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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정착

캐나다 영주권 1990

Atlanta 캐나다 총영사관의 기쁜 소식  

새해가 되면서 드디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왔다. 그토록 목마르게 기다리던 영주권을 받으러 오라는 기쁜 편지가 미국 Atlanta 캐나다 총영사관에서 왔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해의 큰 선물을 안겨 주셨다.

 

영주권을 받으러 가는 미국 여행  2. 17 St
여러 해를 기다려 온 영주권을 받기 위해 우리 네 식구와 어머니를 모시고 목적지 미국 남부에 있는 Atlanta로 떠났다. 이번 길은 우리 가족이 미국 중부를 가로질러 내려갔다가 동부 쪽으로 올라오면서 워싱턴과 뉴욕을 거쳐 뉴욕 주 북쪽으로 해서 돌아오는 대 장정이다. 먼저 우리는 828.8Km를 달려서 Chicago에 도착하여  강태훈 형님과 사모님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며 하루를 쉬었다.

 

Chicago  2. 18 Sun 
주일 아침 우리 온 식구가 강형이 목회하시는 교회 예배에 처음으로 참예하는 기쁨을 누렸다. 교회에서 나는 마 17: 용서하는 자의 말씀을 보고 마치기 전에 용서하기를 작정한 분들은 강대상 앞으로 나아와 기도하자고 청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나아왔다. 그리고 모두 화해의 기쁜 악수들을 나누었다. 강 목사님 내외는 우리 가족을 식당으로 청하여 대접해 주시고 Sears Tower를 구경시켜 주셔서 어머니와 아이들이 좋아하셨다. 강 목사님 댁에서 쉬다가 밤 9시경 길을 재촉하여 우리는 남쪽으로 떠났다. 교회 $ 150, 강형이 $ 200을 주셨다. 밤새 달릴 작정이었지만 피곤하여 Louisville 못 미쳐 Motel에서 쉬었다.

 


Clarksville
이곳에서 한인 침례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안영배 목사에게 들렸다. 한국에서 헤어진 지 여러  해만에 이곳 미국 땅에서 만나게 되어서 반가웠다. 안 목사는 내가 거창 장팔리 교회에 있을 때 거창 시내에 전도지를 돌리며 전도를 할 때 길에서 만나서 전도한 중학교 이 학년 학생이 이렇게 목사가 되어 주님을 섬기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원래 안 목사는 장팔리 모임에서 생활하다가 군 장교로 제대 뒤에 잠시 노량진 모임에서 신앙생활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시간 때문에 하루를 머물지 못하고  밤 10시에 남쪽으로 향하여 길을 떠났다. 우리는 새벽 2:00에 드디어 목적지인 Atlanta 시내에 들어와서 Motel에서 쉬었다. 

 

Canada 영주권을 받은 날 2. 20 Tue 1990
출근 시간이 시작되자 우리는 CNN 빌딩에 있는 캐나다 총영사관에 가서 약속 시간에 이민담당 영사를 만났다. 영사님은  수염이 가득한 유태인으로서 자상하여 마음이 편했다. 가족이 캐나다에서 생활할 만하냐고 묻고는 별 다른 질문 없이 서류에 우리들의 Sign을 받고는 영주권을 내주었다. 할렐루야!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주권인가! 이제야 모든 시름을 놓게 되었다. 지난 2년 11개월 간 기다려 온 것이 아닌가! 우리 가족은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은 가벼운 마음들이었다. 우선 혁이의 대학교 학비 문제가 해결된 것만으로도 나는 안심이 되었다.


Martin Luther의 기념관
홀가분해진 마음은 밤새 이곳까지 달려온 피로감도 다 잊게 해 주었다. 나는 평소에 존경하는 인권운동 흑인 지도자인 Martin Luther의 기념관으로 가족을 데리고 갔다. 기념관을 돌아보면서 백인들은 왜 그토록 흑인들을 차별하여 고통을 주었는지 안타까웠다. 백인들은 생래로부터 우월적이고 침략적이며 인종차별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남부에서는 흑인들이 인종차별을 받고 있는 현실이 마음 아프다. 

 

 

캐나다는 복합주의 문화 정책으로 여러 민족이 함께 모여 사는 나라로 미국 같은 인종차별적인 행동은 용납이 안 된다. 정부 부서에도 인종차별에 대한 신고를 받아 처리하는 기관이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숭고한 인권 정신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었다.

 

Washington D. C. 2. 21 
Washington D. C.의 국회 의사당은 세계 대국의 웅장함을 느끼게 해 준다. 대통령이 사는 백악관은 시민들과 가까이할 수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저 멀리 의사당이 마주 바라다 보이는 자리 보좌에 앉아 있는 흰색의 링컨 좌상을 바라보면서 백인들에게 학대받는 흑인들에게 자유 얻게 하여 인간답게 살도록 해 준 위대한 그의 모습이 자랑스럽다.

 

 New York  2. 22

아침에 우리는 다시 Manhattan에 들어가서 천 형제의 사업장에 들려서 잠시 교제하고, 우리는 뉴욕을 상징하는 Empire State Building을 올라가 드넓게 퍼져 있는 뉴욕 도시를 한눈에 둘러보았다. UN본부를 차에서만 돌아보았다. 95번 HWY를 찾느라 좀 헤매다가 찾아서 뉴욕 주 북부로 올라오다가 비가 내리는 밤에 도로에서 엔진이 섰다. 지나가는 차에 손짓을 하니 어떤 차가 서서 나와 혁이를 다음 나가는 곳에 까지 태워다 주어서, 주유소에서 엔진 오일을 사서 3Km 정도 걸어와서 붓고 달리다가 또 차가 섰다. 마침 출구 부근이어서 밖에 나가 가게에서 전화로 CAA를 불렀다. 30분 후에 와서 우리를 가까운 동리에 데려다주어서 우선 쉬었다. 차가 열을 많이 받아서 인지 한참 쉬면 다시 걸리곤 했다.

아침에 가까운 Garage에 가서 엔진을 씻어내고 오일을 새로 갈고 정비를 했다. 오후 1:30에 떠났다. 우리는 90번 도로로 New York 주 북쪽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는데 어두운 밤에 눈보라가 세게 내리어서 운전이 몹시 힘들었다. 드디어 우리 가족은 미국의 긴 여행을 마치고 나이아가라 Fall의 Queenston-Lewiston-Bridge를 건너와서 캐나다 국경선 이민국에 도착하여 필요한 서류에 사인을 하므로 서 캐나다에서 긴 나그네 생활이 끝나고 정착민이 되었다. 이민관은 우리에게 앞으로 할 일들에 대해서 자세히 안내를 하여 주면서 잘 살라고 격려하여 주었다.

1990년 2월 22일 밤  9:30 어머니와 우리 가족이 캐나다 국경선을 넘으므로 써 정식 영주권자가 되었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영주권 때문에 우리가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 모두가  5,165Km의 미국 중심부로 해서 동부 워싱턴 뉴욕 그리고 뉴욕 주 북쪽으로 돌아서 캐나다로 오는 여행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일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이번 여행의 경비는 $ 1100 정도 들었다.

 

새로운 삶의 시작  3. 2 F
우리 가족은 이제 영주권자로서 OHIP(의료보험)과 Social Insurance Card(사회보장카드)도 새로 신청하면서 Canada 삶을 새로이 시작하고 있었다. 캐나다의 초여름 5월이 시작되고 있었다. 자매의 혀 밑에 있는 돌같이 딱딱한 것을 떼 내는 수술을 받았다. 자매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안 되었다. 미국을 방문 중인 독일의 엘리자벳 자매님이 토론토를 방문하고 싶다고 하여 초청하기로 하였다. 6월 5일 혁일 내외와 친정 모친이 6단계 공과를 마치는 저녁이었다.

 

Elisabeth 방문 6. 21-29 F
엘리자벳 자매님 New york에서 홍성경 자매와 함께 토론토를 찾아주셔서 대단히  반가웠다. 나는 엘리사벳 자매님과는 한국에서 만났고, 서독에서 세 차례나 한인 방문 선교여행을 하여서 인연이 깊다. 여러 해 만에 다시 토론토에서 만나니 꿈만 같았다. 우리 교회에서 교제를 나누면서 나이아가라 폭포 등으로 모시고 다니면서 즐거운 시간들을 가졌다.

 

형제들의 방문 7. 10, 16
미국 수양회에 왔던 서명수 형제와 염일부 형제가 일주일 간격으로 방문하여서 교제의 즐거움을 나누었다.

 

 SBC 교육국 프로그램  7. 28 St

SBC 교육국에서 소수민족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목회자들을 위한 6일간의 교육프로그램에 공부하러 오라는 초청장이 왔다. 모든 경비는 교육국에서 지불한다니 이 얼마나 큰 혜택인가! 토론토에서 New Mexico 주 Glorieta에 내렸다.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처음 보는 신기한 건물들이 내 눈을 끌고 있었다. 이곳은 Pueblo라고 부르는 원주민들과 여러 부족들이 살던 지역이다. 더운 열기를 피하려고 집들도 독특한 모양으로 지어졌다. 교육생들을 기다리는 버스를 타고 백두산보다도 더 높은 산을 돌고 돌아 오르는데 기후대에 따라 식물들의 종류가 달라지고 있었다. Glorieta 교육 센터에 오후에 도착했다. 해발 2700m에 자리 잡은 센터는 우선 산소가 부족한 고산 지대여서 숨이 가쁘고 머리가 띵 하는 증세가 일어난다. 이것이 산소가 부족하여 생기는 고산증이었다. 미리 안내받은 대로 걸음을 천천히 걷고 숨을 두 번 들여 마시고 한번 내 쉬는 방법으로 했다.

 

 

SBC의 거대한 교육 센터는 세계적인 것이었다. 그 거대함에 우선 놀랬고 SBC의 교육 시스템의 우수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미국에는 동쪽에 또 한 곳에 이런 교육센터가 있다. 어떤 교단도 이와같이 거대한 교육 시스템을 가진 곳은 없을 것이다. 교육 시설이 있는 그곳은 하나의 Town이라 해야겠다. 이번에 교육을 받으러 온 사람들은 1500명이 넘는다고 했다. 우리 소수민족 지도자 반은 60여 명이다. 각 분야의 전문 경험이 많은 목회자, 선교사, 교수들이 가르치니 어찌 교단이 성장하지 않겠는가! 기숙사도 Five Star hotel 수준이었다. 그리고 끼니마다 그 풍성한 음식들은 제왕의 식탁에 버금하고 있었다. 3일째가 되자 고산 적응이 되는지 호흡이 편해지고 두통증세가 사라지고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Albuquerque Town 방문 8. 1
산 아래 Albuquerque 한인 교회 목회자도 함께 하여서 그분의 인도로 우리 몇몇은 수업을 땡땡이치면서 산을 내려와서 Albuquerque Town으로 내려갔다. 인디언들 가게들을 둘러보는데 여러가지 민속 공에 품들과고추들을 팔고 있는 데 반갑고 신기한 것은 매단 고추들이 한국과 같다는 것이다.

 

 

Albuquerque에는 세계에서 제일 길다는 Cable car는 오르는 길이 험하여 한번 중계탑을 거쳐 방향을 틀어서 오른다. 백두산보다도 더 높은 정상에 오르자 Albuquerque의 끝 없는 사막이 한눈에 들어온다.

 

 

온 들과 산야에는 선인장들이 우뚝우뚝 서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8월 2일 오늘 오전으로 교육을 마쳤다. 교통비를 주는데, 날틀 표를 가진 사람을 표 대로, 차로 온 사람은 거리로 계산해서 주었다. 우리는 Albuquerque 한인 교회의 집사님이 하는 일본 식당을 하는데 우리 모두를 점심에 초대해 주셨다. 손님들 앞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면서 칼을 돌려가며 재간을 부리는데 재미있었다. 비록 우리가 초대는 받았지만 우리들이 돈을 조금씩 모아서 주었다. 새로 만난 여러 한국 목회자들과 사귀면서 한 주간 즐거운 생활을 끝내고 돌아왔다.
 

딸 은하 결혼식  10. 6 St 1990
23년간을 키운 딸이 결혼하는 날이다. 시카고에 계시는 강태훈 목사님을 주례로 청하여 내가 목회하는 교회당에서 복된 시간을 나누었다.

 

새 예배당으로 이사 12
모이는 예배당이 우리에게 좀 불편하여 새 장소를 찾아보다가 마침 Younge and Finch에 있는 Yorkview Heights Baptist Church에 가서 캐네디안 목사님을 만났는데, 나이는 나 보다 어리지만 내 학교 선배였다. 며칠 뒤 예배당 사용에 대해서 교회 직원들과 의논했는데, 모두 환영해 주었다. 이 교회도 교인들은 적어지고 교회를 운영하는데 재정적으로 힘이 드는 것 같았다. 담임 목사는 교회 재정이 어려워지자 군목이 되어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한 주에 두 번 정도 부대에 출근해서 상담과 정신교육 그리고 종교 업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로써 교회가 목회자의 생활 부담을 줄이고 있어서 바람직한 일들이었다. 건물 사용료는 다음과 같이 정했다. 91년 1월-6월까지는 $ 200, 7월-12월 까지는 $ 300, 그리고 92년도부터는  $ 400로 하기로 했다. 새해부터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1990년을 보내면서,
우리 같은 가족이 캐나다 영주권을 얻은 것은 아주 획기적인 일이라고 해야 한다. 정식으로 이민을 온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우리가 어떻게 어머니까지 한꺼번에 영주권을 얻었는지는 인간적으로는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놀라우신 축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민 온 분들도 부모를 모시고 오려면 초청장에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캐나다에서 살아보겠다고 4-5년씩 불법자로 있으면서 온갖 방법으로 노력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적법한 절차를 따라 영주권을 받게 되었으니 어찌 축하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 일이 우리로 하여금 선교지로 나아가는 발판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며 축복해 주신 한 해였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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