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지 순례(Holy Land Tour)/2.성지 순례

통곡의 벽, 베데스다

◈ 통곡의 벽(Wailing Wall) April 9

 

 

A. D. 70년 로마의 장군 Titus가 예루살렘을 정복할 당시 모든 성벽은 헐어 버리고 기념으로 이 벽만 남겨 놓았다. 이 벽을 남긴 것은 후세에 로마군의 위력을 과시하려 했다고 한다. 그 뒤로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이 이곳에 와서 폐허가 된 성전 그리고 흩어진 민족의 애통함을  통곡하며 기도하면서 이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통곡의 벽은 남녀가 기도하는 자리가 나뉘어 있었다. 북쪽은 남자, 남쪽은 여자들이 기도하는 곳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고 남쪽으로 들어가려다가 안내하는 여성이 남자들은 저쪽이라고 손으로 가르쳐 주었다. 남자들은 반드시 머리에 무엇인가를 써야만 들어갈 수 있다. 안내가 검은 종이로 만들어진 [키파’(Kipa)]라는 작은 모자를 주어서 쓰고 들어갔다. 유대인들이 키파를 쓰는 것은, 머리 위에 하나님이 계심(Divine presence)을 알고, 그를 경외(fear of God)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아예 키파를 하나 사서 가지고 다녔다.  수많은 유대인이 벽면 가까이 서서 허리를 굽실굽실하면서 기도하기에 여념이 없는데, 특히 수염을 기르고 검은 양복에 검은 모자를 쓴 정통파 유대인들이 더 열성적으로 토라나 기도문을 읽으면서 기도하고 있었다. 또  성벽의 돌 틈 사이에는 소원을 적은 종잇조각들이 틈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아마 내가 기도한 흔적을 하나님 앞에 남겨두고 간다는 뜻일 게다. 기도만 하면 되는데, 미련을 남기는 것은 미신적인 행위로 보인다. 

 

 

성벽에 뚫린 통로가 있어서 들어가서 보니 경사진 언덕 비탈에 수평 성벽을 쌓기 위하여 한쪽에 쌓아 올린 16계단의 큰 돌벽은 현대인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토목 공사였다. 기계가 없던 그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큰 공사를 할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였다.

 

 성전 산(모리아 산)

이 성전산은 원래 모리아 산으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산정 바위에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희생제물로 드리려고 하던 곳이며, 또 다윗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모리아(Moriah) 산 언덕에 있는 여부스 사람의 타작마당을 은을 주고 사서 소유지로 삼았다. (역대상 22장) 그 뒤 다윗이 이곳에 성을 쌓고 다윗성이라고 부르다가 이스라엘의 중심지, 예루살렘이 되었다. 예루살렘을 회복한 이스라엘의 유대교 보수진영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지을 운동을 하고 있지만, 정치적인 영향 때문에 짓는 일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황금 돔과 은색 돔 모스크(Mocque, 사원 )

이 모리아(성전) 산에 하나님의 성전이 서 있어야 하는데, 어울리지 않게 이슬람의 황금 색 둥근 지붕을 한 Dome of the Rock Mocque(바위사원)과 남쪽으로는 은색 돔 El-Aqsa-Mocque(엘 악사 모스크)가 있다. 이 모슬렘 사원은 전적으로 아랍 사람들이 관리하고 있는데 경계가 아주 심하였다. 우리가 여기에 오기 얼마 전에 호주에서 온 사람이 이 은색 돔에 불을 지른 적이 있어서 경계가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지금 황금 돔이 있는 자리에서 동북쪽 옆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자리로 밝혀지고 있는데 그 성전 자리가 황금 돔과 일부 겹쳐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성전은 AD 70년 로마의 Titus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성전은 불타고 다 무너져서 없어졌다. 지금 사원 안에는 반석 같은 넙적한 바위( 13 m×13 m×높이 1.25~2 m×길이18m)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던 바위이다.(창세기 22장) 하지만 모슬렘은  하늘에서 내려온 바위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치던 제단이라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모하멧이 이 바위를 딛고 승천하였다고 이 바위를 성스럽게 보호하려고 692년 예루살렘의 통치자인 압둘 말리크가 사원을 지었다 이슬람에서는 메카, 메디나와 함께 예루살렘을 3대 성지로 꼽는다다.  두 사원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하면서 신성시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들어가지 못하게 해서 우리만 들어갔다. 안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였다.

 

 

 베데스다 연못의 기적(요한복음 5:1-18)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란 뜻이며.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병자가 고침을 받게 되어 있었다. 거기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는데 물이 움직일 때 들어가고자 하지만 더 건강한 병자가 먼저 가기 때문에 이 환자는 고침을 받을 기회는 없었다. 예수님이 거기에 오셔서 이 병자의 사정을 듣고 고쳐주셨다는 이야기가 서려 있는 연못이다. 그동안 지리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연못이라기 보다는 그저 물웅덩이다.

 

 

  성전 이방인의 뜰 

원래 유대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이라는 것은 없었다. 솔로몬의 성전은 주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두 번째 스룹바벨이 건축한 성전은 주전 63년 폼페우스 장군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유대를 다스리던 로마의 분봉왕이며 이두매(에돔) 이방인인 헤롯이 유대인의 민심을 얻기 위해 주전 20년에 착공하여 9년 만에 완공했다. 성전을 건축하면서 크기를 확장하면서 생겨난 공간이 이방인의 뜰이다. 헤롯이 건축해서 헤롯 성전이라 부른다.

 

 

성전이 완공되자, 로마 황제 아우그스도(Augustus, 눅2:1)는 이 성전을 신성한 곳으로 여겨 다음과 같은 출입금지 명령을 내렸다.

◈ 경고의 문구

[어떤 이방인도 성전을 둘러싼 담장과 성전 영역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잡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죽음에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성전 헌당식에 로마제국의 2인 자인 아그립바가 황제를 대신하여 소 100마리를 제물로 드리려고 성전 마당에는 들어왔지만, 안뜰로는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황제의 명은 삼엄했다. 이 명령은 바깥뜰에서 안뜰로 들어가는 돌담장에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새겨 놓아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아름답게 그린 사진과 자료들은 Biblia로부터 제공 받음

 

그림에서 보듯이 사각형 성전의 붉은 선 바깥을 이방인의 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바깥뜰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 등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으나, 이방인은 성전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나중에 여기서 상행위도 이루어졌다. 예수님이 화가 나셔서 환전상을 뒤집어엎으신 곳이다. 예수님이 진짜 화가 나신 이유는 사람들이 나와서 장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제물을 팔고, 환전하는 일에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종사하였고 폭리와 사기, 부정불법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성전도 불타버리고, 성전 터에 모슬렘 사원이 세워지면서 성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넓은 이방인의 뜰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곳에서 아름다웠을 성전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 성전 모형

 

 

이 성전 모형은 호텔의 소유자인 한스 크로츠(Hans Kroch)가 이스라엘 독립 전쟁에 참가하여 전사한 아들 야곱을 기념하려고 건축하여 1966년 자기 호텔에 전시하였다. 그 성전의 모형뿐만 아니라 그 옛날 예루살렘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나는 성전이 모형을 보면서 성경에서만 보고 마음에 그리고 있었는데 실제 같은 모형을 보니 실감이 났다. 지금 이 모형은 2006년 성서의 전당 옆으로 옮겨져 왔다고 한다.  

김제화

'성지 순례(Holy Land Tour) > 2.성지 순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루살렘  (0) 2021.04.14
홀로코스트(Holocaust) 추모 관  (0) 2021.04.14
Via Dolorosa  (0) 2021.04.14
안식일, 예수 감옥  (0) 2021.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