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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정착

중국 선교의 Vision

중국 선교 결단의 해  1992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하면서 앞으로 우리의 사역을 위해서 십이 일간의 금식 기도를 통하여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결과 내가 태어나고 6살까지 자란 동심의 세계가 있는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 선교에 대한 Vision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EU의 유럽 연합과 로마 가톨릭을 연구하기 위해서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한 해를 보냈다. 

1. 금식기도
2. EU와 로마 가톨릭 연구를 위하여 유럽 여러 나라 여행

-Belgium, France, Luxemburg, Germany-
-Berlin Pergamon Museum(버가모 바벨론 유물 박물관)
-Paris의 Montmartre(몽마르트르) 언덕


Fair Haven의 금식기도  Feb 22-March 2
나는 캐나다에 정착하여 편하게 사는 것보다는 선교지에 나가고 싶은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길이 열리지 않아서 답답한 가운데 있었다. 원래가 선교를 위하여 선교학도 공부를 하였고, IMI 선교회에 가서 선교사 훈련도 받았으며 OM Mission의 중국 선교에 대한 세미나에도 참예하였다. 문제는 내가 이 두 선교회에서 요구하는 선교 후원금을 모금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성경모임을 시작한 것이 교회로 발전은 하였으나 이민자들의 교회가 2-3년 잘 발전하여 가는 것 같더니 생각지도 않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일어나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나는 이런 목회에 은사도 없고, 주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는 복음 전하는 것이며, 교회를 개척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모여진 형제들이 교회를 좀 안정시키고 나서 내가 선교사로 나가면 자기들이 후원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나에게 보여주었지만 여러 가지 일들이 꼬이면서 그러한 마음들은 기대하기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나는 좁은 데 갇혀서 아옹다옹하고 시간을 보내며 살 것이 아니라, 선교지로 나아가기 위해서 어떤 결단이 있어야만 했다.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혼란한 내 마음도 정리하고자 주님께 간절히 의논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하여 금식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온타리오 북쪽에 있는 Fair Haven 수양 관으로 올라갔다. 나 자신도 그저 필요에 의해서 한두 끼니 정도는 금식을 해 보았어도, 여러 날을 금식한다는 것은 상상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시점에서 나의 장래에 대해서 내 마음이 너무 핍절해져서 인지 금식을 통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싶은 욕망이 세게 일어나고 있었고, 주님도 어떤 지시를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의 이런 움직임은 예수님 말씀에 따른 것이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행전 13:2-3

 

아흐레의 금식 기도 

첫날
마음을 비우는 묵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나의 죄와 허물 자백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둘째 셋째 날
새벽 6시까지 기도와 말씀을 보고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낯 12시였다. 흰 눈이 뒤 덮인 세상은 세찬 바람만이 휘몰아가고 있었다. 그동안 마음에 담고 있던 모든 것을 토해내고 빈 마음을 가지려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말씀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기대하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고 있었다.

 

넷째 날

주일 밤 기도 집회 때문에 내려가서 모임을 마치고 7시경 집에 잠시 들렀는데, 먹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다섯째 날  유혹의 사과
밤새 기도와 말씀을 보고 새벽에 잠이 들었다가 깨니 오후 한 시였다. 모세 오경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을 복에 대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책상 설 합을 여니 여름에 왔던 누군가가 두고 간 쪼글쪼글하게 마른 사과 하나가 있었다. 먹고 싶은 욕망이 가득한 나에게는 큰 유혹의 대상이었다. 마치 내 금식을 깨기라도 할 것 같이 나의 식욕을 돋우고 있었다. 그 사과를 두고 먹고 싶은 유혹과 참으려는 투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여섯째 날
신명기에서 무엇을 행해야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지를 많이 배웠다. 그리고 교회가 문제가 생기는 것은 내게 사랑이 없었고, 더 낮은 자세로 섬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밤 7-8시에는 배고픔이 몹시 몰려왔다.

 

일곱째 날
허기와 약간의 어지러움이 일어났다. 나는 참고 견디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한밤 깊이 묵상기도를 하는 동안, 내 영혼에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들판이 내 머리에 스크린 같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벌판은 내가 어린 시절 뛰어다니던 목단 강변의 들과 산하(山河)라고 느껴지면서 나의 가야 하는 길이 보다 분명해지고 있었다. 내가 구원받은 다음에 가지던 선교의 꿈을 내 동심의 고향에 두고 있었는데, 이제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었다. 이로써 내가 중국으로 가고자 하는 내 평생의 뜻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토론토에서 목회를 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평생에 품어오던 중국 선교의 때가 이제 오고 있다는 시대적 사명감에 눈을 뜨게 되었다.  우리의 젊음을 경기도 평택의 진위면 사후동, 유평 그리고 율북리(수부), 나아가서 사천진리와 강릉에서 바쳤듯이, 이제 아직도 남아 있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 부분을 중국에서 송두리 채 주님께 바쳐야 된다는 사명감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드레와 아홉째 날
나는 자신의 부족이 무엇인지를 많이 자숙하게 되었다. 오늘로 구일 동안의 금식이 끝나가고 있었다. 날짜를 정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바라는 마음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내 생애에 있어서 처음 가져 보는 가장 긴 금식이었고 자신을 깊이 돌아볼 수 있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었다. 나는 중국을 향한 평안하고 확신에 찬 마음으로 짐을 싸고 나오면서 며칠 나를 그렇게도 유혹하던 쪼글쪼글해진 사과를 들고 차에 탔다. 운전을 하면서 유혹의 사과를 이겨보려고 한 입 깨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썩은 것이었다. 유혹은 언제나 달콤한 것이 아니라 쓴 것이었다.

 

주희의 감염(infection)  May. 28  Sun.1992
낯 예배가 시작되자마자 주희가 갑자기 오한(chills) 같은 이상한 현상을 일으켜서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 예배가 끝나고 오후에 병원에 가보니, 피에 균이 침입했다는 것이다, 어린것이 옷을 다 벗고 링거 주사를 달고 있었다. 처음에는 몸의 열을 내리기 위해서 얼음으로 찜질을 했다고 한다. 큰일 날 뻔했다. 어린 아기가 고생을 하고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주님께서 은혜 주시도록 함께 기도하였다. 며칠 뒤 주희가 많이 좋아졌다. 그리고 여러 날 입원하는 동안 병원에서 귀염둥이로 모두에게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EU와 로마 가톨릭 연구를 위한 유럽 여행  July. 12-23 1992
나는 유럽의 EU와 천주교의 연구를 위하여 먼저 Belgium, Luxembourg, Strasbourg(프랑스), Berlin 그리고 Paris로 여행을 하려고 떠났다. 먼저 Toronto에서 파리 경유하여 Belgium의 서울 Brussels(브뤼셀)에 내렸다.  

♣ 내용은 유럽여행기에서

 

무너진 베를린 장벽   Jul 17 Fri 1992

Brussels에서 볼 일을 다 보내고 조그마한 날틀로 독일 Berlin에 내렸다.  베를린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이 형제가 반가이 맞아 주었다. 형제 집에서 잠시 쉬고 나서. 나는 동서독을 나누어 놓았던 무너진 베를린 장벽을 보고 싶어서 나갔다. 1979-1980년 사이에 네 번이나 베를린을 올 때마다 찾아보던 높은 장벽 그리고 자유를 찾아 담벼락을 넘다가 숨져간 생명들을 위로하던 꽃 무더기들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하였었는데, 이제 그 장벽은 무너지고 사라졌다. 동서로 나누어져 있던 베를린은 이제 하나가 되었고, 독일이 통일이 되었다. 남북 분단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통일이 우리의 통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들어가는 검문소와 장벽

                                                       

성 개방의 나라 Jul 18 Sat
오후에 모이는 한인교회에서 설교하고  나자 교회가 공원에서 BBQ Picnic을 한다고 하여 함께 갔다. 전에 이곳에 여러 번 주님을 섬기러 온 적이 있어서 아는 얼굴들이 제법 있었다. 모두와 교제하는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하는 일들이 공원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그것은 벌거벗은 남녀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는데, 성 개방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12살 정도 또래 남녀 아이들이 벌거벗고 뛰어다니는 모습은 보기에 그랬다.

1980년에 내가 여러 번 여기에 왔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은 없었다. 그사이에 독일만이 아니라 유럽의 성문화가 놀랍게 변해버렸다. 사회의 성범죄를 줄이기 위한 교육의 한 방법으로 어려서부터 성을 개방하여 서로의 성에 대해서 심리적으로 둔감해지게 하며 서로의 육체에 대하여 보다 자연스럽게 여기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유럽이 거의 다 그렇듯이 독일도  성 문화를 완전히 개방하여 보는 바와 같이 남녀 아이들이 벌거벗은 채 돌아다니는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 독일 TV 쇼에 나온 한 가정의 실화

아들딸을 가진 독일의 한 가정은 일단 밖에서 돌아오면, 집안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모두 옷을 벗고 알몸으로 지낸다고 한다. 이 가정이 TV쇼에 나왔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묻자, 부모는 이렇게 하면 아이들이 크면서 성에 대해서 자연스러운 감정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더란다. 가리고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정말 낯선 동화와 같은 이야기 일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남녀가 서로 어울리고 알면서 크면 호기심이나 신비감이 해소되어서 좀 더 자연스러운 감정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유럽의 기독교 퇴락은 물질만능주의와 무신론 그리고 성개방도 한몫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등) 그리고 독일은 보통 16세에 성관계가 시작되고 있다. 독일은 17세에 부모들이 자녀들의 성관계를 허용하는 편이며, 부모는 아이만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래서 법적으로 여자가 17살에는 부모와 함께 피임약을 타러 갈 수 있고, 18세부터는 혼자서 피임약을 타러 갈 수 있다.  그러나 전 국민 가정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닐 것이고, 보편적인 사회현상일 것이다. 그래서 호텔 휴게소 공중화장실은 물론이고 심지어 고등학교 화장실에도 피임기구 판매기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베를린 한인교회

한인교회 예배 시간이 오후 4:00이어서 나는 시간을 아끼려고  Egypt관에 가서 원하는 여러 가지 자료들을 Slide에 담았다. 나에게 설교시간 모두를 주어서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과 함께 천주교의 그릇됨을 나누었다. 끝나고 교제 시간에 대체로 처음 천주교에 대해서 자세히 듣게 되어서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들 하였다, 유학생으로 와 있는 조카 부부와 함께 시내에 나가서 Buffet 식당에서 저녁을 하고 헤어졌다.  

독일에 오랜만에 온 김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본거지인 비텐베르크를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이 형제와 의논하였고, 같이 안 되면 혼자서라도 가보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녁에 독일 형제와 결혼한 강자매 부부가 자기네 Van으로 자기 아이들과 우리를 데리고 Wittenberg으로 가고 싶다는 의논을 해왔다. 남편과 함께 월요일에 시간을 냈다고 한다. 자매가 주일 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동했나 보다. Wittenberg이 남의 나라도 아니고 제나라에 있고, 그렇게 귀한 역사가 일어난 곳이 지척인데도 자기들은 무관심하게 살았다고 하면서 이번 기회에 함께 가보고 싶다고 하였다. 주님께서 나의 길을 선히 인도하여 주시고 계셔서 무척 반가웠다. 독일 종교개혁의 성지  Wittenberg 여행은 성지 순례편에 따로 올려놓았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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