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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여행기/Haiti(아이티) 선교

1-1. Haiti Missions

아이티 NGO 선교

토론토에서 아이티까지 하늘길로는 3,131Km이다. Toronto에서 아이티로 가는 길은 먼저 미국 Florida주 Miami까지 1984Km를 날아서, 다시 날틀을 갈아타고 Port-au-Prince까지 바다를 건너 1147Km 날아야 하는 거리이다.

 

Port-au-Prince  12. 6 월 밤새 눈이 내림
우리가 탈 날틀은 너무 이른 아침이어서 잠을 설쳤다. 김창인 형제님이 눈이 내리고 있는 이른 아침 5시 20분경에 오셔서 우리를 공항에 데려다주었다. 현지에 줄 옷가지 네 상자를 부치려고 하니까 여름하고 년 말에는 종이로 된 상자를 부치지 못한다고 자루에 두 개씩 넣어 부쳐야 한다고 한다. 이 이른 새벽에 어디 가서 자루를 사야 하느냐고 묻자 파는 곳을 알려준다. 시간이 많지를 않아서 바쁜 마음으로 뛰어갔지만 가게 문이 아직 열리지 않았다. 잠시 서성이는데 주인이 와서 문을 열었다. 긴 자루 두 개를 $36에 사서 한 자루에 상자 두 개씩을 넣어 부치느라 마음이 바빴다. 모든 일에는 항상 변수가 있듯이, American Air에 이런 일이 있는지를 누가 알았겠느냐! 우리가 늦게 함께하므로 같은 날틀로 가지 못하고 우리가 먼저 떠나 마이애미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날틀은 흰 눈이 덮인 활주로를 나가 한 곳에서 날틀 위에 덮인 눈을 치우고 나서야 힘차게 달려 칠 흙같이 어두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함과 날틀의 엔진 소리만이 어둠의 고요를 깨고 있었다.

 

 

얼마 뒤 동녘 저 끝자락에 아주 가는 주황색 띠가 둘러치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이제 해님이 떠오르려나 보다. 7시 10분이 지나면서 붉은 불덩어리 해님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골을 이루며 연이어져 가는 거대한 회색 구름 산맥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새 아침의 밝은 빛을 받으며 잠시 성경을 보고 주님께서 아이티에서 우리들을 주님의 선한 도구로 써주시기를 기도하였다.

3시간여 날아오니 대서양의 푸른 바다가 보이더니 미국 남쪽 끝자락 Miami에 내렸다. 우리는 아이티로 가는 대기실에 있는 coffee shop에 가서 커피를 한잔 사면서 컵라면에 더운물을 받아서 아침 점심을 대신하였다. 거의 네 시간을 기다려서야 토론토 팀들과 반가이 만났다. 다시 우리를 실은 날틀은 대서양을 두 시간여 날자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중남미의 섬나라 아이티가 보이기 시작한다. 산야는 붉고 메마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진으로 부서진 흔적들을 보면서 수도 Port-au-Prince 공항에 내렸다. 공항은 작고 몹시 초라하였다. 짐을 찾는 곳은 좁아서 몹시 어지러웠다. cart 사용료 $2 내고 짐을 찾아 실으려고 하는데, 원하지도 않는데 cart에 실어주는 친절한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에서 잡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한 푼이라도 벌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1을 주었다. 밖에 나오니 cart를 끌어 주겠다는 친구들이 너도나도 달라붙는다. 괜찮다고 해도 한 친구는 끝까지 따라온다. 현지 NGO 선교사가 두 대의 차와 staff들을 데리고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드디어 우리 일행 10명의 짐이 한데 모이고 사람과 차로 붐비는 주차장은 어둡고 어지러웠다. 우리 일행의 짐 cart를 따라온 사람들이 우리가 트럭에 짐을 싣는 데 억지로 돕느라 애들을 쓰고 있어서 측은하기도 했다. cart를 따라온 사람들만 거의 5-6여 명은 되었다. 모두 한 푼이라도 받으려는 기대였다. 짐을 다 싫은 다음 이 선교사는 영어로 우리가 너희들을 부른 것이 아니라 너희가 스스로 왔으니까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얼마를 쥐여준다. 그들도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받아서 물러난다. 그저 따라오기만 해도 조금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공항에서 어정거리기만 해도 한 끼니의 밥을 해결할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다. 사실은 도와주고 싶어도 말이 안 통하는 거기에서 어처구니없는 바가지를 쓸까 봐 겁이 나서 짐을 못 맡기는 것이기도 했다. 차라리 일 불이라고 말을 한다면 얼마든지 도와줄 일일 것이다. 불과 40여 년 전 한국 서울역에서 무거운 짐을 서로 맡으려고 애쓰던 지게꾼 아저씨들, 15년 전 중국에서도 공항이나 역에서 서로 짐을 들어주려고 하는 짐꾼들을 생각나게 해 주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는 길에 늘어선 차들로 말미암아 쉽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얼마를 기다리며 해치고 나오자 이제 길도 좋아지고 달릴 수가 있었다. 내가 길이 좋다고 하니까, 운전하는 최선웅 간사가 이 길이 국도라고 했다. 여러 동리를 지나 드디어 우리가 머물 Indigo Resort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방을 정해 놓고 식당에 모였다. 서양 음식을 닮은 아이티의 특색 있는 음식과 과일들이 어우러진 식탁에서 교제들을 나누면서 하루의 피로를 달랬다.

 

내일부터 있을 수양 회를 위하여 프로그램들을 의논하느라 피곤하리만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일 아침 devotion은 나에게 부탁하였다. 그리고 이틀째에는 나에게 한 시간이 주어졌다. 나의 간증과 중국 사역을 나눔으로써 여기 현지 목회자들에게 신선한 변화를 주고자 하는 데 있었다.

                             

 

 Indigo Resort  12. 7. 화 맑음

캐리비안 바닷가에 자리 잡은 이 리조트는 지진과 콜레라로 외국 손님이 없고 우리가 다 차지한 셈이다. 전국에서 초교파적으로 초청된 100여 명의 목회자들을 데리고 세미나를 하려는 곳이다. 오후부터 등록이 시작되고 저녁부터 세미나가 시작될 예정이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함께 남국의 밝은 아침을 맞이하였다. 야자와 종려나무의 싱그러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느끼게 해 주었다. 오후에는 끝없이 펼쳐져 있는 노란 모래밭들, 가벼운 파도가 일고 있는 Caribbean의 푸른 바다는 아름답기만 하였다.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이 나라에 어떻게 지진과 태풍 그리고 콜레라가 번져 이토록 생명이 고통을 받고 있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흔들리는 이 땅, 죄인들이 사는 이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은 없는 것 같다. 시간이 많아서 오전에 나는 푸른 바다에 몸을 맡기고 파도를 타며 헤엄을 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발로 아무리 바다 밑 모래밭을 뒤져 보아도 살아있는 조개들은 없는 것 같고, 발에 걸려 나오는 것들은 부서진 산호 조각들과 빈소라 조개들뿐이었다. 출렁이는 파도와 함께 그거라도 건지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 큰 수양 회 비용을 위하여 토론토 Joyful 교회는 그동안 바자회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모금을 하였는데, 떠나기 전 주일 아이티로 가는 팀과 함께했을 때 담임 목회자가 회계에게 교회 재정을 물었을 때 제로라고 대답한다. 그런데도 선교를 떠나야 하는 이것이 한국 사람들이다. 서양 교회 같으면 될 수도 없는 일이고, 말도 안 되는 일을 한국 사람들은 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주님께서 이런 교회를 놀라운 방법으로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후부터 현지 아이티 사역자들이 오기 시작하였다.

             

 

아이티 기독교 연합회에서 목회자들을 초교파적으로 100명을 초청하였는데, 어려운 사정들로 인하여 75명 정도가 왔다. 우리와 Gap 팀과 함께 모두 100여 명의 수양회를 가지게 되었다. 저녁 집회에서 모두를 소개하는 orientation을 가지면서 첫날 저녁을 보냈다.

              

           

수양회 둘째 날  12. 8 수. 맑음
6시 반 아침 기도회가 있었다. 그리고 오전에는 한국, 아이티 강사들의 강의가 있었다. Joyful의 후원으로 환란을 겪은 아이티 목회자들이 이렇게 좋은 곳에서 풍성한 음식과 교제들을 나누면서 휴식을 가지며 재충전할 수 있게 되어서 모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우리 팀원들과 함께 바다에 나아가 파도를 타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 이 자매는 아이티 에서 널리 아려진 Gospel Singer로 은혜로운 찬양을 해 주고 있다.              

                  

오후 시간에 나는 구원받은 간증과 아울러 한국에서의 교회 개척과 중국 선교를 하게 된 동기들을 나누었는데, 반응들이 대단히 좋은 것 같았다. 나는 아이티 목회자들과 친밀감을 가지려고 그들의 말인 크레올(kreyol)을 미리 몇 마디 배워 연습한 것을 설교 전에 써 보았더니 모두 좋아했다.

               

               

나는 강단에 서면서 “Mwen Kongtan Wew Jezi Chris(므웬 콩탕 웨어 제지 크리스)”-I am happy to see you in Jesus Christ- 좀 어집은 말로 하기는 했어도 모두 알아들었는지 박수를 치면서 좋아들 한다. 그리고 영어로 Praise the Lord! 하고 몇 번 외치니 모두 큰 소리로 맞장구를 친다. 그러다가  크레올 어로 “Louyel Letenel(루일 레테 넬)-Praise the Lord-하고 외치니 모두 좋아하면서 자기네 말로 따라 한다.  말씀을 마치면서 존경하는 아이티 목회자들에게 크레올 말로 “Bondie Deniw(봉디에 데니 우)”-God Bless You-라는 말로 마쳤다. 함께 교제의 악수를 나누는데 몇몇 목사들이 명함을 주면서 시간이 되면 자기네 교회를 방문하여 달라고 청해 주어서 반가웠다. 

 

    

오늘 수도 포토 프랭크에서 온 소식은 우리를 좀 긴장하게 했다. 지난 7일 대통령 선거 한 달 만에 표를 많이 얻은 1, 2등만 발표를 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나머지 후보자들과 대중들이 어제부터 폭동을 일으켜 수도로 들어가는 모든 도로를 막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대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내일 수도로 들어갈 수 있는지는 내일이 되어보아야 알 일이다.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지금 주어진 시간을 더 즐겁게 누리고 싶었다. 여기는 평화롭게 즐거움을 누리고 있지만, 불과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저기 서울 포토 프랑스에는 폭동으로 인하여 시가지가 철시되고 놀람과 무서움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다니, 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세상인가!

 

                 

♣ 아이티 형제들의 간절한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주제 그룹 토의시간

                

수양회 삼 일째  12.9 목. 비. 흐림
밤부터 비가 내렸고, 종일 흐리며 비가 자주 내렸다. 오전으로 수양회를 마치게 된다. 오후에 모두 떠나야 하는데, 포토 프랭스의 사정을 자세히 몰라서 아직은 앞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 형제들의 찬양  /            한 목회자의 사회학 강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한 구성원으로 어떻게 살아가냐 하는지를 나눔

                                                

잠깐의 휴식시간을 즐기는 형제들

 

♣ 이 젊은 Staff들은 모두 자원 봉사자들로서, 전문분야 대학을 나오고 연방 공무원. 상사 직원 등으로 길게는 일 년, 짧게는 몇 주를 내어서 어려운 선교지에 와서 젊음을 바치고 있는 귀한 형제자매들이다. 한국에서 온 몇 명의 Staff 외에는 미주 출신들이어서 영어는 전문이고, 어떤 Staff 들은 불어까지 능통하여서, 아이티 사역에 크게 보탬이 되고 있었고, 우물 파기 등 기계를 돌려야 하는 일에 마침 미국 공대 출신이 와서 모든 기계를 돌보는 일에 크게 쓰임 받고 있었다. 우리 젊은이들이 선교현장에서 봉사하는 경험을 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 마지막 저녁 식탁, 지난 5일간의 세미나를 돌아보면서 나누는 Staff들의 교제 시간 

 

만찬 예배

오늘은 세미나 닷새 째로 마치는 날이다. 마지막 시간에 주님의 몸 된 떡과 피 된 잔을 나누는 뜻깊은 만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우리가 피부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사는 모습이 다르더라도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로서 구원받은 한 형제요 자매였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귀하고 귀한 예배였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상하는 내 몸이요,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니라"

               

                                                 주님의 몸 된 떡과 핏된 잔에 대한 고마움의 기도

 

빈손으로 헤어지기 아쉬워서 가지고 온 것들을 모아서 나누었다.

             

포토 프랭스로 오는 길

현지 지도자들이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다. 정오가 되자 수도 외곽에 길이 열렸다는 소식이다. 의논 끝에 현지 기독교 지도자들이 차가 앞에 서고 그다음 한국 차들 그 뒤에 현지 목회자 차들이 따르기로 하였다. 우리가 수도로 들어가는 길은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모험 그 자체였다. 모두 떠나기 전 함께 주님께서 지켜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만일 가는 도중에 폭도들과 마주치게 될 때 어떤 말도 하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다. 현지 목회자들이 알아서 한다고 했다. 현지 목회자들의 차들이 우리 차(세대)를 앞뒤로 호위하는데 한 차에는 기독교 신문 기자 목회자가 있어서 창문에 Press(기자)라고 써 붙이기까지 했다. 한 참을 내려오자 수도 포토 프랭스로 들어가는 외곽 길은 큰 차가 한쪽 길을 막고 겨우 한쪽만 열어 놓아 지나갈 수 있게 해 놓았다. 시내에 들어오니 길에 커다란 트럭을 쓰러트려 길을 막고 있었는데, 한 트럭의 무장한 경찰들의 엄호 아래 큰 불도저를 데리고 와서 길을 가로막고 누워있는 차를 밀어내고 길을 열고 있었다. 불에 탄 타이어들이 길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모습들이 요 며칠 심각하게 대치하면서 간밤에 큰 소동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길이 열리는 동안 기다리는 우리 주위에 들러선 사람들의 살기등등한 눈빛들은 당장 무슨 일들이라도 낼 것만 같았다. 우리는 무사히 이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는 GAP NGO Center에 도착하였다. 넓은 터에 이 층 건물로 야자와 망고 나무들이 높은 담 옆으로 둘러있었다. 이곳 집의 담은 보통 3m 정도 높고 단단한 철 대문들이 이 사회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아이티는 가난하고 사회가 무질서하며 안전하지 못해서 2009년부터 UN 평화 군이 와서 사회질서를 유지하느라고 수고하지만, 군중들이 유엔군을 폭행하고 공격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지진에 이어 2010년 10월에 불어 닥친 태풍, 그리고 연이어 만연되는 콜레라로 곤두박질친 이 나라는 혼돈의 숲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지진이 일어난 지 일 년이 되어가지만 부서진 대통령 궁도 치우 지를 못하고 있으니, 다른 곳은 오죽하랴. 정부 관계자는 이렇게 가다가는 수도의 건설은 10년도 넘게 걸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이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 부정선거 여파로 정치적으로 안정이 없으니 이 나라의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폐쇄된 공항  12. 10 금 맑음
며칠 동안 공항은 폐쇄되고, 시내는 며칠간 상가도 철시하고, 외국인들의 바깥나들이가 위험하다고 하여 오늘은 여기 Gap Center에 갇혀 지나다시피 했다. 마침 우리 일행 가운데 한 형제가 American Air에 근무하는 형제가 있어서 신 자매와 함께 우리 일행의 모든 표를 해약하는 일을 했다. 금요일 토론토와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분들이 국내 날틀이 도미니카로는 다닌다고 하여서 타러 나갔지만 밀린 사람들로 타기가 어려워져서 장거리 버스를 타려고 터미널로 왔다는 연락이 왔다. 병 물을 가지고 나오라는 전화가 와서, 나가는 차에 나도 따라 나가 터미널에서 떠나는 분들을 다시 보게 되어서 반가웠다. 신 자매가 감기가 들어서 힘들어하고 있어서 안 되었다. 터미널과 그 옆에 지진으로 금이 가 있는 건물과 주변을 돌아보면서 기분전환이 좀 되었다. 밖이 위험하다고 겁을 주어서 우리 둘이 나가기도 뭐하고 좀 답답한 하루였다. 누가 우리를 좀 도우면 얼마든지 좀 나가서 다니다가 올 수 있겠는데, 의논하고 부탁하기가 어려웠다. 수양 회 기간에 우리가 여기 센터에 오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초청하던 아이티 목회자들을 따라갈까 하고 망설이기도 했는데 생각대로였다. 나는 마음에 내키는 대로 하지 못했음을 좀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의 잘함과 잘못함을 들어서 선을 이루시는 주님의 뜻이 있으리라 믿어, 이 울타리 안에 머무는 동안 평안으로 지내려고 했다. 여기서 함께하는 젊은 간사들도 밖에 볼일을 위하여 차로 나가는 외에는 늘 이 안에 머문다고 하면서 답답할 때도 있다고 하였다. 이런 어려움들을 참고 주님의 큰일에 참여하고 있는 젊은 형제자매들이 귀하기만 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우리, 주의 날까지 승리하며 살자고 굳게 손을 잡았다.  

 

은행에서 돈 바꾸기  12. 11 토 흐리고 해
아침 밥상에서 자매 간사가 지난밤 총소리가 들려서 불안한 밤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잠에 빠져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 오늘부터 정상 활동이 이루어져 GAP에서 은행가는 길에 따라 나갔다. 며칠 동안 철시를 한 거리는 활발하게 보였다. 은행은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경비들로 분위기가 아주 삼엄하였다. 나는 Gap에 있는 젊은 간사들을 위하여 회식이라도 한번 시켜 주려고 U$ 300을 바꾸니 117,00 구루드였다 ($ 1×39G).이 선교사에게 내일 주일에는 이곳 현지 교회에 가도록 하겠다고 말하니까, 위험하다고 안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려서, 나는 괜찮다고 가겠다고 하니, 좋은 대로 하라고 하면서, 자기는 못 간다고 하여서 괜찮다고 하였다. 나는 다시 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이 먼 길을 와서 현지 교회에 가서 교제라도 한번 못하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수양회 기간에 초청한 형제에게 연락하려고 최선웅 간사에게 Timothe Elis에게 연락을 하도록 부탁하였다. Timothe 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그에게 주일에 차를 가져와서 나를 데려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오후에는 Gap 식구 모두가 바람을 쐬러 밖에 나간다고 한다. 시내 밖으로 나가 FORT-JACQUES Hills라고 부르는 산으로 가는 길 양 옆에는 자리를 펴고 바나나 망고 마늘 집에서 기른 채소 등 온갖 것을 팔려고 나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좁은 길을 따라 오르는데 차가 얼마나 밀리는지 시간이 오래 걸려서 피곤했다. 올라가다가 우리 차가 펑크가 나는 바람에 앞에 차를 불러 아이티 형제가 펑크 난 차를 고쳐 오는 동안 우리는 마침 꽃 시장 앞이어서 꽃구경을 하면서 기다렸다. 길옆 쇠창살이 쳐진 안은 꽤 넓은데 젊은 사람들이 패를 나누어 공을 차고 있었다. 내가 촬영을 하는데 꽃 시장 입구에 대기 중인 경찰 지프차에서 한 경찰이 손짓하면서 찍지 말라고 한다. 여기 높은 지대에는 좋은 집들이 많이 있었고 잘 사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곳 수도는 지리적으로 아래 동네와 윗동네로 나누어져 있었다. 지진의 폭탄을 맞은 곳은 바다가 가까운 아래 동네였고, 윗동네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FORT-JACQUES Hills

우리는 아래 동네가 환희 보이는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기념품과 그림들을 팔고 있었다. 아이티 기념으로 뭔가 하나 사고 싶었지만 비싸기만 하고 살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지진 피해를 집중적으로 입은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FORT-JACQUES Hills에서 내려다보는 이 나라 서울은 폐허 자체였다. 저 멀리 부서진 대통령 궁과 시가지에 펼쳐진 천막촌들의 서글픈 모습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 아래를 내려가 보고 싶었지만 모두 위험하다고 겁주고 있었고, 누군가 나와 함께 가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수도에 있으면서도 피해 현장은 가볼 수가 없었고 사진 안에 이렇게 담아 보았다.                 

 

 대통령 궁도 부서진 채 일 년이 가까워져 오는대도 아직 치우지도 못하고 있는 딱한 실정이다.

 

  천막촌의 열악한 생활과 불량한 위생 상태는 콜레라에 무방비 상태이다.

♣ 하나님을 더 잘 섬기려고 호화롭게 지은 로마 가톨릭 건물도 기독교 예배당도 흔들리는 땅덩어리 위에서 그 무엇도 감당할 수 없이 이렇게 부서지고 말았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계시지, 우상적으로 만든 건물 안에 갇혀 계시지는 않는다.

 

진흙 빵
먹을 것이 없어서 이곳에서는 진흙 빵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것마저도 누구든지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기서 불행히도 지금 아이티에서는 많은 사람이 주식으로 삼고 있는 이 진흙 쿠키 (빵)을 소개하려고 한다. 흙 빵이란 본디 아이티란 나라에서 산모들의 칼슘을 보충하기 위한 민간요법으로 오래전부터 먹어오던 것이었다. 재료는 아무 흙이 아니고 먹을 수 있는 특별한 흙이다. 높은 산에서 파온 이 흙에 마가린과 소금을 넣어 반죽한 다음 말려서 만든다고 한다. 살인적인 가난이, 살기 위해서 진흙을 먹게 하는 현실이다. 한국도 중국도 그 옛날에는 식용 흙을 먹기도 하였다. 특히 가축들이 미네랄 보충을 위하여 흙을 먹는다. 

                      

 

여기는 모기와 투쟁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곳이었다. 모기향은 항상 피워야 하고 몸에 뿌리는 spray도 항상 뿌려야 안전하고, 간사들도 바르는 물파스를 자주 쓰고 있었다. 오래 살면 면역이 되어 좀 덜해질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여기에 사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같다. 잠은 언제나 모기장 안에서 자야 한다. 이층 옥상에는 그래도 낮에도 시원함을 느끼는 바람이 불기도 하고 밤이면 선선하리 만치 바람이 불어온다. 순간순간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층 베란다 낡은 흔들의자에 앉아 쉬곤 했다. 현지 여성이 부엌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직 한국식 음식을 할 줄을 모른다고 했다. 밖에는 현지 청년 두 사람이 잡일을 하고 있었는데 고아원에서 데려왔는데 고등학교를 보내주기로 했다고 한다.

 

아이티 현지 교회  12. 12 주일. 맑음 
아침에 돈 봉투를 이동열 선교사에게 드리며 간사들이 먹고 싶은 것들을 사주라고 했다. 오늘은 현지 선교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티 사람들의 교회에 가도록 했다. 현지 교회를 방문한 내용을 여기서 떼어내어서, 몇 달 뒤 그 교회에서 보호하고 있는 지진 고아 26명에 대한 양식 지원을 하게 되는데 그 내용과 함께 다음 장에서 나누려고 한다.  

 

NGO에 돌아와 해가 져 갈 즈음에 이 선교사가 나에게 아침에 준 돈 봉투를 도로 주면서 간사들이 슈퍼에 물건을 사러 가니까 함께 갔다 오라고 하여서 우리는 윤소현과 최선웅 간사와 갔다. 물건값은 대체로 비싸고 모두 도미니카나 미국에서 들어온 물건들이었다. 나는 기념으로 한 5불 하는 아이티 커피를 한 봉 샀다. 간사들이 제법 많이 사서 돈이 모자라나 했는데 약 1900구루드 정도이다. 남은 돈은 다음에 또 사겠다고 하여 그러라고 하였다. 주차장에 나오니 벌써 정문은 닫혀 있고 총을 든 경비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로써 Haiti의 모든 일정이 모두 끝난 것 같다. 우리는 내일 공항이 폐쇄되어서 날틀로 도미니카로 갈 수 없어서 부득이 도미니카 수도 싼토밍고로 가는 7시간 장거리 버스로 가도록 했다.

 

아이티를 떠나기 전에 내가 보고 느낀 것은 이렇다.
아이티가 세계 특히 한국 사람에게 잘 알려지게 된 것은 지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앞서 거기에서 선교하는 한국 사람들은 몇 사람 정도였다. 지진이 일어나자 아이티 사람들과 더불어 살려고 하는 선교사보다는 국가 재건 그리고 기아문제를 도우려는 여러 종류의 NGO 등 기간 선교를 하려는 단체들이 많이 들어왔다. 한국에서 모아진 지진 구호금, UN이 가지고 있는 자금 등을 받아내서 큰일을 하기 위하여 Project를 만들고 있었다. 여러 단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고 있지만(예를 들면 우물 파주기, 매일 모닝 빵 들어 먹이기, 양식과 구호물자 나누어주기, 질병 치료, 현지 교회 협력 사역, 등등), 지금 아이티 지도층들은 여러 나라에서 자기네 나라를 돕겠다고 와 있는 NGO들이 하는 일 없이 경제만 축내고 있다고 비난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길을 지나다 보니 영등포에 온 한 교회가 천막을 치고 교육과 전도에 힘쓰고 있어서 반가웠다. 한국과 해외 한인교회들이 앞을 다투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티 교회와 사회를 도우려고 합력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들리는 말들이 많은데 어떤 부서진 교회 수리를 위하여 그곳 목회자에게 미화 5만 불을 주었다는데, 수리는 하지 않고 그 돈을 가지고 달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현지 지도자들에게 현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들을 하고 있었다. 정말 그랬는지, 나는 그 돈을 주고 떼인 사람에게서 듣지 않아서 사실 여부는 모르나, 이런 말들로 인하여 아이티 기독교 지도자들의 도덕적 수준과 아이티 전체 기독교의 질을 가볍게 보려는 위험도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한국교회의 질은 더 나은 가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국가가 가난하고 사회도덕 수준이 낮으면 그곳의 기독교인들도 그 수준을 크게 웃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마치 중국 교회의 목사들이 주님의 마음보다는 공산당 정치사상의 영향으로, 자기가 담당하는 지역에서 마치 당위원장 같은 독재자의 행세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아이티 선교는 다른 문화권보다 한 가지 어려운 부담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티는 여러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이중 언어를 쓰고 있는 것도 문제인 것 같다. 프랑스 식민지로 오랫동안 착취당하면서 프랑스 말과 글이 사용되어 왔고, 아이티 국민 모두가 쓰는 그들의 언어 크레올이 따로 있다. 이곳에서 일하려고 하는 선교사가 두 언어를 극복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만일 두 언어를 장악한다면 대단한 일로, 복음 전도에 있어서 상 하류 계층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그러나 만일 한 가지만 선택하여야 한다면 크레올을 배워야 할 것이다. 아이티에 자기 삶을 함께 나누며 어우러져 살 수 있는 토착적인 선교사를 주님은 더 필요로 하시는 것 같다. 이런 선교는 언젠가 하다가 그만두는 것이 아니고 내 삶이 다 한 뒤에도 계속되는 한 알의 밀이 되는 선교 정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티에는 이런 실례를 찾아볼 수 있는 대를 이어서 헌신하고 있는 귀한 선교사 Turnbull을 나눔의 한 마당에서 소개해 본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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