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이 밝으면서 주님은 우리에게 변화와 새로운 삶의 장을 열어주시고 계셨다.
첫째는 기다리던 캐나다 시민권을 받았다.
둘째는 그동안 준비해 온 중국 선교 지를 답사하려고 차 떠나다.
Watch night service는 Westmount Chapel에서 가졌다. 1.1. St.
어젯밤 New Yea Eve에 우리가 함께하는 Westmount Bible Chapel에서 망년회로 모였다. 여러 형제자매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우리가 중국으로 나아가는 선교문제와 아울러 천거 문제도 의논하였다. 모두 기도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새해 첫날 매일 읽는 묵상의 책에서 한 해를 시작하는 시간에 귀한 말씀들을 마음에 담았다.
" Never be afraid to entrust the unknown future to the all-knowing God"
"알 수 없는 미래를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주님께 맡기는데 꺼려하지 말자"
“The God who holds the universe Is the God who is holding me"
"우주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은 나를 붙드시고 계신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
“All His saints are in your hand"-Deut 33:3-
모든 성도가 그의 손안에(수중에) 있으며... 신명기 33:3
새해에 내게 주신 귀한 말씀들이다.
대전 내동교회 초청
지나 해 내동교회의 여러 형제들이 나를 사역자로 초청하려고 움직이고 있었는데, 반대하는 형제들도 어느 정도 있어서 모두 합의를 보지는 않고 있었는데, 서울 김종만 형제가 대전에 내려가서 며칠을 머물면서 나를 초청하는 일을 막으려고 형제들을 설득하는 일을 극심스럽게 했다. 그래서 나는 내동 모임을 어지럽게 하고 싶지 않아서 초청을 사양하고 형제들끼리 화목하게 잘 나가기를 바란다는 의견을 보냈다.
오산 교회의 초청
오산 교회도 여러 날 머물면서 말씀 교제를 나누었는데 그때 나에게 사역자로 와달라고 초청을 했고, 나는 중국 선교를 나아가야 하므로 그들의 청을 사양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신년이 시작되면서 나는 3권으로 되어 있는 Calvin의 Institution of the Christian Religion(기독교강요)을읽었다. 그분의 글에는 나를 각성시키는 귀한 말씀들이 많이 있어서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그의 선택적인 예지 론 등은 장로교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킨 근거가 되었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그 사상은 그분의 머리에서 나온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뿐이며, 계시된 말씀은 아니므로 사람의 해석을 진리같이 여긴다면 큰 잘못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구원받은 교회를 선택해 놓으셨지 구원받을 자, 지옥 갈 자를 미리 다 선택해 놓으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다고 하신다. 즉 그리스도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자를 선택하셨다. 예지론에 빠져 있는 사람은 그렇게 믿는 것도 선택받은 자라고 말한다. 이런 사상에 빠지면 천국 가는 일에 있어서 비록 내가 믿을지라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된다면 천국에 갈 자신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자신(확신)이 없다는 것은 결국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었다"는 약속을 믿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요 3:16). 그러나 그 젊은 나이에 이러한 장서를 남겼다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훌륭한 일이지만, 이런 책을 만들어 놓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온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성경만이면 더 만족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내어 놓은 복음주의 형제들의 협력으로 가능했다. 그러나 국가 권력자들의 비호를 받는 그는 혁명의 동지들을 죽음에 내 모는 협력자가 되었다. 초대교회의 예배 중심은 만찬 예배였다. 칼빈은 성찬예배를 설교 예배로 바꾼 장본인이다. 그로부터 칼빈의 후예들인 장로교회는 성찬예배를 년 중 행사같이 여겨 멀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분의 글 가운데 교훈이 되는 몇 절을 옮겨 본다.
“세상은 무가치하게 하든지, 과도하게 사랑하든지 둘 중에 하나, 중간 지대는 없다. 영원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전력을 다해서 족쇄(足鎖)를 부수어 버려야 한다.-기독교강요 중 P.231
"우둔함은 우리의 지성이 부귀영화의 허망한 광채에 마비되어, 그 이상의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마음의 탐욕, 야심, 정욕 등에 눌려 더 높이 날(비약(飛躍) 수는 없다. 영혼의 존재가 육의 각종 유혹에 빠져 지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주께서는 현세 생활의 끊임없는 불행들을 보여 주심으로 땅에서 무엇을 얻으리라는 기대를 갖지 못하게 한다. - 기독교강요 중 P. 230-
주님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는 세상 것을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만 한다.
Dixie Canadian Church
케네디언 목회자가 휴가차 한 달 자리를 비우게 된다고 나에게 세 번 주일 설교 초청을 했는데 아직까지, 영어 간증은 여러 번 해 보았지만 한 번도 영어 설교를 해 본 적이 없어서 망설이다가 하기로 했다. 한 주씩 영어 설교를 하려고 원고를 외우고 신경을 써서 인지 오늘 주일이 지나고 나자 긴장이 풀려서 인지 피로가 몰려오는 듯했다.
시민권 인터뷰 2. 13. 월.
지난해 4월에 신청한 시민권 시험을 보려고 오늘 시민권 판사에게 가서 Canadian Citizenship Interview (시민권 시험)를 했는데, 그동안 공부를 해서 인지 그리 어려울 것은 없었다. 그리고 지난 3년간 캐나다에 거주했는지에 대해 여권 검열도 받았다. 우리 모두 합격이다. 우리가 이제 법적으로 캐나다 사람이 되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선교지에 나아가려는 우리에게 캐나다 시민권은 신분 보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The Mission of China 4.22 1994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중국 선교에 나서고 있었다. 이제 보잘것없는 내가 중국 선교에 나서려고 하니, 50이 넘은 나이에 때늦은 감이 들지만, 오랫동안 마음속에 메아리치고 있던 소리를 따르게 되었다. 내가 청년 시절에 받았던 중국 선교에 대한 마음의 감동을 이제야 이루려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 내 평생에 이루고 싶었던 선교 사역으로 헌신하고 싶은 곳은 나의 고향인 중국 흑룡강 성 목단강이다. 중국 정부의 종교 폐쇄 정책으로 지금은 자유로운 활동은 어렵겠지만 점차적으로 크게 열릴 것으로 믿어진다. 기댈만한 아무것도 없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항상 그랬듯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시는 주님을 믿고 또 한 걸음 나아가 보는 것이다. 이때부터 주님은 우리를 중국으로 가도록 길을 열어 주시고 계셨다. 요즈음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데 전에 사역하던 한인교회에서 선교지원금으로 $200을 보내주셔서 고마웠다. 그리고 나는 이제 기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일어나 중국을 가서 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고 영적으로 경험해 보고 싶었다. 그러면 주님의 뜻이 좀 더 밝아지게 될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오늘(4. 22) 마음을 굳히고 토론토 중국 총영사관에 Visa 신청을 하러 갔는데 중국 총영사관의 시설도, 신청서도 어찌나 초라하던지, 중국의 가난을 보는 듯했다.
Canadian Citizenship(캐나다 시민권) 2. 23. 수. 1994 눈
오늘은 우리에게 있어서 또 한 번 역사적인 날로 캐나다 시민권을 받는 날이다. 우리는 Citizenship Court(시민권 법정)에 가서 시민권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법적으로 캐나다 시민이 되었다. 시민권 선서식에서 마지막 한 구절 Queen Elisabeth에게 충성한다는 부분은 따라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여기까지 와서 그 여성에게 충성할 것까지는 없었다. 충성은 캐나다 국가에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중국서 온 반가운 편지 2. 26-27 Sun
오늘 중국 연변 TV의 방송국 이승희 기자의 편지가 왔다. 나를 기다린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아는 이 없는 막막한 곳에 나를 맞이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이승희 기자와의 만남은 내가 중국으로 나아가는 쉬운 길이 되었다. 주님은 때때로 만남을 통해서 당신의 길을 인도하시기도 하신다. 지난해 미국 Ohio 주 Cleveland 한인 침례교회에서 그 지방 교회들이 연합하여 가지는 수양회에 강사로 초청을 받았다. 마침 한방에서 생활하게 된 형제가 바로 이승희 기자였다. 내 고향 조선족 동포여서 이 만남이 얼마나 반갑고 기뻤던지 매일 시간만 나면 성경을 교제하며 영육 간에 가까워졌다. 그가 미국에 오게 된 것은, 미국 시카고 한인방송국과 연계가 되어서 방문하게 되었다. 한인 교회에서 대접을 받으면서 예수에 대하여 처음 들으면서 기독교인 되어가고 있었다. 그를 통해서 중국 실정을 잘 이해하게 되었고, 나의 고향 동북삼성의 사정도 잘 알게 되었다. 중국 오면 자기 집에서 머물도록 청하여 주어서 고마웠다.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은 3일 동안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 침례교회에서 머물다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침례를 받고 중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몇 주 뒤 중국에서 이승희 형제의 전화가 왔다. 언제 오는지를 알려주면 자기가 마중을 나오겠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내가 한국에 나가서 전화를 하기로 하였다.
중국 비자 3. 1. Tue
오늘 중국 총영사관에 가서 Visa를 받음으로 몇십 년 동안 마음에만 담고 있던 중국 선교가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은 우리의 중국 선교를 위한 교회도, 단체도, 후원자도 없다, 그저 믿느니 위에 계신 분 밖에는 없다. 며칠 뒤 아침에 성경을 읽다가 마음에 빛이 되는 말씀을 받았다.
“ …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사 48:17
한국에서 오래 동안 선교를 하고 있는 미국 선교사 허진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지금 중국 선교가 어렵다고 하면서 나를 진정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이 분을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내 소식을 들었는지 궁금하다. 모두 중국 선교가 어렵다고 하면서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고 있었다. 우리를 격려하면서 나아가기를 권하는 마음들은 별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민족의 동족상잔의 6.25의 배후 세력이었고, 사회주의 나라로 반세기가 넘도록 죽의 장막으로 외부와 접촉하지 않은 비밀스러운 나라로 모두 조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먼저 가서 길을 여는 일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인교회에서 청하여 중국 선교에 대하여 교제를 나누었고 선교헌금 $100을 주셨다.
오늘은 캐나다 MSC(형제교회 선교) 회장 Mr. Loney를 모시고 한국식당에서 갈비 점심으로 대접하면서 교제하였다. 자기도 형제교회 사람으로 ontario Bible College(내가 다닌 대학원 학부) 그리고 Chicago에 있는 Wheaton Theological Seminary를 나와서 완고한 모임으로부터는 초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웃었다.
송 형제 가정을 심방하여 건강이 안 좋으신 모친을 위하여 기도해 드리고 위로하였다. 가족들이 $100을 중국 선교를 위해서 주셨다. 오늘은 한인 식당에서 신학교 동창생들 모임이 있어서 참여하여서 중국 선교에 대하여 설명하고 기도해 줄 것을 청했다. 그동안 함께 일하던 공산권 선교회에서 중국 선교를 위하여 $300을 보내주어서 고마웠다. 식후 최영철 동창생이 집까지 태워다 주고 잘 다녀오라고 US$100을 주면서 격려하여 주어서 고마웠다. 아직 재정적으로 중국 왕복표를 살 형편이 안 되어서 Credit Card로 표를 샀다.
중국으로 나아가는 길 3. 22 화
오늘 드디어 중국 땅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하여 떠나는 날이다. 우선 한국에 잠시 들려서 교제하다가 중국을 5월경에 가고자 계획을 세웠다. 중국으로 가는 길에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으로 나왔다. 날틀에서 어렸을 때 살았던 6살까지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개방은 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삼엄한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하는 궁금한 마음을 주님께 의지하며 기도했다.
I prayed to Find His Way, to Know His Will, to Meet His Place.
한국에서의 교제
4월 한 달은 오산 이해균 형제의 나무 농장에 머물면서 교제하면서 지냈다. 농장에 있는 동안 오산 형제들이 나를 초청하고자 하는 일로 많이 교제를 나누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저 거대한 대륙 중국인데, 여러 형제들이 이 좁은 땅에서 날 함께 살자고 청하고 있었다.
안양 교회 복음 집회 4. 8-10 Sun
박춘규 형제가 복음 집회를 위하여 초청하여 주셔서 복음을 전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3일간 주님께서 여러 가지로 축복하여 주신 좋은 집회였다. 김명자 5200, 안양 모임 선교헌금 50000, 안양교회 사례 30만을 주셔서 중국으로 가려는 나에게 큰 보탬이 되어 주고 있어서 주님의 선하심에 감사를 드렸다.
목포교회 4. 16-17 Sun
전라남도 목포 교회를 방문하였다. 저녁 집회에 말씀을 전하는데 여행에 피곤해서인지 힘이 들었다. 집회를 마치고 나서 형제들과 차들을 나누며 교제하는데, 형제들이 내가 이 교회 사정이라도 잘 아는 듯 합당한 말씀을 주셨다고들 하여서 주님의 인도하심이 참 놀라웠다. 주님께서 나를 감동하셔서 말씀으로 이 교회의 문제를 다루도록 해 주셨다. 강절교회에서 장태영 형제와 여러 식구들이, 그리고 영광교회에서도 형제들이 와서 격려해 주어서 반가웠다. 교회에서 선교헌금 20만을 선물해 주셨다.
귀신에 씐 형제와의 씨름 4. 2 Fri
오산에서 형제들과 교제하다가 좀 늦게 농장에 들어가니 이 형제가 나를 맞이하러 나왔다. 한방을 쓰는 처남 용석 형제가 술에 취해 게걸대고 시끄러워서, 나는 잠옷을 챙겨 가지고 오산으로 나 가려고 방에 들어가니, 큰 소리를 내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이때 누나인 박 자매가 불을 켜고 동생을 깨우면서 내가 왔다고 알리고 나무라고 있었다. 나는 미안해서 그냥 놔두라고 했다. 용석이가 눈을 뜨자마자 나를 보고는 장총을 쏘는 시늉을 하면서 쥐, 쥐, 하면서 두려운 눈빛으로 보면서 내 눈길을 피하려고 누나 뒤로 숨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 내려가 큰 소리로 용석이, 정신 차려, 하니까, 더 발작을 하는데, 내가 자기 몸에 손을 데니까 더 발광을 하다가 문을 열고 달아나니 누나와 매형이 붙들고 하자 뿌리치고 어두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형제가 뛰어나가면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밖에 나가니 캄캄한데 머리카락이 쭈뼛해진다. 나는 그가 귀신이 들었다고 생각하니 내 영이 놀라는 것 같았다. 닭장 뒤에 서서 그에게 들어가 있는 귀신을 쫓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여! 제게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고 아래 길로 좇아내려갔다. 캄캄한 밤 주변에 집들도 없는 삼거리에 가로등만이 외로이 켜져 있는 길에서 이 형제가 처남 용석 형제를 깔고 누워 씨름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왼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그의 이마를 힘차게 치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고 명령했다. 그가 악을 쓰면서 나를 노려보면서 김제화, 나하고 한번 해 볼래 하면서 비웃는 야유의 웃음 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데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는 빠져나가려고 힘을 쓰고 있었다. 이 형제와 내가 그를 제압하고는, 나는 계속 그 안에 있는 귀신아 나가, 못 나가 하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계속 악을 쓰면서 저항과 비웃음의 미소가 입가에 돌면서 자기 매형과 나를 비웃고 있었다. 이러기를 한참 하다가 나는 다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라고 명하니, 이상하게 그가 기운이 빠지면서 요한 3:16을 외우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다시 그이 이마를 치면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하고 명하자, 그는 나에게 성호에게로 가겠다고 말한다. 나는 이 형제에게 성호가 누구냐고 물으니, 죽은 처남 친구라고 했다. 나는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저 개울가로 가라고 호통을 치고 나니 이상하게도 그는 힘이 쭉 빠지면서, 나에게 이제 되었다고 말하면서 일어나는데 언제 그랬냐 싶었다. 30-40여 분 동안 싸움으로 주님은 그를 온전케 하셨다. 이런 영적 투쟁과 치유는 내 평생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었다. 이런 축복을 경험하게 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했다.
구원받은 형제에게 어떻게 이러한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귀신들을 다루는 사역도 연구하고 익숙해져야 할 필요를 깊이 느꼈다. 그가 그렇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가 교통사고로 시체를 거두기 어려울 만큼 험하게 죽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화장하여 묻은 뒤 그는 친구의 영정 사진을 방에 걸어 놓고 지내어서 분위기가 좀 스산했다고 누나가 나에게 말했다. 어느 날 누나가 그 사진을 떼어서 감추었는데 사진을 찾더라는 것이다. 친구의 뼈 가루는 원주에 있는 공동묘지에 뿌려졌다는데 가끔 그곳에 가서 있다가 오기도 했단다. 어느 날 죽은 친구의 형이 마침 그곳에 갔다가 용석이가 하염없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너 여기에 뭐 하러 왔느냐고 물으니, 성호 만나러 왔다고 하드란다. 그는 죽은 자에 대한 마음이 깊어져서 친구의 망령에 씌워지게 된 것이다. 이 일은 나의 평생 목회에 놀라운 경험이 되었다.
평택교회 5. 7-8 주일
이번 주말을 평택교회에서 교제하며 보내게 되었다. 임정빈 형님과 John과 많은 교제를 나누었다. 평택교회 10만, 임형 20만, 김형 30만의 선교 헌금을 주셨다.
♣ 두 달간은 중국 선교 여행 이야기는 "중국 여행기에서..
중국에서 한국으로 7. 16 토
두 달 닷새 동안 중국 여러 곳을 다니면서 중국의 사정을 살펴 보았다. 여러 곳의 조선족 가정교회들을 찾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중국에 있는 동안 주님은 나를 많이 훈련하시고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중국 선교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는 확신도 가지게 해 주셨다. 우선 지친 몸을 좀 쉬려고 조암 작은 동서 목장으로 갔다. 처남 상호 형제가 20만 원, 처제 순호 자매가 10만 원을 교제하여 주었다.
여러 교회들 방문 8월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여 중국을 방문한 간증들을 나누면서 주님의 은혜를 나누는 좋은 시간을 가졌다.
오산교회- 주일을 오산 교회에서 보내면서 중국 선교여행을 하고 돌아온 간증들을 나누었다. 교회에서 20만을 교제하여 주어서 고마웠다. 그리고 형제들이 우리가 살 아파트를 가보자고 하여서 함께 가 보았다. 형제들은 내가 올 것을 기대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선 종형제와 이천 Camp에 가서 형제들과 교제하였다.
평택교회- 주말을 보내게 되었다. 화요일 자매회의 초청이 있어서 말씀을 나누었다. 자매회 10만, 한 자매의 교제 10만을 주셨다.
대전교회- 대전 네동교회를 방문하여 여러 형제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초청 문제들이 진지한 내용들이었지만 나는 중국 선교를 해야 하는 일로 사양했다. 또 나를 초청하는 일로 교회가 의견이 나누어져 있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라고 설득하였다. 헤어질 때 형제들이 선물들을 주었다. 김용구 10만, 김형제 10만, 백 형제 5만 원.
대구 중부교회- 대구로 가서 이강일 형제가 사역하는 중부교회에서 주말을 보내었다.
8월 17일 캐나다로 돌아가기 전에 염과 송을 만나서 그동안 고마워서 점심을 사려고 했더니 염 형이 음식 값을 내서 미안했다. 염일부 형제가 또 10만 원을 주어서 받지 않으려고 하는데, 거절하지 못했다. 고마운 형제요 친구였다. 고마운 친구들을 뒤로하고 나는 3개월의 여정을 끝내고 고국의 하늘을 벗어나고 있었다.
돌아온 토론토 9월
중국 선교지를 답사하고 돌아왔지만, 앞으로 중국 선교를 어떻게 풀어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였다. 혼자서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 선교(Faith Mission)를 시작하다 보니 우선 기도 요청을 할 곳도 없고 의논할 동역 자들이 없는 것이 나를 더 외롭고 힘들게 하고 있었다. 이럴 때 주님은 시편에서 귀한 말씀으로 나를 위로하여 주시고 계셨다.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하는 고,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시 43:5”
효도관광 10. 3-16
시카고에 계시던 강태훈 형이 Santiago에서 한인 교회를 개척하더니 창립예배를 드린다고 하여서 오라고 청해 주셨다. 시카고 안영배목사가 가는 길에 효도 관광여행을 만들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뫼고 겸사겸사 어머니들을 모시고 관광길에 나섰다. 시카고 안영배 목사 교회 차로 안목사의 어머니 그리고 다른 몇 모친들을 모시고 라스베이거스를 경유하여 LA를 거쳐 Santiago로 내려가는 여행을 하였다. 샌디에이고 한인 교회 창립예배에는 생각보다 한인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Mexico 방문
주일날 창립예배를 드리고 이곳에서 하루 이틀 쉬기로 하였다. 우리들은 한 형제의 안내로 Mexico로 내려갔다. 국경선 하나를 두고 미국과 멕시코는 하늘과 지옥의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불법 입국자를 막자고 쳐 놓은 국경선 높은 담 그 담 구멍으로 미국 쪽 동정을 살펴보고 있는 멕시코 사람들, 어떻게 한 대륙에 살면서 사는 것이 이렇게 천지차이로 살 수 있는지 수수께끼다. 해안 국경선을 따라 내려가 한 동리에 들어갔다. 가게에 냉장고가 없어서 허리가 잘록한 코카콜라를 물에 담가 놓고 파는데 병뚜껑 가장자리에는 붉은 녹들이 슬어 있었다. 사는 것이 중국과 별 다름없는 것 같았다. 우리를 인도하는 형제가 가끔 낚시를 온다는 바다가 높은 언덕에 왔다. 저 아래 바다에는 한 떼의 고기 무리들이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를 치고 다니며 잡아먹고 있는 큰 고기들이 보인다. 아름다운 자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찌 이렇게 가난하고 고생스럽게 사는지 한심하기만 하다.
우리 일행은 Chicago로 돌아오는 길에 Grand Canyon을 들렸다. 어머니들의 놀라움은 대단했다. 이렇게 아름답고 깊은 계곡을 모두 처음 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질학 연구의 중심이 되고 있는 이곳은 창조과학자들의 연구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창조과학 탐사에서 참고
장장 수천 Km의 여행을 마치고 시카고에 잘 돌아왔다. 다음 날 나는 어머니와 안영배 형제의 어머니를 모시고 기차로 토론토로 돌아왔다.
중국 단기 선교보고
할렐루야 한인교회에서 중국 선교 보고를 하면서 기도 요청을 했다. 선교 후원금으로 $100을 주셨다. 다음 주에는 Parkdrive Bible Chapel 캐네디언 모임에서 중국의 이모저모를 환등을 보여주면서 간증을 나누었다. 모두 그 어려운 곳을 다녀왔다고 격려해 주셨다. 이곳의 나의 큰 조력자이신 Dr. Harold 형이 장로로 계신 교회이다. 교회에서 $75, Harold $50, 개인성도가 $40을 선교후원금으로 주셨다.
공산권 선교회의 후원 11. 16
공산권 선교회 회장을 하고 있는 동창생인 김대억 회장이 선교회에서 나의 중국 선교 지원금으로 $1000 주도록 결의했다고 수표를 전해 주어서 반가웠다.
Orillia 심방 11. 22. Tue 1994
눈이 많이 내린 날인데 주희를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100K가 넘은 북쪽 Orillia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김현중 형제 가정을 방문하여 교제를 나누었다. 과거 우리 교회에 있었던 어려움을 모두 아쉬워하면서 마음들을 풀었다. 가까운 곳에서 사업을 하는 장대복 행제부부도 함께 하였다 두 가정이 각각 $500 씩을 우리의 중국 선교에 써 달라고 주어서 고마웠다. 또 김 자매는 내 자매에게 주희가 필요한 것을 사주라고 $100을 따로 주었다. 형제자매들의 사랑이 고마웠다. 주님은 이렇게 중국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빈손을 조금씩 채워주시고 계셨다.
Northern Baptist Seminary Chicago 12. 11
오늘 시카고 한인 침례회 지방회 초청으로 와서 며칠 보내고 있다. 여기 와서 보니 모두 목회학 박사 과정들을 공부하고 있었다. 여러 친구들의 권유로 목회학 박사과정에 등록하고 첫 수업을 받았다. 무척 힘든 우리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무리를 해서 또 학생이 되었다. 중국으로 가야 하는 사람이 또 학생이 되어서 새로운 학적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저 시간이 되는 때까지 학적 경험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저 이렇게 중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10과목의 학점을 땄다. 그리고 본격적인 박사 마지막 과정을 해야 하는데 중국에 정착하게 되어서 미련 없이 과정을 포기했다.
김제화
'캐나다정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캐나다 영주권 1990 (0) | 2018.01.23 |
---|---|
Ham Radio Operator (0) | 2018.01.23 |
중국 선교의 Vision (0) | 2018.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