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akuru Safari(자연공원) 1.10 토. 맑음 2004
Daniel과 우리 셋은 길에 나와서 버스를 타고 NAKURU 시로 나왔다. 전에 우리가 여기 올 때 작은 버스를 타던 공원이 있는 곳이다.
마침 이 공원에서는 두 개의 기독교 진영에서 와서 저 나름대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한쪽은 성령 파이고 다른 쪽은 조용한 복음주의였다. 심지어 흰옷을 입고 흰 모자를 쓴 무슬림도 같은 장소에서 노방 전도를 하고 있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경쟁적으로 메가폰으로 소리소리 지르고 있어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시끄러울 뿐이었다. 어쨌든 이 나라에 복음 전하는 열망을 가진 분들이 많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Daniel이 자연동물원으로 가는 버스를 알아보는데 쉽지 않은 모양이다. 한 참 만에 그곳 가까이 가는 버스를 알아내어 우리를 자연동물원까지 태워다 주기로 하고 탔다. 한곳에 오니 손님들은 다 내린다. 우리 셋만 태워서 한 6km나 되는 Safari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이때가 11시쯤 되었다. 사파리 들어가는 표를 사려고 보니 한 사람 입장료가 15불인데 외국인은 30불이라고 쓰여 있다. 중국 개방 초기 같이 여기도 외국인은 차별하여 한 배를 더 받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열이 좀 나서 여기를 꼭 들어가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 둘 60하고 Daniel 하면 75불인데 여기다가 조금만 더 보태면 교회 키보드 하나를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들어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자매에게 우리 들어가지 말고 키보드 사는데 보태자고 했더니 좋아했다. 그리고 Daniel 형제에게 여기는 네 나라이고 가까운 곳에 있으니 언제든지 와 볼 수 있으니까 오늘 이 돈에다 더 보태어 교회 키보드를 하나 사자고 의논했더니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면서 기뻐서 날리다. 우리는 발길을 돌려 나왔다. 갑자기 비가 좀 내리기 시작하더니 금방 멈추었다. 크기는 작아도 맹수들은 캐나다 야생 동물원, 한국 자연공원 그리고 독일에서 보아서 꼭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 지역에서 이름난 자연동물원인데 시내와 연결하는 공공버스가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걸을 수밖에는 없었다. 양쪽에 안전 철망을 친 긴 길을 한참 걸어 나오다 보니 12시가 지나고 있었다. 길과 철망 사이 풀밭에는 큰 나무들이 드문드문 마치 가로수같이 보기 좋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큰 나무 그늘 아래에 점심을 먹으려고 자리를 잡앗다. 오늘 점심은 토론토에서 가져간 컵 신라면이다. 얼룩말들이 철망 안 큰 나무 그늘에 모여서 쉬고 있는 모습들이 보이고 사슴, 등 초식동물들의 움직임이 보여서 들어가지 않아도 절반은 본 셈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면서 무더위를 식힌다. 우리는 보온병에 담아 온 더운물을 부어서 신 라면 먹을 준비를 하고 가져간 먹을 것들을 내놓았다. 이때 이 공원에서 일하는 세 사람이 지나가다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오라고 하여 초콜릿을 하나씩 주니 고맙다고 반가워한다. 날이 더워서 초콜릿이 녹아서 물렁물렁해졌다. Daniel이 그들에게 오늘 일을 설명하니까 안 들어가기를 잘했다고 하면서 이 더운 낯에는 들어가 보아야 맹수들을 깊은 그늘에서 잠자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없고 저기 보이는 얼룩말 사슴 노루 들소 등만 보인다고 한다. 전에 사자가 철망을 넘어와서 사람을 헤친 적이 있어서 울타리를 조금 높였지만 그래도 주위를 살피라고 말해 주었다. 외국 사람들에게 입장료를 배나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 떠나갔다. 한참을 걸어 나오니 동네가 나오고 버스 타는 곳이 나왔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왔다. NAKURU는 큰 도시였다. 먼저 은행에 가서 US $200을 바꾸어 악기점으로 갔다. Daniel이 여러 개를 쳐 보더니 Yamaha를 사겠다고 하여 19,500실링을 주고 샀다. 그리고 큰 식품가게에 가서 월요일 소풍을 가면 Daniel 식구들에게 먹이려고 컵라면을 사고자 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모자라서였다. 이런 곳에 한국 라면이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찾아보니 안 보인다. 점원에게 물었더니 한곳을 보여 준다.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한국 것은 없고 싱가포르에서 만든 컵라면이 있어서 5개를 샀다. 그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 키보드
오늘 우리는 Safari를 보고 마음에 짐승 그림을 가지고 오는 대신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큼직한 악기를 들고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잘한 하루였다.
우리가 가진 특권이나 권리를 나를 위하여 쓰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쓴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다. Daniel은 전기 납땜 도구를 꺼내서 교회당 안의 스피커에 연결하고서는 복음 송을 쳐 대는데 프로급이었다. 내일 주일 이 교회가 찬양으로 들썩일 것 같아서 기대되었다. 저녁에 고등학교 선생을 하는 집사님과 여러 자매님이 잠시 와서 교제하다가 갔다. 고등학교 기숙사에 있는 큰딸이 돌아와서 얼굴을 볼 수가 있어서 반가웠다. 우리는 가지고 간 가방의 옷가지들을 여기에다 풀어놓기로 했다. 원래 우리가 Walter 형제에게 주려고 가지고 온 선물들이지만 주님은 여기 사람들에게 주시도록 하셨다. 옷이라고 새것은 아니지만, 새것이나 다름없는 것들이었다. 9시 반에 저녁을 먹고 모든 것들을 내놓았다. 이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 줄 알았더라면 더 많이 가져올 것을 하고 자매가 몹시 아쉬워하고 있었다. 모두 기뻐하고 고마워했다. 냉장고가 없어서 초콜릿이 낮에는 물렁물렁 녹았다가 저녁에는 좀 굳어지곤 하였다. 주일에 아이들에게 주려고 기다리느라 보관하는데 걱정스러운 마음이다.
▶ 주일 예배 1. 11 주일. 맑음
9시가 넘어가자 여기저기서 둥 둥 둥둥 하는 북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한다. 교회마다 찬송할 때 두드려 대는 작은 북소리였다. 여기 교회도 10시에 어린이 청년 주일학교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교회당에는 아모스 형제가 청년들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언덕 아래 목사 사택을 짓다 만 곳에서는 어린이 주일학교를 아모스 누나가 가르치고 있었다. 한 20여 명이 모였고, 아이들도 찬송가 부를 때는 모두 일어나서 몸을 흔들며 막춤을 추면서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간증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있었다. 어린아이나 큰 아이들이 지난 주간 자기가 경험한 것들을 자유롭게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사탕과 초콜릿을 나누어 주면서 반가움의 손을 잡았다.
▶ 주일학교
10시쯤에 청년회와 주일학교가 끝났다. 본 예배당에는 한 분의 노 자매님이 오셔서 의자를 정돈하고 걸레로 닦고 있어서 고마웠다.
♣ 케냐는 영국의 지배를 오래 받아서 서양문화에 젖어 있을 것 같은데, 교회 형제자매들이 섞여 앉지 않고 남녀가 따로 앉고 있었다
10시 반이 되자 예배당 자리가 반 정도 찬다. 그리고 찬송이 시작되었다. 작은 북 두 개를 형제들이 힘껏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면서 찬송을 인도하는데 놀란 것은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름대로 막춤을 추면서 찬양을 한다.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이라 우리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곧 이렇게 신나게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게 되었다. 이것이 아프리카 문화였다. 11시가 되지 Daniel이 키보드를 치면서 부르는 찬양은 정말 열광적이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 두 사람만이 어색할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함께 어울리려고 애를 썼다. 형제와 자매들이 따로 앉는 습관이 한국과 같은 것 같았다. 나는 촬영을 하면서 회중 가운데로 다니면서 갓난아이들. 울고 보채는 아이들에게 일일이 사탕과 초콜릿을 나누어 주면서 진정시켰다. Daniel 목사는 교회에 우리를 소개하고 있었다. Daniel 목사는 이년 전 키보드가 망가진 뒤부터 지금까지 주님께서 키보드 주시기를 기도해 왔는데, 주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방문한 김 선교사 부부를 통해서 응답해 주셨다고 할 때 전 회중이 아멘, '아멘' 하고 주님을 높이고 있었다. 우리를 일어서게 해서 박수로 환영해 주었다. 설교에서도 두 가지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 케냐교회의 헌금하는 시간
스와힐리어로 말하면 영어로, 영어로 하면 스와힐리어로 통역을 하고 있었다. 영어통역은 우리 때문이었다. 그리고 찬양을 하고는 헌금하는 시간이 되었다. 강대상에 입이 넓은 케냐 바구니를 놓고 찬양하는 동안 자유롭게 나가서 헌금을 하고 있었다. 이 습관이 우리하고 달랐다. 중국은 어느 교회나 헌금을 그릇으로 거두는 일은 없다. 무기명 헌금함을 놓거나 달아놓아 누구든지 언제든지 헌금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영적으로 한국교회보다 더 높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거두지 않으면 헌금이 덜 나올 것이라는 염려는 사람의 생각이다. 한국교회는 한 수 더 떠서 헌금자의 이름을 밝히고 축복 기도한다는 명목은 기복적으로 사람을 부추겨 오기도 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을 주님만 아시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믿음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내색하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버리게 될 때 영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헌금이 끝나고 이번에는 통역 없이 스와힐리로 광고 같은 것을 한참 하더니 또 한 번의 헌금을 한다.
그리고 나의 설교 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동안 배운 스와힐리어로 “와 누구와 다다 하바리야코"(형제자매님들 안녕하십니까?) “문구아 와바리키"(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라는 말을 하니 모두 웃으며 좋아하며 박수를 쳐 준다.
나는 본문 왕하 6:1-7에서 문제의 해결점과 우리를 건지시기 위하여 이 땅에 던져진 십자가로, 복음을 전했다. 고등학교 선생 형제가 통역하다가 단어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내 설교 원고 단어를 보여 주어도 어떤 것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자 Daniel이 들어서서 통역을 잘하여 설교를 마쳤다. 주님께 감사한 일이었다.
Daniel은 자기 집에서 몇몇 형제들과 함께 점심을 먹도록 준비를 하였다. 몇몇 자매님들도 함께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보기에 좋았다. 처음 보는 형제자매들과 식사를 하면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교제를 즐길 수가 있었다. 모두 우리의 방문을 환영해 주면서 아침 설교에 은혜가 있었다는 듣기 좋은 말들을 해 주었다.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시는 동안 Daniel이 흰 봉투 하나를 내 앞에 내놓으면서 받으라고 한다. 무엇이냐고 물으니 오늘 두 번째 헌금은 김 선교사를 위해서 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통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의 필요를 위해서 쓰라고 도로 밀어주니 작은 것이지만 감사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이니 받아달라고 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고맙게 받았다. 주님은 이 나그네에게 케냐 성도들의 사랑을 받게 해 주셨다.
▶ KABAZI 장날
이곳은 주일마다 장날이 선다고 한다. 우리는 장 구경도 가고 내일 피크닉갈 채소와 과일을 사러 갔다. 꼭 한국의 시골 장터였다. 배추는 없어서 상추, 오이 등 내일 먹을 셀러리 만들 채소들을 좀 샀다. 그리고 방금 따 온 옥수수가 있어서 우리 식구들이 먹을 만큼 샀다. 달걀도 좀 샀다. 시골 장에서 장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양배추 김치를 만들려고 준비를 했다. 고춧가루도 살 수가 있었다. 양곡상을 하시는 교회의 장로님을 만나 그분 가게를 잠시 들려 보았다.
오후 늦게 나는 Daniel 형제에게 아모스 형제 집에 가자고 했다. 우리 넷이 아래 동네에 사는 아모스 집을 찾아갔다. 주일학교를 하던 누나도 그 옆에 살고 있었다. 결혼한 지 한 달이 되어서 여기 신혼 방은 어떻게 꾸며 놓고 살까 하는 궁금한 마음으로 들어가 보니 이렇다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좀 오래된 판잣집에 어스름한 침대와 TV가 새것이었고 몇 개의 낡은 의자 말고는 신혼이라고 새로 꾸미거나 장만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 어려운 가운데 주안에서 만나 이렇게 하나가 되어 있었다. 우리 네 사람 아모스 부부와 누나가 모두 앉기가 넉넉하지 않았다. 홍차를 나누면서 교제를 나누었다. 나는 아모스에게 결혼도 축하하고 주님의 일을 하고자 신학교에 입학한 것을 축하한다고 격려했다. 그리고 교회에서 준 봉투를 열었다. 3,543(약 $60) 실링이었다. 거기에다가 캐나다 $100을 보태어 주면서 등록금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큰 등록금을 마련하는데 작은 불씨가 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축복하여 주시기를 위하여 기도드렸다. 아모스 형제가 감격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돌아오다가 한 형제의 집에 들렀다. 깨끗하게 해 놓고 살고 있었다. 잠시 집에 들어갔다가 밖에 화장실을 가보니 구조가 똑같았고 깨끗했다. 일반적으로 모두 이렇게 해 놓고 사는 것 같았다. 돌아오면서 장을 보고 돌아가는 형제자매들을 길에서 만나 주의 평안을 축복해주면서 헤어졌다. 이제 어두움이 밀려오려는 순간에 장터에 왔던 여러 모양의 사람들이 각각 자기들의 식구들이 기다리는 처소를 향하여 동서남북으로 부지런히 흩어져 가는 모습들이 행복하게 보였다. 아내는 자매들과 김치 만드는 것을 보여 주면서 맵지 않게 만들었다. 오늘도 아홉 시 반이 되어서 저녁을 먹었다. 오늘 주일은 Kenya의 여러 형제자매와 교제하는 즐거운 날들이었다.
▶ Thomson Fall 1월 12일 월 맑음
오늘은 Thomson Fall로 소풍 가는 날이다. 그동안 수고한 식구들, 가까이 있으면서도 쉽게 가보지 못하고 있는 식구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소풍을 가는 우리 일행은 Daniel 가족 네 명 두 조카와 우리 모두 여덟 명이었다. 두 조카와 사모는 어저께 준 옷들을 입고 나왔는데 보기에 좋았다. 길에 나가 버스를 탔다. 북쪽 큰 고개를 오르더니 다시 내려가 평지 길을 달리고 있었다. 자리가 없어서 모두 서가야만 했다. 한 40Km 와서 Nyahururu라는 도시에서 내렸다. 여기는 제법 북적거리는 큰 읍내 도시였다. 여기서 나는 소시지와 빵을 좀 샀다. 그리고 또다시 소형 버스를 타고 3Km 정도 달려 길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니 Thompson Fall이라는 폭포의 안내판이 나온다. 다시 한참을 걸어 들어가니 폭포 관광지가 나온다. 영국식 고전적인 호텔도 하나 있고 선물 가게들도 있었다. 영국 사람이 처음 발견했다고 그 사람의 이름을 붙여 Thomson Fall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곳 원주민에 대한 모독이며 자존심 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이 폭포는 원래부터 원주민 조상 대대로 가지고 있었는데, 침략자들이 남의 땅에 와서 자기가 처음 보았다고 해서 이름도 제멋대로 지은 것이다. 이 나라는 지난 70년 동안 영국 식민 제국주의자들의 발굽에 짓밟히면서 나라 전체에 영국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우리 대한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지식이 있었어도 왜구에게 36년간 침탈을 당해 지금도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데, 역사와 문화가 없었던 다수의 부족이 살던 이곳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래도 다행한 것은 영국 침략 제국주의자들은 일본 침략자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기독교와 영어를 남겨 놓았다. 폭포는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저 굵은 한줄기 물이 72m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건너편 들판에는 검은원숭이 떼들이 몰려다니면서 놀고 있는 것이 정말 자연의 나라였다. 저 원숭이는 잡아먹기도 하느냐고 물으니 전에는 잡아먹었는데, 지금은 수가 많이 줄어들어 국가 보호 동물이 되어서 법으로 못 잡아먹게 한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깊은 숲 속 길을 따라 내려가 폭포 물이 떨어져 흘러가는 곳을 보고 올라왔다. 폭포 옆 잔디밭에는 원주민 옷차림과 화장을 한몇 사람이 사진을 함께 찍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몇 푼 주고 모두 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고 우리는 선물가게에 가서 코끼리, 마사이족들의 목각 인형들을 부르는 값에 60%는 깎아서 샀다. 그리고 더운 물들을 얻어 가지고 나무 그늘이 있는 한 곳에 자리를 잡고 둘러앉았다. 컵 라면들을 먹기 위해 더운물을 붓고 5분 기다리라고 가르쳐 주었다. 일평생 이런 라면은 모두 처음 먹어 본다고 하면서 좋아했다. 그리고 어저께 만든 양배추 김치와 모든 것들을 내놓고 즐거운 소풍 점심을 나누었다. 다 먹은 뒤 소화를 위하여 복음 송을 부르자고 하니 Daniel 형제가 먼저 부르니 모두 따라 부르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몇 곡을 부르면서 주님을 찬양했다. 즐거운 하루였다. 돌아와서 모두 피곤할 텐데 또 저녁을 준비하여 9시 반에 먹었다. 모두 양배추 김치가 맛이 있었다고 하면서, 자기들은 그렇게 만들어 먹을 줄 몰랐다고 하면서 앞으로 그렇게 만들어 먹겠다고 하였다. 저녁에는 아모스가 놀러 와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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