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8-1932)
앨런 선교사가 그의 아내와 함께 1884년 10월 27일 조선 땅을 밟았을 때 조선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몹시 어수선한 시대였다. 이 격동기에 의료 선교사인 그는 조선에 오자마자 본의 아니게 요동치는 역사의 현장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그를 조선에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의 격동기를 통해 조선의 복음화와 번영에 이바지하도록 그의 생애를 이 땅에서 불사르게 하셨다. 선교사와 교육자로서 그리고 외교관으로서 조선의 개화와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앨런은 조선의 첫 번째 기독교 선교사로서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을 조선에서 산 역사의 증인이다.
◈앨런보다 먼저 조선 땅을 밟은 외국 선교사들이 있었으나 모두 잠시 머물다 떠나간 나그네들이었다.
▶귀출라프(Friedrich Gützlaff)-독일 루터교 중국 선교사로 1832년 7월 22일 조선을 살펴보려고 며칠 방문하여 관리들과 한문으로 대화하고 성경과 전도책자와 약품을 주고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주고 한글 자모를 가지고 가서 세계에 알렸다.
▶토마스(Robert Thomas)-영국 회중교회(Congligational Church) 중국 선교사. 1865년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해주 연안에 이르러 한문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1866년 8월 9일 다시 전도지와 성경을 가지고 미국 상선 제네랄셔만(General shirman)호를 타고 대동강을 오르면서 조선 사람들에게 전도지와 성경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평양 대동강에서 조선군의 화공공격으로 배가 불길에 휩싸이자 강 언덕으로 오르자 조선 병사가 죽이려 하자 성경 한 권을 전하고 그의 피는 대동강둑에 뿌려졌다. 이 순교자의 흘린 피가 뒷날 복음의 싹이 나고 꽃을 피우는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매클레이(Robert Maclay)-미국 감리교회의 중국·일본 선교사. 1884년 6~7월 조선을 방문하여 김옥균의 도움으로 교육과 의료사업을 해도 좋다는 고종의 허락을 받음으로써 미국 감리교 선교의 문을 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 감리교 선교부는 교육자 에펜젤러, 여성 교육자로 에펜젤러의 어머니, 메리 그리고 스크랜튼 의료선교사 부부를 임명하여 조선으로 파송하였다.
앨런 선교사 조선으로 파송
앨런선교사는 1858년 4월 23일 오하이오(Ohio) 주 델라웨어(Delaware)에서 태어났다. 웨슬리안 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던 때에는 미국 전역에 불고 있었던 영적 각성 운동으로 많은 학생이 선교지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영향으로 알렌은 오하이주 신시내티(Cincinnati)에 있는 마이애미(Miami) 의대에 진학하여 1883년 졸업과 함께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 25세에 미국 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갓 결혼한 아내, 프란시스 앤과 함께 1883년 10월에 중국 상해로 파송되었으나 현지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조선으로 가고자 하여 다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받아 1884년 10월 27일 조선 땅을 밟는 첫 기독교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7개월 뒤인 1885년 4월 5일 미국의 북 감리교회 아펜젤러와 미국 북 장로교회의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가 인천 제물포에 함께 내리니 그날은 부활절 아침이었다. 조선에 처음 발을 디딘 세 선교사는 모두 26-29의 피가 끓는 청년들로 조선의 희망이요, 조선에 떠오르는 복음의 밝은 해들이었다.
갑신정변과 알렌 선교사
앨런이 1884년 10월 27일 조선에 도착하였을 때 조선은 외국 종교의 포교를 금지하는 삼엄한 때였다. 미국 공사는 앨런에게 선교사 신분으로는 조선에서 활동하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미국 공관의 무보수 직원으로 임명하여 주었다. 그가 조선에 온 지 38일 만인 그 해 12월 4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나서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이 자객의 칼에 난자를 당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14명의 한의사가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민영익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보호하던 조선 정부의 외교 고문인 독일인 뮐레도르프는 급히 애런을 불렀다. 밤새 지혈을 하면서 일본 군의관과 함께 27곳의 상처를 봉합하는 대 수술을 하여 살려냈다. 조선에서 처음 한 외과수술이며 서양의학이 빛을 내는 순간이었다. 민영익은 알렌의 헌신적인 돌봄으로 석 달 만에 완쾌되면서 갑신정변도 진압되었다. 고종은 앨런에게 왕실 병풍과 고려자기 그리고 금일봉을 내렸다.
◈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12.4-12.7)
갑신정변(甲申政變)은 갑신년에 일어난 정변을 이르는 말로 우정국 쿠데타라고도 한다. 1884년 12월 4일 청나라의 내정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외교권을 가지고 조선을 근대적 자주 국가를 만들려고 하는 신진 개혁파가 기존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수구파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정변이다. 신진 개혁파의 주역들은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20~30대의 김옥균, 박영교, 박영효, 박영교,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이었다. 한편 수구파는 해 오던 대로 청나라의 그늘에서 천천히 개혁하고자 하는 왕비 민 씨를 중심으로 하는 민 씨 일가였다. 쿠데타는 우정총국의 저녁 축하연회가 무르익을 때 일어나 몇 명의 수구파 요인들을 척살하고 왕궁을 장악하였다. 일본의 비호를 받으며 일으킨 개혁파의 쿠데타는 12월 7일 출동한 청군에 의해 고종을 호위하던 개혁파 홍영식, 박영교는 피살되고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우정국 쿠데타는 3일 만에 그 막을 내렸다.
▶우정총국-우체국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 조선에서는 1884년(고종 21) 3월 27일 처음으로 우정국이 설치되어 1884년 10월 1일 첫 우정 업무를 시작하였다.
제중원 설립
이 일로 앨런이 병원 설립을 고종에게 요청하자 흔쾌히 허락하면서 병원으로 쓸 큰집을 내렸다. 1885년 4월 14일(고종 22년)에 조선에 첫 서양의료기관인 광혜원이 세워졌다. 12일이 지난 4월 26일 고종은 '대중(백성)을 구제한다'라는 뜻의 제중원(濟衆院)이란 이름을 내려서, 광혜원은 [제중원]이란 새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제중원은 치료병원이면서 의료 교육 기관으로 조선의 첫 의사들을 길러내는 의학교가 되었다. 처음으로 앨런은 스크랜튼과 함께 조선 사람들을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개원한 제중원에 민영익이 찾아와 두 살 많은 앨런을 앞으로 평생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하면서 10만 냥을 기부하면서, “당신은 미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라고 했다. 그때 조선에는 외국인에 대한 오해와 미신으로 제중원이 문을 열자 “서양인이 조선 아이들을 잡아먹는데, 그 본거지가 제중원”이라는 유언비어가 돌아 민중들의 경계를 사기도 했다고 한다.


제중원은 우여곡절을 거친 뒤 에비슨 의료 선교사가 미국의 부호 세브란스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병원 건물을 짓고 후원자의 이름을 따서 1094년 9월 23일 제중원은 세브란스(Severance) 병원과 의학 전문학교”로 거듭났다. 세브란스 의학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자격을 갖춘 의사 8명을 1908년 6월 3일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1911년에 2회 6명, 1913년에 3회 5명을 배출했다. 1955년에 이르러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 의전이 통합하면서 연희전문학교 첫 자 [연]과 세브란스 의전의 첫 자 [세]를 따서 오늘날의 연세 대학교가 되었다.
앨런의 조선 생활
앨런 선교사는 한국 땅을 밟은 첫 선교사이지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사역보다는 의사로서 치료와 교육에 힘썼으며, 조선과 미국 정부의 외교관으로 일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는 첫 5년간(1884-1905) 은 의료 선교사, 이어 7년간은 미국공사관 서기관, 마지막 8년은 미국 공사로. 외교관이 되면서 알렌은 1887년 미국 북 장로교 선교부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외교관으로서 앨런은 고립되어 있던 조선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자주 독립국이 되도록 힘썼다. 그는 1887년 8월 고종이 임명한 주미조선공사관의 초대 전권 대신인 박정양(朴定陽)을 보좌하는 고문역인 참찬관(參贊官)이 되어 미국 워싱턴에 가서 공사관 설립을 도왔고 1893년 미국 시카고박람회에 참여를 주선하고 조선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 힘썼다. 특히 그는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받고 있는 조선의 어려운 현실을 미국무부에 알리면서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강조했다. 정치적으로 앨런은 조선이 청나라에 의존해 있는 모습이 측은하여 주권을 가진 나라가 되도록 고종 황제와 관료들에게 권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 편에 서서 사사건건 조선을 간섭하는 청나라 대표 위안스키에 맞선 유일한 외국인 관리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정치적으로 양국에 영사관 설치를 위해 노력을 하였고, 양국의 이익을 위하여 몇 가지 사업도 추진하였다. 앨런은 조선 정부로부터 1895년 평북지방의 운산의 노다지 금광 채굴권을 얻어서 수수료를 받고 미국 회사에 넘겨주어 막대한 이익을 보게 했다. 또 1896년 경인 철도 부설권도 따내 미국 제임스 모스에게 주었지만, 자금난으로 일본에 팔아 버렸다. 그리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사탕 수수밭에 일할 노동자 102명을 보내면서 미국으로 노동자 수출의 길을 열었다. 오늘날 앨런은 한국의 학자들로부터 긍정적인 면과 함께 부정적인 면으로도 비판을 받고 있다.
대통령 루스벨트와 논쟁
앨런은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대한정책의 기조는 불간섭정책이었지만, 점차 친일정책으로 바뀌었다. 일본이 미국을 대신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막아주는 대신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을 묵인하고 있었다. 조선과 동북아의 정치 현황을 잘하는 알렌은 미국의 친일정책의 잘 못됨을 지적하고자 1903년 9월 미국으로 들어가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알렌의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알앨런은 이에 불복하여 미국에 머무는 동안 언론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면서 정부의 조선 정책을 비판하였다. 그러다가 조선과 만주 지역의 지배를 둘러싸고 벌인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일본의 조선 침략을 지지하고 있는 미국의 정책을 맹렬히 반대하다가 1905년 공사직에서 해임되면서 본국으로 소환된다.
고향으로
앨런은 조선을 떠나기 전 고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나라가 풍전등화 앞에 놓였는데, 궁궐을 짓는 일로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모습을 보고 고종을 로마의 네로에 비교하면서, 조선 백성이 불쌍하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명운이 다해 가고 있는 조선을 보면서 지난 20년간 젊음을 바쳐서 헌신하던 조선에서의 그의 사역을 접는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불모지 조선 땅을 밟았던 그는 어느덧 47세 중년이 된 1905년 6월 9일 미국 고향으로 돌아갔다.
주의 나라에서 안식
엘런은 그의 고향, 오하이오(Ohio) 주 톨레도(Toledo)로 돌아가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집필에 힘쓰다가 1932년 12월 11일 74세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 한국 이야기(Korean Tales, Horace Newton Allen, 1889
Historic Woodlawn Cemetery( 우드론 국립유적지)
그는 지금 Ohio 주 Toledo에 있는 미국 국립유적지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앨런 선교사 묘소에서 머물면서 그 어려웠던 격동의 시기에 조선에서 젊음을 바친 알렌 선교사 부부의 아름다운 삶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앨런 선교사 가족이 다니던 교회당도 마을 가운데 있었고 그리고 살던 생가도 둘러보았다. 한국 기독교 측에서 그의 생가를 사려고 접촉하였는데 지금 사는 사람이 아직은 팔 뜻이 없다고 한단다.
앨런 선교사의 약력 1884. 10.27 장로회 의료 선교사 1884 주한 미국공사관 의사 1885 제중원(광혜원) 설립/ 의사 겸 교수 1890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 1892 한국 휘보 창간 1897 주한 미국공사관 공사 1897 주한 미국공사관 서울주재 총영사 1901 주한 미국공사관 전권공사 |
조선 황실이 수여한 포상 1885-1887 조선 참찬관 협판 벼슬 정 2품 1886년 5월 13일 알렌에게 정 3품인 통정대부(通政大夫) 1886년 9월 27일에는 정 2품의 가선대부(嘉善大夫) 1887년 11월 23일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의 직첩을 주어 의료사업에 공헌함을 기리다. 1904년 고종의 훈공 일등 태극대수장 수여. 등록문화재 제651호(2015.10.12. 지정), 연대 동은의학박물관 소장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한 훈장 건국훈장 독립장(당시 태극장) 1950년 3월 1일 알렌에게 서훈 |
여행을 마치면서,
기억에 남을 한 주간의 여행은 이제 지난 시간 속에 묻혀가고 있다. 오랫동안 기다리며 기대했던 창조박물관과 노아방주 박물관을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은 감사한 일이었으며 이 일을 계획해 주신 Rev. 안영배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보고 느끼고 배운 경험들을 널리 나누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즐거웠고 고마웠던 팥빵과 뻥튀기의 은은한 맛을 나누면서 마치려 한다. 긴 여행길
에는 지루함을 달래느라 서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시간을 잊는다. 또 입의 심심함을 달래기에는 가벼운 먹거리가 제격이다. 이번 우리 여행에서 Mrs. 김영순 님이 팥빵과 뻥튀기를 준비하셨다. 한국 음식이 없는 여행에서 팥이 든 빵은 허전한 속을 달래기에 더 없는 간식이었으며, 나이가 든 분들에게는 지난날 고국에서 즐기던 단팥 빵의 맛을 되새기는 추억이기도 하다. 뻥튀기는 그 옛날 고국에서 시장통이나 골목에서 국수 부스러기와 쌀 몇 알로 뻥! 소리와 함께 달덩이만 한 과자가 튕겨 나온다. 어려웠던 그때 아이들에게는 더 없는 주점 부리였다. 이제 이 뻥튀기는 먹을 것이 넘치는 세대들에게는 심심풀이로, 지난 세대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는 먹거리이다. 달리는 공간 안에서 심심함을 달래주시려고 귀한 먹거리를 준비하신 Mr. 김에게 고마운 마음을 드리며, 어느 날 이런 기회가 또 있기를 기대해 본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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