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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선교 학교와 여행

영국으로 떠나든 날

2) 영국으로 떠나든 날  1979 2. 6 화

   오늘은 내가 몇 해를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마음으로 살아오든 일들이 현실이 되는 날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은 나에게는 맞는 말이었다. 아침 자매가 내 머리를 깎고 드라이를 정성껏 해 주었다. 아내의 친절이 얼마나 고마운지 주님께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박상호 처남이 차를 가지고 와서 편하게 김포공항으로 데려다 주었다. 30여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이 이 부족한 사람을 보내주기 위하여 나와 주었다. 17:30분에 떠나야할 날틀이 한 시간 오십분이나 늦게 19:00에 떠나는 바람에 모두를 기다리게 해서 미안했다. 떠나는 나를 위해서 잠시 모임이 있었다. 제임스 선교사님이 말씀을 보시고 김종만 형제가 기도했다. 이수원형제가 20불을 손에 쥐어주었다. 가족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준비를 하지 않은 채 내 갈 길만 좇아가는 사람, 현실이야 어찌되었던 그저 이상만 바라보고 나아가고 있었다. 뜨거운 형제자매들의 사랑의 보냄을 받으며 나아가는 뒤에서 송찬호 형은 나를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돈키호테"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처음 타 보는 날틀, 큰 CPA 날틀에 오르면서 나는 힘주어 트랩의 손잡이를 쥐면서 이제 가는 거야! 한번 해 보는 거야! 하면서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자리에 앉아서 주님께 알지 못하는 앞으로의 일들을 위하여 간절히 의논 드렸다.


흰 눈이 덮인 활주로를 따라 날틀은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의 불빛은 멀어져 가면서 나는 이제 알지 못하는 세계로 향하여 날아가고 있었다. 한국, 일본, 중국, 홍콩(켄톤), 영어 5개 국어로 안내를 하고 있었다. 어느 듯 비행기는 제주도 상공을 벗어나고 있었고 고도 9400m, 880Km의 속도로 날고 있었다. 경도를 지나는 지점에서 대만 시간을 알려 주었다. 우리 보다 한 시간 늦게 가고 있어서 시계를 맞추었다. 시장하든 차에 닭고기로 된 식사가 나와서 맛있게 잘 먹었다. 화장실에 가니 시설이 너무 좋고 Skin Lotion도 있고 잘 갖추어 있었다. 이렇게 멋있는 여행을 함께 하지 못하는 나의 아내 그리고 사역자 형제들 생각이 났다. 두 시간 정도 날아 불빛이 휘황찬란한 타이베이 공항에 내렸다. 공항 휴게실에서 40분간 휴식하는 동안 아름다운 중국의 도자기류들을 보면서 중국의 문화를 느껴 보았다. 중동으로 일하러가는 한국 분들이 있어서 휴게실에서 말을 걸어 보니 모두 경계하는 눈치여서 너도 나도 같은 한국 사람끼리 어색하기만 했다. 모두 반공교육을 너무 잘 받아서 혹 북한 쪽 사람인가 해서 경계하는 것 같았다. 다시 날틀에 오르니 홍콩으로 가는 사람들이 빈자리를 가득이 메웠다. 날틀은 22:20 다시 어두움의 장막을 뚫고 서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대만서 탄 사람들을 위해 또 식사가 나온다. 나는 사양했다. 한 시간 후 홍콩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늦게 떠나는 바람에 늦게 도착하니 현지 시간은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내가 타야할 버스 등은 끊어진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개인택시로 YMCA Hotel 로 가자고 했더니 Koo Loong 북쪽에 있는 데로 데려다 주었다. Taxi 요금은 미화 $ 2불이었다. 호텔 앞은 아주 어두웠다. 나중에 보니 U$ 2불울 준다는 것이 어두운데서 지갑에서 돈을 꺼내다 보니 함께 넣어 두었던 £ 2를 주어서 손해가 많이 났다. 처음 해외여행에 서툰 영어에 낯선 모든 것 때문에 몹시 긴장해서 인지 몸과 마음이 몹시 피곤했다. 홍콩에서의 첫 밤을 맞이했다.

 

Hong Kong

내가 홍콩을 찾았을 때는 아직 영국 식민지였다. 중국 사람들이 사는 섬에 영국 국기가 휘날리는 것을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홍콩은 중국에게는 굴욕과 수치의 상징이며, 영국에게는 침략제국주의의 산물이다. 아름다운 섬 홍콩이 왜 이 꼴이 되었는지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19세기는 유럽 제국이 팽창주의에 미쳐 날뛰던(狂奔) 때이다. 침략제국주의(imperialism) 영국은 고요하게 살고 있던 인도를 식민지화한 뒤로 중국을 넘겨보고 있었다. 처음 영국은 중국과 정상적인 무역거래를 하다가 심각한 국내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하여 중국의 밀수업자와 손을 잡고 인도(지금 Bangladesh)에서 생산된 아편을 중국에 무제한 밀수출 하므로 서, 중국 사람들이 점차 아편중독자가 되면서 국가적으로 문제가 심각해지자, 1839년 3월 황제 도광제는 “아편 엄금 론”을 주장한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특사)으로 광동 성에 보내 밀수 아편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임칙서는 밀수업자 괴수를 사형시키고, 쌓여있는 영국의 아편 20,000상자를 불태워 버렸다. 이 때 임칙서는 영국 여왕에게, “하나님을 믿는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독물을 사용해 중국 사람들을 해칠 수 있느냐”고 묻는 편지를 보냈는데, 보내 온 답은 “아편의 해악은 술보다 적습니다.”였다. 큰 피해를 본 영국 자본가들은 영국정부와 의회를  압박하여 참전하게 된다. 1939년 10월 영국은 함대와 원정군을 보내서 청 ·영 아편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전쟁을 아편전쟁(呀片战争, Opium War)이라 한다. 2년에 걸친 전쟁은 청나라는 현대화된 영국군에게 크게 지게(大敗) 된다. 이로 인하여 영국의 일방적인 요구에 따라 난징불평등조약(南京條約, 1841)을 맺게 되므로 중원의 강자는 자존심을 구기고 수치를 당하게 된다. 엄청난 전쟁배상금은 물론이고  전리품으로 홍콩을 99년 간 영국에 양도하기로 한다.(1860-1997)

(※ 香港回国(홍콩이 돌아 옴)-1997년 7월 1일 밤 0시에 13억의 중국 인민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홍콩은 137년간의 영국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중화의 품에 다시 안기게 되었다.)

 

Hong Kong의 하루  2. 7 수

피곤했음에도 잠을 깊이 잘 수가 없었다. 통행금지가 없는 여기는 밤새 차 소리에 잠을 설쳤다. 접수처에 내려가 시내 지도 하나를 얻고 시가지 안내를 받은 다음 홍콩 시내관광을 떠났다. 항구가 있는 쪽으로 걸어서 내려가니 온 거리가 Shopping Mall들이다. 소형카메라와 공부에 필요하리라 생각되어 소형녹음기 하나를 샀다. 바다 건너편에 있는 홍콩 섬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줄에 섰다. 내 차례가 되자 노란동전 두 개를 넣고 한사람씩 통과하는데 내 차례가 되어 동전 두 개를 넣었는데 꺾쇠가 안 돌아간다. 문제는 내가 동전을 넣을 때는 관리인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넣으란다. 다시 넣으니까 꺾인다. 말도 못하고 이 얼마나 억울한가! 영국이 아편 전쟁으로 빼앗은 이 불모의 섬을 이렇게 거대한 국제 경제 중심지로 만들었을 줄이야! 섬은 대단히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한국서 일월이라 내복에 겨울옷을 입고 와서 옷을 갈아입지 않고 나왔더니 얼마나 더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다리가 아프리만치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아름답게 핀 열대의 꽃들을 처음 보는 이 나그네에게는 신기롭기만 했다. 저녁에는 비행기를 타야하므로 서둘러 호텔로 돌아와 항공사에 연락을 했더니, 왜 이제야 연락을 하느냐고 하면서 대단히 반가워했다. 하루 이기는 했지만 즐거운 홍콩 나들이였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공항에 와서 내가 나가야할 곳을 찾아서 Check in 하는데 Service 요금이 HK $15, 화물 초과 요금이 HK $140 냈다. 없는 돈에 자꾸 없어지니 마음도 허전해 졌다.


내 짐이 X-Ray를 지날 때 이민국 여직원이 나 보고 do you have a Calculator? 라고 묻는다. 내가 잘 못 알아들으니까, 2-3번 더 물어도 알아듣지 못하니까 그대로 통과되었다. Calculator가 무슨 뜻인지 휴게실에서 사전을 꺼내 찾아보니 전자계산기가 아닌가! 그때는 우리가 아직 전자계산기가 일반화 되어있지 않을 때였고, 아직 수판이 판치는 시대라 나에게는 익숙한 단어가 아니었다. 이런 정도의 단어도 모르면서 공부를 하러 간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가! 아무 준비 없이 중국인들 사회에 갑자기 뛰어들어 이틀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불편했는지 모른다. 외국 나들이의 첫 번째 경험은 영어를 쓰는 홍콩 중국인들이었다. 그래도 내 서툰 영어라도 어디든지 통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홍콩시간 18:20 영국 날틀에 올랐다. 그리고 날틀은 굉음과 함께 솟아올랐다. 아직 해 빛이 환한 저녁이라 홍콩 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날틀은 나를 싣고 펼쳐질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남서쪽으로 날고 있었다. 20:30 방콕에서 기름을 넣기 위해서 잠시 내렸다. 기내에서 기다리는 동안 아가씨들이 올라와서 청소를 해 주었다. 손님들은 대부분 홍콩 중국 사람들로 관광 팀도 끼어 있었다. 다시 떠나서 아름다운 방콕의 야경이 잠시 보이더니 곧 어둠에 묻히고 말았다. 마침 내 옆자리가 두 자리나 비어서 나는 누워서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큰 축복인가! 어둠 속을 얼마를 날아 왔을까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United Arab Emirates의 수도 Shajah

2월 8 목요일 오전 3: 35분에 공항에 내렸다. 50분간 휴식을 위해서 모두 휴게소로 나갔다. 마침 그날 밤 공항 당직 장교인 고나리인 중위와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허락으로 보세구역에서 사진을 한 장 찍을 수가 있었다. 카메라 불이 번쩍 터지자 일하던 군인들이 놀라서 돌아본다. 나도 좀 당황했다. 그러자 중위가 손짓을 한번 하니까 그대로 자기 일들을 하고 있었다. 검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커다란 카세트를 들고 또 카메라를 메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돈을 벌어 가지고 돌아가는 노무자들이었다. 이번에 길을 가면서 중국 사람들, 그리고 처음 아랍 사람들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좋은 경험을 얻으면서 나의 세계관이 좀 넓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시 날틀은 서북쪽으로 날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무장에게 항로를 물으니. 홍콩-다낭-방콕서 주유-아랍에미리트에서 주유와 휴식-쿠웨이트-이락-이스탄불-서독-영국으로 날게 된다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고, 지금은 독일 상공을 지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비행기 뒤편 지평선에서는 훤히 밝아 오는 선에 엷은 붉은 색깔이 함께 드리워져 있고, 가는 쪽인 서쪽은 짙은 어둠만이 있었다. 이제 곧 도착할 텐데 공항에서 Victoria까지 그리고 목적지 New Milton까지를 찾아 가야하는 일로 벌써부터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한 세기의 식민침략 제국주의 나라 영국의 수도 런던 상공에는 이른 새벽에 도착했다. 노란불빛들이 졸고 있는 런던 시내 상공을 지나는데 먼동이 터 오기 시작한다.

 

 영국 도착

현지시간 2월 8일 목요일  오전 7시경 영국 Gatwick 국제공항에 날틀은 안전하게 내렸다. 공항에서 나와 기차시간표, 런던 시내 안내서와 지도, 등을 챙겨가지고 Victoria역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내가 무거운 가방을 가지고 들어가려니까, 열차 장이 짐을 싣는 칸을 가리켜 주었다. 사람들은 짐칸에다가 짐을 실어 놓고는 편하게 자리에 앉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서 온 나는 그 짐이 안전한지 궁금하여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에 몇 번이고 가 보았다. 자리에서 짐칸은 두 칸이나 떨어져 있었다. 짐칸에는 자전 차도 실려 있었는데 가다가 내려서 또 타고 갈수 있어서 편리한 것 같았다. 열차는 한국 것보다는 조금 좁고 낮고 의자는 두 사람씩만 앉게 만들어져 있었다. 공항에서 가져온 지도와 시간표를 보면서 Victoria - Waterloo - New Milton 가는 열차와 시간을 알아 놓았다. Victoria station에 내리니 platform이 얼마나 긴지 모르겠다. 바퀴 달린 무거운 가방을 굴리며가니 그 소리가 시끄러워서 사람들이 다 쳐다보곤 했다. 역밖에 거의 나오다 보니 여기 역에는 공항같이 짐을 싣는 Cart가 있지 않은가, 모르고 이렇게 힘들게 끌고 오다니, 촌사람이 뭘 알아야지. 출근시간이 되어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밖에 나오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정신이 없다. 여기저기 버스를 타려고 늘어선 사람들의 줄, 나는 어느 줄에 서야하는지 몰랐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길게 늘어선 줄 맨 뒤에 선 할머니에게 Waterloo역을 어떻게 가느냐? 고 물었더니 버스도 있고 지하철도 있다고 한다. subway는 저기 Circle에 가란다. 영어와 영국의 습관에 대해서 서툰 나는 Circle 이란 단어의 뜻이 둥근 원이란 뜻인데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Circle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하얀 색 둥근 판에 파란 색으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그 안에 붉은 색으로 Circle이라고 쓰여 있었다. 돌아가는 교차로 Rotary를 여기는 Circle로 쓰고 있었다. 저기로 내려가면 지하철이 있다고 알아들어서 길을 건너 계단을 내려가니 지하철 안내 실이 보인다. 나는 가서 이것저것을 물어보니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지하철 요금도 알려 주었다. 25 Pence 로 표를 사서 내려가 한 청년에게 Waterloo를 물으니 가다가 알려 주겠다고 하여 고마웠다. 그 청년은 가다가 내려서 나를 Waterloo 가는 지하철까지 데려다 주어서 너무 친절하고 고마운 친구였다. 이것이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받아본 첫 번째 영국 사람의 친절이었다.

                                         

 여기 지하철은 4층으로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는데, 우리 한국이 얼마나 뒤 떨어져 있는지 충격을 받았다.  Waterloo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로 두 번이나 갈아타고 올라오니 Waterloo 역은 넓고 컸다. 여기가 New Milton 가는 기차를 타는 곳이다. 몇 시간의 긴장이 풀리고 다 온 것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표를 사서 10번 개찰구에 늘어선 줄에 섰다. 나는 앞사람에게 차에서 먹을 것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살수는 있지만 여기서 사먹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 가방을 좀 봐 달라고 부탁하고 저 만큼에 있는 cafe에 가서 sandwich 하나와 콜라를 사서 먹으면서도 못 미더워 가방을 바라보면서 먹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들이 열차를 타기 위하여 나아간다. 나는 Dr. Hudson의 말대로 앞에서 네 번째까지의 객차에 타라고 해서 사람이 덜 타는 한산한 칸에 올라 웃옷을 벗어 걸어놓고 땀을 시키며, 안도감과 함께 지난 며칠 사이에 얼마나 바쁘고 피곤하고 긴장했는지 피로가 몰려오고 있었다. 열차 차장이 짐을 짐칸에 갔다가 놓으라고 해서 괜찮다고 했더니 그러면 문밖에 내 놓으란다. 여기는 큰 짐은 안에 들여놓지 못 하게 하고 있었다. 도둑이 많은 사회에서 살던 나는 영국 사람들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천천히 영국 사회와 문화에 적응해 나아가는 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달리는 차창으로 런던 시내의 전경과 지나는 도시와 농촌의 집들은 주로 붉은 벽돌로 된 이층 주택들로 지붕에 두 개의 굴뚝들이 나와 있는 것이 우리와 다른 모양과 색깔이다. 초록색 자연과 붉은 벽돌이 어우러지고 있는 색깔 문화가 나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오래전부터 이런 전원주택 같은 생활을 해 온 것을 보니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영국은 잘 사는 나라였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넓은 들에는 푸른 잔디로 입혀져 있고 곳곳마다 푸른 축구장이 보여서 감탄했다. 차창에 스치는 영국의 자연 풍치는 낯선 나그네에겐 새롭고 신기한 그리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해 주었다. 벌써 여러 역을 지났지만 타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이 큰 칸에 사람도 몇 명이 없는데 굳이 가방을 밖에다가 내 놓으라고 하는지 열차 장이 이해가 안 되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대게 열차 칸 입구에는 가방을 넣는 조그마한 칸이 있기도 하지만 이 열차는 짐칸이 따로 있었다. 한 시간 사십 여분 달려서 한 역에 서니 부인이 내린다. 여기가 New Milton역이냐고 물으니 다음 역이라고 한다. 아 - 이제야 다 왔구나 하고 마음에 내릴 준비를 하였다. 한 20여분 가서 조그마한 마을이 보이는 역에서 열차가 섰다. 여기가 바로 앞으로 내가 한 동안 살아야할 New Milton이었다.

 

                                                                                Chelston Bible College

역에서 택시를 타고 잠시, 큰 3층 붉은 벽돌 건물 벽에 Chelston Bible College 라고 써 붙어 있었다. 여기까지 오려고 그동안 그토록 몸부림을 친 것이다. 초인종을 누르니 교장 Dr. Hudson과 사모님 여러 학생들이 나와서 환영해 주었다, 반갑게 함께 인사를 나누고 정해준 이층 기숙사 방에 짐을 풀고 한숨 돌리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식당에서 학생들과 이야기하면서 사귀기 시작했다. 마침 1월 Term Break(학기 중간 방학)이라 2주간 휴가로 대부분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Holland, Germany, 등 멀리서 온 학생들만 남아 있었다. 다음 주 화요일에 개강을 한단다. 교장에게 제임스 형님이 보낸 병풍 달력과 내가 벽걸이를 드렸더니 반가워했다. 체재 비자를 위해서는 자기가 편지를 써 줄 테니까 가지고 이민국에 가면 된다고 했다. 이민국은 런던으로 가서 또 한참 가야하는 먼 곳에 있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잠시 Holland에서 온 두 간호사 자매와 이야기를 나누고 너무 피곤해서 2:30에 침대에 들었다가 밤 10:30에야 잠이 깨었다. 정말 길고 긴 하루였다.

 

학교 생활시작 2. 9 Friday.

영국에 온지 이틀째. 8시 식당에 내려가서 함께 식사하였다. 모든 환경은 새로운 것이었다. 하나하나 눈치 빠르게 적응해 나가야만 했다. Dr. Hudson은 휴일 기간 동안 런던에서 의사를 하고 있는 아들 집을 다녀온다고 가는 길에 나를 런던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걸 나는 너무 피곤하여 월요일 나 혼자 갔다 오겠다고 하였다. 이 학교는 일 년을 세 학기로 하여 매 학기 마다 2주 정도씩 Term Break(방학)이 있었다. 오전은 Holland에서 온 간호사인 Thea 와 Ducky 자매들과 교제하면서 학교생활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후에는 공부에 필요한 문구류를 사고 서독, 화란 자매들이 그동안 공부한 노트들을 빌려 보면서 베끼려고 하는데 그들이 쓴 영어 필기체를 알아보기에 너무 어려워 신경이 너무 피로했다. 독일어를 쓰는 자매들의 글씨가 영어 같지 않았고, 한 자매는 왼손잡이 글이라 30, 60도로 놓고 보아도 잘 모르겠어서 걷어치웠다.

 

저녁을 먹은 뒤 자매들이 바다가로 산책을 가자고 하여 따라나섰다. 대서양이 보이는 바다가는 언덕 비탈 저 아래에 있었다.  여기 바다가는 Cliff(벼랑, 낭떠러지)으로 되어 있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특수한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물과 뭍이 맞닿는 곳은 모래가 아니라 자갈밭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모래가 귀한 것 같았다. 나는 Cliff을 내려가서 대서양 바다 물에 손을 씻으면서 내가 여기 땅 끝까지 왔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한 없이 넓은 대서양은 며칠 긴장했던 마음의 피로를 다 앗아 가는 것 같았다. 대서양 수평선으로 넘어가는 해님은 나에게 두고 온 가족을 떠오르게 해 주었다

저녁에는 Rev. Rose 선생님이 오셔서 함께 저녁 경건의 시간을 가졌다. 이 분은 원래 침례교 목사님이신데 은퇴하고 여기에 정착하러 오셔서 이 학교에서 가르치면서 형제교회에서 함께 하고 계셨다. 부인은 간호사로서 이 후에 나에게 참 잘해주셨던 분들이다. 이 분은 여기서 우편배달부를 하고 계시는데, 현역 목회를 할 때부터 Part time 배달부를 하셔서 신문에도  만큼 유명해진 분이시라고 했다.

 

첫 주일 2. 10 Sunday

영국에서 맞이하는 첫 주일이었다. 교장이 장로로 계시는 Gore Road church에 Rose 선생님부부와 함께 갔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멀리 Korea에서 온 김 형제를 환영한다고 소개하고 나의 천거 서를 한 장로님이 읽으셨고, 모두 발수로 나를 환영하여 주었다. 식구들은 100여명이 넘었다. 거의 다 노인들의 모임으로 30대는 나를 포함하여 20여명이 될 것 같았다. 성찬예배 때 놀란 것은 전자 오르간을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 한국에서 악기를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다가 온 나에게는 아주 반가운 일이었다. 떡을 나눌 때에는(배찬) 한 분의 형제가 수건을 들고 컵이 가는 데로 따라 가면서 가끔 컵을 닦아주곤 했다. 그리고 헌금은 헌금위원들이 잠자리 채 같은 헌금대를 가지고 거두러 다니는 낡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여기서는 오래된 전통). 자매들이 모자들을 거의 쓰고 있어서 수건만 쓰는 것을 보다가 온 나에게는 처음에는 별나게 보였다. 찬송을 부를 때에는 모두 일어나는 것이 영국의 습관이었다. 한 노인이 몸이 불편한지 이번엔 앉아서 부르자고 하여 모두 그렇게 했다. 처음 영국교회를 경험하였다. (집회 전에 장로들이 미리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몇 주 뒤 나도 이 장로들 기도회에 참가시켰는데 영어로 기도하는 것이 힘들고 학생이라 할 일 많아서 장로들의 기도회에는 가지 않았다.) .

 

NIV 성경

오후에 Bournmouth에 간 Thea와 Ducky가 보급 판 NIV성경을 나를 위하여 사왔다. 실은 내가 영어성경이 꼭 필요한데, Rose선생님이 그들에게 부탁하여 기념으로 사 주시면서 Sign해 주셔서 고마웠다. 아무에게도 나의 필요를 말하지 않았는데 주님께서 나의 필요를 아시고 이렇게 축복해 주셨다. 영국에 온지 삼일 만에 처음 주님의 축복을 경험한 것이다. 학기 시작하기 전에 런던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가서 기간 연장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내일 아침 런던 가는 기차 시간을 묻고 의논했다. 내일 아침 일찍 차를 타야하기 때문에 열차에서 먹을 Sandwich를 Rose 자매가 싸주어서 고마웠다. 오자마자 낯설지 않게 예쁜 서양 자매들과 사귀며 그들의 돌봄을 받으니 모두 가족 같이 느껴졌다. 어디든지 친절하고 고마운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서독서 온 키가 작은 Brouni자매가 내일 자기도 런던으로 가는데 런던에서 만나 같이 내려오자고 하면서 Abbey Language School 주소를 나에게 주었다. 처음 가는 런던에 내일 길 안내자가 있게 되다니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여기 온지 5일째인데 아직 해를 보지 못했다. 종일 진눈 개비가 내리거나 흐린 날이어서 해가 그리워진다. New Milton에서7:13분 기차를 타고 Waterloo에서 내려서 지하철로 South Kingston을 경유하여 4 Place라는 주소를 찾아가니 한국 국기가 보여서 반가웠다. 가난한 나라들의 대사관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한국 여성이 접수를 받고 있었다. 년 말까지 기한 연장을 하고 함께 서독, 이태리, 방문하는 신청도 하고 수수료로 £3.60을 내었다. St. Wood에 가서 서독 여학생 Brouni를 만나러 가는데 어떤 금발의 아가씨가 나보고 Chelston에서 오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 런던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나는 은근히 놀랬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도착하든 날 휴가를 떠나면서 문에서 나를 잠간만나 인사하고 떠난 Susan이란 자매였다. Susan 자매도 Brouni 자매를 만나러 가는 길인데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면서 해 맑게 웃고 있었다. 나도 지금 지도를 보면서 어리어리하게 길을 찾아가는 중인데 주님께서 길 안내자를 만나게 해주시니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Abbey Language School

Abbey Language School에 가니 Brouni 자매가 우리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이 영어 학교는 Proni 침례교회에서 운영하는 국제적으로 이름 있는 영어 학교였다. 이곳은 외국인들에게 영어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교로서 수준이 높은 학교였다 영어를 배우는 여러 한국 사람들도 만나보았다. 나도 여기서 영어를 좀 철저히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만 형편이 안 되니 어떻게 하랴. 우리 셋은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사먹었다. 학교를 나와서 우리 셋은 빨간색의 이층 버스도 타보면서 거리 여행을 하였다. 자매들이 세계에서 유명하다는 몇 개의 큰 백화점들을 돌아보면서 사치와 부유하게 사는 영국의 모습을 느껴 볼 수가 있었다. 오후 내내 다니다 보니 해가 졌다. 자매들이 저녁을 사먹자고 하여 불빛이 휘황찬란한 거리 식당에 가니 문에 음식 값이 적혀 있어서 자매들이 무엇을 먹을 것인지를 연구하고 있었다. 몇 집을 지나 한 곳에서 여기서 먹자고 하여 들어갔다. 자매들이 Noodle을 시키기에 나도 시켰다. 값이 70 Pence에 세금, 그리고 Tip해서 £1를 내니 돈이 아까웠다. 무슨 70전 짜리 국수 먹는데도 세금과 tip을 내야하는지 기가 찼다. 그 당시 한국에서 이런 제도와 습관을 모르고 살던 나에게는 어리둥절하고 불만스러운 일이었다. 셋이 즐기며 다녀도 각각 자기 것은 자기가 내는(Dutch pay) 생활이 기본이라 한국 같이 눈치 보는 일이 없어서 편하고 좋은 문화였다. 돌아오는 길은 열차가 New Milton까지 가는 것이 없어서 가까이까지 오는 기차를 타고 와서 내렸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가면된다고 하면서 저기 Bar에 가서 음료수를 한잔 마시자고 하여 들어갔다. Bar라는 곳은 각종 음료수와 술을 파는 곳이었다. 자매들이 Snowball이라는 것을 시키기에 나도 그냥 시켰다. 사실 나는 돈이 아까워서 안 먹고 싶었지만 분위기 상, 또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마셔보았다. Snowball은 크림이 타진 탄산음료수로서 처음 마셔 보는 것인데 맛이 괜찮았다. 버스를 타고 학교에 돌아오니 밤 10 시가 되었다. 긴 하루였지만 즐거운 런던 나들이를 제대로 잘 한 하루였다. 음료수 한잔도 못 사준 두 자매들에게 미안했고 고마운 마음이었다.

 

영국이란 나라 

 

 

영국이라는 나라는 복잡한 역사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연합국이다.  한국에서 부르는 영국英國)이라고 부르는 정식 이름은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이며, 줄여서 짧게 Britain, 또는 약자로 U. K. 라고 한다.   영국은 작은 네 영주국, England(London), Wales(Cardiff), Scotland(Edinburgh), Northern Ireland(Belfast) 들이 모여서 연합왕국을 이루었고 각기 자치권을 가지고 있으며, 연합국의 수도는 London으로 정하고 있다.

 

두번째 half term(반 학기)   2. 13 Tuesday

내가 지난 9월에 시작하는 학기가 반이 지나 와서 봄 학기인 두 번째 학기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어제 저녁으로  모두 돌아와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오늘 두 번째 Term(학기)을 시작하는 첫 날이다. 학교생활은 요리사가 있고 학생들은 조를 짜서 설거지와 식탁을 차리고 정리하는 일을 하고, 아침 식사 뒤에는 식당 당번들은 부엌에서 그릇들을 씻어서 자동 건조기에 넣었다가 꺼내서 마른 걸레 질을 한다. 다른 학생들은 안에서는 청소하는 일, 밖에서는 정원 가꾸는 일들을 정해진 것이 아니라 각각 알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었다. 나는 정원과 장미와 화초 돌보는 일을 했다. 이 학교는 선교사 훈련을 전문으로 하는 곳으로 학생은 많지 않아도 여러 나라에서 와서 가족같이 함께 살면서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나누면서 선교사로서의 자질을 키우고 있었다.

 

오늘 첫 수업에는 교장 Dr. Hudson의 Christian Doctrine과 Pastoral Theology 강의를 들었다. 강의 개요안 먼저 주고 조용하고 낙낙한 소리로 강의를 하여서 첫 수업이지만 그런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Rev. Rose 선생의 서신서 강의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하였다. 오늘 날틀 표, 은행이자, 등 해서 £338를 주고 나니까 주머니에는 £96가 남았는데 이것이 나의 모두이다. 오늘은 춥고, 눈발이 뿌렸다. 오늘 세 번째 수업은 정말 어려웠다. 선교 의료 학, 성경 번역 학 등은 그 용어 자체만으로도 내 머리를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형제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며 공과 대학에서 교수를 하는 형제분은 요한복음을 가르치시는데 조그마한 휴대용 성경 한권 만 들고 교탁에 서서 강의를 하는데 그 분은 코맹맹이 소리로 말을 하기 때문에 영국 학생들도 듣는 것이 불편해 하고 있었으니, 나야 아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뒤에 많이 나아는 졌지만, 한 학기 동안 그 선생 시간만 오면 두 시간 강의에 나는 몸살이 나야만 했다.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했더니, 내 기간 연장이 일단 부결되었는데, 좀 더 알아 볼 것이 있는데, 소속과 직위, 대사관과 교민회에 신고를 했는지를 물었다. 나에게 전화해 주겠다고 했다. 뭐가 이렇게 까다로운지! 저녁 모임에 갔는데 말씀교제가 다 끝나고, 마지막에 모두 함께 만들어진 기도문을 통성으로 외우는 것이어서, 나는 처음 보는 일이어서 별났다.

 

Ruth의 도움 2. 16 Fri

내가 수업시간에 강의를 제대로 받아쓰지 못하여 Ruth 자매의 도움으로 노트로 정리를 하곤 했다. 몇 일간 Ruth의 노트를 베끼다가 너무 힘들어서 Ruth 보고 아예 쓸 때 먹지를 대고 써 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흔쾌히 받아 주어서 필기하는 부담을 덜었다. Ruth는 Scotland의 서부에 있는 Liverpool 모임의 장로의 딸로서 간호사였다. 대개 모두가 선교사의 길을 가기 위해서 왔듯이 이 자매도 30이 넘도록 결혼도 안하고 주님의 일에만 머리를 쓰고 있었다. 반 가운데 제일 필기를 잘하였는데 너무 잘하여 내가 정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남들이 놀 때 나는 노트를 가지고 오늘 배운 것을 요약하고 이해하느라 놀 시간도 없었다. 긴장과 피로로 점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Poole Evangelical Church 2. 17 Sat

저녁에 Dr. Hudson 부부가 나를 데리고 Poole이란 도시에 있는 Poole Evangelical Church에 갔다. 에콰도르에서 온 형제교회 선교사가 선교 보고를 했다. 영국 형제 모임의 선교후원회인 Echoes Service에서 오신 형제분들도 말씀들을 나누고 선교후원을 위하여 기도해야할 필요성을 강조하여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Dr. Hudson과 좋은 교제를 나누었다. 돌아오니 Betty(은퇴하고 오신 할머니 학생)노 자매님이 자기네 교회에 소개해서 다음 3월에 있을 Break(휴가) 때에는 초청하겠다고 말해 주어서 고마웠다. 주님께서 이 부족한 사람에게 영국에서도 조금씩 길을 열어주고 계시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워지는 해님 2. 18 Sun

아직도 날씨가 흐리고 해는 보이지 않았다. 영국에 온지 열흘이 지나는데도 아직 해를 보지 못해서인지 마음이 좀 우울해지고 해님이 그리워지고 있었다. 아침 식탁에 내려가니 내 자리에 흰 봉투가 놓여 있었다. 무엇인가 열어보니 오늘 내 생일이라고 학생들이 Sign을 한 Birthday Card였다. 정신이 없어서 오늘이 내 생일인줄도 나도 몰랐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Happy Birthday를 불러 주어서 기쁘고 마음써준 학생들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카드 안에는 책 쿠폰 £2.50짜리가 들어 있었다. 아침 예배에서 나는 이사야 53장을 읽었다. 예배가 끝나고 여러 사람들이 어려운 성경을 잘 읽어 주어서 축복이 되었다고 격려해 주었다. 점심 식탁에는 Dr, Hudson부부가 나의 생일을 위해 Birthday Cake을 준비해 주셔서 또 한 번 Happy Birthday를 부르고 축하해 주셔서 너무 기뻤다. 이 먼 영국 땅에서 생일 축하 Cake을 받아보다니 감격했다. 기억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었다. 기념사진을 같이 찍으며 즐거워했다. 오후 5시에 교회의 Jones 노부부가 Tea에 초청해 주셔서 즐거웠다. 영국에서는 Tea라고 하면 식사 보다는 쿠키나 케이크 같은 단 음식으로 된 것을 차와 함께 마시는 가벼운 저녁 식사를 말한다.

 

Student  Rail Card 2. 19 Mon

한국 대사관에 전화했더니 체재연장 결재가 났단다. 회신용 우표 35 Pence를 보내라고 해서 보냈다. 남이 놀 때 나는 책과 씨름하며 공부를 해야 했다. 이제 공부하는 요령을 터득해 가는 듯싶었다. 교장이 만들어준 학생증을 가지고 역에 가서 Student Rail Card를 내었다. 이 카드만 있으면 영국 안에서는 모든 기차표가 반 표이고, 주말 휴일은 일반인도 반 표인데 우리는 또 반에 반이라니 얼마나 좋은 나라인가!

 

학생들 경건의 시간 2. 21 Wed

저녁 학생들 경건의 시간에는 내가 말씀을 볼 차례여서 안 할려고 하다가 시원찮은 영어이지만 요한 일서 2:15-17에서 한 10분 교제했다. 처음으로 영어로 그래도 대중 앞에서 10분간 해 보았다. 하다보면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주일학교

오늘 저녁에는 주일학생들이 모이는 날이라고 하여서 여기서는 어떻게 하나 보려고 가보았다. 의자들은 다 치워놓고, 한 판 놀게 한 다음에 성경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고 나서 남은 애들은 탁구를 치며 놀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들이 었다.

 

중학교 진학 2. 23 Fri

딸 은하는 우리 아파트 뒤에 있는 영복 중학교에 추첨되었다는 자매의 편지가 왔다. 아무것도 없이 가정을 지탱해 나아가느라 아내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하니 마음이 쓰려왔다. Mall에 가서 구경하다가 국수 통조림을 하나 샀다. 야채와 국을 만들어 먹고 싶은데 여기서는 먹을 길이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 오후 수업을 마치고 Colline, Ruth, Ducky와 함께 바다 가를 다녀왔다.

 

Bournmouth 2. 24 Sat

Betty 할머니와 함께 기차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남부 도시 Bournmouth시로 갔다. 영국남부의 해양중심 도시로서 대서양이 끝없이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곳이며, 런던 Waterloo에서 오는 기차의 마지막 역이기도 했다. 오늘 처음 학생카드를 사용하여 반에 반액 혜택을 받았다. 영국은 제도가 좋은 나라였다.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생은 노인과 어린이 표인 반액 활인 혜택을 주고 있었다. 이층 버스를 타고 시내에 들어가 기독교 서점에 들어가 모임의 대부라 불리는 John Darby 성경을 한 권 샀다. 큰 Shopping Mall을 같이 돌아보다가 목이 말라서 Tea를 파는 곳이 있어서 Betty 노 자매님에게 한잔 사드렸더니 그렇게 고마워하고 좋아하셨다.

 

학교로 돌아와 Rev. Rose 선생님 댁에 가서 몇몇 학생들과 영국의  C. Division 축구 시합을 보았다. 아직 한국이 흑백 TV시대에서 살다가 오늘 처음 Color TV로 축구 시합을 보는 즐거움은 색달랐다.

 

만찬예배 기도 2. 25 Sun

그동안 만찬 예배에서 감사 기도를 드리고 싶었는데 언어 관계로 참아오다가 오늘 영어로 준비한 감사 기도를 드렸다. 예배가 끝나고 교제하는 시간에 한 노 형제님이 지구 뒤편에서 온 형제가 드리는 기도에 은혜가 되었다고 격려하여 주셨다.

오후 3:30에 Mr. Baymont부부가 나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서 Tea를 나누며 교제하다. 여름에 계획이 무엇이냐? 고 물으면서 모임을 방문하기 원하느냐? 등 물어주어서 고마웠다. 저녁 모임에는 Christ Church 교회에서 오신 약사이신 형제분이 설교하였다. 집회 뒤에 Mr. Baymont가 나를 그 분에게 소개해 주었는데, 한 목요일에 자기네 교회로 초청하여 주겠다고 하여서 고마웠다.

 

Wales에서 온 기쁜 소식 2. 28 Wed

영국의 서쪽 Wales에 살고 계시는 제임스 형님의 여동생부부로부터 반가운 편지가 왔다. 3월 Break(휴가) 때 Wales 자기네 집으로 오라는 초청의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두 주간 휴가 때는 어디 갈 곳도 없고 기도만 하고 있는데 주님은 이렇게 나의 갈 곳을 준비해 주셨다.

 

Immigration Office 3. 2 Fri

런던 한국대사관에 가서 여권을 찾아 가지고 이민국이 있는 Croydon 시에 갔다. 기차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가면서 책을 읽고 있는 분에게 Wesley Road가 어디쯤이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부인 때문에 이민국에 가는 길이니 같이 가자고 하여 편하게 갔다. 늦게 신청했는데 빨리 결재가 나와서 기뻤다. 런던으로 돌아 New Milton으로 오는 길은 멀고멀었다. 늦은 밤 학교에 돌아오니 Ducky 자매가 나의 저녁을 준비해 놓아서 너무 고마웠다.

 

경찰서 거류신고 3. 3 Sat

지난 월요일에 경찰서에 가서 거류 신고를 했더니 가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오늘 두 분의 경찰관이 학교로 찾아왔다. 거류 증을 써서 나에게 주면서 수속비로 £8(7736원)나 받아갔다. 오늘 저녁 교회에서는 한 해를 결산 하는 날이었다. 우리들은 대개 새해 초에 하는데 이곳에서는 3월에 하는 모양이다. 두 분 장로님을 앞에 모셔 앉혀 놓고 모두와 함께 재정을 포함하여 모든 부분에 대하여 묻고 대답하고 토론도 하는 진지한 모임이었다. 특히 자매님들도 자유롭게 묻고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이 한국과 달라서 좋았다.

한국 형제교회에서는 정규 집회인 예배, 설교 시간이 아닌 회합에서도 자매들이 교회에서 잠잠 하라는 말씀을 너무 넓게 적용하여 공동체 안에서  자매들의 의사표현의 자유를 너무 제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이다. 

 

가정주일  3. 4 Sun

오늘 주일은 자녀들과 함께 모이는 가정 주일이다. “Be of Good Cheer, 용기를 내라”라는 제목으로 어린이 집회 강사이신 할아버지께서 설교를 하셨다. 한 달에 한번 정도 자녀들과 함께 모이는 가정 주일을 지키고 있는 것이 우리와 다른 모습이었다. 이 노형은 학교의 특강시간에 모두 King James 성경이 어렵다고 하여 쉬운 언어로 번역해 가는 것을 염려하시면서, 어린이들도 King James 성경으로도 구원을 받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King James 성경을 최고의 번역 성경으로 여기고 계셨다.(여러 가지 성경 번역들이 나오면서 그 표현이 가벼워지거나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염려들을 하고 있다. 본문의 문제를 비교하는 고전과 권위 있는 성경은 그래도 King James 임에는 틀림이 없다.)

 

예배 뒤에 아주 연로 하신 Quiney 노 자매님이 나를 보고 자전거가 필요하냐고 물으신다. 나는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이번 주말에 자기 집에 와서 차도 나누면서 교제하자고 말씀해 주셨다. 이 노 자매님은 내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내 집같이 쓰도록 해 주신 Quiney 할머니 셨다. 언어 장애로 이것도 공부라고 너무 신경을 써서 정신적으로 피곤하여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번 주부터 시험인데, 시험이 되었다. 대사관 아가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기가 병가 휴가로 내 여권을 우편으로 못 보내드리고 와서 찾아가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Dr. Hudson과의 대화  3. 7 Wed

오늘 대화하는 가운데 내가 John Darby 책들을 사고 싶다고 했더니 옛날 글이라 좀 어렵고 너무 폐쇄적이라고 하셨다. 한국의 사정에 대해서 들려드리고 우리는 사역을 하면서 기적 같이 살아오고 있다고 하니 여기서도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2, £1, £5 씩 학교를 위하여 써 달라고 보낸 돈으로 나의 한 학기 장학금을 만들었다고 말씀해 주셨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내가 휴가 기간에 교회들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더니 이미 준비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영국 교회는 설교자들이 적어도 6개월 전에 예약을 하기 때문에 다음 학기나 되어야 방문할 시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미리 준비하는 일을 경험 해보지 못했던 나에게는 또 새로운 세계를 느끼는 듯 했다.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면 이스라엘을 방문하고자 하는데 그 때 필요하다면 재정 보증서를 한 장 써 달라고 했더니 쾌히 승낙해 주셨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가난하고 힘이 없는 나라여서 다른 나라에 갈 때 재정보증서 같은 것이 때때로 필요하여서 미리미리 준비하여야만 했다.

 

시험은 시험이다 3. 9 Fri

오늘부터 며칠 이번 학기를 마무리하는 시험기간이다. 영국에 와서 처음 쳐보는 시험이다. 그것도 영어로 시험을 보는 날인데 나에게는 큰 시험의 날이었다. 한 시간 반에 두 과목의 주관식 시험을 치르는데 쉽지 않았다. 모든 문제가 “논하라, 진술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영어로 해야 하니 이게 보통 일은 아니었다. 결과야 어떻든 닥치는 대로 해 볼 판이다.


Minneapolis 교회의 선물  3. 10 토

미국 Minneapolis 모임의 Milallen 형님으로부터 $50의 수표가 든 편지가 와서 주님께 감사했다. 내가 여기서 공부를 한다고 해서 학비나 생활비를 보내 줄 교회나 사람은 없다. 어떤 내용이나 목적이든지 성경학교라는 자체를 반대하는 마음을 가진 한국형제교회에서 내가 여기서 공부하다고 기도 부탁을 한다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했다. 여기에 온 모든 학생들이 자기네 교회나 친구들에게 자기들의 공부하는 일을 위해서 기도 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들을 보내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주위에 사람들은 있는데 공부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말 할 만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저 홀로이구나 하는 느낌이 드니 더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 공부를 위해서 나의 필요를 위하여 나의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들에게 기도해 주기를 부탁하기보다는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그저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주께로부터 오는 도다”라는 시 121:2 말씀만이 나의 힘이요 위로였다.

 

Quiney 할머니 집 방문 

오후에 나에게 자전거를 주시겠다는 Quiney 할머니 집을 찾아갔다. 한 2Km나 되었다. 그쪽 동네는 처음 가는 곳이라 재미있는 산책코스였다. 할머니 집은 길가에 푸른 잔디가 있는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84세가 되도록 처녀로 사신 할머니는 나를 친자식 같이 맞이하여 주셨다. 우간다 선교지에 보낼 조각 이불을 뜨고 계셨다. 나에게도 하나 주시면서 집에 보내라고 하셨다. 혼자 사시는 것이 몹시 쓸쓸하게 보였다. 내 방을 하나 정해 주시면서 아무 때고 와서 쉬고 부엌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 먹으라고 했다. 밖에 열쇠를 감추어 두는 곳도 알려 주시고, 앞집들과 길 건너편 집에 동양인인 네가 내 집에 아무 때고 드나들게 된다고 알려 놓아서 모두 알고 있으니 주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고 자상하게 준비를 해 주셨다. 사실 그곳은 동양인은 중국 식당을 하는 한 집 뿐이기 때문에 동양 사람들을 보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곳이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내 집 같이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타던 자전거도 나에게 주셨다. 따뜻한 차와 함께 할머니의 따뜻한 주님의 사랑을 느꼈다. 주님께서는 내가 필요할 때마다 쉴 수 있는 쉼터를 마련해 주시니, 과연 여호와의 이레였다. 주님의 선하심과 그 은혜를 어찌 다 감사할 수 있으랴.

 

시험주간 3월 12 Mon

오전에 두 시간 동안 시험을 보고 나니 정신이 어질어질 하였다. 인생은 태어나면서 시험지옥에 산다더니 내가 지금 그 지경이다. 기분 전환을 위하여 쇼핑 몰에 갔다. 과일들이 있는 곳에 가면 그리 크지 않은 작은 빨간 사과 한 봉지에  22 Pence를 하는데 그동안 먹고 싶었어도 사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에야 큰마음 먹고 한 봉지를 샀다. 저녁 한가한 시간에 Dvora No.8을 들으면서 먹어보는 사과는 꿀 맛 같았다.

 

한국으로의 송금  3. 13 Tue

어려운 가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늘 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머니에 마지막 남아 있는 60파운드에서 20파운드와 미국에서 온 수표를 봉투에 넣어서 집으로 등기로 부쳤다. 저녁에 Betty 할머니가 자기네 침례교회에서 3. 29-4월 2일까지 방문해 달라는 목사의 초청 소식을 알려 주었다. 주님께서 곧 있을 Spring Break(봄 휴가)에 갈 곳을 두 곳이나 준비해 주시어서 고마웠다. 한국에서는 진달래가 필 3월인데 여기는 진눈 개비가 종일 뿌리고 있었다. 오후 Dr. Hudson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 학기부터 김 형제가 여러 교회들로부터 초청을 받게 될 텐데 그동안에 나의 영어가 더 좋아져야겠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같이 자상하게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주셔서 고마웠다. 저녁 집회에서는 Baymont 노형님께서 한국을 위해 기도해 주셨다. 여기 교회는 주중에는 목요일에 모이고 있었다.

 

시험 끝  3. 16 Fri

오늘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나니까 점수야 상관없이 속이 후련하고 무거운 짐을 벗은 듯싶었다. 그런대로 Konglish로 답을 쓰느라고 썼다. 모든 시험이 주관식이라 논하거나 증명하는 식이어서 마음에 들었지만 문장을 만들어 답을 쓰는 일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번학기는 다음 월 화 수 삼 일 더 수업을 하고 마쳐진다고 하였다. 약국에 가서 소독용 알코올을 사러갔더니 의사 처방전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까다로운 나라라고 느꼈다. 그리고 기분도 좀 안 좋았다. 그까짓 소독용 알코올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처방전까지 요구하는지 마음이 불편했다. 간호사인 화란 자매들에게 물으니 그것으로 술도 만들고 여러 가지 나쁜 것들을 만들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고 이해하였다.

 

오늘은 3월 17일 토요일로  학교를 떠나기 전에 모두 대 청소를 하는 날이다. 오늘 처음 학생들 라운지를 청소하면서 처음 vacuum 을 사용해 보았다. 먼지를 잘 빨아드려 카펫을 청소하기에는 좋은 도구였다. 영국에 와서 여러 가지 편리한 도구들을 사용해 보면서 우리 집은 문명의 도구로부터 얼마나 자연스럽게만 살아왔는지를 느낄 수가 있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생활 형편에 따라서 사람 사는 것이 다르겠지만 그저 복음에만 미쳐 단순하게만 살던 나에게는 새로운 것이 너무 많았다. Betty 할머니와 함께 식품점에 가니 마늘 고추가 있어서 먹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32p를 주고 불가리아 산 오이 Pickle을 한 병 샀다. 얼마나 맛이 있는지! 그 신 국물은 그동안의 갈증을 내려주었다.

 

Summer Time 3 . 18 Sun

모처럼 휴일이라 늦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는데, Colline 형제가 와서 식사시간이란다.  내 시계를 보여 주었더니 오늘부터 Summer Time 시작이란다. 후닥닥 일어나 내려가니 모두 웃는다.  지난밤 0시부터 시작되는 영국의 Summer Time을 내가 아는 줄로 알고 아무도 나에게 말해 주지 않은 것이다. 그동안 한국에서도 summer time을 하다가 치워서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예배 후 Mr. Baymont 노형이 나를 데리고 어디로 갈 모양이었다. 집회 후 우리는 Rose 선생님 댁에서 Hamburger를 만들어 먹으면서 즐겼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휴가기간의 시간 계획이 좀 중복되어서 저녁에 Baymont씨에게 내가 바로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일주일이나 이곳에서 있어야 한다고 했더니 중요한 모임이라고 같이 가자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고 제임스 선교사 동생 자매 집은 다음 화요일 가기로 했다. 내일부터 방학인데 마음이 설레 인다. 두 주 휴가 기간에 주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일들을 경험하게 하시려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종강파티가 있었다. 모든 선생님들이 부부 동반하여 학생들과 함께 하는 학기말 만찬이었다. 나로서는 기억에 남을 만한 만찬이었다. 모든 학생들이 내일 떠나려고 짐을 꾸리고 있었다. 나는 가지고 온 한국 양말을 모두에게 한 켤레씩 나누어주었다.

 

 

Spring Break(봄 방학) 3. 21-4. 17일

오늘 오후부터 즐거운 두 주간의 Spring Term Break이다. 지나간 거의 삼 개월은 몇 년을 산 것 같은 세월들이었다. 오늘로 이 모든 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오전 Dr. Hudson의 두 과목 강의를 끝으로 봄 학기를 마쳤다. 학기를 마치는 기도를 하고나서, 우리에게는 종합 시험 결과가 든 봉투 하나씩이 주어졌다. 영국은 학점이 50%가 합격선이었다. 두 과목을 한데 묶어 한 과목으로 하여서 10과목이 5과목이 된 셈이다. 네 과목은 52-59%를 받았는데 Pastoral &Christian Leadership이란 과목은 40%였다. 그리고 교장의 코멘트는 “한 달 늦게 와서 그 정도 쓸 수 있었다는데 놀랬다면서 영어를 잘못하는데 비하면 잘 했다”고 격려해 주셨다. 내가 생각해도 이만하면 잘 한 것이었다. 오후에 큰 가방들은 창고에 넣어놓고 작은 가방 하나를 자전거에 싣고 Quiney 할머니 집으로 옮겨서 자리를 잡았다. 혼자 사는 큰집은 추웠는데 따뜻한 전기담요가 있어서 지낼 만 했다. 할머니는 언제나 콩고 선교지에 보낼 조각 이불을 만드시느라 뜨개질을 하시고 계셨다. 나는 책을 보다가 차를 만들어 둘이서 마시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

 

Appointment diary 3. 22 Thu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Bristol에서 초청한다는 전화가 세 번씩이나 왔다고 하면서 학교에 와서 전화를 기다리라고 한다. 자전거를 달려서 학교에 가서 전화를 기다렸지만 전화는 더 이상 오지를 않았다. 저녁 집회 뒤에 오늘 저녁 설교자이시고, 학교에서 함께 식사한 적이 있는 약사로 은퇴하신 Mr. Dent 노형부부가 4월 28-29일 Dr. Hudson과 함께 당신네 교회에 초청한다고 알려 주어서 고마웠다. 나도 이제는 스케줄이 잡히기 때문에 작은 Appointment diary가 필요해서 하나 샀다. 

 

제임스 선교사의 동생 전화  3. 23 Fri

학교에서 오전 내내 제임스 형님의 동생으로부터 전화 오기를 학교에서 기다렸지만 오지를 않았다. Rose 선생님 집에 놀러가서 한국 양말 두 켤레와 민속 지갑 하나를 드리고 놀다가 오니 오후 늦게 학교에 돌아와서 잠시 기다리니 전화가 왔다. 제임스 선교사 동생자매님의 전화였다. 내일 Bristol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서로의 인상착의를 알려 주었고, 그분들은 Platform 안에서 나를 기다리겠다고 하셨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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