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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순례(Holy Land Tour)/2.성지 순례

Via Dolorosa

 빌라도 법정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던 그때 빌라도 법정 자리에는 지금 아랍학교가 들어서 있지만, 그 자리는 남아 있어서 매일 순례자들이 찾는 곳이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겪으셨던 고난을 그려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본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예수님이 복음 활동을 하고 계실 때, 30대의 젊은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지방의 총독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혜성 같이 나타나 민중을 몰고 다니는 예수를 시기한 유대민족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그들은 여러 가지 죄목을 걸어서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를 죽여 달라고 빌라도에게로 보냈다. 빌라도가 조사를 해 보았지만 죄목이라는 것이 모두 유대 종교에 대한 문제이지 사형시킬 아무 명목이 없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첫 번째로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 또 두 번째도 그는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다.라고 선언했다. (눅23:13-15) 그러자 성난 유대인들이, 무조건 십자가에 죽여 달라고 난동이었다. 잠시 뒤 다시 빌라도는 세 번째로 민중들에게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라고 마지막 판결을 했다. (눅23:20-22 지금으로 말하자면, 삼심 재판 결과 무죄 판결이 난 것이다. 그러자 성난 민중들이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충성하는 문제를 들먹거리면서 폭동을 일으킬 기세였다. 빌라도는 법과 정의보다는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예수를 그들의 손에 내어주어 죽음에 이르게 한다. (눅 23:24-25)

 

 

그리고 빌라도는 물에 손을 씻으면서, 민중들을 향하여, "나는 이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 무죄하니 죗값을 너희가 받으라고 하자", 무리들이 "우리와 우리 자손이 받겠다고 한 목소리로 응답하자", 빌라도는 그들이 원하는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 (마 27:11-26)

'빌라도'가 나중에라도 회개하고 주님께로 왔더라면,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었을 텐데..., 불행하게도 그의 이름은 이 세상 끝날까지 어디서든지 예수와 함께 하면서 비난받는 불행한 이름이 되었다. 예를 들어, 노만 쥬이슨(Norman Jewison)의 뮤지컬 "슈퍼스타 지저스 크라이스트" (Super Star Jesus Christ)에서도 그의 이름은 비난을 받고 있는 대목이 있다. 여기서 생각하게 하는 한 가지 가르침은 우리 이름이 어떤 이름으로 남아야 하는 가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일에 가담하여 악역을 맡았던, 유다, 빌라도, 가야바 대제사장, 등이 회개하고 돌아왔으면 용서를 받고 영생의 복을 받을 수 있었는데, 아쉬운 일이다.

 

▶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여 나가는 길

▶ #3 지점에 오면 2000년 전 예수님이 밟고 걸으셨던 박석 깔린 길을 만나게 된다.  빌라도 법정 바닥도 박석으로 되어 있었다. (요 19:13)

▼ 박석(薄石), 히브리어로는 ‘갑바타 (גַּבְּתָא)로 '넓적하고 얇은 돌'로 검은색 등의 돌을 섞어서 마당이나 길을 예쁘게 포장하였다. 

              

 비아 돌로사 (예수 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 고통의 길)

 

라틴어 Via Dolorosa는  Via는 길(way), Dolorosa는 슬픔, 비탄(sorrowful)으로 고통의 뜻으로 “슬픔의 길, 고통의 길”이라 부른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못 박혀 죽으시려고 마지막 지나가신 길이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지나가신 이 길은 이제 아랍 사람들이 돈 버는 장사 길이 되어있어서 슬펐다. 양옆으로 꽉 들어찬 아랍인들의 기념품 가게들은 바가지 장사였다. 하도 더워서 베로 만든 청색 T-Shirt 하나를 부르는 가격에 세배나 깎아서 샀는데도 싼 것이 아니라니 기가 찼다.

 

 

▶ 로마 가톨릭이 만든 Via Dolorosa  

이 길은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 법정에서부터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신 거리 800m의 거리를 “비아 돌로로사”라고 부른다.

금요일의 순례

금요일마다 순례객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오후 3시에 모두 모여서 제일 지점인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를 맨 선두자를 따라 순례를 시작한다.

▶(예수님은 12시(6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 오후 3시(9시)에 운명하셨다.(누가복음)  

800m의 거리 “비아 돌로사”는 14세기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 만들었으며, 14개의 지점은 그저 상징적이며, 각 지점에서 설명하는 에피소드나 드라마 같은 사건들은 로마 가톨릭이 꾸며낸 소설 같은 이야기로 모두 허구(Fiction)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건은 예수님이 넘어지셔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사건만 사실이다. 십자가의 길은 4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누가복음 23장에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내를 잃은 Peter

우리 일행이 Via Dolorosa 시장통 길을 걷고 나서, 한 시간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자유시장을 돌아보고 시장 밖에서 모이기로 했다. 북새통을 이루는 시장통을 여기저기 이것저것 돌아보다가 더워서 베로 만든 청색 T-Shirt 하나를 부르는 가격을 세번이나 깎아서 샀는데도 싼 것이 아니라니 기가 찼다. 시간이 되어서 밖에 나와보니 모두 반겨 주었다. 시장밖에는 아랍 자치 경찰이 말을 타고 경계하고 있었고, 저쪽 언덕에는 이스라엘 군이 기관총을 걸어놓고 경계를 하고 있어서 분위기가 삼엄하였다. 내가 인원점검을 하려고 하자 한 사람이 오지 않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우리 팀에는 현지에서 함께한 불가리아 부부가 있었다. 그분은 미국에서 불가리아로 복음 방송을 하는 부부인데, 그 부인이 오지 않고 있었다. 같이 다니다가 남편이 부인을 잃은 것이다. 우리는 둘씩 짝을 지어서 다시 시장 안으로 들어가 흩어져서 15분 동안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약속된 시간에서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겁에 질린 부인이 허겁지겁 나타났다. 우리는 그녀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환호하면서 기뻐해 주었지만, 남편 속이야 얼마나 탔겠는가! 우리는 박수로 맞이해 주었고 자매들이 남편에게 잘 대해 주도록 격려했다. 부인이 남편과 우리 모두에게 사과했다. 부부는 뒷자리에 가서 앉았고, 부인은 계속 잘못했다고 남편에게 용서해 달라고 하지만, 남편은 말이 없었다. 오늘 점심은 키브츠에서 먹기로 되어 있었다. 부인은 식당에 올라오지 못하고 아래층에서 울고 있었다. 우리 안내자 야곱이 남편을 데리고 내려가서 진정시켜 데리고 올라와 식탁에 함께 하여서 다행이었다.

 

 성묘(聖墓) 교당(Holy Sepulcher) 

오후에 다시 십자가의 길을 이어 종점인 성묘 교당에 이르렀다. 성묘 교당은 골고다 언덕을 에워싼 그 위에 건물을 지었다. 즉 십자가에 달리시고 묻히신 무덤 부활의 장소가 다 이 건물 안에 있다는 것이다. 성묘는 '거룩한 무덤'이란 뜻이다. 그리스 정교회는 '부활의 교회'라고 부른다. 지금 이곳은 그리스 정교회가 관리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섯 종파가 공동 사용권을 가지고 있어서 안에는 각각의 기도처들이 있다. 

▶ 여섯 종파 - 그리스 정교회, 로마 가톨릭,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콥트교, 에티오피아 종교회

 

 

성묘 교당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13 지점에서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지하로 내려가면 이 넓은 돌판이 맞이한다.. 이 돌판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 누이고 향유를 뿌리며 베 옷을 입히며 장례 준비를 한 장소라는 것이다. 물론 상징적으로 그럴듯하게 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게 진짜인 줄 알고, 진짜라도 그렇지, 손을 얹거나 비비면서 기도하거나 울상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딱한 일이었다.  

 

 

#13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사람들은 십자가 제대 밑에 들어가 안벽에 걸린 십자가 성화에 입을 맞추고 나오려고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팀이 도착했을 때는 온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한 곳에 제대로 머물기가 쉽지 않았다.

 

 

▶#14 지하에 예수님의 빈 무덤을 만들고, 무덤 천정에 빛이 들어오도록 설계하여 빈 무덤을 환하게 비추게 하고 있다.  

 

 골고다(Golgotha) 

골고다 즉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 마 27:33, 막 15:22, 눅23:33, 요 19:17

우리말 [골고다]는 아람어 '굴구타(gulgulta)'가 그리스어, Golgotha로 음역 된 것으로 '해골' 이란 뜻이다. 우리는 골고다 또는 갈보리라고도 부른다. '갈보리'라는 말은 '해골'의 라틴어 칼바리아이(Calvariae)에서 영어 칼바리(Calvary)가 파생되었고, 한국어로 '갈보리'로 부르게 되었다. 골고다(해골)는 신약의 네 복음서에 네 번 나오지만, 갈보리란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킹 제임스 성경에는 누가복음 23장 33절에 한번 [갈보리]라고 나온다. 어떤 단어를 쓰든지 뜻은 같다. 이 언덕이 해골의 장소로 부르는 것은 사형장으로 해골들이 널려 있었다는 설과 해골처럼 생겼다는 설이 있는데, 기독교에서는 두 번째 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 골고다 언덕에 대한 엇갈린 주장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면서 놀란 일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묻히고 부활한 장소인 골고다 언덕이 한 곳이 아니고 두 곳으로 나뉘어 있어서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 이런 논란은 골고다 언덕이 여기다, 하고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한 곳은 성묘 교회당이고 다른 곳은 정원 무덤이란 곳이다. 골고다 언덕은 사람이 사는 성밖에 있는 사형장 또는 공동묘지로 쓰였던 곳으로 알려졌다.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또는 부활 교회당(정교회)은(정교회)은 구시가지로 불리는 동예루살렘의 서쪽 지역에 있다. 한편 정원 무덤(Garden Tomb)은 예루살렘의 북쪽 문인 다마스쿠스 성문 밖 북서쪽에 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은 몇 차례의 전쟁을 통해 경계선이 바뀌기도 했다.

1538년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황제가 예루살렘 성을 넓혀 사방 1km의 정사각형 모양의 성을 건설하면서 성묘 교당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 전에는 성 밖이었다고 주장한다. 또 얼마의 신학자들과 고고학자들도 이 같은 견해를 지지하면서, 정원 무덤은 그저 상징적인 뜻을 가질 뿐이라고 했다.

기독교의 흔적들을 잘 알지 못하는 데는 이스라엘 멸망의 역사와도 관계가 있다. 주후 70 Titus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당하고 파괴되었다. 그리고 110년이 넘으면서 유대민족은 세계로 흩어져 유랑하는 민족이 되었다. 로마제국에 항거하는 유대 민족을 박해하면서 유대민족의 종교를 철저히 말살하였다. 예루살렘 이름도 [알리아 카피톨리]라고 바꾸었고, 비너스 신전 들 이방 종교의 상징물을 많이 건설하였다. 기독교가 탄생한 지 불과 40여 년 유대교의 핍박으로 제대로 자리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나라가 망해버렸으니 기독교의 흔적들은 무관심 속에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그러는 동안 로마제국과 주변의 나라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복음이 전해졌다. 313년 콘스탄틴의 기독교 신앙의 자유가 공포되자 기독교 성지 회복을 위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예수 님의 흔적들을 여러 나라 기독교와 종파들이 서로 차지하려는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한 장소에 같은 유적이 두 개 세 개가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예수님 감옥도 두 곳, 골고다도 두 곳이 되었다. 또 베들레헴 예수님 탄생지에는 한 곳에 여섯 종파가 아우러져 있다.

성지 유적을 성역화하는데 크게 기여한 분은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였. 그녀가 326년 예루살렘에 온 그녀는 골고다 언덕의 위치를 찾으라고고 지시했다. 그때 조사단이 비너스 신전 부근을 뒤지다가 나무 조각 하나를 찾아내어 십자가를 만들었던 나무라고 주장하여, 335년 비너스 신전을 헐어버리고 성묘 교당을 짓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아무 논쟁 없이 그런가 하면서 긴 세월 말없이 흐르면서 사실같이 굳어져 버린 것이다.

 

☞ 또 하나의 골고다는? 

 

 정원 무덤(Garden Tomb)

이 새로운 주장은 영국의 골든(Charles Gorden) 장군에 의해서이다. 그는 1883년 이스라엘 주둔 사령관으로 근무하면서 골고다를 찾는 일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는 예루살렘 북문 다마스쿠스(Damascus) 성문 밖 북동쪽 언덕에 해골 모양을 한 장소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해골 모양이 자연스럽게 있었던 것이라고 하는데 신기하기만 하다. 그 언덕 이름도 아람어로 해골이라는 것과 로마시대에 사형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오래된 무덤들을 발굴하는 가운데 이 바위굴을 찾아내어 예수님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나름대로 고고학적 자료를 더하면서 기독교 복음 진영 쪽에서는 우상의 집 같은 성묘 교당보다는 이곳을 인정하게 되었다.  지금 이 정원 무덤은, 영국에 있는 정원 무덤 관리 위원회에서 성지 유적의 품위를 위해 관리를 잘하고 있다고 한다.  

 

 

▶ 서로의 주장에 대해서,

지금 주장하고 있는 정원 무덤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라는 증거는 없다. 요셉의 고향은 사무엘의 고향인 에브라임 산지의 아리마대 성이다. 이스라엘의 높은 관직인 산헤드린의 공회원이 사형장인 이곳에 자기의 새 무덤을 마련했을까?

또 비너스 신전 부근에서 찾은 나무 쪼가리 하나로 여기가 '골고다'라고 하여 이교 비너스 신전을 헐고 그 자리에 지은 성묘 교당도 과학적인 아무 증거도 없다. 두 곳을 다 돌아본 나로서는 장소는 상징일 뿐, 내 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여기에서 더욱 깨닫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셨다는 성경말씀을 믿는 내 믿음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더욱 확신케 했다는 것이다. 장소를 중요시하는 것은 상업적이거나 우상적인 발로일 수도 있다.

 

 정원 무덤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나누고 싶어서 실어 본다.

1980년대 아는 한국의 Kim 부흥사께서 성지 여행을 오셨다가, 이 정원 무덤에서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관광객도 없고 조용해 지자, 목사는 관리인에게 $100을 손에 쥐어주고 잠깐만 예수님 누우셨던 자리에 한번 누워 보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관리인이 철문을 열어 주자, 예수님 자리에 누워서 할렐루야를 웨치면서 세 번 일어났다 누웠다, 했다고  우리에게 자랑삼아 말한 적이 있다. 그분은 왜 그렇게 해 보고 싶었을까?  진짜 무덤도 아닌데, 재밌는 일이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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