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Base, Sharing Home 2008-11
나눔의 집의 위탁 운영 2008-201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중국 사역에 나선 지 올해로 16년째, 그 가운데 "나눔의 집" 양로원을 운영해 온 세월이 11년(1999-2010)째 이다. 이 세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동안 주님의 축복과 인도로 세 곳의 한족 교회, 난청(南城) 교회, 알잔(二站) 교회, 소쥬(小九) 교회, 우둘(五对) 한족 가정교회 그리고 도문의 썅산(向上) 조선족 교회가 세워졌다. 우리가 바라기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있는 자리 그곳에서 복음의 빛을 비추는 등대 역할을 하는 성경 중심의 교회로서 선교적이고 전투적인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안식년이라 해서 6개월이나 일 년 정도 고향에 돌아가서 쉬면서 모금도 하고 공부도 하고 온다는데, 우리는 그렇게 오래 쉴 때도 없고, 오라고 하는 곳도 없어서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그저 나눔의 집 식구들과 살면서 1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가 세운 한족 교회와 조선족 교회를 돌아보면서 섬기는 일이 우리의 고정된 사역이 되었다. 외국인인 우리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없는 이 나라에서 우리가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것은 우리가 가르치고 양육하는 한족 형제자매들이 뻗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복음을 전하러 나아가야 한다는 성령의 강한 인도하심을 받는 형제자매들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알잔 가정교회는 순 노형의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딸 펑친이 몸이 아파서 목단강 원춘이란 곳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그때 조선족 간호사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집에 돌아온 자매는 부모님에게 전도하여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어 자기 집을 열어 모이기 시작하다가 우리를 만나, 체계적인 가정교회로 발전하여 예배당도 가진 150여 명의 교회로 자랐다.
알잔 교회 예배 모습
새로운 변화란 세 곳의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다른 곳으로 뻗어 나가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못하여 가장 아쉬운 일이었다. 일하게 하시는(역사, 役事) 성령의 뜨거운 감동과 복음을 전하러 나아가야 한다는 강력한 도전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좀 담대하고 전투적이고 개척적인 전도자들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격려하지만, 중국 형제자매들은 소심하고 겁이 많았다. 물론 여기에는 중국의 정치적인 환경도 있다. 종교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없도록 하는 중국의 종교법이 믿는 자들을 움츠리게 하는 영향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또 이런 종교법을 악용하여 돈벌이하려는 말단국가공무원들의 부정부패도 한몫하고 있었다. 그저 자기 마을 안에 갇혀서 활동하는 정도인데 이 한계를 벗어나서 다른 마을에 전도를 보내면 지극히 소극적으로 활동하다가 그만두는 것이 보통이다. 종교선전을 한다고 누가 파출소에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붙잡혀 가거나 물어야 할 벌금들은 이들에게는 감당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은근히 용감한 형제자매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가기도 하고 벌금도 물고 매도 좀 맞고 핍박을 당하는 경험도 좀 하기를 바라는데 지난 10여 년의 세월 동안 전혀 그런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그저 허가 없이 종교 활동을 한다고 종교 국으로부터 벌금 통고를 받은 세 번의 경험이 전부다. 또 사역을 확대한다고 경제적으로 기대를 하는 사람들이나 현지교회들과 잘 못 얽히면 사달이 나는 일들이 자주 있어서 큰일은 못해도 부담 없이 마음 편하게 이렇게 자유롭게 일하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제일 좋은 것 같다. 우리 자신도 법의 제재를 받으면서도 이 만큼 해 온 것이 기적이며 주님의 크신 은혜이다. 우리가 나눔의 집을 하면서 사회정치적으로 인정과 지지를 받으면서 목단강 경내에서는 편하게 움직이지만, 목단강 시와 해림 시 경내를 벗어나면 우리도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소심해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 해림(海林)시 난청(南城) 가정교회 창조론과 진화론 강의--농촌 분들은 우주관에 대한 지식도 부족하지만, 오랫동안 사회주의 무신론에 젖어 살아서 성경에 근거한 창조론에 대한 지식이 적었다.
상지(尚志) 시 소쥬(小九) 가정교회 2005
주님은 우리를 상지시 우지미향 소쥬 촌 한족가정교회로 인도해 주셨다. 50여 명이 모이는 처소는 왕민도(王民道) 가정교회로 성경 중심의 한족 교회였다. 가정교회로 쟈이(翟)자매가 인도하고 있었고, 모이는 집은 소쥬 촌 당서기의 집으로 어머니가 믿는 자매님이어서 이 가정교회가 보호를 받고 있었다. 우리는 소쥬 가정교회를 영적으로 가르치고 교제하는 좋은 관계로 발전하여 나갔다. 해가 바뀌어(5, 2006) 이 처소의 예배당을 지어 줄 손길이 나타나서 의논하였는데, 새로운 터는 구할 수 없어서 쟈이 자매 집을 헐고 새집을 짓는 데 모두 찬성하여서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하나님은 저들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그곳에 보내어 저들의 구하는 바를 이루어 주시고 계셨다.
2008
또 한 가지 우리들의 교회 문제는 인구이동의 사회현상이 지역교회 발전에 큰 장애의 요소가 되어왔다. 중국이 산업화 사회로 빠르게 들어가면서 젊은이들이 고향을 떠나가는 현상이 지난 5년간 눈에 띄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 현상은 비단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기성세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농촌 마을에는 젊은 인구가 줄어들고 교회는 기성세대와 노년 인구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도시나 산업지구의 교회는 자연히 커지고 있었다. 마치 한국이 겪었던 같은 현상이 여기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젊은 형제자매들에 대한 기대는 일자리를 찾아간 그곳에서 복음을 위하여 충성스럽게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도문에 있는 조선족 교회의 경우를 보면 고등학교 시절부터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열심히 활동하다가 연변 과기대나 다른 대학을 다니면서 청장년을 위한 활동은 타에 모범적이었다. 일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아서 떠나고 일부는 대학들을 졸업하고 역시 일자리들을 찾거나 진학을 위하여 중국 연안지구나 한국으로 하나둘 떠나가면서 몇 년 사이에 주일이면 찬양 소리로 요란하던 교회는 썰렁해지다가 이제는 이 악기들과 드럼 등은 더 소리를 내지 못한 채 먼지만 내려앉고 있었다. 허가 없이 종교 활동한다고 벌금을 몇 번이나 맞으면서도 충만한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다가 드디어 종교 활동 장소 허가가 나서 좀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지만 이젠 사람이 귀해졌다.
연변 도문 향상 조선족 교회
나눔의 집 운영도 우리가 농장을 개간하여 절반 정도의 자급자족은 한다고 하더라도 10년이 지나면서 이 사역을 감당하기에는 힘이 부치고 있었다. 세월이 갈수록 일은 많아지는데 후원의 손길들은 줄어들고 있었다. Fund Raising이나 후원자들을 모을 수 있는 교회나 배경 그리고 중국선교를 위하여 중간 역할을 해 주는 누구도 우리에게는 없었다. 우리 자신도 선교를 위하여 모금 등 그런 일을 할 만한 재간도 없었다. 그동안 주님께서 기적적으로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는데, 앞으로의 일도 주님이 하시는 일일 진데 우리가 어찌하랴! 주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잘 알아서 판단해야 할 일이었다. 우리는 이 나눔의 집을 맡아서 선교목적으로 계속 일할 일꾼을 알아보고 있었다. 아무 조건도 부담도 없이 그저 나눔의 집을 맡아서 하면 되도록 모든 것을 넘겨주고 싶었다. 이 넓은 땅과 건물은 우리가 수리하여 세로쓰면서 땅은 개간하여 농사짓고 있어서 오늘 모든 것을 놔두고 떠난다고 해도 아까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10여 년 이상 닦아진 선교 베이스는 무엇으로도 계산할 수 없는 무형의 재산이 남아있을 수도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08
우리는 2008년이 밝아오면서 나눔의집을 정리하려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련 없이 나눔의 집을 닫으면 될 일이지만, 중국의 상황에서 나눔의 집을 통한 선교사역은 중요한 뜻을 가지므로 이 나눔의 집이 남아있기를 바랐다. 뜻이 있는 누군가가 나눔의 집을 맡아서 운영하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때 마침 나눔의 집을 맡아서 운영해 보겠다는 한국 팀이 의논하여왔다. 의논 결과는 당신들이 운영자금을 대고 농사를 지으면서 일 년 시험운영을 해 보기로 했다. 그들이 일 년 동안 나눔의 집 운영은 괜찮았다. 처음 이 팀은 중국 사람들에 대한 선교를 연변 조선족같이 조금 낭만적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자기들이 직접 부딪쳐 보면서 자신감을 가지지 못한 것 같다. 그저 통역이나 쓰면 되는 정도로 쉽게 생각한 모양인데 그런 통역이 항상 있으란 보장도 없고, 부정과 배신이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그분들이 우선 나눔의 집을 성실히 운영하면서 여기서 중국선교의 비결을 터득하면 될 텐데, 마음이 바쁜 것 같았다. 선교는 시간이 쌓여야 하는 일이다. 낯선 중국 문화와 언어에 먼저 적응하려면 2~3년의 세월을 들여야 하는데 이분들은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길게 살 생각을 해야 하는데 마음이 바쁜 것 같았다. 이미 중국교회가 세 곳이나 세워져 있고 인간관계가 10여 년 이상 만들어져 있는 이곳에 천천히 스며들어 우리를 대신하여가면서 새로운 선교의 판(Base)을 짜가면 될 일인데 길게 생각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봄에 씨앗을 뿌리면 시간을 기다려야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자연의 원리를 선교정책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하는데…….
2009
그들이 손을 놓고 물러나자 이번에는 시내에 있는 한족(중국) 교회가 맡아 해 보고 싶다고 하였다. 우리를 잘 아는 중국교회 목사는 자기네 교회의 노인들을 생각하면서 그동안 우리 양로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이 있었다. 우리는 한족 교회의 Staff들과 긴 토론 끝에 한족 교회가 재정을 해결하면서 농사도 짓고 한해 시험운영을 하는 데 합의를 하였다. 나는 이번에는 한 동네고 중국 형제들이 운영하게 되어서 마음이 좀 놓이고 편했다. 그런데 반년이 지나면서 우리에게 재정지원을 부탁하고 있었다. 나는 이 중국교회에 한국 사람들도 드나들고 있어서 재정문제는 잘되리라고 믿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일 년이 되자 그들도 손을 놓았다. 준비된 모든 것을 그냥 주어도 맡아서 할 사람이 없었다. 이 오지에 와서 주님과 함께 고생하려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이나 사업적으로 밝은 사람들은 이왕 선교할 바에는 목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으려는 경향들이 있었다. 즉 교육환경이 좋고 문화화된 도시나 교통이 편리한 곳 등지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오지(奧地)에 대한 사명감이 있는 분들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2016
우둘(五队) 가정교회
중국의 모든 조직은 군대식으로 되어서 농촌 지역도 대대 중대 소대 분대 단위로 부르기도 한다. 알잔 본 마을의 주변에 있는 몇 개의 마을이 있는 데 본 교회에서 4Km 정도 떨어진 길가에 60여 호가 사는 "5대대"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다. 五队(오대)를 중국어로 '우뚜이' 인데 발음상 얼화(儿)해서, 즉 ‘ㄹ’을 붙여서 '우둘'이라고 부른다. 알잔 촌에 속한 다섯 번째(소대) 마을이라는 뜻이다. 몇 년 전 이 마을에 왕 씨 성을 가진 부부가 남매를 키우며 농사를 짓고 있었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이 가정에 불행이 닥쳤다. 부인이 귀신이 들린 것이다. 우리가 이들을 만나기 전에 이미 남편은 무당집에다 이름을 울리고 귀신에게 의지하려고 준비가 다 된 상태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전날 밤에 우리가 알게 된 것이다. 이 일은 이미 나의 글에 적었다. 우리는 그 밤에 그들을 교회당으로 데리고 와서 기도하면서 한 주가 지나서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예수님을 그들의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은 형제자매가 되었다. 성령의 은혜로 그들은 영적으로 빠르게 자랐다. 자기 조그마한 마을에 복음화를 위하여 힘쓰면서 본 교회 주일 외에 한 번 성경집회로 모이게 되면서 우리도 가끔 참여하여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다. 그러던 가운데 2015년 한해 농사를 지은 뒤 길가 좋은 몫에 나와 있는 넓은 터에 있는 흙 토담집을 왕 형제가 자기 돈으로 인민폐 25,000원을 주고 샀다. 자기네는 이미 번듯한 벽돌집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들이 살려고 산 것은 아니었다. 마을에 모일 집회소를 위하여 산 것이다. 그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집이 너무 낡고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집이기도 했다. 2016년 방문했을 때 나에게 본 교회에서 나와 자기네 마을의 독립된 가정교회를 이루고 싶다는 의견과 함께 새 처소를 짓고 싶다는 의논을 해왔다. 나는 미국에 있는 후배에게 이 소식을 보냈다. 여러 달 뒤에 그 교회에서 돕기로 하였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총예산 중국 인민폐 5만 원 가운데 2/3를 미국 한인 교회에서 1/3은 자기네들이 대기로 하여서 새 처소를 지었다. 그리고 12월부터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부르셔서 당신의 터를 넓혀 가시고 계셨다.
나눔의 집은 2008년과 2010년까지 힘들게 운영되다가 2011년 문을 닫으면서 우리들의 중국선교의 든든한 기지(base) 역할을 한 터전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2012년부터는 우리도 이제는 중국 거주자가 아니라 방문자로서 신분이 바뀌게 되어서 허전함은 말할 수 없었다. 1994년부터 중국선교를 시작한 지 18년 가운데 15년 동안은 주님께서 나눔의 집을 통하여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다. 그 가운데 북한 고난의 행군 시기에 양식 지원 사역은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아픔을 몸으로 느껴본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다. 세 곳의 한족 교회와 가정교회 그리고 한 곳의 조선족 교회가 자립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우리가 중국에서 산 보람이다.
내 인생을 3막으로 나누어 본다면 20대에 시작하여 네 곳의 교회 개척시대, 중간인 제2막은 배움의 시대 그리고 제3막은 중국선교의 시대로 50대에 와서 60대 후반에 이르는 삶을 중국 땅에서 살았고, 그리고 이제 나눔의집은 비록 닫았지만, 사역은 계속되는 데, 이제부터는 1~2년마다 한두 달씩 방문하여 순회하면서 이제는 영적인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이 사역이나마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하다가 중국 땅에서 부르심을 받고 싶은 마음이다. 한번 왔다가는 삶, 한없이 부족한 우리에게 은혜와 능력을 주셔서 영광스러운 복음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던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경배를 드린다.
마라나다(Μαρανα θα0 주께서 곧 오십니다. (고린도전서 16 : 22)
김제화
jewhakim@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