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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중국 여행

상해-임시정부-윤봉길의사

 

목단강 공항 - 상해  7. 24- 31 목

우리 식구들은 상해로 해서 한국으로 나갈 계획이다. 오늘 목단강 공항에서 날틀을 타는데 짐이 많아서 짐 값을 더 내라고 하여 우리가 상해를 경유하여 한국을 나가는 길이라고 표를 보여주어도 안 된다고 한다. 내가 경로원 허가증 사본을 보여주면서 우리 하는 일을 우리직원이 설명하자 상관을 부른다, 그가 오더니 모두 통과 시켜주었다.

 

상해에서 내리자 상해에 살고 있는 이 선생의 아들, 김화성 형제가 특별히 나와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는 미리 예약된 조선 사람 민박에 들었다. 우리가 방문한 상해의 몇 곳을 소개해 본다.

 

상해(上海,샹하이)

 

   상해는 중국 동해안 중부의 양자강 하구와 동중국해(태평양)가 접한 곳에 있다. 큰 하천과 바다를 접하고 있고 교통 중심지로서 예로부터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중국 최대 경제 도시이자 인구 약 2,000명의 큰 도시로, 베이징과 함께 상하이는 외국인이 많이 찾는 도시로 볼거리 또한 많은 관광지이다. 내가 처음 상해를 온 것은 1997년 이었는데 올 때 마다 상해는 새롭게 변하고 있어서 놀랄 정도이다. 물론 중국은 지금 어디든지 하루가 멀다 하고 발전변화하고 있었다. 중국이 공산화 된 뒤에 세계를 향해 문을 닫고 고립된 채 계급투쟁만하다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혁명의 열기로 불태웠던 문화대혁명으로 상해뿐만 아니라 전 중국의 경제와 문화유산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중국 개혁, 개방으로 경제 불모지였던 상해가 경제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와이탄(外滩, The Bund)
이 와이탄은 중국과 영국의 불평등 조약으로 탄생한 개항지로 150년 전 영국 조계시대에 세워진 곳이다. 영국이 양자강 하구를 거쳐 황푸강(黃浦江) 연안 영국 조계지까지 배가 들어오도록 강바닥 파내고 둑을 쌓았다. 이곳을 영국 사람들은 반드(Bund)라고 불렀는데, 중국 사람들은 외국인의 강변이라는 뜻으로 와이탄(外滩)이라 불렀다. 이 와이탄은 영국 조계지로 상해에서 제일 처음 만들어진 황푸공원(黃浦公園,1868년)으로 황푸 강을 끼고 1.7km 걸쳐 유럽풍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연이어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 때 영국 사람들은 이 강변공원을 만든 다음에 입구에 "중국인과 개는 출입금지!”라는 경고문을 붙여 놓았다고 한다. 

 

황푸강의 유람선

우리가족은 어두워지자 푸동강 유람선에 올랐다. 강 양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운 조명들은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와이탄’이 상해의 과거라면, 황푸강 건너 맞은편‘루자쭈이’는 상해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각종 고층빌딩에서는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동방명주탑, 진마오 빌딩 등의 주요 마천루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조명)들은 황홀하기만하다.

 

상해 세계금융센터(上海环球金融中心)는 그 높이가 492m로 아시아에서 제일 높고, 세계 여섯 번째 타워이다. 가장 아름다운 불빛을 자랑하는 동방명주탑(东方明珠塔)은 높이가 468m로 중국에서 두 번째로 높지만 실제로 TV 방송 타워를 포함한다면 제일 높은 타워라고 할 수 있다.

   

상해임시정부와 홍구 공원

오늘 하루 김화성 형제가 자기 차로 우리를 위해 수고를 많이 해 주었다. 오전에 상해 임시 정부와 홍구 공원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돌아보았다. 나는 어린 손자 손녀들에게 우리나라가 일본침략제국주의자들인 왜구의 침략을 받아 겪은 고난의 세월들을 간단히 설명하여 주었다. 그리고 김 형제는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잠시 쉬게 해 주면서 부부가 맛있는 냉면을 만들어 주어서 고마웠다. 저녁에는 푸동 강변으로 해서 상해 야경을 구경시켜주었다. 김 형제의 수고가 너무 고마웠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1948)는 1919년 3월 1일 경성(京城,서울)에서 선포된 3·1 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9년 4월 13일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망명정부이다. 일본침략제국주의자들이 조선반도를 강제로 점령하여 식민지를 만들자, 나라를 다시 찾겠다는 나라사랑하는 사람(애국지사)들이 중국으로 나아가서 항일투쟁을 하기 시작한다. 이때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론을 발표하자 이에 고무된 애국지사들이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든다.             

 

홍커우공원(虹口公园,홍구공원)과 윤봉길 의사 기념관

대한의 아들 윤봉길 의사가 왜국 왕의 생일날인 천장절 축하장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요인들을 척살한 곳이다.  이 공원은 1896년 영국 사람들이 인공호수를 만들고 각종 놀이시설들이 있는 공원을 만들어 상해에 있는 외국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중국 사람과 개의 출입을 금하였다”1922년 홍구공원이라 이름 짓고 1928년에 가서야 중국인들에게 개방되었다. 1932년 윤봉길의사의 폭탄투척 사건이 일어난다. 중국인들은 이 사건을 홍구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1988년 중국정부는 소설가 루쉰(鲁迅노신)을 기리기 위해 공원이름을 루쉰공원(鲁迅公园)으로 바꾸었다. 바로 이 공원 안에는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이 있어서 한국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폭탄을 던져 왜군을 척살한 의거 현장

 

 

윤봉길 의사(義士)(1908~1932)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광현당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려의 명장 윤관의 후손이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윤봉길은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 1922년 배용순(裵用順)과 결혼하였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하기도 했다.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하고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아서 농촌계몽활동, 농촌부흥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운동 등을 시작하였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다. 1928년 부흥원 설립을 기념하는 공연인 우화 「토끼와 여우」의 공연과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사년(己巳年) 일기>(日記)를 지었다. 이어 위친계(爲親契) 조직, 월진회(月進會), 수암 체육회 등을 조직하여 애국 운동을 벌이다가 탄압을 받게 되었다.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비장한 각오로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일지

중국에 온 청년 윤봉길은 상해에서 채소장사를 하다가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국무령(총리)인 김구를 찾아가서  독립운동에 몸 바치겠다고 호소하여 한인애국 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해의 홍구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탄생일(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장에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는데, 윤봉길이 폭탄을 던지기로 하였다. 당시 폭탄은 폭발물 전문가인 김웅에 의해 폭탄 투척에 적합한 도시락 모양과 물통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홍구 공원에서 열리는 행사에는 점심식사는 제공되지 않으므로 일본 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가져오도록 했기 때문에 윤봉길은 폭탄을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할 수 있었다. 물통은 투척용이고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으로 제작되었다. 혹여 잡혀서 심문을 받지 않고 자결하기 위해서 도시락 모양의 폭탄을 만든 것이다.

                               

 

♣ 거사전 왼 손에 폭탄,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마지막 결의(절명사)를 가슴에 걸고 찍은 윤봉길

 

훙커우 공원(虹口(홍구)公園) 의거 사건
홍구 공원 의거(義擧)는 1932년 4월 29일 중화민국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 윤봉길이 대한 독립을 위해 폭탄을 던져서 일본침략제국의 주요 인사들을 죽거나 다치게 한 사건이다.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개석은  윤봉길의 홍구 공원에서의 폭탄 투척 소식을 전해 듣고 감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 "윤봉길 길이 빛나리라" 칭송하며,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선언을 하면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게 된다.

 

사건 과정
공원에는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는 일본 왜왕의 생일인 천장절 행사와 상하이 점령 전승기념 행사를 하고 있었다.  7시 50분 윤봉길 의사는 삼엄한 감시를 피해 홍구 공원에 도착하여 가능한 무대 가까이 하고자 중국인 경비원이 지키는 문으로 가서 유창한 일본어로 자신을 일본인으로 속이고 들어갔다. 9시쯤에 시작된 천장절은 11시 즈음에 끝났고, 11시 20분부터는 2부로 상하이 전승 기념식이 시작되었다. 중국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관계 요인들이 단상에 자리를 잡았다.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가 시작되었다. 11시 40분에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고, 거의 끝날 순간에 윤봉길 의사가 단상으로 달려 나가 5m거리에서 물통폭탄을 던졌는데 폭탄은 시라카와 대장과 노무라 중장 사이에 떨어져 폭발하였다. 윤봉길은 도시락 폭탄으로 자결하려 했으나 곧바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피투성이가 되어 일본군 사령부로 끌려갔다. 이 사건으로 많은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죽거나 다쳤다.

 

                  폭탄이  천장절 경축식                                                                                       폭탄 세레받은 뒤 어수선해진 사건 현장               

                                     

사상자 이름

사망자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 폭탄을 맞고 12번이나 수술을 했으나 사건 후 27일 만인 5월 26일 사망.
가와바타 사다쓰구(상하이 일본인거류민단 행정위원장)-폭탄을 맞고 창자가 끊어져 15시간 뒤인 4월 30일 사망.

부상자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제3함대 사령관)-폭탄을 맞고 오른쪽 눈을 잃음.
우에다 겐키치 중장(제9사단장)-폭탄을 맞고 왼쪽 다리를 절단.
무라이 구라마쓰(상하이 주재 총영사)-폭탄을 맞고 중상을 당함.
시게미쓰 마모루(상하이 주재 공사)-폭탄을 맞고 중상을 당함.
도모노 모리(일본인 거류민단 서기)-폭탄을 맞고 중상을 당함.

 

윤봉길의사의 순국
체포된 윤봉길은 같은 해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아 1932년 11월 18일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11월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金澤陸軍刑務所)에서 7시 27분 사형이 집행되었다. 정사수가 쏜 총알이 미간에 명중하면서 13분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끼친 영향
이 사건은 1932년 4월 29일 오후 1시경에 전 세계에 뉴스로 보도되기 시작하여, 전 세계 각국 주요 신문들이 제 1면에 대대적으로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왜국은 배후 세력들을 소탕과정에서 안창호 선생을 체포하여 국내로 압송되었다. 예비 검속 자들의 탄압이 계속되자 김구 선생은 외신을 통해 자신이 지시했음을 밝혔다. 일본은 이봉창의사의 배후이기도 한 김구를 체포하기 위해 1차로 20만원엔의 현상금을 걸고 수배했지만, 실패하자 외무성, 조선총독부, 상하이주둔사령부 등과 합작하여 현상금을 대폭 올려 60만원엔(198억원)에 이르는 거금의 현상금을 걸고 수배하였지만 실패했다.

 

의거 가담자

윤봉길 - 독립운동가, 1932년 12월 19일 사형
백정기 - 독립운동가, 윤봉길보다 1시간 먼저 폭탄을 던지려 했으나 실패함
김구 - 독립 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총리), 윤봉길에게 거사를 지시함                           

 

난징지에(南京街)에 섹스 폰 부는 사나이

 

보행난징지에(步行南京街,걷는남경길)는 한국의 명동 같은 거리로 누구든지 상해에 오면 한번은 들려보는 이름 있는 곳이다. 길 양 쪽에 늘어선 shopping Mall들과 먹거리들 그리고 길 거리에는 아이들을 유혹하는 흥미로운 장난감들이 늘어서 있어서 이것저것 shopping도 하고 음식 먹는 재미를 즐기는 동안 어느새 푸동 강변 공원에 닿는다. 

오늘은 아이들과 푸동 공원까지 다니는 타이니(tiny) 차를 탔는데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길이 재미있었다. 외국 사람들이 모여오는 국제적인 거리로 사람구경도 할만하다. 이 거리의 명물은 이층 발코니에서 섹스 폰을 부는 흰 와이셔츠에 검은 중절모를 쓴 멋있는 사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가 불어대는 은은한 Classic 섹스 폰 소리가 사람들의 발걸음을 서게 하고 무더위를 식혀주고 있었다. 

 

김제화/ jewhakim.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