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오동 대첩의 영웅 홍범도 장군 ☆

홍범도(洪範圖, 음력 1868. 8.27~1943 10.25)는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군인이다. 사냥꾼으로 활동하여 사격술에 능하였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었다.


생애
평안도 평양에서 출생하였고 한때 평안도 자성을 거쳐 평안도 양덕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동안 머슴, 건설현장 노동자, 종이공장 노동자, 불교 승려, 사냥꾼, 광산 노동자 등 어려운 생활을 많이 하였다. 1895년경부터 의병에 뛰어들어 함경북도 갑산, 무산 등지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07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에 자극을 받아 동년 11월 갑산에서 산포대를 조직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삼수·갑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 만주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1919년 간도 국민회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후에 독립군의 통합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다. 1920년 일본군이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3일간의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렸고 청산리대첩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가족
부친 : 홍윤식 , 모친 : 이옥구 ( ~ 1908년)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
부인: 이인복 (1926년 러시아에서 재혼) 장남: 홍양순 ( ~ 1908년) 정평배기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
차남: 홍용환 (일본군에게 고문당한 후 순국)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당했고, 그곳에서 집단 농장을 운영하였다. 1943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향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2급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다..

장군의 귀한 8. 15, 2021

카자흐스탄과 국교가 맺어지자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본국으로 봉환하려고 노력하여왔다. 그러나 북한과 카자흐스탄 교민들의 반대로 미루어 오다가, 2021년 8.15 광복 76주기를 맞이하여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문과 함께 장군의 유해를 봉환할 수 있게 되었다. 장군이 대한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통한의 눈을 감은 지 78년 만이며.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가 있은지 101년 만이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신 군 수송기가 대한민국 서해 방공식별 구역에 들어서자 공군 전투기 6대가 주위를 에워싸 호위하면서 서울 공항에 내렸다.






귀환한 장군에게 대통령은 최상의 예우로 건국훈장 최고 등급인 1급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했다. 살기 위해서 또 애국하기 위해서 험하고 고달픈 머나먼 여정을 마치고 이제 고국의 품에서 편히 쉬시게 되었다.
김제화
'항일 독립 투사와 조선족'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좌진 장군 (0) | 2021.02.2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