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강릉교회방문

강릉교회 2019

강릉교회 방문 6.22-24, 2019
1972년 9월 3일 우리의 젊음을 바쳐 개척한 강릉교 회의 방문은 나에게는 감개무량(感慨无量) 한 일이다. 우리가 1969년 5월 25일 강릉에 와서 1979년 7월 15일 10년 한 달 20일을 살고 강릉을 떠나면서 진리교회는 모친이 내준 땅에 작은 예배당을 지었고, 강릉교회는 전세금 110만 원+10만 원을 남겨 두었는데, 이제 이렇게 반듯한 교회당 건물을 가지고 복음 전도에 힘쓰니 주님께 감사할 뿐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주님께로 온 박용시 형제와 그때 강릉교회에서 함께했던 홍인숙 자매가 가정을 이루어 이제 직장에서 은퇴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어머니가 섬기시던 교회, 어렸을 때 함께 했던 모 교회의 목회자가 되어서 제2의 인생을 주님께 봉사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번성하며 자립하는 교회, 복음 전도에 뜨거운 열정을 가진 교회를 보면서, 우리의 젊음을 바쳐 산 보람을 느꼈다.

40여 년 만에 박용시 형제를 만나니 반가웠다. 형제의 아파트에 가자 자매가 반갑게 맞아 준다. 나는 자매를 처음 보는 자매라고 생각하여, 나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나를 놀라게 하는 대답을 한다. 40년 전 어렸을 때부터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이야기도 하여서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어렸을 때의 자매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저녁은 이 교회의 동역자들과 함께 오리요리 집에서 만남의 즐거움을 나누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난 박철호 형제가 이제 강릉 교회의 원로로, 그의 자매가 된 서울 은평교회에서 함께 주님을 섬기던 조 양순 자매도 함께하여서 반가웠다.

 

 

강릉교회 예배
10~11시 만찬 예배가 형제들의 참여로 활기 있게 이루어졌다.

 

 

잠시 휴식
11:20~12:00 강릉교회 역사 강의 1부

 

 

잠시 휴식
12:10~1:00 강릉교회 역사 강의 2부

 

 

강릉교회는 그동안 교회 역사과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가지고 있지 못하여 강릉교회 역사에 대한 재정립을 위하여 개척자인 나를 청하여 특별한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나의 뒤를 이은 사역자 김도현이 개척자를 무시하고 자기가 마치 강릉교회를 시작한 양 역사를 왜곡한 데서 교회의 역사적인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이번 강의로 교회 역사가 재정립되었을 것이고, 알려지지 않았던 뒷이야기(behind story)들로 모두 재미있어했다.

 

강릉교회 개척 때부터 함께 있던 1세대 가운데 강릉교회와 함께 남아있는 잔존자는 박철호, 박용시 부부. 김난옥, 김옥기 두 모친, 5명이며, 주일학교 출신들 여러 명이 강릉교회의 산증인으로 남아있었다.

 

 

반가운 만남도 있었다.
집회 뒤에 한 자매가 와서 인사를 하는데 1980년 내가 자기네 주례를 섰다고 한다. 박계선 자매였다. 1980년 영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요한나 자매가 독일서 나왔다. 함께 강릉교회를 방문하였는데, 환경이 어려운 가운데 있는 김정규+박계선이 갑자기 결혼을 해야 한다고 주례를 부탁하여서 주례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자매가 여전히 강릉교회에 있어서 반가웠다. 그때 그 결혼사진을 가지고 있어서 그동안 이 친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늘 궁금하였는데 믿음 안에서 잘살고 있어서 반가웠다.

 

 

권미순 자매
찾아보고 싶은 자매가 마음에 떠올라 물어보았더니 알고 있었다. 전화로 반가운 대화를 하였다. 교회 자매들과 공유하는 Band를 통해서 이미 나의 소식과 강의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반가웠다. 남편 때문에 그동안 몇 해 교회를 못 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를 다시 나가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믿음은 이기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제 나이도 들었고, 자기 사업도 똑똑히 하고 있으니까, 신앙을 방해하는 남편을 이기라고 격려했다. 내가 중국 갔다 와서 다시 진리교회에 한 주간 있을 것이라고 하자, 그때 진리교회로 들어오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옛날 형제자매들의 소식도 들을 수 있어서 반가웠다.

미순 자매는 우리가 강릉교회를 개척하고 있을 때, 멀리 안인 가는 임곡 산골(강동면 임곡 1리)에 살고 있었다. 하루에 버스가 두 번만 다니는 골짜기였다. 어떤 인연으로 강릉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버스를 못 타거나 안 다닐 때는 한참을 걸어서 큰길에 나와서 지나가는 버스를 타야만 하는 교통이 불편한 곳에 살고 있었다. 몸도 아주 약하게 보이는 16살,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을 텐데도 열심히 나와서 개척하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런 자매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더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어린 자매가 마침 서울서 내려와 시장통에서 한복점을 하던 권영하 자매에게서 한복을 배워서 지금은 시장통에서 한복점을 하는 생활인이 되었다. 이른 시간 안에 신앙생활이 회복되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이다. 주일 오후 집회가 끝나자 한 자매가 미순 자매가 보낸 봉투 하나를 전해 주었다. 봉투에는 편지 한 장과 선교비 50만 원을 보내와서 놀랐다. 나는 자매의 글이 너무 반갑고 놀라워서 여기에 실어본다. 그리고 여러 손길이 선교지로 가는데 보탬이 되라고 사랑의 선물들을 주었고, 교회도 100만 원의 선교비를 주어서 고마웠다.

 

 

주일 오후 박용시 형제는 나를 데리고 경포에 있는 스카이베이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가서 잠시 쉬었다. 해 뜨는 쪽으로는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이 맞닿아 있고, 해지는 쪽으로는 백두대간의 푸른 산맥이 푸른 하늘과 맞닿은 영동은 신비롭고 아름답다. 형제는 나를 데리고 양복 판매장에 가서 윗도리 재킷과 셔츠 하나를 주어서 고마웠다. 강릉은 지난 평창올림픽을 기해서 완전히 새로운 도시가 되었다. 서울서 강릉까지 KTX 고속열차가 한 시간 정도로 다니는 세상이 되었다. 청량리에서 KTX로 강릉을 가면서 그 옛날 12시간을 밤새 달리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감회가 새롭다.

 

 

저녁은 강릉교회 형제들의 초청으로 안목 수산시장 횟집에서 싱싱한 회와 해물탕으로 저녁을 하면서 즐거운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안목은 조그만 어촌 포구였는데 지금은 울릉도 독도를 다니는 여객선이 다니는 항구로 발전하였다. 더욱이 횟집이나 있던 이곳은 이제 전국에 알려진 커피 거리가 되었다. 우리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와 아이스크림으로 하루를 마치게 되어서 주님께 감사하였다.

 

 

우레기 미역국

월요일, 오늘은 김난옥, 김옥기 모친에게 점심을 대접해 드리고 싶었다. 박용시 형제 부부, 박철호 부부와 함께 경포에 가서 모친들이 드시기 편한 우레기 미역국으로 점심을 나누었다. 아침부터 오늘은 내가 청하고 대접하므로 내가 계산한다고 그렇게 일렀건만, 이미 홍인숙 자매가 냈다. 말도 되게 안 듣는다.

 

 

Blue Mountain Cafe

그리고 진리에 들어가서 전영선 자매의 Blue Mountain Cafe에서 교제들을 나누었다. 울렁이는 동해의 푸른 물결은 어서 들어오라고 나를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바다를 늘 그리워하고 사는 사람이다. 김계중 자매가 감자 적을 부쳐왔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감자 적은 맛이 좋았다. 여름이라 김 형제네는 자기 마당에 간이식당을 열고 있었다.

     

     

 

고 자매가 선교비로 20만을 주어서 고마웠다. 저녁은 김 형제와 영선 자매와 주문진에 가서 메밀막국수로 했다. 오늘 밤은 영선의 민박인 이 층에서 파도 소리와 함께 꿈나라로 떠났다.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붉은 해는 신비롭고 아름답기만 하다. 그리고 이 하루 이 땅을 얼마나 뜨겁게 달굴 것인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아침 바다는 잔잔하다. 찰싹거리는 파도 소리, 바다의 짠 내를 맡으며 뒷섬 솔밭 쪽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하늘을 가리는 자연 솔밭은 아름답기만 하다. 

       

 

곰치탕 

아침은 함께 주문진에 항에 있는 곰치(멍텅구리) 탕 전문집으로 가서 아침을 했다. 우리가 강릉에 살던 때에는 곰치는 잡지도 않았고, 먹지 않았다. 뱃사람들이 잡히면 재수 없다고 버리던 고기인데 이제는 귀한 몸이 되었다. 곰치탕은 이제 널리 알려진 동해안 음식으로  바다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즐겨 찾고 있다.  

 

 

영선 카페에서 교제하다가 김계중 형제 식당에서 잔치국수로 점심을 나누고 헤어져야만 했다. 중국 선교지로 떠나가는 길에 도움이 되라고 전영선 자매 30, 김계중 10의 교제를 주어서 고마웠다. 중국 가는 나를 위하여 전복조 형제가 100만 원의 노잣돈을 내 통장에 넣어주어서 중국으로 가는 걸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김제화

jewhakim@daum.net

'강릉교회방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60번  (0) 2019.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