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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선교학교

8. Chelston Bible College

학교로 돌아옴  10.1 Mon, 1979
  오늘은 아무 부담이 없는 날이라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나는 그동안 영어로 대중 앞에서 말하고 교제하는 일들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마음이 몹시 피로해져 있었다. 9시가 넘도록 내 방에서 나오지 않고 쉬었다. 참 좋은 아침이었다. 차를 한잔 먹으려고 나왔더니 Priscilla 자매님은 아들에게 옷을 입히고 도시락을 들려서 기술학교를 보내고 있었다. 혼자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는데, 돌아올 때까지 늘 신경이 쓰인다고 했다. 자매님의 수고가 많으셨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포근한 소파에 앉아서 마시는 홍차 한 잔이 그동안의 피로를 다 가시게 하는 듯했다.. 점심시간에 Mr. David Hollingsworth 가 직장에서 점심을 나와 함께 하시려고 오셨다. 자매님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주셨다. 그동안 나를 위해서 수고를 많이 해 주셨다. 형제님께서 나를 역 안에까지 배웅해 주시고 선물 봉투(£5)를 주셨다. 그동안 좋은 안식처와 좋은 음식으로 잘 대접해 주셨는데 이렇게 선물까지 주시니 고맙기만 했다. 즐거움과 떨림, 시련과 고뇌가 있었던 약 3개월의 소중한 시간이 다 지나갔다. 어느 누가 내가 지난 삼 개월간 누렸던 경험을 감히 할 수 있었을까? 하면 된다는 믿음은 지금까지 나를 가능하게 해 주시고 계셨다. 방학 동안 다른 학생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아르바이트를 했을 텐데, 나는 주님께서 일을 시켜주셔서 일찍이 기대하지 못했던 경험과 축복을 받게 해 주셨다.

Dr. Hudson의 소개로 활동 범위가 넓어져 가고 있었고, 웨일스 지역에서는 Mr. Lloyd 노형의 소개로 활동할 수가 있었지만, 워낙 완고한 분들이 사는 곳이라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였다. 내가 Bible College에 공부하러 온 것이 무슨 큰 죄라도 되는지, 노형께서 교회에서 나를 소개할 때에 Bible College에 온 것은 영국을 방문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할 때도 있어서 씁쓸했다. 나도 그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할 형편도 아니어서 마음이 좀 구겨져 있었다. 다음부터는 이런 세계에 오지 않는 것이 평안이라 생각했다. Wale의 완고한 모임들은 건물 간판을 Gospel Hall로 쓰며 John Darby 계통이라 할 수 있고, 우리 교장 쪽의 열린 모임들은 건물 간판을 Bible Chapel or Church로 쓰며 George Muller 계통이라 할 수 있다. Wales 쪽은 우리 교장 쪽과는 교제하지 않는 관계에 있었다. 내가 두 부류의 형제교회를 경험해 보면서 얻은 결론은 생각의 차이 밖에는 아무것도 다른 것이 없었다. 생각의 차이란 생각하기에 다른 것이고 진리는 아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내가 한국에서 New Milton에 처음 올 때 Dr. Hudson의 안내에는 런던에서 New Milton 열차를 탈 때 앞에서 첫 번째에서 4번째 칸 안으로 타라고 했다. 그래서 처음 올 때는 앞에서 네 번째 칸에 탔다. 여러 번 열차를 타 보면서 모든 차 바구니가 다 여기 역을 통과하는데 왜 앞으로 네 번째까지만 탈 필요가 있겠나 싶어서, 이번엔 6번째 정도 사람이 별로 없는 칸에 앉았다. New Milton 역에 열차가 섰다. 밖을 내다보니 내릴 역이기는 한데 아직 플랫폼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대로 앉아 있는데 열차 장이 와서 여기가 New Milton이라고 내리란다. 나는 급히 가방을 들고 철로로 내리려고 하니까, 아니라고 따라오란다. 두 칸을 지나서야 밖을 보니 역이 보이고 Platform이 나타났다. 나는 몹시 의아해하면서 내려 열 차장에게 도와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나 때문에 열차는 5분 정도는 늦게 떠났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두 번째 영국의 친절이었다. 열 차장이 표를 검사할 때 내가 동양인이라 내릴 곳을 기억해 두었던 것 같다. 사실은 조그마한 시골 역이라 Platform이 짧아서 앞에서 네 칸만 platform에 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난 이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되새겼다. 학교에 오니 여러 통의 반가운 편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Portsmouth 교회에서 11일 초청하는 편지도 있었다. 짐을 풀어놓고 자전거에 라면 등을 가지고 Quiney 할머니 집으로 달려가서 끓여 고추장을 풀어 먹으니, 삼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김치만 있었으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뜨개질하시는 할머니와 앉아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노 자매님을 즐겁게 해 드렸다. 테이블에 놓인 바구니에 있는 조그마한 사과를 옷에 문질러 먹으니 할머니가 사과를 빛이 나게 닦아서 먹는구나 하시면서 씻어 놓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농약 때문에 잘 씻거나 빡빡 문질러 먹는 습관이 있어서 할머니가 보기에 이상했을 수도 있었다. 할머니 집에서 하룻밤 쉬었다.

뜻밖의 선물 10.2 Tue

오후에 학교 기숙사로 돌아와 내 방에 짐을 풀고 앞으로 10주간의 학업 투쟁이 시작되는 날이다. 저녁에 Devorak 음악을 들으면서 Calendar를 찾다가, 지난번 독일에서 박용숙 자매가 준 독일 그림책을 보려고 여는데 흰 봉투가 하나 뚝 떨어진다. 이상해서 열어보니 박자매의 글과 함께 DM 200 이 들어 있지 않은가! 나를 또 이렇게 놀라게 해 주었다.

첫 학기 10.3 수

새로운 학생들도 좀 오고 낯익은 친구들이 돌아와서 기뻤다. 영국은 학년 첫 학기가 9월에 시작하는데, 우리 학교는 10월에 시작하고 있었다. 오늘이 첫 수업이 시작되는 날이다. 첫 시간은 교회사와 구약이었다. 오후는 공대에서 교수를 하는 Mr. Simon은 모임의 형제로 요한복음을 가르치는데 말씨가 지방 사투리로 입안에서만 옹알거리는 말이어서 여기 학생들도 듣는 데 신경을 쓰고 있었다. 오후에 역에 가서 학생 패스를 새로 내고 학비 £200을 내고 나니 은행에는 £91 남았다. 이제부터 또 주님이 주시는 것을 기대하면서 살아야만 한다. 집에 DM 200을 보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한 마음이다. 지난 학기보다는 경제도 조금 여유가 있고 마음도 안정되고 언어도 알든 모르든 조금은 편안해져 가고 있었다. 압살롬은 가져온 Faro 우표들을 주었다. 그는 집에 가서 바다오리들을 잡아서 돈을 벌었단다. 이번 학기는 영어도 힘든데 거기에다가 Hebrew(히브리어)까지 배우니 야단 났다.

축구경기 10월 6 Sat

이번 학기는 Brian이란 50대가 넘은 신사 한 분이 왔는데 그는 영국의 열렬한 공산당원으로 영국 대표의 일원으로 모스크바 국제공산당대회에도 다녀올 만큼 열렬한 분이었다. 그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남은 생애를 복음을 위하여 살고자 말씀을 배우러 왔단다. 나에게 주말인데 별일 없으면 축구 구경을 가자고 하여 따라나섰다. 그의 차로 여러 학생을 태워서 Bournmouth에서 열리는 Division C의 축구 시합을 보러 갔다. 푸른 잔디가 없던 한국에서 온 내가 푸른 잔디 위에서 펼쳐지는 축구경기는 볼만하고 재미있었다. 경기장 저쪽에서 젊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경찰이 나타난다. 외지 팀 응원단과 본토박이 간에 시비가 생겼다고 한다. 오나가나 싸움질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축구장을 나와서 나는 시간이 되면 기독교 서점에 가 보고 싶다고 부탁했더니 모두 좋아했다. 차를 가지고 있는 Brian 형제의 오늘 수고가 고마웠다. 이번에 나와 나이가 같은 아프리카 Kenya 수도 나이로비 형제교회에서 사역하든 Walter 형제가 왔다. 그를 통해서 아프리카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다. 새까만 사람과 함께 한 지붕 아래 살아보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검은 이 형제의 만남은 25년 뒤인 2004, 1. 중국 선교지에서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Walter 형제가 있는 케냐를 단기선교로 방문하는 인연이 되었다. 케냐 단기선교 여행기 참고)

Harbone Parish Church 10. 13 Sat

저녁에는 Harbone Parish church(영국 국교회, 성공회)에서 있는 선교사 간증 집회에 갔다. Mr. Frank는 형제교회의 형제로 선교사는 아니고 이라크에 있는 영국 회사에 근무하러 가서 이라크 사람들을 데리고 가정 성경공부를 시키다가 붙잡혀서 6개월 징역살이를 하고 온 간증을 들었다. 이라크는 이슬람 나라로 공식적으로 세워진 기독교회는 없고 공개적인 선교활동은 곧 순교할 수 있는 위험한 나라였다. 거기에 간접 선교의 사명을 띠고 가서 일하는 여러 종류의 종들이 있다니 얼마나 용감한 분들인가! 오는 길에는 영국 성공회(Anglican Church) 목사의 차로 Absalom과 Richard 그리고 내가 타고 오는데, 목사님이 나보고 Born Again 했느냐고 물어서 기쁨으로 간증을 하고, 그분에게 언제 거듭 낳느냐고 물으니, 고등학교 때 Camp에 가서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다고 했다. 내가 성공회는 천주교와 비슷하지 않으냐? 고 물었더니, 그분은 성공회 안에는 두 흐름이 있다고 했다, 복음주의 쪽은 침례교회나 형제교회와 비슷하다고 하면서, 구원의 복음을 강조하고 성찬과 침례를 중요시한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천주교와 비슷하다고 하면서 성공회 안에 두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Dr. Hudson이 불러서 가 보니 이젠 졸업하고 집에 가 있는 할머니 학생 Betty가 내 학비에 보태 쓰라고 £5를 보내왔다고 주셔서 큰돈을 받은 만큼이나 고마웠다.

까맣게 타버린 토스트 10.16. Tue

오늘 아침 식사 당번은 독일서 온 Burnie 자매와 나였다. 학교에 있는 토스트 기계가 구형이어서 gas 레인지로 토스트를 굽는 것이어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태우기가 일쑤였다. 오늘 내가 익숙지 않은 기계로 빵을 굽다가 꺼멓게 태웠다. 학생들이 너무 태웠다고 말들은 한다. 내가 미안하다고 말하고, 이미 감사한 것은 기쁨으로 먹으라고 했더니, 모두 옳다고 하면서 웃어 주었다. Bath에 있는 Members Chapel에서 11월 8-12일 휴가 기간에 와달라는 초청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교회에서 초청의 편지를 곧 보낼 것이라고 하였다. 이 학기 동안 주님은 여러 곳으로부터 초청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고 계셨다. 영국을 떠나기 전에 북쪽 Scotland도 여행하고 싶지만, 아직 길이 열리지 않고 있다. 오후에 Southampton에 가서 눈 치료를 받았다. 여기는 전문의사를 만나려면 예약을 하고 3~6개월 기다려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그러나 의료비가 들지 않아서 좋은 제도를 가진 나라이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이 문제이다. 급하면 응급실에 가는 길이 최선이라고 한다. 

냄새와 향수 

오늘은 서양에 왜 향수가 발달했는지를 이해했다. 민족마다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케냐의 Walter 형제와 가까이 있으면 그에게서 숯검정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 온다.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너무 구워서 그런가? 서양 애들과 가까이 있으면 누린 냄새가 나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주 심하다. 설어서인가? 그래서 서양 사람은 향수를 몸에 뿌리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다. 압살롬 같은 형제는 몸 냄새가 대단히 심하다. 그리고 그가 뿌리는 spray 냄새는 지독한 향이다. 한 번은 그가 우리에게 장난으로 자기 스프레이를 우리에게 뿌렸는데 그 향이 얼마나 독한지 숨이 막히고 역겹기도 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압살롬이 그것을 자기 몸에 뿌리면 몸 냄새와 중화되어서 괜찮아지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저들은 나에게서는 어떤 냄새를 느낄까? 궁금하다. 대개 한국 사람에게서는 마구간 냄새가 난다고 한다. 볏짚들이 떠서 나는 냄새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어떤 향기가 나야 할까? 생명의 냄새가 나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는 우리 삶의 움직임이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고린도후서 2:15-16

“the Hand Book of Bible" 10. 18. Thus

오후 수업을 마치고 Finland 형제 Alpo와 케냐 형제 Walter와 바닷가에 갔다 오다가 어떤 부인을 만났는데 친절하게도 그 부인은 오는 주일 오후 자기 집에서 Tea를 나누자고 초청하여서 생각해 보겠다고 하자 지기 전화번호를 준다. 이단일 가능성이 있어서 학교에 돌아와서 이야기들을 나누어보니 나처럼 초청받은 학생들이 또 있었다. 여호와 증인이라고 한다. 저녁 집회에 갔더니 초등학교 선생인 Stuart 형제가 “the Hand Book of Bible"이라는 성경 사전을 주었다. 지난번 자기 집 마당을 파 주었다고 사 주는 것 같았다. 

이 교수님은 의사로서 중국에서 오랜 시간 의료선교사로 봉사하다가 공산화되면서 추방되어 인도에서 주님을 섬기다가 노년에 고향에 돌아와 사시면서 우리 학교에서 의료선교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계시는 자상한 할아버지시다. 당신 집으로 우리를 초청하여 주시어 좋은 음식으로 대접해 주시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기도 하셨다.

기쁜 결혼 소식 10. 19 Fri

지난여름 동안 하노버에 있을 때의 일이다. 장한숙 자매가 광부로 와 있던 김문봉이라는 고향 광주 남자를 만나서 사귀다가 결혼은 하고 싶은데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어서 속을 태우고 있었다. 그때 마침 내가 영국에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남자 친구를 내게 부쳐서 구원의 믿음을 가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내가 낳은 영적 아들 김문봉 형제가 장한숙과 11월 17일 결혼한다는 기쁜 소식을 보내온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축복해 주시고 계셨다.

Jubilee 합창단

저녁에 학생들은 버스로 Pool이라는 도시에 있는 음악 공연장으로 가서, 25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Jubilee 합창단의 Choir를 즐겼다. 단원 모두가 50이 넘은 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단원들은 거의 평생을 이 합창단에서 헌신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Dr. Hutching의 복음 전도 대회 10. 23 Tue

Christchurch 도시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Dr. Hudson의 처남인 Dr. Hutching 전도자의 복음 전도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우리 학생들 여럿이 그 대회에 갔다. 그가 전하는 구원의 복음은 정확했고, 설교 마치고는 결신 자 초대를 하였다. 설교는 복음의 말씀을 따라 전해지는 순수한 구원의 설교여서, 여전히 하나님께서 이런 복음 전도자들을 세계 여러 곳에 두시고 역사하시고 계셨다. 빌리 그래함과 같은 스타일이었다. 감리교회인데도 모자와 너울을 쓴 자매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Immigration Office(이민국) 10. 26 Fri

아침 작업 시간에 나는 잔디에 있는 잡풀들을 캐고 있는데 Dr. Hudson이 와서 나에게 케냐에서 온 Walter 형제를 데리고 런던 East Craydon 이민국에 갔다 오라고 하신다. 나는 교장에게 지난번 나도 혼자 갔다가 왔고, Walter는 나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데 스스로 갈 수 있지 않으냐고 말씀을 드렸더니, 지리를 잘 모른다고 데리고 갔다 오라고 하셔서 마음은 좀 불편했지만, 거절을 못 하였다. 사실 Walter 형제는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케냐에서 교육을 받아서 영어는 나보다 더 잘하는데 뭐가 어떻다고 내가 데리고 가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혹 아프리카에서 와서 헤맬까 봐서 그러시는지! 오늘은 그를 위해서 종일 봉사했다. 그는 돈이 없어서 자기를 위해 수고하는 나에게 차비는커녕 차 한 잔도 사지 못하는 어려운 형편인 것 같았다. 점심도 먹지 못한 채, 그의 비자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열차에서 샌드위치와 차를 사 주었는데 아주 고마워했다. 오늘 아프리카 케냐에서 온 형제를 도울 수 있어서 주님께 감사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10. 27 Sat

아침 식탁에 내려와 있는데 교장 사모님이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이 실린 아침 신문을 보라고 주셨다. 적당히 하고 그만두었으면 국부로서 존경을 받으실 그분이 그렇게 믿던 부하에게 살해당한 것은 슬픈 일이었다. 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온 힘을 다한 그분의 높은 이상과 꿈보다 권력에 취한 주위 사람들로 인해 자기 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정치가 불안정한 한국의 모습을 모든 선생과 학생들에게 보여주게 되어서 부끄러운 마음이다.

독일서 온기뿐 소식 11.2 Fri

독일 하노버에 있는 영남 조카가 £40를 보내와서 고마웠다. 그때 전도한 둘째 남자 조카도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다. 누구든 지고 간에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는 하고 볼 일이다.

반가운 소식들 11.6-7 Wed

여러 해 전에 WEC(믿음의 방패) 선교회 선교사로 한국 대구 지역에서 활동하던 Mr. Derick Earl 선교사가 지금 영국 남서부에 있는 Swan Sea Bible College에서 선생을 하고 있었다. 방문해 주기를 바라는 편지가 와서 9일 가기로 했다. 그분은 한국말을 잘하고, 우리는 한국에서부터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수업이 끝나고 나니까 메모 한 장을 가져다준다. 수업 중 Bitten 교회의 Holingsworth 부부가 지나는 길에 학교에 들러서 남긴 메모였다. 그곳 모임에서 11.17-18일 있을 선교 모임에 오라는 메모를 놔두고 가셨다. Hawaii에 계시는 Mr. Hockaday로부터 $ 50불과 함께 이번 Christmas 전에 방문할 수 있느냐고 묻는 반가운 편지가 왔다.

Term Break(학기 중간 휴가) 11.8-12 Mon

영국 학교는 노는 날이 많아서 좋다. 몇 주간 공부하느라 수고했다고 또 Half Break이다. 학생이 노는 날만큼 반가운 일이 또 있겠는가! 이번 기간에 Bath로 가서 형제교회 선교부 Echoes Service의 회장님 댁에서 하루 자고 Swan sea에 갔다가 다시 Bath로 와서 그곳 교회 예배에 참여하고 월요일 Brian과 함께 학교로 돌아오기로 계획했다.

Bath로

친절하게도 Brian 형제가 집으로 가는 길에 나를 Bath까지 태워다 주어서 정말 고마웠다. 우리는 긴 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교제를 나누었고, 특히 그의 공산당 활동과 비판은 들을만한 것이었다. Bath 기차역에서 Mr. Warren에게 전화하여 30분 뒤에 만나기로 했다. 그사이 나는 그동안 사고 싶었던 Letter Case를 £3.69에 하나 샀다. Echoes Service에서 일하시는 Daving 형제 부부가 와서 나를 데리고 Echoes Service Director로 있는 Mr. Warren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영국에서 형제교회는 모든 교파 가운데서 선교사를 제일 많이 내보내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모임 사람들도 주님의 축복이 제삼 세계로 옮겨갔다고 믿기 때문에 선교에 더욱 힘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Mrs. Warren 자매님이 좋은 식사를 준비해 주셔서 고마웠다. 식후 Mr. Warren이 앞치마를 두르려고 하기에 빼앗아서 내가 차니까, 손님이라고 차나 마시고 쉬라고 하신다. 나는 개의치 않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분은 마른 걸레질을 하면서 흐뭇해하는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일하는 동안의 친교라는 것이 대단히 귀했다. 학교에서 해 보든 솜씨라 세 사람이 먹은 그릇들이야 일도 아니었다. 자매님도 대개 손님으로 오는 외국 분들은 설거지를 잘 안 하는데 난 좀 특별하다고 듣기 좋은 말씀을 해 주었다. 부엌일을 마치고 우리는 차를 나누면서 Warren 부부와 한국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Brian 형제와 함께

휴가로 집으로 갔다가 학교로 돌아가는 Brian 형을 저녁 7시 Bath 역에서 만났다. 올 때도 태워다 주더니 갈 때도 이렇게 신세를 지고 있었다. 친절한 형제로 인하여 내가 복을 받고 있었다. 오면서 나는 그에게 부인은 공산당을 하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니, 부인이 아주 좋아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개종에는 부인의 영향도 있었다고 간증을 해 주었다. 나는 그에게 이상적인 사회주의 실현이 현세에서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처음에 자기는 그렇게 되리라 믿었는데 갈수록 회의가 생겼었다고 했다. 우리는 신나는 Gospel Song을 들으면서 두 시간 정도 달려서 학교로 돌아왔다. 오늘로써 학기 중간 한 주간의 휴가가 끝났다. 공부하다가 지칠 때쯤 되면 잠시 쉬면서 공부를 하도록 하는 제도가 좋았다. 학생들도 모두 돌아왔다. 영어도 잘 모르는 내가 쉴 새 없이 돌아다니니까 학생들이 부러워하고 있었다. 이것이 다 주님의 은혜이며, 교장의 배려가 아니겠는가! 고맙고 고마울 뿐이다.

Mr. Brown과 함께 여행

교장의 도움말 11. 13 Tue

오늘부터 남은 반 학기의 시작이다. 아침 잔디를 깎는데 교장이 오셔서 이번 학기를 마치고 한 학기를 더하면 나의 영어가 더 좋아진다고 그렇게 해 보라도 하셨다. 전에 프랑스에서 온 형제도 그렇게 했는데 효과가 있었다고 하셨다. 체재 연장은 걱정하지 말고 생각해 보라고 말씀해 주셔서 고마웠다.

Southampton의 Bitten 교회 11.17-18 Sun

주말은 초청해준 South Hampton의 Bittern교회의 Mr. Hollingsworth 집에 가니 부부가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토요일 가족과 교제하면서 편하게 쉬었다. 지난번 수양회 때도 잘 대접해 주셨는데, 주말을 적적하게 보낼까 봐서 이렇게 또 불러 주셔서 고마웠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따뜻한 점심을 나누고 나는 Southampton 항구에 가서 Duolos 선교하는 배를 찾아보고 싶어서 말씀을 드리고 항구로 나갔다. Bitten 교회 저녁 모임에서 나에게 15분 정도 영국 오게 된 동기와 서독에서의 사역을 들려 달라고 청해서 나누었다. 집회 뒤 Charlse 부부가 청해서 형제들과 Tea를 나누며 교제를 했다. 이름 모를 자매가 손에 £5를 주었다. 주말을 잘 쉬게 해 주신 성도의 사랑에 감사했다.

앞으로의 일들 11. 20-26 Mon

조금씩 모인 선물들을 겨우살이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한국 집에 £40를 보낼 수 있어서 주님께 감사했다. 내가 1월 학기에 반 늦게 와서 반을 더해야 Full Academic 수료증을 줄 수 있다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했다. 서독을 방문하는 일정도 잡혔고, 미국을 방문하는 일도 강태훈 형님이 초청장을 보내주겠다고 하셨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스라엘을 가 보고 가야 하는데 어떻게 되려는지 여전히 기도의 제목이 되고 있었다. 한국 대사관에 가서 2월 말까지 체류 허가를 받았고, 이민국(Home Office)에 가서도 2월까지 비자 연장을 받았다. 이제 내년 2월 안에는 영국을 떠나겠다는 것이 나의 계획이다.

엘리스의 소식 12.1 Sat.
벌써 12월이 시작되고 있었다. 독일 하노버의 엘리스 자매님이 나를 12월 14일 하노버에 도착해 달라는 편지가 왔다. 표를 예약해야 하는데 돈이 충분하지 않았다. 독일 여행사에 전화하니 20일까지는 매진이고 21일 것은 £10 더 비싸다고 했다. 어찌할꼬, 특별한 길이 안 열리면 기차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학기말 시험 12.3-5 Wed.
학기말 시험 기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즐거운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모두가 긴장되어 있었다. 나야 오죽하겠느냐, 하는 데까지 해 보는 것이고, 아는 데까지 쓰면 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교회 저녁 집회를 가지 않는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바보들 같으니, 마지막 날 오전 90분씩 두 번의 시험을 보고 나니 허리가 휘어지는 것 같았다. 이로써 이번 학기의 시험은 모두 끝났다. 강의는 12일까지 계속되지만, 사실 이것으로 학기 과정이 모두 끝난 셈이다. 힘든 시험 그런대로 잘 본 것 같다. 학생이 누리는 자유와 해방은 시험지옥에서 풀려났을 때이다. 그동안의 스트레스와 피로가 확 풀리는 듯했다. 방마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즐거움의 웃음소리가 넘치고, 만나는 학생마다 끝나면 어디로 가느냐? 계획이 무엇이냐? 등 묻는 것이 인사였다. 그리고 감사하고 놀라운 것은 마침 서독 엘리스 자매로부터 표를 사라고 DM 200을 보내왔다. 가까스로 시간에 맞추어 Hannover 날틀 표를 예약할 수가 있었다.

Farewell Party 12.7 Fri

오전 두 시간 강의가 끝나고 오후에는 자유 시간이었다. 수업은 12일까지 있지만, 저녁에는 한 학기를 마치는 Farewell Party가 있었다. 선생님들 부부와 학생들이 함께 하는 파티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특히 이런 파티는 일 년 전체 과정을 마치는 학생들에게는 졸업식과 같은 것이었다. 수업 일수를 남겨 놓은 채 학기말 시험과 졸업 파티는 미리 하고 있어서 떠나는 학생들에게 여유가 있어서 좋고, 또 선생들이 다 시간 강사이다 보니 그들의 시간이 방해받지 않도록 일찍 하고 있었다. 나 같은 경우는 일월 학기에 반 학기를 하러 다시 와야 하지만 이 파티는 나에게 졸업과 같은 파티였다.

성지여행에 대한 희망

저녁에 독일에서 엘리스로부터 전화가 왔다. 성지여행 단에 한국 팀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는 기쁜 소식을 들려주었다. 한국에서부터 이번 여행에서 성지여행을 위한 기도를 하고 떠났는데 이제 주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것 같았다. Elis가 나를 Leader로 하는 Team을 만드는 것은 순전히 나를 성지에 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지난여름 방문 때 하노버에서 한 병원 기숙사에서 식사하고 독일인 자매님들 여럿과 함께 자유로운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나의 성지 방문에 대한 기도의 간증을 듣고 우리도 기도하겠다고 말하면서 믿음으로 계속 나아가라고 격려해 준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이와 같은 한국인 성지 방문에 대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제 내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부담은 돌아갈 날틀 표를 살 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게 하신 주님께서 또 돌아가도록 해 주시겠지.

London City Mission

New Milton에서 하루에 런던에 가서 독일 비행기를 타지 못하기 때문에 쉴 곳을 알아보아야 했다. 내가 가진 전 재산은 £12 뿐이었다. Mr. Baymont 노 형제 부부 가정에서 Walter와 나를 주말에 쉬도록 해 주어서 고마웠다. 독일 학생 Dieter를 통해서 London City Mission에 소속된 Youth Hostel 같은 곳에 아침 포함하여 £1이라고 소개해 주어서 반가웠다. 자기도 여기 학기가 끝나면 그리고 간다고 하여 연락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싼 데가 있는 것을 그동안 나는 왜 몰랐을까?

놀라운 선물 12. 11 Tue

바깥일을 하고 교실에 가니 내 의자에 두 통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Hawaii에서 Mr. Hockaday 가 보낸 편지로 그 안에는 $222.58 수표가 들어 있었다. 이 갑작스러운 축복에 난 얼떨떨하기만 했다. 연초부터 그 교회가 계획된 일이기는 하지만 필요할 때 받은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마지막 강의 12. 12 Wed

오전 90분 강의로 모든 강의는 끝났다. 그리고 성적표를 나누어주었다. 나는 기대한 대로 전 과목 Pass였고, 구약 같은 것은 79%에 달했다. 그런대로 한해를 잘 참으면서 투쟁하도록 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렸다. 나는 1월 반 학기가 지나왔기 때문에 다시 와서 반 학기를 해야만 했다. 갈 길만 바쁘지 않다면 영어 공부를 위하여 일 년 더 공부하고 싶지만 내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수업이 끝나자 모두 짐 싸기에 바빴다. 점심 후 갈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있었다. 두 학기 반 동안 정들었던 Ruth 자매와도 이제 영영 헤어져야 하는 것이 섭섭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었을까 생각만 해도 고마운 자매였다. 한 학기 나와한 팀이 되어 Breakfast와 Tea를 만들던 키 작은 독일 자매 Brunie와도 헤어져야 했다. Walter와 나는 Johns 노형 댁으로 자리를 옮겨서 부담 없이 편안하게 휴식을 하니 행복했다. 주님께서 이런 귀한 가정으로 인도해 주셨다.

김제화/ jewhaki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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