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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여행기/Haiti(아이티) 선교

0. Hispaniola Missions

Hispaniola(아이티와 도미니카) NGO 선교 2010


오래전부터 중국 선교를 하면서도 캐나다에 올 때마다 남미 지역의 선교지를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곳에서는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미는 캐나다에서는 7박 8일  Package Tour로 싸게 가는 길이 많이 있지만, 나는 선교사가 일하고 있는 선교지를 가보고 싶었다. 그러던 차 중국에서 잠시 나와 있는 동안 12월 초 NGO가 주최하는 아이티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수양 회 프로그램에 초청하여 주어서 나와 내 아내가 함께 갈 수가 있게 되었다. 우리가 가야 하는 선교지 아이티는 지금 대통령 부정선거로 인한 여파로 한 달이 지나도록 선거 결과를 미루고 있어서 언제 폭동이 일어날지 모르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데다가, 콜레라까지 만연하여 2천여 명이 죽어 나가고 9만여 명이 감염되고 있었다. 주위에서 지금은 안 가는 것이 좋겠다고들 말하지만, 우리는 위험하다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주님께서 그곳에서 우리에게 주님의 선한 일들을 이루시리라는 믿음이 아이티와 도미니카로 가는 일에 주저하지 않도록 하여 주었다. 아이티와 도미니카는 한 섬으로 된 나라로, 이 섬을 Hispaniola라고 부른다. 아이티는 섬의 26%를 차지하고 있고, 도미니카는 두 배가 되는 74%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왕 가는 길에 두 나라를 모두 방문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계획하였다. 날틀 요금이 아이티 왕복보다는 도미니카로 돌아오는 것이 오히려 더 싸기도 했다.

              

 

 그러나 도미니카에는 아는 분이 없어서 기도하는 가운데 도미니카 공화국 web site에서 한국 침례교회에서 파송된 김영구 선교사와 연락이 되었다. 우리의 방문을 환영해 주어서, 우리는 도미니카 공화국 선교지도 방문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중남미 섬나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중남미로 가는 길은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우선 두 나라 환경이 조금은 다를 수 있어도 장티푸스, A, B형 간염, 파상풍, 말라리아, 콜레라 그리고 뎅기열, 등이 항상 있는 곳이라고 한다. 우리는 간단하게 예방 접종을 하기로 하였다.  우리 두 사람이 간염 A, B 가운데 B는 이미 면역이 되어 있어서 A와 말라리아 예방 주사, 콜레라와 설사 예방약을 먹는데 $400이 들었는데, 선교지를 도울 수 있는 큰돈이 이런 데로 없어지는 것이 아깝기만 하였다.

 

 아이티 공화국(Republic of Haiti)

 

 

크기-27,700㎢(강원도1/3 크기)
인구-9,751,000 정도, 지진과 콜레라로 인구수가 많이 줄었을 것이다.
수도-Port-au-Prince(포르토프랭스)
정치-대통령 중심제 
돈 –구르드 (gourde/G)로
말- 민족어 크레욜(Creyole)/고교이상은 프랑스어를 사용. 
인종-아프리카 흑인(95%), 나머지는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혈)와 백인이다.
종교-80%가 로마가톨릭, 기독교도가 16%, 공적으로는 가톨릭이

부두교-사실은 인구의 반 이상이 아프리카에 기원을 둔 밀교인 부두교를 널리 믿고 있다.

 

1. 역사
스페인의 식민 통치

히스파니올라섬(아이티와 도미니카)의 불행한 역사는 콜럼버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섬을 발견한 이래, 섬의 원주민이던 타이노 족과 아라와칸 족 등 토착민들이 학살과 질병으로 인해 몰살당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와 일하게 하였으며, 지금 아이티 사람들의 선조이다. 토착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진난만한 토착민들

상륙한 스페인 군인들을 토착민들은 환영하면서 황금 가면을 선물 하였는데, 황금 가면을 선물 받은 스페인군은 황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원주민을 무력으로 사로잡아서 황금 광산을 캐는 중노동을 시키게 된다. 이에 분노한 카리브 인디오들이 대항하게 되지만, 강력한 화력을 가진 스페인 군대에 패하게 되자 중노동에 견디지 못한 원주민들은 약을 먹고 집단 자살을 한다, 스페인 식민 제국주의자들은 서부 아프리카로부터 흑인들을 데려와 노예로 삼아서 황금을 캐는 중노동을 시키게 된다. 스페인은 1687년까지 식민 통치를 하다가, 1697년에 프랑스령으로 바뀌게 되면서, 흑인 노예들은 목화, 사탕수수, 커피 농장에서 혹사당하면서 중남미에서 가장 번영한 프랑스령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혹사에 격분한 흑인 노예들은 1791년 8월에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며 투생루베르튀르,  데 살린, 페숑, 등의 뛰어난 지도자 아래 뭉쳐, 스페인, 프랑스, 영국군을 차례대로 격파하고 프랑스 나폴레옹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이티 공화국 독립
1804년 1월 1일에 아이티 흑인 공화국을 수립하게 된다. 1822~1844에는 도미니카를 병합하게 되므로 Hispaniola 섬 전체가 아이티 공화국이 된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각종 내분으로 국가가 휘청거리고 있을 때 미국의 자본이 들어와 입김이 세어지게 되고, 1915년 7월 내분을 핑계로 미군이 아이티섬을 점령하여 보호령으로 만들고 1934년까지 미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미국의 보호령에서 벗어난 아이티는 1957년부터 30년 동안 여러 종류의 독재정권의 결과로 국토는 피폐해지고, 사람들은 일 년에 평균 250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생활을 꾸려가야 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떨어지게 되었다.

 

 자연
아이티(Ayiti)란 아라와크어로 ‘산이 많은 땅’이라는 뜻이며, 이름 그대로 국토의 3/4이 산이다. 가뭄과 허리케인 등이 자주 발생하여 큰 피해를 입기도 한다. 산야가 벌거벗은 것은 아이티 사람들은 나무를 숯으로 만들어서 땔감으로 쓰는 습관 때문이다. 나무를 키우지는 않으면서 베어내기만 하다 보니 한 때 풍요로웠던 산야가 이렇게 민둥산이 되었다고 한다.

 

3. 사회
아이티는 소수의 상류계급이 호화주택에 살고 있지만, 대다수의 국민은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다. 초등교육은 의무, 무상으로 되어 있으나 학령기 아동의 1/5~1/6만이 취학하고 있을 뿐이며, 15세 이상 성인의 문맹률이 55%(1995)나 된다. 노래와 춤, 그림과 조각은 아프리카 색채가 짙다. 2001년 인구증가율은 1.4%이며, 평균수명은 49.38세로 남자는 47.67세, 여자는 51.17세이다. 1999년 현재 성인의 5.17%가 AIDS에 걸려 있고 2만 3000여 명이 사망하였다.

 

부두(Boodoo) 교

아이티 선교를 하려면 부두교가 무엇인지를 기본적으로 알 필요가 있다. 부두교는 서아프리카의 종교로서, 부두교를 믿는 자는 전 세계적으로 6천만 명이 넘는다고 하며, 제일 많은 곳은 아이티와 미국 남부 루지에나 등 흑인들이 주로 많은 곳이다. 프랑스가 노동자 공급을 위해 서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데려오면서 부두교가 따라 들어왔다. 1804년 Haiti의 흑인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프랑스 백인의 독재정권을 물리친 흑인 정권은 Boodoo 교를 국교로 정했고, 이러한 상황은 Haiti가 공화국이 된 1820년까지 계속됐다. 1863년 여덟 명의 부두교 승려가 여자 두 명을 납치하여, 그중의 하나는 제물로 바친 후에 요리까지 해 먹었다가 잡히는 사건이 발생하여, 로마 가톨릭교도였던 당시의 대통령 Geffrard의 분노를 사게 되어서  Voodoo 교를 폐지하려고 하자, 이에 앙심을 품은 부두교 승려들은 port-au-Prince의 한 가톨릭교 미사에서 그 대통령의 딸을 살해해 버리는 큰일이 벌일 정도로 그들의 세력은 지금도 막강하며, 아이티 가톨릭은 부두교와  혼합된 종교이다.좀비라는 황당한 존재의 말은 바로 이교에서 나왔다. 좀비는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을 일컫는다. 부두교는 돈만 주면 상대방을 저주하는 가작인두(假作人头)술수가 발달되어 있는데, 한국의 토속 신앙인 제웅과 방자의 주술 거리와 똑같다. 한국의 제웅은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서 바늘을 꽂아서 저주 거리로 삼았다.

  

   

아이티 지진

아이티 지진은 2010년 1월 11일 오후 4시 53분 9초에 아이티의 수도인 포르토프랭스 인근 지표면으로부터 13Km 깊이에서 발생했다. 8.9도의 첫 지진은 35초간 있었으며, 그 뒤 여진은 2시간 동안 6차례 발생했고, 9시간 동안 26차례의 여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아이티 대통령 궁(르네 프레발 아이티 대통령은 무사했다.)과 국회 의사당을 포함한 포토프랭스의 주요 건물들이 무너지거나 부서졌으며, 감옥, 공항, 병원과 같은 시설도 무너졌다. 현재 지진에 의한 사망자는 30만으로 추정하며, 37만 명의 고아들이 생겨났으며, 100만 명의 이재민들이 삶의 터를 잃고 지금도 천막촌에서 하루 한두 끼니를 연명하면서 살고 있다. 이런 데다가 지난 10월 태풍이 몰아쳐 엄청난 피해에 연이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콜레라가 퍼져 온 나라는 아비규환이 되었다. 지진 피해 일주년이 되는 현재 2011년 1월 11일 현재 콜레라도 죽은 자가 3500여 명에 이르고 15만 명 이상이 감염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이 역병이 언제쯤 끝날 것인지는 아직 막연하기만 한 것 같다.

                 

 

아이티의 정치 상황
2009년 10월 28일 대통령 선거는 혼란 속에서 투표가 이루어졌지만, 국민의 50%가 참여하지 않았다. 18명의 후보자 가운데 12명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여 선거가 무효라고 주장하며 곳곳에서 부정선거 항의시위를 벌였다. 현 대통령인 르네 프르벨이 자기의 사위이자 야당 후보인 셀레수탱 후보의 당선을 음성적으로 지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투표일에 어떤 곳에서는 폭력사태로 투표소가 문을 닫거나 투표함이 통째로 도난당하는 등 선거를 방해하는 일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아이티 정국이 불안한 가운데 대통령 당선자 발표를 한 달이나 미루고 있다가, 우리 팀이 도착한 다음 날인 12월 7일 고득점자 1, 2위만 발표를 하였다. 여기에 반발하여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수도로 들어가는 길을 막으면서 총격 시위가 벌어졌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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