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lanfairfacan 선교사 수양회 9.15 M-22 St, 1979
오늘은 4주간의 런던 생활을 끝내고 선교사 수양회가 있는 Wales 북쪽 Llanfarefacan으로 가기 위해서 13:00 Holy Head 행 장거리 열차를 탔다. 웨일스 켈틱 어에는 ‘LL’ 자를 두 번 겹쳐 쓰기도 하는데, 발음은 된 후음(guttural sound)을 내는 "크"였다. 두 시간 정도 가서 Chepster 역에서 사람들이 오르는데 저쪽으로 가는 여성의 뒷모습이 Ruth 자매 같아서, Ruth 하고 불러보니 그였다. 그는 반가워하면서 마침 비어 있는 내 옆자리에 앉아서 배가 고프다고 하기에 마침 주머니에 있는 사탕을 몇 개 주니 좋아했다. 함께 여행하면서 그동안의 일들을 나누면서 2시간 이상 지루하지 않게 목적지 Llanfarfacan에 내렸다. 여기는 Wales의 북서쪽 해안지대로 푸른 대서양이 앞으로 펼쳐져 있고, 뒤로는 낮은 산언덕이 바다와 닿아 있는 해안 절벽 지대였다. 호텔은 절벽을 기대어 높이 서 있었다. 일 년에 두 번씩 손님을 비우고 한 주간씩 선교사들을 위한 수양회를 한다니 얼마나 귀한 분이신가! 내일 이곳 모임의 저녁 복음 집회에서 간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저녁 후 여럿이서 하얀 자갈들이 많은 바닷가를 거닐면서 수평선 너머로 기울어져 가는 해를 즐겼다. 일본에서 선교하시고 한국도 방문해서 알고 있는 북아일랜드 Mr. Mulan 형제님이 오셔서 아주 반가웠다. 그리고 Echoes of Service의 임원들도 왔다. Ruth와 나는 제일 나이가 어린 학생들이라 6층 제일 높은 골방 같은 곳을 배정받았다. 절벽 저 아래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방이어서 좋았다. Ruth와 나에게는 매일 아침 4시 반부터 Morning Tea를 방마다 배달하는 일이 주어졌다. 잠들이나 더 잘 것이지 이른 아침 4:40부터 Tea를 마시는 버릇들이 왜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침마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주방에 가서 Ruth와 함께 차를 만들어서 컵에 부어 큰 쟁반에 담아 1층서 6층까지 방마다 두드리며 Tea! Tea! 하면서 돌리는 일은 좀 번거롭기는 하지만 새로운 경험으로 알고 즐거운 마음으로 했다. Morning Tea를 원하지 않는 분들은 문에다 No thank you!라는 메모지를 부쳐 놓았다. 그러나 대부분 마시는 편이었다. 여러 나라에서 선교 일을 하는 형제자매님들과 교제하면서 많은 것을 들을 수가 있었다. 주일 예배는 우리 모두 이곳 모임에 나가서 성찬 예배를 드렸다.
월요일부터 본격적인 수양회가 시작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내 기대와는 달랐다. 아침 식사 뒤 한 시간 정도 경건의 시간을 가진 후 오전 내내 휴식이었다. 오후도 그대로 휴식이다. 난 처음에는 모두 모처럼 모였고, 경비도 들이는데 이렇게 놀기만 하는가 하고 궁금했다. 오후에 Foundation이란 부부가 나를 데리고 Cornway 란 곳으로 가서 시장을 돌아보고 버려진 옛날 성으로 가서 성벽을 올라가 보면서 웨일스의 성벽 건축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항상 산등성이를 이용해서 성을 쌓았지만, 산이 없는 이곳에서는 들판에 주로 둥글게 높이 쌓은 성이 특색이 있었다. 이곳은 어느 정도 바닷가로 솟은 절벽을 이용해서 성을 쌓았다. 작은 포구 Colwyn bay로 해서 돌아왔다. 아름다운 고성과 자연이 나를 즐겁게 해 주었다. 저녁에는 함께 모였는데 무엇이든지 간증을 해달라고 사회자가 주문했는데, 그 많은 선교사가 아무도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자 호텔 사장인 Mr. Escout 장로님이 나보고 한국에 대해서 말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한국 모임의 일반 소개와 나 자신의 전도자로서의 소명에 대해서 말하였다. 저녁 집회가 끝나고 교제의 시간에 한 자매님이 와서 나에게 인사를 하고는 Bitten 교회 선교사 수양회에 가는 김 형제냐고 묻는다. 자기는 그 교회에서 Hong Kong에 파송된 Holingsworth 자매라고 하면서 거기에 가면, 내가 자기 오빠 집에서 머물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면서 반가워했다. 한 주간 동안 가깝게 교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침 식사 뒤에 한 시간 Devotion을 마치니 대형 관광버스가 왔다. 오늘은 관광 가는 날이란다. 들과 산을 지나서 Porthmedog 포구에서 내려 주위를 돌아보고 우리 팀은 나무를 때서 달리는 Pony train(소형기차)을 탔다. 이 차를 타려는 관광객들도 심심치 않게 많았다. 열차는 해발 600m 산을 돌고 돌아 오르는 장난감 같은 산악 관광열차로 재미있었다. 내가 일어서면 머리가 천정에 닿을 듯했다. 아슬아슬한 산 계곡을 지나는 열차는 힘이 들어 보였지만 계곡의 이름다움과 웨일스의 자연을 만끽할 수가 있었다.
저녁에는 나에게 슬라이드 몇 장을 보여 달라고 하여 10장을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 한 장은 진리와 강릉 교회가 함께 눈이 쌓인 1월에 바닷가 개울에서 침례식을 하는 장면에서는 모두 WOW!! 하고 함성을 질렀다. 마치자 모두 격려의 박수를 주었다. 사회자는 한국 형제자매들은 우리 영국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하는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한국 성도들을 칭찬해주었다. 오늘은 아무 계획도 없이 자유로운 휴식이었다. 이것이 참 수양회였다. 수고 많이 하는 선교사들과 학생인 우리를 또 짜인 틀 속에 몰아넣으면 얼마나 피곤할까! 부담 없이 마음껏 휴식하면서 재충전하는 기회를 주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우리는 한국에서 그동안 모인다 하면 너무 빡빡한 순서 속에 살아왔다. 여유가 있고 편히 쉬게 해 주는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한가! 나는 혼자 바닷가에 가서 거닐다가 이상하게 생긴 조그마한 돌 하나를 주었는데 그것은 꼭 사람 해골을 닮은 모습이어서 좋은 기념품이 되었다. 오후에는 호텔 뒤편으로 있는 해발 800m가 되는 Pen Mountain을 정복하고자 나섰다. Ruth에게 함께 등산하자고 청하니 자기는 잠자겠단다, 그래서 동행자가 없어서 좀 쓸쓸하기는 하지만, 등고선 개간이 잘 되어있는 밭들을 지나서 꼭대기에 이르니 그곳은 가시덩굴과 측백나무와 비슷하면서 나무에 가시가 난 Gorse라는 나무들이 많았는데 잔잔한 노란 꽃들이 많이 피어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그 사이로 주인 없이 방목하는 양 떼들이 나를 보더니 모두 경계하고 있었다. 동양인을 처음 보는 양 떼들도 신기한 모양이다.
이곳은 동양인들이 거의 오는 일이 없는 곳이라 내가 여기에 있다는 자체가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저 아래에 우리가 머무는 호텔과 넓게 펼쳐진 바다와 해수욕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혼자 즐기는 좋은 하루였다. 오늘은 수요일이라 수양회 팀은 이곳 모임 저녁 집회에 모두 갔다. 나에게 15분 시간을 주어서 간증과 함께 한국과 한국 교회를 소개하다가 15분 시간이 되어서, ‘내가 시간이 다 되었다’ 라고 마치니 모두 웃으면서 아멘! 하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18일 오늘은 좀 멀리 여행을 가는 날이다. 오늘은 웨일스 최북단에 있는 Holy Head로 갔다. 대서양을 향해 등대가 말없이 바다 길목을 지키고 있는 언덕은 분홍색의 Header라는 꽃들이 덮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우리 일행은 Bango라는 곳에서 내렸다. 그곳에는 바다를 가로질러 놓은 Menai bridge라는 다리가 있는데, 출렁(suspension) 다리였다. 모두 조심스럽게 건너보면서 출렁거리는 긴 다리의 전율을 즐겼다. 다리 저 밑에는 푸른 바다가 너울거리고 있는데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Mullan 일본 선교사
큰 고성(古城)을 보기 위해서 들어갈 때는 각자 표를 사는데 Mr. Mullan 가 내 표를 사주어서 고마웠다. Isle of Angelesey 섬을 돌아보고 Penrhos Nature Reserve 공원에서 점심을 나누면서 휴식을 하였다. 그리고 조수가 밀려 나가는 해안을 거닐었다. South Stack cliff light House에 오니 웨일스 최북단 산정이요 등대하나가 외로이 서 있었다. 저 건너편이 Ireland(애란)라고 Mullan이 말해 주었다. 저 건너 Bangor에 계시는 Mr. Kirk 선교사가 길을 열어주면 Belfast를 갈 수 있는데, 며칠 전 Lloyd 노형이 Kirk 형과 전화하는 눈치를 보니까 가보기는 그른 것 같았다. 제임스 선교사도 내가 그곳을 한 번 방문하는 것을 원하셨고, 그 일로 Mr. Lloyd가 컥 형에게 나의 방문을 의논하자 컼이 거절하는 것 같았다. Stevenson 선교사는 미국으로 가면서 북 애란 자기네 교회를 방문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했지만, 여기서 Stevenson 선교사의 교회 연락처를 물어보기도 어려운 눈치였다. Mr. Lloyd 형도 개인적으로는 내가 성경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나, 개방적인 모임들과 어울리는 것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Mr. 제임스 때문에 나에게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고 계셨다. 이것이 바로 완고하고 폐쇄적인 모임 사람들의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결국, Northern Ireland Ballast를 방문하는 일은 Mr. Kirk이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바다 건너를 바라보면서 아쉬운 마음 가득했다. 산정에는 Heather라는 진분홍색 잔잔한 꽃들이 넝쿨로 우거져 푸른 바다와 조화를 이루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었다. 정상에서 Muller, 홍콩 여 선교사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Plas-House-Newynn 마을에서는 오래된 귀족의 큰 주택을 돌아보았다. 넓은 정원과 아늑한 정원은 고색이 찬란했다. 정말 즐거운 나들이였다. 이 지도에서 보이는 붉은 선이 우리가 있는 동안 다닌 길이다.
내일은 이곳을 떠나기 때문에 내려가는 곳에 있는 Mr. Lloyd 노형 댁에 잠시 들려 며칠 쉬고 가려고 전화를 드렸더니 오라고 하셨다. Lloyd 부부에게 드릴 조그마한 선물을 하나 샀다.
수양회 끝 9. 22. Sat
오늘은 수양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 이곳 교회에서 £10를 보내와서 뜻밖의 선물을 받고 너무 기뻤다. 호텔 사장 사모님이신 Mrs. Escout 자매님이 차에서 먹으라고 Sandwich를 싸주셨고, Regler 부부가 나를 역에 태워다 주셔서 모두 고마웠다. 이제 다시 오지 못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차창에 스치는 바다와 산들이 더 정겹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푸른 대양 또 한편으로는 산 옆과 들을 지나 Abegavenny에 내리니 Mr. Lloyd 노형이 기다리고 계셨다.
양로원 방문 9.23 Sun
주일 오후에는 Mr. Lloyd와 몇 분과 함께 6Km 떨어진 곳에 있는 양로원을 찾았다. 그때 그 시절 한국에서 이만한 시설에 갖춘 양로원이 있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여기에 사는 노인들이 복이 많은 것 같다. 넓은 라운지에 30여 명의 노인을 모셔놓고 찬송가를 부르고 내가 한 15여 분 동안 한국 찬송과 복음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10여 분 Mr. Lloyd도 복음을 전했다. 삶의 마지막을 보내고 계시는 노인들과 함께한 시간이 보람이 있었다.
Made In Korea 9.24 Mon
오늘은 시간을 내어서 혼자 시내 구경도 하면서 돌아다니고 싶었다. Mr. Lloyd 동리에서 한 2Km 넘는 읍내까지는 시내버스가 다니지 않는 지역이어서 걸어서 읍내에 나갔다. 백화점에 가서 여기저기 구경을 하고 가방을 파는 코너에서 메는 가방을 하나 사려고 이것저것 보다가 밤색 가방이 마음에 들어서 샀는데 안을 보니 Made in Korea라는 딱지가 있어서 정말 반가웠다. 영국 서쪽 Wales 시골 이런 곳에 한국 제품이 있다니! 혼자 좋아하고 있는데, 한 여성 직원이 다가와서 나를 반긴다. 나는 누군가하고 벙벙해 있는데, 모임 이야기를 해서 생각이 났다. 모임 장로님의 자매였다. 그리고 이 백화점의 Supervisor로 일하고 있었다. 어제 주일에 나의 마지막 주일이라는 광고가 있어서, 형제를 다시 못 볼 줄 알았다가 이렇게 다시 또 보게 되어 반갑다고 백화점 안을 친절히 안내하여주셨다.
번개시장 9.25 Tue
오늘 이곳에는 가축 시장과 거리 장이 서는 날이다. Lloyd씨와 함께 시장에 갔다. 온갖 잡동사니를 파는 길거리 시장은 볼만했다. 가축 시장에는 면양과 젖소, 등 여러 가지 가축들이 선보이고 있었다. 나는 바지 하나와 겨울을 위하여 Hoover가 달린 잠바 하나를 £21.50에 샀다.
악기에 관한 토론
저녁에는 내가 전에 갔던 Bacord 모임에 계시고, 나를 아는 Mr. Plum 부부가 오셨다. 그분들은 기도회 때마다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너무 고마웠다. 나는 그분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교회에서 자매들이 특송을 부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Lloyd 씨는 반대이고, Plum 씨는 찬성이었다. Lloyd 노형은 자매는 교회든, 사회활동이든 형제들이 있는 곳에서는 자매들이 혼자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절 반대였다. 그러나 Plum 노형은 나와 뜻이 같아서 반가웠다. 우리는 Coffee를 나누면서 모임에서 피아노나 오르간은 괜찮고 기타는 왜 안 되는지를 토론했다. 사람의 편견은; 피아노, 오르간. 바이올린, 등 관현악기는 옛날부터 고전 음악에서 사용되어서 인지 거부감이 없이 경건한 악기들로 여기고 있고, 기타, 북, 관악기, 등은 팝송, 재즈, 등 좀 신앙적인 분위기에 반대되는 세속적 음악에 쓰인다고 해서 불 경건한 악기로 여기는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는 일이다.
악기란 무슨 노래를 치든지, 불면 그 노래가 나오기 마련인데 뭐가 되고 안 되는 것이 있는지 웃기는 일이었다. 나는 형제자매들의 이렇게 한쪽으로만 생각하는 기울어진 사고를 버려야 모든 면에서 균형을 이루리라 믿는다. 사람에 의해 생겨난 문화나 전통은 사람이 만든 것으로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변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다. 이 백 년 전에 영국 사람들이 자기들의 문화 전통에 따라 만든 습관과 전통들이 한국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다. 한국의 전통악기로도 얼마든지 훌륭한 주님을 찬송을 탈 수 있다. 이 일들로 영국에서도 세대 간에 고민하고 있다는 데 한국도 마찬가지다. 젊은 세대들이 모임을 떠나는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모임은 젊은이들을 의한 음악이 없다. 또 세대 차이를 극복할만한 대안과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마지막 수요일 9.26 wed
전에 내가 여기 와서 머물다 떠날 때, 주님의 나라에서나 보자고 하시던 노 형제자매님들이 내가 다시 온 것을 알고 반가워하시면서 손을 잡아주셨다. 집회 뒤에 교회에서 격려의 선물로 £5를 주셨고, 성도님들이 인사의 악수를 할 때 개인적으로 조금씩 손에 쥐여 주신 것이 모두 £17 나 되어서 오나가나 가난한 학생의 빈 주머니를 주님은 채워주시고 계셨다. 오늘은 내가 이제 이곳을 떠나는 날이다. Mr. Lloyd 노형이 나를 위하여 점심으로 비싼 참치를 사 오셨다. 자매님이 튀김 가루를 발라서 프라이팬에 튀겨서 소스를 발라서 먹는 것이 여기 식이다. 나는 먹으면서 이것을 회로 치거나 얼큰한 국을 끓였으면 맛이 기가 막힐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가 나를 기차역에 데려다주셨다. 노 자매님이 내 양 볼에 두 번이나 Kiss를 해 주시면서 £10을 주셨다. 내일 일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볼 수 없는 이별인 것 같았다. 갈 곳이 없었던 이 나그네가 이 아름다운 Wales를 두 번씩이나 오게 되다니, 주님께서 이내 인생을 멋있게 해 주셨다.
Bristol에서 8.27-29 Sat
Bristol에서 내리니 부동산 중개업을 하시는 Mr. Patfield 이 맞아주셨다. 나를 데리고 생선 전문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Code(대구)로 만든 Fish&chip을 저녁을 사주셨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인데 맛이 좋았다. 여기 교회는 목요일에 모인다고 하여서 나를 Pensford 저녁 모임에 데리고 갔다. 나에게 독일에 가서 한 일들을 들려달라고 하여 독일 사역 간증을 잠시 하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Mr. Patfield는 나에게 내일은 형제교회의 의사, 사업가 형제들이 모이는 곳인 Mitmouth란 곳에 나를 데리고 가겠다고 말씀해 주셔서 고마웠다. 주님은 이곳에서 나를 영국 남부의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분들을 만나서 교제하도록 준비해 주시고 계셨다. 이 부족한 것에게 주님은 넘치시는 분이셨다.
Mitmouth 여행 9.28 Fri
아침을 간단하게 들고 Mr. Patfield와 함께 남부 해안 도시 Colyton으로 가면서 영국 남서부의 자연들을 즐기었다. 도착하니 이미 모두 와 있었다. 나를 형제분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모두 Mitmouth 도시로 가서, 아름다운 바닷가에 있는 유서 깊은 저택과 정원을 둘러보았다. 지난날 이곳 영주가 살던 곳이라는데 수십 세대가 살 수 있는 큰 집이었다. 넓고 넓은 정원과 수풀이 달린 이 건물은 학교나 수양관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팔려고 내놓은 것이라고 했다. 부동산 중개사인 Mr. Patfield에게 팔아 달라고 들어와 있는 한 곳의 별장을 보고, 또 다른 곳에 나와 있는 주택으로 갔다. 사과가 달린 정원을 Mr. Patfield 씨가 기계로 풀을 깎기에 내가 받아서 한 20분 깎았다. 점심은 분위기 좋은 고급 식당에 가서 새로운 영국 요리를 맛보는데, 아직 내가 영국 고급 식탁 문화를 잘 몰라서 배가 고픈 김에 앞에 나오는 것을 다 먹어치웠는데, 이게 웬일인가 음식과 디저트 그리고 차와 커피가 5코스로 나오고 있어서 놀랐다. 오신 분들 가운데는 이란에서 선교하고 있는 Steer라는 31세 된 젊은 형제가 있어서 서로 교제하다가, 우리는 함께 South Hampton 시에 있는 Bitten 교회에서 주최하는 주말 선교사 수양회 강사로 초청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도 지금 Bristol에 있는데 내일 Bitten으로 올라가는데 자기 차로 같이 가자고 하여서 고마웠다.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이다.
George Muller의 보육원 9.29 Sat
나는 아무래도 여기까지 왔다가 가는 길에 George Muller의 보육원을 한번 보고 떠나는 것이 좋을 듯싶어서 아침 식탁에서 의논드렸더니 한 형제에게 전화하더니, 얼마 뒤 한 형제가 나를 데리러 왔다. 그리고 Ashely Road에 있는 보육원으로 데리고 갔다. 지금은 보육원 건물은 공업대학교가 되어있고, 보육원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국가에서 가정형태로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안내해주느라 수고한 형제가 고마웠다. 일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위대한 조지 물러, 다시 태어나면 부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한 조지 물러, 그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으며, 이웃 사랑을 실천해 보인 산 증인이었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가난했고, 남을 위해서 그는 부자가 되고 싶었다. 나는 이 훌륭한 종의 삶을 마음에 새기면서 떠나야만 했다. 그동안 돌보아주신 고마운 Mr. Patfield는 오후에 나를 Bristol역에 데려다주고 떠나셨다. Steer 형제가 차를 몰고 왔다. 우리는 South Hampton의 Bittten Chapel로 가는 여러 시간 동안 많은 것을 교제하면서 여행의 즐거움을 나누었다. 이란서는 공개적으로 전도 활동을 못 하고 있어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간접 선교, man to man 선교를 하고 있는데 많이 조심이 된다고 하였다. 드디어 긴 여행 끝에 초청받은 Bitten 교회에 도착하여 형제자매들의 반가운 영접을 받았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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