나에서 잘 한다는 뷔페식당에 갔다. 마침 양고기 요리가 있어서 반가웠다. 식사를 마치고 라이브가 있는 호텔 카페에서 차를 나누면서 아바나의 밤은 깊어갔다. Havana
Habana Baptist Church 3. 10 주일
한국 사람들은 쿠바의 서울 Havana를 글자 그대로 '하바나'라고 부른다. 그러나 스페인어에는 'H'자를 발음하지 않아서 '아바나'로 부른다. Holguin도 홀긴이라 하지 않고, '올긴'이라 한다. 아바나에는 한인 후예들의 가정교회가 없어서 우리 팀은 주일에 쿠바 침례교회에 참여하였다. 대단히 큰 교회당이었다. 지난주에 이곳에서 쿠바 침례교회의 년 차 총회가 있었다고 한다. 쿠바는 스페인 침략자들의 종교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다가 사회주의 혁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복음주의 기독교는 침례교로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기독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기독교의 활동이 활발함을 볼 수 있었다. 공산당의 기독교 압박정책에도 불구하고 지난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믿음을 지켜 온 쿠바 그리스도인들이 자랑스러웠다.
쿠바 한인회 모임
오후에는 쿠바한인회관을 방문하였다. 쿠바 한인회의 역사를 보면, 1950년에 첫 정착지 엘볼로 에서 임천택을 중심으로 첫 ‘대한인 주민회’가 만들어져서 고국의 전통과 문화를 회복하려고 노력을 하였고, 학교도 세워서 교육에도 힘쓰다가, 공산혁명이 일어난 뒤 고국과의 교류도 끊어지고, 피가 섞인 세대들은 고국과 멀어지게 되었다. 지금 쿠바 한인회는 1995년 한국 경제인 연합회의 지원으로 설립되어 지방에도 지부를 두게 되었다. 말이 한인 회지, 한국 사람처럼 생기거나 한국말을 제대로 하는 사람 하나 없는 서먹한 한인회다. 그저 조상을 한국 사람으로 두고 그 피가 조금 섞여 있다는 역사적 사실 하나로만 그 뜻을 새기고 있었다. 우리 팀이 준 경비로 저녁을 차렸는데 작은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워 가지고 왔다.
한인 후예들 25여 명과 우리와 함께 식탁에 앉아서 복음도 전하고 저녁을 나누면서 교제의 꽃을 피웠다
나는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라는 말씀으로 구원의 복음을 전했다.
지금 회장은 Tony Kim이란 분인데 한국말은 전혀 못 하였다. 우리를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하면서 회관 벽에 붙어 있는 자기 아버지와 가족사진들을 가리키면서 스페인어로 설명하느라 바빴다. 마치 자기 조상이 쿠바 한인사회의 주체인 양 자랑하기에 바쁜 것 같았다. 한 벽에 2/3는 자기네 조상과 가족사진으로 가득 메우고, 연이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임천택의 사진과 훈장 수여식과 대전 독립유공자 묘역의 안장식 사진이 겨우 1/3 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 한인회의 정통성 문제에 두 가지 의견이 긴장감을 이루고 있었다. 원래 쿠바 한인회 역사의 전통성은 임천택 애국지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지금 회장의 삼촌 되는 분이 활동력이 있었는지 한국의 경제인 지원팀과 잘 합작하여서 첫 쿠바 한인회를 설립하여 첫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삼촌 되는 회장이 돌아가시자 조카 되는 Tony Kim이 회장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자기 집안의 사람들을 내 세우는데 열을 내고 있는데, 실제로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내 세울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임천택 유공자 가족
마침 임천택 유공자의 친딸과 남편 그리고 아들과 함께 마주 앉아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마침 아들이 영어를 해서 우리의 대화가 가능해져서 좋았다. 임천택 유공자가 엘볼로 에네껜 농장에서 힘들게 일하면서 독립자금 $500을 모아서 상해임시정부에 보낼 만큼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고 있었다. 그때 이 $500은 그분들의 임금에 비해서 대단히 큰돈이었다. 이런 훌륭한 독립 유공자 임천택의 딸 가족과 교제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Gasbar Kim Sanchez
나는 또 옆에 있는 부녀와 식사를 함께 하면서, 그들의 집안 내력과 사정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 아버지 되는 분은 한국 사람 모습이었는데, 알고 보니 자기는 2세대로 부모가 한국 분이었다고 하는데, 한국 말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기는 현지 여성과 결혼해서 손자 대에 이르는 4대의 가계를 이루고 있었다. 중년이 되어가는 딸이 영어를 좀 해서 대화가 가능했다. 키가 아주 작고 몸이 가는 Kim 씨는 원래 배우였다고 하고, 딸인 Haivly Kim Sanchez는 음악가라고 했다. 이 아버지가 나의 설교 뒤에 나가서 인사와 함께 성경 말씀을 잠시 나누는 것을 보니 믿는 분이었다. 이분의 휴대폰에는 가족사진들이 많이 들어 있는데, 내 눈을 끈 것은 자기 아버지가 처음 멕시코에 올 때 가지고 온 조선 성경 사진이 있었다. 지금도 이 성경을 고모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 험한 곳에서 믿음으로 견디며 살아왔고, 그 믿음이 자손에게 이어지고 있어서 반가웠다. 한국어 성경이 없다고 하여서 내 휴대용 가죽 성경을 주었다. 딸이 나에게 자기 명함을 주면서 앞으로 아바나에 오게 되면 자기에게 연락하면 민박 등을 안내해 주겠다고 해서 반가웠다. 오늘 귀한 분들을 함께 긴 시간 교제를 나누어서 가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도시에 오니까, 교육받은 사람들 가운데 영어로 말이 통하는 분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시골에서는 서로가 말이 통하지 않아서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어 보지 못하여 아쉬웠다.
天坛饭店
쿠바에 온 뒤로 큰 변화가 없는 쿠바 음식을 먹어서 한국 음식 생각들이 나서 모두 중국 음식점에 가기로 했다. 여기에도 China Town이 있었다. 중국 식당들이 늘어선 골목에 들어서자 색다른 풍경을 보게 되었다. 식당 종업원이 메뉴판을 펴들고 보여 주면서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정 선교사는 우리를 중국 뷔페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내가 둘러보니 말이 중국 뷔페이지 거의 쿠바 일반 음식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모두에게 여기서 먹으면 중국 특색이 있는 음식은 못 먹으니까, 중국 요리 집으로 가자고 하니 모두 좋아해서 '천단'이라고 하는 요릿집으로 갔다. 종업원들은 모두 쿠바 아가씨들이어서 중국인 주인을 불렀다, 나는 그에게 중국 말로 우리가 순 중국 음식을 먹으려고 한다면서, 메뉴에 없는 鱼香肉丝와 鸡蛋和西红柿汤을 시키고 주인이 추천하는 몇 가지를 시켰다. Lobster와 해삼 요리는 좀 비쌌지만 한 접시씩 시켰다. 시킨 음식은 요리 일곱 접시, 흰밥 두 접시, 맛있는 볶음밥 두 접시와 탕으로 모두 모자람 없이 먹었다. 우리는 그동안 국물을 별로 먹어 본 적이 없어서 국물이 좀 그리웠는지, 큰 그릇에 담아 나온 국으로 모두 목을 축이더니 모두 맛이 있다고 좋아했다. 이 탕은 달걀과 토마토(Egg and Tomato)로 만든 탕이었다. 값은 좀 있지만, 모두 잘 먹었다고들 하여서 보람이 있었다.
헤밍웨이가 살던 동산
나는 그가 쓴 노인과 바다를 고일 때 읽었고, 영어 원본으로 영어공부를 얼마 동안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 허망한 사람이 살던 곳을 가 보는 일에는 관심 없지만, 단체니까 함께했다. 그곳의 언덕 위에 서면 앞으로 대서양이 펼쳐져 있고, 뒤로는 우뚝 선 Palma real tree (Royal palm)와 함께 우거진 열대 자연림은 아름다웠다. 그 동산에 있는 나무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마침 그곳에서 일하는 여자직원이 와서 나무들의 이름을 알려 주어서 고마웠다.
아바나의 옛 요새
Habana는 1519년에 스페인이 건설한 도시로 바로크와 신고전주의적 기념 건물들이 남아있다. 옛 요새는 스페인 침략자들이 바닷가에 만든 레알 푸에르사(Real Fuerza) 성채이다.
♣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건축 -우리가 서양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원이나, 궁전, 등 웅장하고 화려함을 갖춘 건물들이다.
쿠바는 포스트 카드 사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한 곳 선물 가게에서 살 수 있었다. 2장에 US $1인데 우표 값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벽에 붙은 우체통을 찾아서 넣었다.
유대인 회당(Jewish Synagogue)
오전에 시간이 많아서 방에 있기가 답답하여 혼자 밖에 나와서 이 거리 저 거리를 걷다가, 우리 민박 옆길로 가니 놀랍게도 유대인 회당이 있었다. 들어가서 살펴보고 사진도 찍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이 회당은 1953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벽돌 한 장 Poland Auschwitz concentration camp의 벽돌 한 장을 유리관에 넣어 전시하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이 벽돌 한 장이 주는 역사적인 메시지는,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Holocaust"를 잊이 말자는 것이다. 독일의 하노버 부근에 있는 Bargel Belzen 유대인 수용소에서 ‘안네의 일기’ 주인공 안네와 수천 명이 묻힌 무덤을 본 나로서는 이 벽돌 한 장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도 남았다.
쿠바를 떠나면서...
쿠바의 한인 후예들을 찾아서 보낸 한 주간은 무더위와 함께한 강행군이었지만, 보람된 시간이었다. 여느 사회주의 나라와 같이 쿠바도 혁명 초기에는 종교 말살 정책으로 기독교를 몹시 억압함므로써 많은 교회가 통합되었거나 폐쇄되었고, 기독교인들은 고난을 겪었지만, 반세기가 지나면서 서슬이 시퍼렇던 독재자도 사라지고 사회주의 이념의 색깔도 발해 가고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는 알게 모르게 소리 없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마을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는 가정교회들이 그 산 증거이다. 주님께서 쿠바의 정치적인 변화를 통해서 기독교 선교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기를 기도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다시 찾아 볼것을 기대하면서 쿠바를 떠나가는 우리를 밝은 햇살이 축복하여 주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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