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 새해를 맞이하면서,
새해에는 주님께서 영국으로 가도록 해 주실 것을 믿었다. 낯선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될 생활을 그려보며 이렇게 기도했다. 1979년의 시작과 마침을 주님께 의지하오니 한 걸음 한 걸음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주신 새해 선물들 1.4 목
한국교회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일본 형제들을 전송하려고 서울에서 제임스 선교사와 윤 형제와 택시를 타고 가는데, 윤 형제가 내 주머니에 무엇을 넣어주었다. 나중에 보니 십만 원이었다. 형제의 사랑이 고마웠다. 집에 돌아오니 기쁜 소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갈 김기원 형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 가는 길에 필요한 데 쓰라고 십만 원의 선물을 주셨다. Dr. Hudson 교장이 홍콩을 거쳐 영국 가는 비행기 표를 사서 보내왔다. 지난해 제임스 선교사님이 영국에서 표를 사면 싸다고 교장에게 부탁한 그 표가 오늘 온 것이다. 이제 표를 손에 들고나니 이젠 정말 가는 기분이 들었다. 독일 하노버에 계시는 Elizabeth 자매님의 반가운 편지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영국에 가 있으면 초청해 주겠다는 내용이다. 주님께서는 앞서서 나의 할 일을 준비하고 계셨다. 새해 초에 주님은 나에게 이렇게 큰 기쁜 소식들을 주셨다. 그러나 영국에 가서 갚아야 할 날틀 표값, 학비와 기숙사비, 두고 가는 식구들의 생활, 등 해결해야 할 경제문제는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무 대책이 없다. 대책이 없을 때는, 그저 주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믿는 믿음만이 해결책이었다.
여권 기각과 영국 대사관 공증 1.9
여권이 과연 나왔는지 궁금한 마음으로 1월 5일 서울 여권과에 갔더니 나의 여권 신청이 부적합 이유로 기각되어 있었다. 좀 충격이었다. 그래서 문공부 해외담당자에게 전화해서 내 여권 조회 서류를 왜 기각하게 했느냐고 물으니, 여행경비를 “자비”라고 표시되어 있어서 기각했단다. 그래서 “초비”라고 했더니 공증이 없으므로 인정 못 한다고 했다. 여권을 받는 일이 갈수록 태산같이 느껴졌다. 결국, 앤더슨 선교사에게 의논해 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1.9) 아침 앤더슨 선교사와 함께 영국 대사관에 가서, 나의 재정 보증을 선다는 각서를 쓰고 공증을 받아주셨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나에게 “SEEN"(공증)이라는 큰 글자가 찍힌 이 종이 한 장(보증서)은 내가 기댈 수 있는 큰 산 같이 느껴졌다. 문공부에 가서 초비 신청 공증서류를 보여주니 여권 서류를 신청하고 다시 오라고 한다. 여권을 또다시 신청해야 하므로 예정된 시간에 떠날 수가 없어서 앤더슨 선교사와 함께 광화문 전신국에 가서 영국 Dr. Hudson에게 출국 일자 변경을 위하여 전보를 보내는데 앤더슨 형이 요금을 내주셔서 고맙고 미안했다.
Stevenson 선교사 방문 1.11
오늘 서울에서 북아일랜드에서 오신 스티븐슨 선교사 댁에서 교제하였다. 경비에 쓰라고 20,000원의 선물을 주셔서 고마웠다. Steven 선교사 부부는 원래 백화점 같은 데서 돈궤를 터는 전문 도둑인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새사람이 되었다. 이분의 간증이 지역 신문에도 소개되어서 좋은 반응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되었다는 놀라운 간증을 하였다. 형제는 한국말도 잘하고 좋았는데 부인 자매가 우울 증세를 보여 결국 미국으로 가도록 결정하고 있었다. 한국으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선교사 부인들이 좀 외부로 활동을 할 수 있으면 정서적으로도 좋으련만 언어의 불편도 있지만, 여기에서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집안에서 가정부와 함께 맴돌고 특별히 하는 일이 없으니까 마음에 병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한국 자매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교회도 방문하고 형제자매 집도 방문하고, 영어 반도 만들어 가르치면서 보람된 시간을 보내면 어찌 병이 생기겠느냐. 그러나 대개 모임 선교사들의 부인들이 학력도 낮고 전문성을 가진 기능이 없으니까 한국 사회에 나가서 무슨 활동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왕 선교지에 왔으면 자기가 가진 것만큼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려면 얼마든지 일이 있을 텐데 그렇게 노력하는 자매들을 본 것 같지 않다. 여자는 모임에서 잠잠하고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사회생활도 소극적인 점이 염려가 되는 부분이다. 모두 전형적인 가정부인들이었다. 남자 선교사도 이렇다 할 만한 일을 못하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인데, 자매들이야 오죽하랴!
문공부 해외담당자 1.15
오늘 여권 신청을 다시 했다. 문공부에서 잘 협조해 줄지 궁금했다. 그 당시 우리는 선교부 소속이니까 여권을 내자면 보건사회부의 참고 결재를 받아야 여권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우리의 보물 함에는 한국에 와서 며칠 함께 했던 Mr. Vance 씨가 100불, 하와이의 St. Clair 할머니 20불, 강릉교회에서 13,000원의 물질을 보내 주어서 준비하는 일에 도움이 되었다.
노량진교회 방문 1.17
노량진교회의 초청으로 수요일 저녁 집회에서 강릉과 무의도에서 한 캠프 활동을 환등으로 만들어 보여주면서 교제하였다. 교회에서 10,000원을 교제해 주었다.
영광교회 방문 1.20-22
우리는 주말에 전라남도 영광교회를 방문하였다. 새로 지은 예배당은 보기에 대단히 좋았다. 장로교 장로 한 분도 구원을 받아 함께 하고 있어서 반가웠다. 주님은 이환기 형제의 수고를 통해서 교회가 발전하도록 축복해 주시고 계셨다. 나는 진리와 강릉에서 그동안 20대 전후의 젊은이들과 모친들 외에는 아직 30대를 넘지 못하고 있는 식구들을 데리고 힘들게 사역을 하는데, 주님은 이환기 형제에게 은혜를 주셔서 일 잘하는 농부로서 주님을 사랑하는 좋은 종으로서 나보다 더 크게 쓰시고 계시니, 하나님의 일하심이 놀라울 뿐이다. 넘치게 맺어지는 열매들이 얼마나 보기 좋고 아름다운가! 모임에서 교제로 10,000원을 주셨다.
손에 쥔 여권
오늘 또(19일) 궁금한 마음으로 여권과에 가서 열람해 보니 문공부 결재라고 적혀 있었다. 주께서 이제야 일을 마쳐 주시는구나 하고 머리 숙여 감사했다. 1월 23일 여권과에 가서 드디어 여권을 손에 쥐니 천하를 얻은 것 같이 기뻤다. 내 일생에 처음 가져 보는 여권이어서 자랑스러웠다. 제일 먼저 제임스 선교사에게 가서 알려드렸다. 그랬더니 바로 영국으로 전화를 해 주셨다. 이제 영국 비자 문제가 남아 있었다. 제임스 선교사와 영국 대사관에 갔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내 마음의 위로였다. 제임스 선교사와 영사가 나의 비자 문제를 의논하자, 한국과 영국이 3개월 무비자 협정이 되어 있으므로 그냥 들어가서 학교장의 입학허가서를 가지고 이민국에 가면 학생 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3개월 무자비 관계가 되어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비자 문제도 해결되었다. 이제 여권 비자 그리고 날틀 표 등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지나간 한 해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하늘을 날 것 같이 홀가분해졌다.
신림동 교회 방문
수요 저녁 집회는 신림동 교회에서 말씀을 전했다. 사업을 하면서 사역을 하는 정홍 형님이 내가 영국으로 공부하러 간다는 간증을 듣고는, 집회 사회를 보면서 '내가 공부하고 변질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불편한 마음을 나타내 주었다. 형제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이왕 떠나는 형제를 격려해 주는 좋은 말로 하면 힘이 되고 더 고마울 텐데 성질머리도. 교회에서 5000원 교제를 주셨다.
떠날 날 예정 1.25
제임스 선교사님을 찾아뵙고 영국 가는 날틀 표 시간 조정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영국 Dr. Hudson에게 전화를 거셨는데 2월 6일로 다시 예약했다고 알려 주었다. 다음 날 사후동에 알려드리려고 들어갔다. Kunze 노형에게 영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알려드렸더니 경비에 보태어 쓰라고 사랑의 선물 40불을 주셨다.
마으로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교회 방문하는 일들이 바빠지고 있었다. 오전에는 불광동 교회에서 그리고 저녁에는 구로교회에서 마지막 말씀을 전했다. 불광동에서 10,000원, 구로에서 32,000원, 최화서 자매가 5,000원을 교제해 주었다.
간증문 번역 2.1 목
이제 2월이 되었다. 그렇게도 가려고 하던 곳으로 가게 되는 달이다.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펼쳐지려는 달이다. 아브라함이 알지 못하고 나아갔듯이 나 또한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길을 가려는 것이다(히브리서 11:8). 주님의 놀라우신 인도하심과 축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영국에 가서 사용하게 될 나의 간증문을 영어로 써서 서울 제임스 선교사님께 가서 고쳐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내가 쓴 영어 간증문을 고쳐 주면서 Dr. Huds
on이 나의 영어를 보면 실망할 것이라고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이렇게 영어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선교사 훈련을 받으려고 영국으로 간다고 하고 있으니 지나가는 새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아버지 어머님의 방문 2.2
강릉에 계시는 부모님이 아들이 영국으로 떠난다고 오셨다. 오시는 편에 진리 강릉 식구들이 사랑의 선물들을 보내 주었다. 사천 모친 만원, 강릉모임 자매회 만원, 고영숙 자매 만원, 진리 모임 만원, 그리고 수원교회에 함께하고 있는 상호 처남이 삼만 원 선물들을 주었다. 모든 분에게 주님의 축복을 배나 내려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오늘 영국에서 날짜가 바뀐 새 날틀 표가 왔다. 교제 차 성남에 갔더니 김수철 형이 만원을 교제해 주셨다.
수원교회 헤어짐의 예배 2월 4주일
오전은 수원교회에서 만찬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전했다. 교회에서 이만 원, 이건호 이천 원, 한상배 만 원, 자매회 만 원을 주셔서 길 떠나는 나에게 힘을 더해 주었다. 예배 뒤에 서대문교회의 오후 집회를 인도하고, 저녁에는 부평교회 집회에서 설교를 했다. 정말 바쁜 하루를 보냈다. 오후 서대문교회 만원, 권하정 칠천 원, 최덕임 오천 원, 김정희 오천 원,, 저녁 부평교회 오만 원, 김상두 만원, 서명수 오천 원, 서용철 육천 원, 영국 가는 길에 보태어 쓰라고 고마운 사랑의 선물들을 주셨다.
환전 2.5 월
영국 돈을 바꾸려고 은행에 갔더니 환율은 ℒ1=967원 이었다. 한국 돈 600,000만 원을 영국 돈으로 바꾸니 약 ℒ620(파운드)이었다. 이것이 내가 가지고 영국으로 떠나는 전부였다. 날틀 푯 값을 주고 나면 몇 푼이나 남겠는지 모르겠다. Dr. Hudson의 친절한 편지와 함께 학교 엽서를 보내왔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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