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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여행기/Kenya단기선교

2. Nakuru 와 Kabazi

Nakuru와 Kabazi  1.8 목. 흐림. 비. 맑은 2004

아침은 흐렸다. check out을 하고 다시 U$ 200을 바꾸었다. 로비에서 잠시 기다리는데 Daniel 형제가 왔다. 택시로 버스 정류장에 오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Daniel이 잠시 버스 사이로 다니더니 곧 떠날 차를 알아내어 차에 오르니 사람들은 제법 서 있는데 버스 남자 안내원이 우리를 데리고 뒤쪽으로 가서 몇 사람을 일으켜 세우더니 우리 보고 앉으라고 한다. 나는 일어난 사람들 보기에 미안했다. 아마 가까이 가는 사람들인 모양이다. 우리는 157Km의 긴 거리를 가는 사람들이니까 Daniel이 안내와 무슨 흥정이 있었던 것 같았다.  이 버스에는 외국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버스 값은 한 사람이 350 실링이었다. 검은 머리에 얼굴이 누런 우리를 검은 얼굴의 친구들이 신기하게 보는 눈빛들이었다. 멀고 가까운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웃음 띤 얼굴로 눈인사를 나누면서 함께 가고 있었다. 차가 시내를 벗어나자 비는 그치고 시 외곽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초라한 동네들이 연이어 있었다. 사람 사는 풍경이 중국이나 비슷하였다. 이제 버스는 높은 곳인  나이로비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긴 고개를 내려오니 이제 평지이며 열린 넓은 들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북으로 갈수록 아스팔트 길은 파이고 길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차는 흔들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아시아나 북미와 또 다른 자연을 감상하면서 가노라니 들에 내놓고 키우는 소 떼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소들은 주로 엷은 노란색을 띠고 있으며 또 흰 소와 검은 소들도 섞여 있었다.

 

 

60~70Km 오는 사이에 복도에 선 사람들이 어지간히 다 내렸다. 여기들에 있는 아카시아(Acacia) 나무의 특징은 나무가 곧 바르게 올라가다가 가지가 사방으로 펴져서 마치 우산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이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한낱 뜨거울 때는 짐승들이 이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어디든지 살기 마련이라더니 여기는 자연의 이런 혜택이 있었다. 이번에는 달리는 길가에 얼룩말들이 나타났다.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들에 살고 있었다. 우리가 보통 얼룩말은 흰색에 검은 띠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노란색에 검은 띠를 한 말들도 있어서 신기했다. 또 얼마를 가다 보니 이번에는 원숭이 떼들을 만났다. 얻어먹어 버릇하여서 찻길까지 나와서 차에서 무엇을 던져 주기를 바라며 오가고 있었다. 아기를 등에 업은 어미 원숭이도 잽싸게 다니고 있었다. 차들에서 던져주는 것을 줍느라 모두 경쟁적이었다. 관광차들은 이 지점에서 좀 쉰다고 한다. 원숭이들이 위험하리만치 달리는 차 가까이 오고 있었다. 들에서 자유롭게 뒤놀면서 사는 얼룩말과 원숭이를 본 것만으로도 아프리카에 온 가치가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보느라고 피곤한 줄도 몰랐다. 오는 길에서 얼룩말은 세 번 정도 볼 수 있었고 원숭이 떼는 한 번 보았다. 맹수들은 주로 사람들이 왕래하는 찻길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NAKURU
NAKURU라는 큰 도시에 들어와서 어느 길가에서 우리는 내렸다. 이 도시는 이곳의 중심도시로 교통 교육중심지였다. 우리는 또 한참을 걸어서 한 곳에 오니 많은 소형 버스들이 작은 공원을 둘러 있는 정류장으로 왔다. Daniel은 우리를 한 곳에 잠깐 있으라고 하고는 자기는 차를 알아보러 갔다. 그 사이에 나는 화장실을 가고 싶어서 옆에 사람에게 물으니 없단다. 나는 혼자서 상가들이 있는 곳으로 가다가 보니 Coffee와 Tea라고 붙은 간판을 보고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나는 곧장 들어가서 화장실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했다. 잠시 뒤에 Daniel이 돌아왔다. 함께 한 작은 버스에 탔는데, 가방을 놓을 데가 마땅치 않아서 아주 불편했다. 차 안내는 Daniel을 보고 Pastor라고 부르면서 깍듯이 대하고 내가 차비를 내니까 Daniel 차비는 받지 않는다. 차비는 한 사람이 80실링이었다. 기사와 안내가 Daniel 목사를 존중하는 것 같아서 보기에 좋았다. 여기서 자기 동네까지는 40Km 정도 가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더 타기를 기다리는 동안 날씨가 더워서 좀 짜증스러워지기도 하였다. 이 정류장에서 차들이 여러 곳으로 가고 있었다. 차 안은 참기 어려울 만큼 더운데, 차 발동은 쉽게 걸리지 않았다. 한 참 뒤에야 떠났다. 그동안은 주로 평지를 달려왔는데 나이로비에서 내려온 만큼 다시 올라가는 듯하였다. 그리 큰 산은 아니지만, 산들이 많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산들이 많이 나오니까 우리 사는 곳과 같아서 낯설지 않았다. 가는 길에 농장에 앵두 같은 붉은 열매들이 가득히 매어 달려있어 무엇이냐고 물으니 커피 농장이란다. 커피는 많이 마셔 보았지만, 커피나무와 열매를 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신기했다. 하루 이 농장에 와서 보기로 하였다. 달려서 다시 높은 고개에 올라오니  작은 동네가 나오자 차는 섰다. 우리와 여러 사람이 내렸다.

 

KABUZI

여기가 Daniel이 목회하는 KABUZI라는 곳이다. 그저 한국의 면 소재지 정도인 농촌 마을인데 읍내에는 1500명 정도가 산다고 했다. 조금만 시장통을 이루고 있는 거리를 지나는데 믿는 형제들이 Daniel 목사에게 다가와서 인사들을 하므로 나는 자연히 그들과 교제의 악수를 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읍내에서 한 80m 걸으니 저 건너편 언덕에 교회당이 보인다. 자기네 교회당이라고 했다. 집을 지으려고 기초를 파 놓은 어수선한 곳을 지나가는데 부인이 알고 뛰어나와 Daniel을 품에 안으며 볼에다 키스한다. 그리고 우리와 악수를 하고 포옹을 하면서 오신 것을 환영한다고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Daniel이 사는 집은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일자집이었다. 방 세 개와 부엌이 하나였다. 목회자 사택을 짓다가 재정이 모자라서 못 짓고 있는 형편이고 이 집은 방 둘과 부엌을 세로 쓰고 있다고 했다. 식구는 딸 하나 아들 둘인데 딸은 학교 기숙사에 가 있고 집에는 중학생과 초등학생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조카 자매와 다른 자매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두 자매는 예배당에 있는 방을 쓰고 있었다. 마당에는 병아리를 데린 암 닭이 모이를 쪼고 있고, 양 네 마리가 마당에 와서 풀을 뜯어먹는다.  양들이 사람을 겁내지 않는 것을 보니 함께 이렇게 사는 모양이다. 양도 Daniel 것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한다. 동네 사람 양이라고 한다. 양들을 이렇게 풀어놓고 먹이고 있었다. 사람과 짐승이 이렇게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이 평화스러웠다.

우리가 머무는 동안을 위하여 집주인에게 말해서 쓰지 않고 있는 윗방을 쓰도록 했단다. 두 자매가 옆방을 치우고 정리를 하더니 Daniel이 방이 다 준비가 되었다고 가방을 그리로 옮기자고 한다. 방은 그저 사방 3m 정도인데 한쪽에 둘이 겨우 잘 수 있는 좁은 침대가 하나 놓여 있고 방 절반은 곡식 자루 같은 것이  쌓여 있어서 그저 들어와서 잠이나 잘 정도로 비좁았다. 우리는 한 50m 건너편 언덕에 있는 교회당으로 가서 기도하고 주위를 들러 보았다. 낮은 언덕은 푸른 풀들로 덮어져 있었다. 시멘트 블록으로 쌓고 슬레이트 지붕을 하였다. 천정은 하지를 않아서 안전감이 들지 않았다. 등받이가 있는 의자는 나무판자로 만들어졌고 2/3 뒤에는 그냥 앉을 수 있도록 얕게 만든 평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자매들이 잔다는 방을 들여다보니 요도 제대로 없고 덮는 이불도 변변한 것이 없었다. 그냥 습관이 되어서 딱딱한데 그냥 자는 것 같았다. 집 낮은 언덕 밑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이 부근 주민들이 사용하는 것인데, 난간이 없는 우물은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위험한 것 같았다. 날이 저물자 날씨가 선선해지기 시작한다.


Daniel은 방 하나와 응접실이다. 낮에는 응접실로 쓰고 밤에는 아이들이 자는 방이라고 한다. 허름한 소파와 의자 가운데 Tea table이 하나 놓여 있었다. 전기를 달지 않아서 두 개의 촛불을 켜 놓았는데도 어두웠다. 우리는 그곳에서 케냐 차를 마시면서 교제하는 동안 시간은 어느덧 9시가 되어 가는 데 저녁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아서 궁금했다. 사모와 조카들이 부엌에서 무엇인가 음식을 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늦도록 저녁을 안 먹는 것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 9시 반이 되자 드디어 기다리던 저녁이 들어왔다. 손님이 왔다고 닭볶음 요리를 해 왔다. 닭 볶은 양은 냄비 채로 갖다 놓는다. 그리고 알이 작은 감자 삶은 것 한 그릇 그리고 삶은 녹두 한 그릇이 전부다. 푸른 채소나 다른 반찬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각각 알아서 자기 접시에 퍼 먹으면 되었다. 이 저녁 주님께서 지구 저편에서 온 나그네들을 위하여 이 귀한 가정을 통해서 먹을 양식을 주신 것을 감사했다.  11시가 다 되어서 우리 방에 왔다. 조그마한 촛불은 어두움이나 겨우 가시게 하고 있었다. 글도 쓸 수 없고 읽을 수도 없다. 그저 자는 것만이 상책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에는 별들만이 총총하다.  

 

커피 농장 1.9 금. 맑음  

아침 일찍 나 혼자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학교에 가는 초등학생들을 만나 Good Morning하고 인사를 하면 모두 반갑게 Good Morning to you 하고 인사를 하는 친절 미가 있었다. 우리 보통 Good morning 하고 인사를 하면 Good morning 하고 받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 사람들은 거의 다 Good Morning 하고는 꼭 to you를 더 하고 있었다. 좀 써늘하게 느껴지는 아침이고 길에는 밤이슬이 가득히 내려서 촉촉한데 어떤 아이는 짧은 바지에 신발도 없이 맨발로 걸어가고 있었다.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면 아이들 신발을 하나 사주지 못할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자매가 속이 편치 못하여 힘들어하고 있었다. 어제저녁 늦게 너무 기름진 닭 복음 때문인지 탈이 났다. 아침을 먹지 못하였다. 아침 식사는 어저께 먹다 남은 닭볶음과 안남미 쌀밥을 해  왔다. Daniel 형제는 나에게 오전에 커피 농장에 가보자고 한다. 자매에게 물었더니 몸이 좋지 않아서 안 가겠다고 한다. 이번에 못 보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르니까 한두 시간 정도 뒤에 어지간하면 가도록 해 보자고 했다. 마지막 길이라고 생각하고 억지로 자매가 따라나섰다. 길에 나가 지나가는 소형 버스를 타고 한 20 여분 가니 어저께 우리가 오다가 본 커피 농장이 있었다.

                

커피나무

우리는 커피나무 사이로 들어가서 평생 처음 보는 커피나무와 빨간 열매들을 만져 보면서 즐거워했다. 커피 열매는 아주 빨간 색이며 손으로는 부술 수 없는 단단하며 생긴 것은 꼭 앵두 알만하게 생겼다. 한 50m의 긴 커피 밭 밑에는 원두커피를 만드는 조그마한 공장이 있었다. Daniel은 커피를 내게 보이면서 이 커피는 껍질이 세 겹이라고 하면서 손으로 벗겨 보여 주었다.

먼저 빨간 단단한 껍질을 벗기면 안에 얇은 껍질로 쌓여 있다. 다시 그것을 벗기면 세 번째 투명한 비닐 같은 안 껍질이 씨를 감싸고 있다. 이 껍질을 벗기면 비로소 원두커피 씨알이 나온다. 우리가 먹는 이 커피는 이렇게 세 겹 신비에 싸인 것이며, 우리가 마시는 커피 원두가 되기 위하여 까고 말리는 손길의 정성이 들고 있었다. 농장 끝 언덕에 오르니 저 아래 골짜기들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자매가 몸이 많이 불편하여 차를 타려고 길가에 나왔다. 자매는 아예 길가에 누워버렸다. 돌아와서 시장통에 있는 약국에 가니 마침 믿는 약사 자매가 있어서 캐나다에서 쓰던 설사 멎는 약이 있어서 한 통을 샀다. 커피 농장 갔다 오는 몇 시간 동안 자매가 몹시 힘들어했다. 약을 먹고 쉬도록 했다. Daniel이 조카들에게 케냐 홍차를 끓여 오도록 부탁했다. 여기 사람들이 커피나 홍차를 끓여 먹는 습관은 특별하다. 아예 물에 설탕과 우유를 한꺼번에 넣어서 끓이고 있었다. 나는 설탕을 잘 안 먹으니까 다음부터는 그냥 홍차나 커피를 끓이고, 설탕이나 우유는 각자 알아서 타 먹자고 제안을 하니 모두 다 좋다고 했다. 

오후에 자매가 건강이 좀 좋아졌다. 우리는 거리에 나가서 며칠 동안 우리가 쓸 실림 도구를 샀다. 플라스틱 물통과 대야 그리고 남포를 하나 샀다. 토마토, 오이, 채소 그리고 설탕 쌀을 사다가 주면서 사모에게 먹을 것을 사라고 3000 Shilling을 주었다. 모기가 없는 줄 알았는데 자매가 세 마리나 잡았다. 그러나 활동적인 모기는 없는 것 같아서 마음 쓸 일은 없었다. 한낮을 빼고는 선선하니까 특히 밤에는 모기가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 지내기가 좋았다. Daniel과 함께 교회당에 가서 그들이 찬송가 부를 때 쓰는 얇고 둥근 작은북을 들고 박자를 맞추는 연습을 한참 하여 보았다. 나는 Daniel에게 다른 악기는 쓰지 않느냐고 물으니 안에서 낡은 키보드 하나를 가져오는데 고장이 난 지가 오래되어 고쳐서 쓰다가 지금은 못 쓰고 있다고 하였다. 누가 치느냐고 물었더니 주로 자기가 친다고 하였다. 

 

나 혼자 예배당 뒤로 해서 한 참 길을 걸어갔다. 여기 흙은 이상하게도 붉은 색깔이어서 우리네 색깔과는 정말 달랐다. 돌아오다가 길에서 한 여자아이를 만났는데 Daniel 집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좀 헷갈리고 있었다. 그런데 게도 나를 보고 아는 체하는 것도 아니고 이상했다. 그래서 내가 Hi, 하고는 내가 너를 Daniel 집에서 보았느냐고 묻자, 슬쩍 웃으면서 아침에 나에게 인사를 했다고 한다. Daniel 친척이냐고 물으니 조카라고 한다. 지금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고등학생이라고 했다. 지금 어디에 가느냐고 하니 집으로 간다고 한다.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저 언덕 너머라고 했다. 예수님을 믿느냐고 물으니 믿는다고 했다. 주일에 보자고 하고 마침 주머니에 있던 사탕 몇 개를 주면서 헤어졌다. 

 해가 지고 어두워졌다. 우리는 또 그 어두운 응접실에 앉아서 먹을 것을 줄 때까지 차를 마시면서 교제를 나누었다. 창문이 없는 부엌에서는 조그마한 촛불을 켜 놓고 김이 가득한 그곳에서 음식을 만드느라 수고들을 하고 있었다. 이때 아모스라고 부르는 청년 형제가 들어왔다. 교회에서 청년부를 지도하고 있었다. 결혼 한지 한 달 정도 된 새 신랑이었다. 이번에 신학교에 입학은 되었는데 등록금이 전혀 없다고 나에게 기도해 주기를 부탁하여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저녁 식사는 우리가 산 토마토와 채소로 만들었고 흰 쌀밥을 해왔다. 아모스 형제도 함께 식사하면서 케냐의 유명한 Safari 이야기를 하니까 Daniel이 NAKURU에도 Safari 자연 국립공원이 있다고 한다.  가보았느냐고 하니 못가 보았다고 한다. 세계 사람들은 이 Safari를 보려고 오는데, 본토인이 자기들은 보지도 않고 살고 있었다. 내일 NAKURU 시도 돌아보고 내일 그곳으로 함께 가도록 계획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화요일은 이곳을 떠나 나이로비로 내려가야 하니까 월요일은 Daniel 식구들과 가까운 폭포가 있는 곳으로 소풍을 가도록 계획을 했다. 나들이도 잘 못 하는 이 집 식구들을 하루 위로하여 주고 싶었다. 

 

Kenya 화장실

나는 여기에 있는 동안 몇곳의 화장실을 돌아보고 Kenya의 화장실은 아주 깨끗하고 위생적이었다. 이 집 화장실은 우리 방 옆쪽으로 5m 거리에 있다. 화장실 구조는 한국의 농촌에 비하면 그 문화 정도가 훨씬 높고, 중국에 비하면 안방이다. 볼일 보는 곳은 구멍을 작게 내어져 있고 소변이 잘 흘러내려가도록 둥근 반기와 모양을 앞에 놓았다. 위에서는 아래 오물을 전혀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다만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정조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플라스틱 파이프를 밑에서 지붕 위로 세워 놓아서 밑의 메탄가스가 위로 나가도록 해서 인지 안에는 냄새가 전혀 없었다. 아주 위생적인 화장실이었다.  어쩌면 화장실 문화가 한 나라 생활문화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데 칭찬할 만했다. 


병아리와 함께 사는 Daniel 가정

Daniel 집은 6마리의 병아리를 거느린 어미 닭이 있는데 밤에는 어디에서 자는지 궁금했는데 어두워지면 어미 닭은 병아리들을 데리고 Daniel 방으로 들어가 침대 밑에서 자고 날이 밝으면 밖으로 나온다. 사람이 닭과 함께 사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어서 재미있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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