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로비 1.13 화 맑음
오늘은 나이로비로 떠나는 날이다. Daniel 조카들이 만들어 온 차를 마시면서 마지막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매일 우리 방에 물을 길어다 주느라 수고한 이 집 막내에게 용돈을 조금 주었더니 좋아했다. 차를 타려고 길에 나왔다. 소형 버스가 왔다. Daniel은 운전기사와 무엇인가 의논하더니 우리에게 와서 타라고 한다. 두 조카와 사모가 눈물로 우리를 떠나 보내고 있어서 마음이 서운했다. 차를 타고 보니 우리를 앞자리에 앉히려고 앞 두 사람을 우리 뒤로 보냈단다. 미안했다. 지난번 올 때 찍지 못한 야생동물들의 모습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이나 왔을까 길에서 검문한다. 사람들을 다 내리게 하고 가방의 모든 짐은 다 열어 보게 한다. 우리 두 사람의 가방도 길바닥에 놓고 자기들이 열어서 거칠게 뒤진다. 너무 짐을 헝클어 놓아서 다시 정리하느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시 차에 탔다. 여기 경찰이 사람 대하는 것을 보니 아주 거칠고 무례하였다. 이 차에는 외국인이라고는 우리 둘밖에 없었다. 무기밀수 정보가 있어 갑작스러운 검문이라고 Daniel이 나에게 말해 준다. 케냐의 자연 풍치를 찍으며 소 떼들 그리고 이제 얼룩말들이 사는 지역을 통과하면서, 나는 촬영하는 데 바빴다. 얼마 뒤에는 원숭이들이 활동하는 지역을 지나게 되었는데 기사는 나의 사진 촬영을 위하여 속도를 줄여 주어서 고마웠다. 기사에게 고맙다고 하고 사탕을 주었더니 받아먹으며 Thank you 한다. 한참 뒤에 달걀과 오이를 주니 사양한다. 우리는 달리는 차에서 가지고 간 오이 토마토 소시지 등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때웠다. 긴 시간 동안 달리면서 케냐 자연의 모습들을 촬영할 수 있어서 기뻤다.
▶ The Assembly of God Seminary
우리는 나이로비 시내에 들어와 내려서 The Assembly of God Seminary에 도착했다. Daniel 형제가 우리를 이 학교 기숙사에 머물도록 준비를 하여 놓았다. Daniel과 동창이며 지금은 이 학교에서 교수를 하는 James 교수 사무실을 찾아갔다.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다. 이 학교는 두 가지 종류의 학생들이 있었다. 4년 학위과정과 3년 수료과정을 두고 있었다. Daniel은 여기에서 수료과정으로 졸업을 했고, James 교수는 학위과정을 마치고 나이로비 대학교에 가서 Communication 계통을 공부하고 이 신학교에서 Communication과 다른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다. 모든 교수는 학교 안에 있는 교수 사택에 살 수 있는데 자기는 목회를 하면서 밖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중국서 가지고 온 볼펜 50개가 든 한 통을 필요한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주었다. 그리고 교수는 직원을 불러서 우리를 기숙사로 안내하게 했다. 미국 하나님의 교회 선교부에서 케냐에 선교를 시작한 뒤 신학교를 세워 지금까지 많은 사역자를 길러내면서, 선교는 성공적으로 하고 있었다. 잠시 쉰 뒤에 우리는 학생들 식당에 가서 식사하였다. 많은 청년이 지방에서 와서 기숙사에 머물고 있어서 이 교단의 앞날이 밝게 보였다. 예쁜 꽃들과 나무들이 학교를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런 학문의 전당에 머물게 해 주셔서 고마웠다. 우리 기숙사 옆에는 학교 예배당이 있는데 밤늦게까지 학생들의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주님께서 어려운 가운데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든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친구 Walter 24년 만의 만남 1.14 화. 맑음
아침에 Daniel이 나에게 어젯밤에 Walter 형제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전해 준다. 사실은 Walter가 낮에 몇 번 전화했는데 차를 타고 오는 중이어서 받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아침 9시경에 학교 정문에 오기로 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케냐를 떠나기 전에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어서 반가웠다. Daniel과 학교 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으며 오늘 내 친구가 오면 오늘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하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학교 안에서 산책을 하고 돌아와 정문에 나가니 Walter 형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24년 만의 만남이었다. 반가운 포옹을 하였다. 세월이 무심하지 않아 그도 많이 늙어 있었다. Walter는 우리를 자기 집으로 가자고 청한다. Daniel을 소개하고 함께 Taxi로 학교 반대편으로 갔는데 길을 고치느라 파헤쳐놔서 차가 갈 수가 없어서 걸어서 동네를 지나고 골목을 지나 형제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방에 들어가니 부인 자매가 아주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부인은 얼굴색이 진한 검은색이고 몹시 뚱뚱하였다. 전에 Walter가 영국에 있을 때 자기 부인이 Typist로 직장에서 일한다고 하였다. 차와 과자를 나누면서 나는 형제들에게 이 귀한 시간에 집에만 있지 말고 밖에 나가자고 권했다. 어디를 가보고 싶으냐고 물어서 마사이 족이 사는 곳을 가보고 싶다고 하니 그들이 사는 부족 마을은 여기서 대단히 먼데, 한 마사이 부족이 얼마 전 시 외곽 Ebakasi라는 곳에 옮겨와서 정착하는 곳이 있다고 가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원주민들 생활의 모습을 전시한 공원이 있다고 하여 그 두 곳을 가보기로 하였다. 자매가 저녁은 자기가 준비한다고 알려 주면서 나보고 특별히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여서 Kenya Fish를 먹어 보고 싶다고 주문하였다.
▶ 마사이 마을 방문
Walter 아들이 길을 잘 알아서 함께 떠났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어느 곳에 가서 내려 들판을 걸어서 마사이 족이 정착하고 있다는 곳으로 가는데 맞은 편에서 키가 크고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붉은 장삼을 걸친 마사이 용사가 걸어온다. 나이는 좀 들었다. 나는 반가워서 사진을 한 장 찍자고 하니 응한다. 사진을 찍고 고맙다고 하자, 그는 손을 내민다. 모델료를 내라는 뜻이다. 나는 주머니 있는 일 실링 동전 두 개를 주었다. 공짜는 없었다.
한참 걸어 들어가니 마사이 청년들이 소들을 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둥근 집들이 보인다. 입구에는 사진 촬영 금지라고 쓰여 있다. 동네 안에는 소똥을 쌓아 놓은 무더기들이 있었다. 마사이 족은 소똥을 아주 소중히 여긴다. 흙으로 집을 짓고 안은 소똥으로 바른다. 그리고 땔감으로도 쓴다. 동네에 들어가는데 저쪽 소 무리 가운데서 남자들이 우리를 부른다. 우리는 길에 그대로 있고 Daniel과 Walter 형제만 가서 만나 잠시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는 동리 가까이 가서 돌아보았다. 그들의 집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보면 인구가 적은 부족인 것 같았다. 형제들이 왔다. 저 사람들은 이 부족 지도자들인데 내가 캐나다에서 마사이 족을 연구한 분인데 여러분의 전통적인 생활 모습을 보고 싶어서 왔다고 소개를 했단다. 그런데 그분들은 여기는 자기들의 새 장착 쥐어서 아직 안정되어 있지 않고, 전통복장을 하고 행사를 하려면 사람들도 다 없고 시간이 걸려서 안 되겠다고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본 것으로 좋다고 하였다. 짧은 시간에 마사이 족의 모든 것을 보려면 관광목적으로 마사이 족의 문화와 음식 그리고 전통춤 등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다 길들이 멀었다. 교통이 불편한 이곳에서 Group Tour나 차를 빌려야 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만두기로 하였다. 그러자 형제들이 케냐의 여러 부족의 움막집과 생활 모습을 만들어 전시해 놓은 Bommas 공원이 있다고 우리를 그리로 데리고 갔다. 마침 이 공원에 있는 convention Center에 국회의원들이 모여서 헌법 개정작업을 하고 있어서 공원 안에 길이 통제되거나 돌아가야 해서 불편했다. 공원에는 수많은 부족의 움막집들이 실제와 똑같이 만들어져 있었다. 움막들은 다 허리를 숙이고 낮은 자세로 들어가도록 낮고 좁았다. 그리고 안은 그리 넓지 않았다, 그저 잠만 자는 곳이었다. 먹는 일은 다 밖에서 주로 한다고 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하나하나를 들어가 보는데 시간이 쾌 걸렸다.
한 곳에 돌아오니 선물 가게들이 있는데 각 부족의 목각 공예품들이 가득했다. 넓은 곳에 흰 천막들을 치고 국회의원들이 분과별로 나뉘어 심의하고 있었다. 일본이 망한 뒤 한국 헌법이 일본법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졌고, 역사도 일본 사관에 의해 쓰여서 왜구의 냄새가 물씬 나서 시간을 두고 개정작업을 해 왔듯이, 케냐도 70년 영국 신민지 영향으로 독립이 된 지 반세기가 되어가는데 아직도 진정한 케냐인의 법다운 법을 가지지 못해서 이번에 대대적인 개정작업을 하느라고 진통을 겪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마침 국회의원들이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Daniel에게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지를 물어보라고 하였다. 거기 한 직원에게 물었더니 국회의원과 직원 외에는 먹지 못하고 팔지는 않는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지배인을 찾으라고 했다. 지배인이 왔다. Canada에서 온 나를 소개하고는 점심을 여기서 사 먹고 싶어서 한다고 했더니, O. K. 한다. 값은 한 사람이380실링이었다. 우리를 자리에 안내하여 주었다. 큰 파라솔이 달린 둥근 식탁에서 우리 다섯은 교제하면서 기억에 남을만한 식사를 했다.
▶ 엠마오 사무실 방문
돌아오는 길에 한 교회(모임)를 들러 보고, 엠마오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건물은 이 층이었다, 자체 건물인 것 같았다. 문서선교에 수고 많은 엠마오 직원, 형제자매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New Zealand 모임에서 온 선교사가 엠마오 문서선교를 주관하고 있었다. 엠마오 성경학교는 미국 Iowa 주에 있으며 세계 120여 개국 이상에 문서선교팀을 보내어 무료로 성경 과정을 배우게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는 훌륭한 문서선교 기관이다. New Zealand 선교사와 여러분들과 함께 잠시 교제를 나누었다. 밖에 나오니 자체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도 있었고 거기에서 주일은 교회로 모인다고 하였다. 좋은 만남의 교제였다. 종일 걷느라 더위에 지친 몸을 이끌고 Walter 형제 집으로 돌아왔다. 자매가 그동안 Fish&Chip을 만들어 놓았다. 혼자서 준비하느라 많이 바빴을 것이다. 고마웠다. 이 생선은 Victoria 호에서 잡은 것이라고 케냐에서 제일로 쳐주는 물고기라고 소개해 주는데 큰 붕어 비슷하게 생겼다. 자매님의 정성이 더해져서 그런지 아주 맛있었다. 나는 Walter 가족에게 우리는 내일모레 떠나게 된다고 말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섬기면서 잘 살라고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늦은 저녁 Walter 형제가 미리 준비한 택시로 기숙사로 돌아왔다. 보고 싶었던 친구는 만나서 반가웠고 오늘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다.
Walter는 보육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다른 주에서 하고 있었다. 자기들은 보육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지 않고 여기 나이로비에 살면서 원거리 운영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Walter는 나를 그곳에 한번 가보자고 청했지만, 시간도 없고 멀어서 사양했다. 유럽 쪽에서 후원을 받아서 지금까지 운영해 오고 있는 모양이다. 캐나다에서도 후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교회 사역을 하다가 이제는 사회사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딸은 애란에 살고 있고 큰아들은 영국에 살고 있었다. 살만한 아파트도 가지고 있고 이제 내가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오히려 주님 앞에 열심히 사는 Daniel 같은 형제를 도와야 할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 Daniel 형제와 헤어지다 1.15 수 비/맑음
아침에 비가 한참 내리더니 그쳤다. 여기는 그동안 한낮에도 비가 잠깐 내리곤 한다. 오전은 학교 가까이에 있는 시장 거리와 재래시장을 가서 돌아보았다. Daniel이 오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내일 아이들 학교로 돌아가고 집에도 일이 있다고 하였다. 얼마의 아이들 학비라도 보태어 주어야 하는데 여기는 은행도 없고, 오후에 함께 우리가 머물렀던 호텔이 있는 곳으로 시내버스로 갔다. 호텔에 가서 돈을 바꾸어 5000실링을 아이들 학비에 보태어 쓰라고 주고는 그동안 우리를 위해 수고 많은 형제를 버스에 태워서 떠나 보내었다. 그 형제와 헤어지니 섭섭한 마음이 내 마음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같은 번호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로 돌아왔다. 여기 온 뒤로 자매를 잘 먹이지 못하여 살이 많이 빠졌다.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은 자매가 아래 뱃살로 늘 마음을 써왔는데 그 살이 다 빠져서 자연적으로 diet가 되어 버렸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학교 식당에서 끼니마다 학생들이 먹는 음식 가운데 한국에서 쌀로 뻥튀긴 것 같은 누르스름한 손바닥만 한 과자 같은 조각들을 담아가서 먹어서 무엇인지 한번 먹어 보고 싶어서 오늘 물어보니 옥수숫가루를 튀겨서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케냐여! 안녕 1.16 목. 맑음
아침에 서무실에 가서 그동안 머문 기숙사비와 음식값을 계산했다. 잠시 뒤 Walter가 우리에게 줄 선물들을 가지고 왔다. 목각 기린과 마사이 족의 앉은뱅이 의자, 그리고 갈대로 만든 케냐의 큰 가방에 담아 가지고 왔다. 우리가 가지고 온 모든 것들은 다니엘 형제 쪽에 다 주고 이제 친구 Walter에게 그리 줄 만한 것이 없었다. 나는 내가 입던 와이셔츠와 양말 사탕들 있는 것을 다 싸고 US $20과 CDN $20을 싸서 주었다. 공항에 따라오려고 하는 것을 말려서 거리에서 Taxi를 타면서 헤어졌다. 올 때는 밤에 도착해서 나이로비 공항 가는 길과 공항을 잘 못 보았는데 이제야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check in을 하고 X-Ray 검사대에서 검사하는 직원은 거칠게 대하고 있어서 기분이 좀 언짢았다. 택시비를 주고 남은 케냐 돈으로 아이들에게 줄 몇 가지 기념품들을 샀다. 탑승 대기실에서 기다리는데 날틀이 30분 늦게 떠난다는 방송이 나온다. 여기는 일단 들어오고 나면 화장실이 없다. 나는 직원에게 화장실을 가고 싶다니까 안 된다고 하면서 탑승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명색이 이 나라의 관문인 국제공항인데 탑승 대기실에 화장실이 없는 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10시 50분 우리를 태운 Kenya Air는 푸른 하늘로 치솟았다. 나이로비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승무원들은 모두 Kenya 남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Africa의 푸른 하늘을 날면서 날틀 안에서의 점심은 즐거웠다. 영혼 구원을 위한 열정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은 나라 Kenya는 복 받은 나라였다. 두 주간 Kenya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생활한 것은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큰 특권이며 축복이었다. 원래는 단기선교로 여러 지역에 전도하며 말씀을 전하는 기대했지만, 주님은 이렇게 믿는 자들 가운데서 조용히 교제하는 것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셨다. 움츠리고 살다가 이곳에서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마음대로 개인 전도를 하며 어깨를 활짝 펴보게 되어서 제일 기뻤던 것 같다. 중국에서 지금까지 8년을 살면서 안식년이라는 것을 가져보지 못한 우리에게 불과 두 주간이기는 하지만 일 년 못지않은 귀하고 보람된 시간이었다. 케냐에서 주신 주님의 은혜로 재충전된 우리가 이제 중국에서 주님을 더 잘 섬겨야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Kenya의 하늘을 벗어나고 있었다.
♣♣ 이 케냐 단기선교 글은 2013년 토론 토 크리스천 포스트에 연재되어 많은 사람과 나누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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