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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돌아온 홍콩과 마카오

돌아온 Hong Kong 1997

굴욕과 수치와 상징인 Hong Kong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던 중국이 홍콩을 침략제국주 (imperialism)의 나라 영국에 99년간 내어준 것은 중국에게는 굴욕과 수치의 상징이며, 영국에게는 승리의 산물이었다. 아름다운 섬 홍콩이 왜 이 꼴이 되었는지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19세기는 유럽 제국이 팽창주의에 미쳐 날뛰던(狂奔) 때이다. 침략제국주의 영국은 고요하게 살고 있던 인도를 식민지화한 뒤로 중국을 넘겨보고 있었다. 처음 영국은 중국과 정상적인 무역거래를 하다가 심각한 국내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하여 중국의 밀수업자와      손을 잡고 인도( Bangladesh)에서 생산된 아편을 중국에 무제한 밀수출 하므로 서, 중국 사람들이 점차 아편중독자가 되면서 국가적으로 그 폐해가 심각해졌다. 1839년 3월 황제 도광제는 “아편 엄금 론”을 주장한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 특사)으로 광동 성에 보내 밀수 아편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임칙서는 밀수업자 괴수를 사형시키고, 쌓여있는 영국의 아편 20,000 상자를 불태워 버렸다. 이때 임칙서는 영국 여왕에게, “하나님을 믿는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독물을 사용해 중국 사람들을 해칠 수 있느냐”라고 묻는 편지를 보냈는데, 보내온 답은 “아편의 해악은 술보다 적습니다.”였다. 큰 피해를 본 영국 자본가들은 영국정부와 의회가 참전을 승인하도록 여러 가지로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의회에서는 찬반양론의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을 때, 중국에 독성물질인 아편을 팔아먹는 것을 범죄로 보고 전쟁을 반대하는 정의의 양심을 가진 분들이 있어서 소개해 본다.

 

William E. Glastone 의원

중국과의 참전문제로 의회에서 열띤 토론에서 참전 분위기가 짙어져갈 때, 당시 30세의 젊은 의원이었던 William E. Gladstone이 연설을 하면서 분위기가 뒤집히기에 이른다. 그의 연설을 인용해 본다.

“청나라는 아편을 금지시킬 정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아편의 무서움을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영국의 외무장관은 청나라의 정당한 권리마저 짓밟으며 이 부정한 무역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부정하고 치욕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는 전쟁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대영제국의 깃발은 항상 정의의 편, 압제의 적, 민족의 영광, 공명정대한 상업을 위하여 싸워왔습니다. 그것은 옛날의 일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지금은 저 추악한 아편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습니다. 국가의 명예는 더럽혀졌습니다. 국가의 불의는 국가의 몰락을 앞당기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입니다. 이 전쟁의 승리와 그 이득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득이 크더라도 그로 인해 영국의 국왕과 대영제국이 입을 명예, 위신, 존엄성의 손실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국기는 더럽혀졌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즉, 그 기원과 원인을 놓고 볼 때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리게 될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 정의는 중국인들의 편에 있습니다. 저 문명화도 제대로 되지 않은 야만인들에게는 정의가 있는 반면, 우리 깨어 있고 문명화된 기독교인들은 종교와 정의에 반하는 목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전쟁 반대파들 가운데는 "우리는 기독교를 믿는 문명국으로서 중국인들에게 문명을 전파해야 될 의무가 있는데, 과연 아편을 팔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40년 4월 10일 영국 하원에서 청과의 전쟁수행을 위한 투표가 이루어졌는데 271대 262. 9표 차로 전쟁을 멈출 수는 없게 되었고 동서양의 운명은 이로서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표결이 끝난 후 Gladstone은 “262표를 보고 영국의 양심의 무게가 고작 이 정도냐!”라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William Ewart Gladstone은 토리당원으로 뒷날 영국 수상을 여러 번 함, 역사문서에는 그의 종교가 영국국교회라고 되있지만, 실제로는 Plymouth Brethren(영국형제교회)이었다).

 

아편전쟁(呀片战争, Opium War)

1839년 10월 영국 정부는 원정군을 파견하므로 제1차 아편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2년에 걸친 전쟁은 조약과 파기를 거치면서 청나라는 현대화된 영국군에게 크게 지게(大敗) 된다. 이로 인하여 영국의 일방적인 요구에 따라 난징불평등조약(南京條約)을 맺게 되므로 중원의 강자는 자존심을 구기고 역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

 

난징 불평등 조약

- 아편과 전쟁 배상금

- 다섯 항구 개방(홍콩, 샤먼, 푸저우, 닝보, 쌍하이)

- 외국이 거주와 활동의 자유 그리고 치외 법권

- 아편 거래의 자유와 선교의 자유

- 홍콩의 99년 간 조차 조약(1860-1997)

 

이 조약을 살펴보면 아편거래의 자유와 함께 선교의 자유를 함께 다룬다는 것이 모순된 분위기를 주고 있다. 이때부터 제국주의 총 칼을 앞세워 포교활동에 나선 천주교와 일부 기독교 선교사들의 횡포도 있는 반면, 양심을 가진 일부 선교사들을 그런 행동들을 반대하기는 하였지만, 그런 시대정황에 휩싸여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계 여론은 영국의 중국 침략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난징조약은 불평등하며 억압에 의한 것이라고 평한다. 이것은 마치 조선이 1905년 11월 17일 왜국의 총칼의 위협으로 맺어진 늑약불평등 조약과 같은 경우이다. 중국은 난징조약은 “불평등조약”이라고 규정하고, 1842년 8월 29일을 국치일로 여기며, 역사를 통해서 학습하면서 새 세대로 하여금 '그날'을 기억하게 하고 있다. 문제는 중국을 짓밟은 이런 제국주의자들이 일본을 빼고는 모두 기독교 나라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침략제국주의 앞잡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중국 사전에는 “선교사는 제국주의자의 앞잡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홍콩(回国香港 huíguóXiānggǎng) 7.1,1997

1842년 일어난 아편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영국의 강압속에 불평등 조약을 맺음으로 중국의 주권은 짓밟히고 수치를 당하면서 홍콩 섬을 빼앗긴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전쟁에서 패함으로 1860년 북부의 구룡채성(九龍寨城, (Jiǔlóng zhài chéng)을 추가하면서 홍콩은 영국이 지배하는 땅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1898년에는 대륙과의 편한 왕래를 위하여 신계 지구(지금 구룡반도)를 홍콩 영역에 붙이면서 이 지역은 99년간 청나라 정부로부터 임차 조약을 맺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신계지구 반환과 함께 홍콩 반환도 논의되면서 홍콩 본섬과 신계지구 모두 중국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香港 回国历史的天(홍콩이 돌아오는 역사적인 날) 7.1 1997

오늘은 홍콩이 155년 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는 날이다. 중국 대륙은 이 역사적인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려고 모두 흥분하여 대륙이 들썩 거리고 있었다. 북경 천안문 광장에는 거대한 홍콩 반환 시계 판을 만들어 놓고 역사적인 밤 자정을 지켜보려는 사람들이 구름 떼 같이 모여들고 있었다. 6월 30일 늦은 밤 우리도 집에서 TV를 켜 놓고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정 한 시간 전부터 중국 전 TV에서는 왜 홍콩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그 역사 과정을 설명하면서, 아울러 귀환 식 절차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이 밤은 대륙이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밤이며, 12억 인구가 가슴 설레는 밤이다. 드디어 천안문 광장의 초읽기가 시작되었다. 대륙의 모든 인민들은 回国시계 초침을 따라 하나, 둘, 셋, 넷 , 다섯, 땡 하면서 역사적인 환호 소리가 대륙을 흔들고 있었다. 이 밤은 중화민족이 새롭게 맞이하는 기쁨의 날이었다. 

 

▶ 홍콩 반환 기념 우표 우편엽서

 

       

 

 

▶ 북한도 중국의 홍콩 반환을 기념하는 우표를 펴내서 축하해 주고 있다. 

 

        

   

1997년 7월 1일 0시 Hong Kong 현지에서는 성대한 정권 인수식이 시작되었다. 두 시까지 계속된 인수식은 역사적이며 침략제국주의 자들에게 당한 치욕을 이제야 씻어 내고 있었다. 영국의 Union Jack이 내려지고 중화민국의 오성기가 국가와 함께 하늘 높이 올라 펄럭이기 시작하였다. 1842년 남경 조약으로 빼앗긴 홍콩을 되찾게 되었으니 이제야 한 세기가 넘도록 쌓인 한을 풀게 되었다. 영국은 자칭 기독교 나라로서 인류에게 가장 악랄한 만행을 저지른 민족 가운데 하나이며, 저들이 믿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스스로 더럽히고 예수님 얼굴에 먹칠을 한 나라다. 영국 사람이 중국 사람에게 저지른 악랄한 역사를 중화민족이 어찌 잊겠는가! 이 사건은 중국을 향한 기독교 선교의 큰 장애가 되었다. 영국과 왜구(일본)는 같은 섬나라여서 인지 침략제국주의 야욕은 같지만, 천인공로할 만행을 저지르는 잔인함은 왜구는 영국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악랄하였다.  

       

                            中国对香港恢复行使主权式. 1997. 7.1-홍콩애 대한 중국의 주권 회복식-

김제화/ jewha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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