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교회 3분 동영상(잠시 기다리세요 됩니다)
◈ K e n y a(케냐)
크기 : 582,646㎢
수도 : 나이로비
인구 : 3,280만(2005)
공용어-영어와 스와힐리어
민족구성은 복잡하리만큼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키쿠유족 22%, 루히아 족 14%, 루오족 13%, 칼렌진족 12%, 캄바족 11%, 캐시족 6%, 메로족 6%, 기타 아프리카계 15%, 비아프리카계(남아시아인, 영국인, 아랍인) 1%이다. 동쪽은 인도양이며 북동쪽으로 소말리아, 북쪽으로 에티오피아와 수단, 서쪽으로 우간다, 남쪽으로 탄자니아와 국경을 맞닿고 있다.
▶ 케냐의 역사
케냐의 식민시대 역사는 1885년 독일이 잔지바르(현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섬) 술탄의 케냐 해안 영토에 보호령을 설치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1890년에 영국이 독일로부터 이 지역의 영토 지배권을 넘겨받으면서 케냐는 영국의 식민통치 지배 밑에 놓이게 된다. 1952년 10월부터 1959년 12월까지 케냐는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마우마우 반란으로 영국은 단계적으로 케냐의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57년 처음으로 아프리카인들이 피선거권을 가진 입법 회의 직접 선거를 치렀고, 드디어 1963년 12월 12일 케냐는 영국 제국주의 식민지에서 독립을 하였다.
▶케냐에 관한 관심
우리가 케냐를 가보고 싶어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979년 영국 Chelston Bible College에서 선교사 훈련 코스를 하고 있을 때 세 학기 가운데 나와 두 학기를 같이 공부한 Walter Osamo라는 흑인 형제 때문이었다. 그는 형편이 몹시 어려워서 적게나마 내가 좀 도와주어야 했던 형제였고 그 뒤로 우리는 계속 교제 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검은 사람들이 사는 대륙을 한번 가보고 싶었고 그곳에서는 주님께서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지를 알고 싶었다. 2003년 11월 우리는 중국 선교지에서 잠시 캐나다로 돌아와 있는 동안 주님께서는 우리를 Kenya에 가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
▶케냐 여행준비
케냐를 갈 수 있게 된 벅찬 마음은 준비하는 과정에서 좀 염려스러운 일들이 생겼다. 나의 친구 Walter 형제에게 케냐에 간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메일로도 전화로도 전혀 연락되지를 않았다. 6개월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서로 메일을 주고받았는데 지금 메일이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매일 여러 날 전화를 하여 보지만 전혀 되지를 않는다. 나는 캐나다 교환을 불러서 사정을 말하고 번호를 주고 알아보아 달라고 했다. 캐나다 교환이 케냐 교환을 불러서 나에게 연결해주어서 사정을 말하니, 내가 가진 번호는 케냐 핸드폰 번호인데 지금은 쓰지 않는 번호라고 한다. 수십 년 동안 벼르다가 이제 가려고 하는데 연락이 되지를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마음이 좀 번거롭기는 했지만, 케냐에 가서 만나게 되리라는 믿음으로 가기로 했다. 우리의 여정은 14일간이며, 토론토에서 Netheland의 수도 암스테르담을 거쳐 케냐로 가는 길이다.
◈ Kenya 단기 선교 1.4-17, 2004
케냐로 1.4 맑음
흰 눈이 온 세상을 두껍게 옷 입히고 있던 1월 4일 우리는 그리운 친구가 있는 Kenya로 떠났다. 저녁 8시 30분 우리를 실은 KLM 날틀은 캐나다를 벗어나 대서양을 날고 있었다. 보름이 며칠 남지 않은 하늘에는 밝은 달님과 저 멀리 별님들이 창공의 고요함을 깨고 지나가는 무례한 날틀을 지켜보고 있었다. 창공에도 깊은 어두움이 묻혀있고 날틀 안에도 어두움이 드리워지고 피곤한 나그네들의 숨결은 꿈속을 헤매는 듯한데, 이 나그네는 잠 못 이루며 처음 가는 검은 대륙에서 주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또 친구는 어떻게 만나게 될 것인지를 마음에 그리고 있었다. 계수나무 활짝 핀 달님이 이렇게 우리와 가까이하면서 어두운 밤길을 밝혀 주고 있어서 반갑기만 했다. 중국에서 우리의 삶은 늘 주위를 살피고 조심하면서 본의 아니게 경계하는 습관으로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다가 이제 이렇게 풀어져 잠시 쉴 수 있는 것도 우리만이 누리는 하나님의 축복일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나 있는 자 못지않게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넘치시는 분이시다.
길 친구를 만나다 1.5 월. 맑음
잠시 꿈속을 다녀오니 동창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달려 아침 7시 20분에 날틀은 암스테르담 국제공항에 내렸다. 나는 우선 Business center에 가서 메일을 열어 보니 아무 소식이 없다. Kenya는 가까워져 오고 있는데 친구와 연락이 되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나는 함께할 친구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혹시 케냐에 사는 한국 사람이라도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으로 머리 검은 사람들을 찾아보는데 두 사람은 중국 사람이었다. Kenya로 가는 탑승 대기실에는 검은 사람들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룻밤 만에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날틀을 타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 자리인 13번 A와 B 자리에 가니 키가 큰 흑인이 C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Excuses me, 하자 얼른 알아차리고 벌떡 일어서더니 정중히 안으로 들어가라고 친절하게 말한다. 고맙다고 하고 자리에 앉아서 그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내 이름을 말하니 자기는 Daniel이라고 하면서 The church of God 교회의 목사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을 때 나는 할렐루야! 하고 외쳤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좋은 친구를 만나게 해 주신 것이다. 어디에 갔다가 오느냐고 물으니 네 명의 목사들이 독일 Frankfurt에서 있었던 국제 수양회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면서 건너편에 앉은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분도 우리 보고 시간이 되면 지기 지역에도 한번 다녀가라고 청해 주어서 고마웠다. 주님께서는 그들 네 사람 가운데 세 사람은 한자리에 앉게 하고 Daniel은 친구들과 좀 떨어진 자리에서 이렇게 우리를 만나게 하셔서 앞으로 우리의 길잡이로 삼고 계셨다. 그리고 그에게도 복을 받도록 해 주시고 계셨다. 나는 그에게 친구 Walter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내일 자기가 나이로비 전화국에 가서 그 이름으로 등록된 번호를 찾아봐 주겠다고 하여서 고마웠다. 나는 그에게 구원에 대한 교제를 나누었는데, 놀랍게도 그로부터 주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는 간증을 듣게 되어서 반가웠다. 그리고 나이로비와 Kenya 나라에 대해서 또 Daniel이 사역하고 있는 지역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날틀은 어느덧 아프리카 대륙을 날고 있었다. 날틀은 암스테르담에서 유럽을 가로질러 동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북위 30도와 40도 사이로 똑바로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지중해를 건너 아프리카의 넓은 밀림지대와 평야 지대를 내려다보면서 이제 우리가 아프리카에 온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전 10:20 떠난 KLM 날틀은 8시간을 날아 내려와 어두워진 8시 30분경 나이로비 공항에 내렸다. Daniel과는 내일 연락하기로 하고 우리는 먼저 이민국에 가서 미화 $50 내고 입국 비자를 받았다. 가방을 찾아 밖에 나오는데 우리들의 이름을 쓴 피켓을 든 사람이 있었다. 신기해서 그에게 가서 이 이름이 난데 누구냐고 물으니, Marriot 호텔에 예약한 Mr. Kim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자 자기는 taxi 기사인데 우리를 호텔에 모시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차비를 물으니 미화 $10 불이라고 한다. 나는 여기 사정을 잘 몰라서 마침 저쪽에 Daniel이 보여서 그에게 택시 값이 어떠냐고 물으니 조금 비싸기는 해도 지금 밤 10시가 되니 그냥 타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택시 운전사에게 와서 잘 모셔다드리라고 한마디 하고는 내일 연락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공항도 그리 밝지 않지만, 나이로비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는 가로등이 없는 캄캄한 길이다. 어둡기는 중국과 같았다. 대개 어느 나라를 가보면 주로 공항에서 수도로 들어가는 고속도로는 불빛이 환하여 처음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밝게 해 주는데 이렇게 침침해서야…. 그러나 사는 형편이 어려운데 어찌하겠는가! 처음 중국이 그랬지만, 경제 형편이 나아지면서 조금씩 밝게 사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생각한다면 차도 별로 안 다니는 길에 엄청난 전기를 태워 없앨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드문드문 이라도 가로등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친구의 나라에 온 것만으로도 마음만은 밝았다. 택시 기사와 케냐의 여러 사정을 묻고 들으면서 인터넷으로 예약한 Marriott Hotel에 왔다. check in하고 방에 드는데 층에는 경비원이 복도 끝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분위기가 삼엄함을 느꼈다. 시간이 11시를 넘고 있었다. 방에는 더운물을 끓이는 주전자가 없었다. 전화로 더운물을 달라고 하였다. 얼마 뒤 주전자에 물을 가져왔다. 가져간 컵 신 라면을 저녁으로 먹으면서 케냐에서의 첫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나이로비의 아침 1.6 화. 맑음
아침거리 풍경을 보고자 7시경 혼자 호텔 밖으로 나왔다. 아침 바람결이 좀 서늘하다는 느낌이었다. 우선 나를 서먹하게 하는 것은 온통 검은 사람들뿐이라는 것이다. 중국에 처음 가서 살면서 붉은 벽돌로 지은 붉은 색깔과 검고 진한 곤 색 옷을 입은 사람들과 한겨울 지나면서 색깔에 대한 피곤함을 느꼈듯이 여기에서는 검은 색깔에 적응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길거리 신문 잡지 파는 곳에 가보았더니 이곳의 언어인 스와힐리어로 된 것은 몇 가지 밖에 안 되고 모두가 영어로 되어있었다. 어림잡아 세어보니 80% 정도는 영어가 차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나라는 70년 동안 영국 식민지로 있으면서 언어와 사회구조가 영국화 되어있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정도 나오면 영어가 일상 언어가 되고 있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제나라 말인 스와힐리어를 쓴다고 보면 좋을 것 같았다. 우리가 머무는 곳은 나이로비 시내 상업 중심지였다. 호텔들도 몇 개가 모여 있고 백인 관광객들이 더러 보인다. 호텔은 층마다 그리고 거리의 식당과 슈퍼마켓 등 예외 없이 크고 작은 가게마다 고무 방망이를 든 제복의 경비가 한 사람씩 문 앞에서 지키고 있어서 사회 분위기가 좀 삼엄하고 긴장되게 느껴졌다. 낮에도 이 사회는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어서 중국과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8시가 되자 미국 자매 선교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소개를 하고 Walter 형제에 관해서 설명하고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부탁했더니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한번 알아볼 테니 얼마 뒤에 다시 전화해 달라고 하여 전화를 했더니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Water 형제에게 이 편지를 받으면 Daniel 핸드폰으로 연락해 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아래 로비에 내려가니 마침 우표를 살 수가 있어서 우표를 붙여 우편함에 넣고 주님 Walter가 이 편지를 빨리 받아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기념 우표들을 여러 장 쌌다. 사서함 주소여서 속달도 안 되었다. 우선 우리는 그를 찾는 일은 그만두고 Daniel을 따라 그가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호텔 로비에서 US$ 200을 케냐 돈 Shilling(KES)으로 바꾸었다. 환율은 US$ 1 = 50.53 KES 이다. 마침 관광 안내소 있어서 그 유명하다는 사파리(Safari) 자연 동물원 가는 일들을 알아보았는데 당일은 미화 $150-200 정도 든다고 하였다. 일박 이일 코스가 편하고 좋다고 소개해 주었다. 나이로비에서 거리가 265Km 정도 되는데 길이 좋지 않아서 4~5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짐승들이 낯에는 다 그늘에서 잠자기 때문에 이른 아침과 해지는 저녁에 볼 수 있으므로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한다. Safari는 TV에서 보아 대충 알고 있어서 꼭 가고자 하는 마음은 없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 보고 가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다.
Daniel에게 연락해서 hotel로 오라고 했다. 한 시간 뒤에 Daniel이 왔다. 우리는 함께 hotel 식당에서 서양식 뷔페로 점심을 하면서 나의 계획을 나누었다. 오늘과 내일은 여기 나이로비를 돌아보고 모래는 형제를 따라가겠다고 하니 할렐루야! 하면서 좋아했다. 내가 마사이 족의 재래시장을 가지고 하니 매일 장이 서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두 번 서는데 내일이 장이 서는 날이라고 한다. 그래서 오늘은 과일 채소 각종 물건을 파는 도매 시장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우리는 먼저 청과 도매 시장으로 갔다. 시장 바닥은 질고 무질서하게 오가는 그 많은 시장 사람들을 뚫고 나가며 비디오 촬영을 하려니 몹시 힘들었다. Daniel은 앞서서 사람들을 해치면서 우리가 나아가기 편하게 하려고 애를 써 주었다. 엄청나게 쌓여 있는 망고, 바나나, 이름 모를 열대 지방의 신기한 과일들이 널려 있었다. 한 곳을 돌아가니 Daniel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믿는 형제들이었다. 인사들을 나누고 형제들은 무슨 사업을 하느냐고 물으니 4톤 트럭을 가리키는데 보니 귤을 가득히 싣고 사갈 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먹어 보라고 우리에게 몇 개를 주었다. 이런 곳에서 믿는 형제들을 만나니 반가웠고 촬영하는 데 마음이 편했다. 과일 파는 곳을 지나 채소 시장으로 오니 각종 채소와 옥수수 감자 등 개인 장사들이 늘어앉아 있었다. 중국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쌍차이(香菜, 고수)도 팔고 있었다. 나는 Daniel에게 여기 사람들도 이것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니 흔하게 먹는 것은 아니나 고기 요리에 좀 쓴다고 하였다. 한국에도 고수가 있어서 어려서부터 먹어 본 사람은 잘 알고 있다. 고수의 냄새가 빈대 냄새 같아서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냄새 때문에 먹지 못한다. 그러나 빈대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이해가 잘 안 될 것이다. 이 고수는 해독작용을 하며 소화를 돕는 향료이다. 중국 사람들은 무슨 음식이든 고수가 있어야 음식 맛을 낸다고 한다. 나도 중국에서 이 향채를 편하게 먹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시골 아주머니에게서 자두와 토마토를 조금 샀다. 우리는 사람들 틈을 벗어나서 다른 곳으로 가보았다.
그곳에서는 길가에서 노방전도 하는 무리를 보았는데 얼마 만에 보는 노방전도인가! 우리가 전에 한국 대구 시장에서 거창 장터, 그리고 오산 장터에서 장날에 노방전도 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케냐 그리스도인들의 전도에 대한 열정과 살아 있는 믿음을 볼 수 있었다.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시내버스를 타고 중심가에 들어와서 전화국에 들렸다. Daniel이 내 사정을 말하고 Walter의 주소를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이미 사용하지 않는 번호여서 더욱 찾을 수가 없었다. 큰 백화점에 들러 보고 상가가 있는 거리를 걸어 호텔로 돌아오면서 저녁 먹을 것을 사 왔다. 오늘 수고한 Walter 형제는 내일 9시경에 다시 오기로 하고 헤어졌다. 해발 1600m의 높은 곳에 있는 나이로비는 일교차가 심했다. 오늘 한낮에는 얼마나 더운지 섭씨 37도의 불볕더위였다. 우리는 더워 죽겠는데 Daniel은 독일서부터 입고 온 오리털 잠바를 그대로 입고 덥지도 않은지 종일 벗는 일이 없었다. 선선한 저녁인데 낯에 탄 얼굴과 목이 화끈거리고 더위를 좀 먹은 것 같다. 오늘은 지칠 것 같은 피곤한 하루였다.
▶마사이 족의 재래시장 01.07 약간의 비
케냐에서 두 번째 날이 밝았다. 몸이 아주 무거웠지만, 오늘 또 강행군하여야 하기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9시가 되자 Daniel 형제가 왔다. 한 형제를 시내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함께 거리에 나가 약속한 장소에서 제임스라는 형제를 만났다. 장거리 트럭을 운전하는 형제였다. 화물을 싣고 우간다와 잠비아 등 옆 나라들을 다닌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마사이 족의 재래시장으로 갔다. 그들의 시장은 시 밖의 경사진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래로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건너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마사이 족의 시장은 온갖 과일 채소 먹을거리들과 잡동사니들, 장신구와 일용품, 그리고 그들의 문화전통 예술품들로 가득했다. 전통적으로 마사이 족은 이 장날에 팔 것을 가져 나오고 필요한 것을 사가는 날로, 이제는 나이로비의 관광명소같이 되어서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우리는 돌아보고 음료수와 빵들을 사서 개울 건너 풀밭에 앉아서 좀 쉬면서 교제하려고 갔다. 내가 앉으려고 하니까 제임스 형제가 잠깐 하더니 살펴보고는 다른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 자세히 보니 인간 오물들이 여기저기 있지 않은가! 이 아름다운 풀밭을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움푹 빠진 개울가에는 쓰레기들이 쌓여 있고 개울물은 깨끗지 못했다. 거기에 빨간색 머리에 검은색을 한 독수리만큼 큰 새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날고 있었다. 뙤약볕에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데 여러 명의 크고 작은 아이들이 좀 거리를 두고 서 있다. 그러더니 점점 가까이 온다. 나는 Daniel 형제에게 그들에게 빵을 하나씩 주어서 보내라고 했더니 빵을 받고는 가지를 않고 아예 주저앉아버린다. 우리는 언덕을 올라와서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비가 조금 내렸다. 시내버스는 사람이 많았다. 나이로비 북쪽에 있는 공원에서 내렸다. 아직 조경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공원을 오르니 나이로비 중심가가 시원하게 한 눈에 들어온다. Daniel은 정부청사, 국회, 대학교, 등등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알려주었다.
시내 쪽에서는 여기저기 몇 곳에서 노방전도 하는 스피커 서리가 요란하다. 알고 보니 지금 점심시간이라 여기저기서 노방 전도하느라고 바빴다. 여기는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이렇게 노방전도를 열심히 한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우리는 시내로 들어가려고 공원을 내려와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연못을 지나오는 데 그곳에서도 얼마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전도하는 분들을 만났다. 우리는 서로 할렐루야 하면서 수고한다는 반가움의 인사를 나누었다. 시내로 들어왔다. 어저께 우리가 돌아본 남쪽 지역은 주로 주거와 산업 지구였고, 여기는 이 나라의 심장부로서 주로 정부 건물이거나 은행과 증권사 그리고 신문사가 있는 경제 중심지였다. 시내는 깨끗하였다. 이 나라에서 볼 때는 가장 좋은 건물들이 있는 곳이며 번화한 곳이다. 마침 저 멀리 정부청사에 이 나라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기에 비디오 촬영을 했더니, 제임스가 우리나라에서는 국기를 찍지 못하게 한다고 말해준다. 이 나라는 국기를 신성시하는 것 같았다. 맨발에 붉은 옷을 걸친 마사이 전사들 셋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모습이 씩씩하게 보였다. 오후 2시가 되어서 나는 형제들에게 케냐의 전통 음식으로 점심을 먹자고 하였다. 한 곳을 데리고 갔는데 식당 안 환경이 깨끗하지 않고 입맛이 날 것 같지 않아서 형제들에게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니 이곳은 식당이 없단다.
그러면 Western style의 식당으로 가자고 하여서 한참 걸어 큰 건물을 돌아가서 한 식당에 들어가니 마음이 편했다. 주로 햄버거와 감자 칩으로 된 것으로 주문했다. 이 낯선 곳에서 주안에 두 형제와 함께 즐거운 교제를 나눌 수 있다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 식당에서 우리 호텔은 그저 2Km 정도 된다고 하여 걷기로 하였다. 제임스 형제와는 길에서 헤어졌다. 한 길가 모퉁이에도 한 떼거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뭐 하는 사람들인가 궁금하여 가까이 가보았더니 한 분이 성경을 열어 개인 전도를 하고 있었다.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주님은 케냐에서 영혼 구원 역사를 하시고 계셨다. 우리는 호텔에 와서 Daniel과 내일 아침 만나서 함께 가기로 하고 헤어졌다. 어저께 불볕더위에 탄 목의 피부가 벗겨지고 있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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