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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교/중국 여행

남경 대 학살(the Nanjing massacre )-1-

남경 대 학살(南京大屠杀, the Nanjing Massacre ) 12.1937

 

저주받을 일본 제국주의 만행

 

 

왜군이 저질은 남경 학살의 실체

왜군이 남경에 저지른 만행을 쓰면서 단어의 직선적인 표현들이나 혐오스러운 사진 자료들은 왜군과 중국 자료에 나타난 언어 표현을 그대로 옮긴 것이며, 이 표현들을 나는 점잖게 부드럽게 완곡하게 표현할 생각은 없다. 사진 자료들은 역사적 사실을 담은 사실 그대로이므로 이 또한 그대로 싣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밝은 대낮에 왜군이 저지른 일들을 무엇을 위하여 또는 누구를 위하여 모자이크 처리하거나 흐리게 해야 하는가! 역사를 왜곡하려는 침략 제국주의 자손들인 왜국의 우파들이나 할 수 있는 일들을 우리가 닮아야 할 필요는 없다. 저들이 자랑스럽게 남긴 자료들이므로 그대로 싣는 것이 역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잔인하고 참혹한 모습들은 후세들에 대한 역사 교육을 바로 하는 것이며, 반성과 각오를 새롭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이스라엘을 갔을 때 바로 유대인들이 후세들에게 민족 생존에 관한 교육과 경각심을 가르치기 위하여 유치원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조상들이 나치에게 당한 그 참혹한 모습들, 남녀가 발가벗은 나체로 내가 몰리는 잔인한 모습들, 참혹한 주검들을 생생하게 재현해 놓은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다. 이 참혹한 사진들은 바로 살인마 나치가 남겨 놓은 역사의 산 증거물들이다. 어린아이들에게 까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의 의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 나는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되었다. 역사의 현장과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바른 역사일 것이다.

 

☆ 나는 일본교회를 한 달 방문하면서 많은 일본 형제자매와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에 대한 교제를 나누면서 사귀었다. 이렇게 착한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지난날 이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져 보았다. 일본 악의 집단은 악의 영에 씌어진 군국주의자들이다. 이들이 일본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세계전쟁을 일으켜 자기 민족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자들이었다. 평범한 일본 사람은 다 착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를 왜곡하고 잘못을 사과할 줄 모르는 우익 정치 지도자들, 일본 곳곳에서 한국 사람을 비난하는 험한(險韓) 시위를 하는 우경 주의 자들은 남경에서 저지른 만행을 다시 저지를 잠재적인 사람들이다. 일본 민족이 좀 더 평화주의 민족이 되는 길은 일본의 왕 정제가 무너지고 군국주의 망령이 사라지는 길이다. 기독교 인구가 아주 적은 일본이 빨리 복음화가 되는 길만이 우경 주의와 군국주의를 막는 길일 것이다.

 

남경대학살(南京大屠杀) 기념관

 

남경을 찾은 것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평안하게 사는 이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고 30만이나 되는 생명을 무자비하게 죽인 현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남경대학살 기념관으로 달려갔다. 기념관은 묘의 모양으로 건축되었으며 정면에 희생자 300,000이란 숫자가 나를 섬뜩하게 해 주었다. 엄청난 역사의 비극을 기억하게 하는 전시장은 좀 초라하고 입체적이지 못해서 역사의 그 비참함을 효과적으로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쉬운 마음이다. 전시장 입구에는 무참하게 학살되어 집단 매장된 무덤에서 파낸 해골들을 양쪽 가득히 쌓아 놓아 왜국 군국주의자들의 만행이 어떠했는지를 실감케 했다. 36°의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냉방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안은 오래 머무르기에는 아주 불편스러웠다. 왜인들의 저지른 만행의 증거자료와 재현된 현장을 보는 그것만으로도 왜인들이 얼마나 잔인한 민족인지를 느끼게 해 준다.(그 뒤 이 기념관은 현대 시설을 갖춘 전시장으로 다시 건축되었다.)

 

이들의 억울한 한을 누가 풀어 줄 수 있을까!!

 

 

남경대학살 기념관은 왜관들의 저지른 만행의 현장을 재현한 현장이다. 수많은 기록 자료들은 보는 것 만으로도 우리를 섬뜩하게 하고 있다.


피에 굶주린 악마가 된 왜군은 하루에 몇 명의 목을 베었느냐 하는 것이 경쟁적인 저들의 자랑 거리가 되었다. 목을 치되 완전히 자르지 않고 머리가 달려 있도록 기술적으로 베는 이런 짓을 했다니 천인 공로할 일이 아닌가! 이러한 사진들은 모두 그 당시 이런 일을 저지른 왜군 본인이 기념과 자랑 거리로 찍은 사진들과 일본 기자들과 외국인들(특히 선교사들)에 의하여 찍어져서 남겨진 것들이었다. 특히 남경 참사의 생생한 자료들을 남기는 데는 기독교 선교사들의 노력이 컸다.

 

억울한 주검들을 구경하는 왜군

 

일본 군국주의 아시아 침략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중국 침략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 혁명으로 아세아에서 처음으로 자본주의 나라로 발전하면서 동북 대륙에 대한 침략이 시작되었다. 1910년 8월 29일 간악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매국노 이완용 등을 앞세워 무력으로 한일 합병 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은 36년간 왜국의 굴욕적인 식민지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일본과 청국 그리고 러시아가 서로 다투고 있었다. 조선이 의지하고 있던 저 큰 나라 청나라도(1895), 마지막 끈이던 러시아도 패하게 되니(1905) 조선은 그대로 일본의 밥이 되고 말았다. 조선을 식민지화한 뒤 20여 년 동안 중국을 침략할 준비를 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왜국은 드디어 1931년 9.18 유조호(柳條湖) 자작극을 벌려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만주사변은 일본 침략자들이 만주를 강점하기 위하여 꾸며낸 사건이다. 관동군 참모부는 류조호 부근에서 남만 철도의 한 단락을 폭파하고 이를 중국 측의 도발 행위라고 날조하면서 이것을 구실로 군사 행동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이 임무는 이마다 대위가 책임지고 집행하기로 하였다. 9월 18일 10시 40분 장춘으로부터 봉천(선양)에 도착하는 급행열차를 전복하기로 되었다. 그러나 폭파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겨우 1.5m의 철로가 구부러지고 몇 개의 침목이 튀어나왔을 뿐 기차는 큰 사고 없이 봉천역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간악한 왜군은 무고한 민간인들에게 중국 군대의 옷을 입혀 철도 파괴자로 가장시켜 철도 연변에 데려다 놓고 총살하였다. 이로 인하여 만주사변이 시작되어 15년간의 중일 전쟁 시작되었다. 장춘과 봉천이 강점당하면서 만주는 어처구니없이 침략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무력으로 동북(만주) 지역을 점령한 왜국은 침략의 명분을 위해서 1932년 3월 만주 제국을 세우고 청 왕조의 마지막 황제로 천진에서 은거하고 있던 부위(溥儀)를 만주국의 허수아비 황제로 세우면서, 중일전쟁을 준비한다. 왜국은 만주지역을 기반으로 중국본토 침략의 핑계로 1937년 7월 7일 북경에서 노구교 자작극으로 발생된 총격전은 중일 전쟁으로 번졌다. 그리고 두번에 걸친 상해 사변(1937.8.13-11.12) 전투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중국 국민당 군은 패하게 된다. 왜군은 연이어 중국의 수도 남경을 향하여 쳐 올라가면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중국의 동남부 지역을 장악한다. 중일전쟁은 1937년 7월에 시작하여 그해 12월 3일 남경이 함락됨으로써 왜군은 중국 동남부를 장악한다. 

노구교 사건 

북경 노구교 다리를 사이에 두고 중국군과 대치하고 있던 왜군을 침략의 빌미를 찾고 있던 중 왜군 한 명이 실종하는 일이 생겨서, 그를 찾고 있던 중 중국군 쪽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왜군은 이때를 놓지지 않고 공격하여 만주 사변을 일으켰다. 사실 실종된 사병은 화장실에 갖다 온 것으로 밝혀졌다. 

 

남경의 참극

1937년 12월 13일 왜군은 남경을 함락시켰다. 남경을 수비하고 있던 정부군은 작전 실패로 고립되었고 왜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왜군은 전세를 장악하고 나서 고립에 빠진 중국군에게 투항하면 살려 준다는 왜군의 얼림에 빠져서 드디어 중국군은 투항한다. 중국군이 전의를 잃은 것도 있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이 한목숨"을 하는 결의와 애국심이 없었다는 것이 더 서글픈 일이다. 군 지휘부는 백성과 고립된 장병을 그대로 놔둔 채 저들만 살겠다고 무책임하게 도망갔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중국군은 오합지졸이었다. 투항한 만 명이 넘는 중국 군인들을 모두 한 골짜기에 모아놓고 집단사살을 하고 확인 사살까지 했다. 나라를 위하여 개인들은 애국적인 행동으로 생명을 초개 같이 버리기도 하는데 일만 명이라는 엄청난 대군이 마지막까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싸우다가 죽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하니 얼마나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인가! 왜군은 나라와 왕을 위해 죽도록 정신무장이 되어 있는 반면 중국군은 그렇지 못하였다.  

 

확인 사살하는 왜군들

 

그리고 남경은 여섯 달 동안 피비린내 나는 아비규환의 악몽에 시달리면서 30만 명 이상의 죄 없는 생명이 참혹하게 죽어갔다. 왜군은 도시의 1/3 이상의 시가지를 불태우고 약탈했다. 왜군은 중국 남자는 닥치는 대로 죽였고, 여자는 닥치는 대로 강간하고 잔혹하게 죽였다. 일본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를 역사는 살아서 지금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아울러 섬나라 왜족은 얼마나 잔인한 민족인지를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저들이 저지른 일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반성보다는 저지른 저들의 부끄러운 만행을 후세들에게 감추려고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하는 데 공을 들였다.

 

강간하고 나서 바로 날카로운 군도로 목을 쳐서 떨어지기 직전의 모습,  얼마나 아팠을까!!

강간한 것도 모자라서 바로 배를 갈라 내장이 흘러 나오는 참혹한 모습을 왜군이 자랑스럽게 찍은 사진들.

 

겁에 질린 알몸의 여인을 찍으며 온갖 해악을 저지르는 왜군

 

 

보라!! 왜군들의 만행을!

강간한 것도 모자라서 바로 그 자리에 막대기를 꽂은 왜군의 잔악함

이것들이 왜군들이 중국에서 저지른 만행들의 극치이다.

왜군이 저지른 만행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다.

 

왜군 가운데서도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집단에서의 왜인은 잔악무도한 짐승들보다 더 못한 쓰레기들이었다. 왜군에게 강간을 당한 여성들은 하루에도 20,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짐승 같은 왜군들의 강간 대상자는 임신부와 어린 여자아이들, 심지어 80이 넘은 할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시체는 양쯔강에 버리기도 하고 불에 태웠다.

 

왜군들의 목 자르기 시합

또 왜군들은 군도로 사람들의 목을 더 많이 자르는 기록들을 세우느라 경쟁적이었다. 왜군은 100명의 목을 먼저 자르는 대회를 열어 포상하기도 했다. 1937 11 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每日新聞) 12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수하는지를 겨뤘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들이 정신 없이 목을 베다 보니 도시는 106명 쓰요시는 105명이 되었다. 누가 먼저 100명의 목을 잘랐는지 판가름이 나지 않자, 그들은 다시 110명을 누가 먼저 베느냐를 두고 연장 시합을 하였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은 1948년 총살당하였다.

 

1937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서 보도된100인 참수경쟁 기사왜군의 목 자르기 두 선수, 만행의 역사 주인공들, 이래도 아니라고 할 것인가? 

 

목 자르기 연습하는 왜군들, 이게 인간이 할 짓인가? 악령의 술에 취한 자들이다. 

 

☆ 그날 남경에서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저지른 이런 잔인한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억울한 주검들!!

   

집단 매장지 발굴된 그대로 모습

                                                                       

양쯔강에 버려진 시체 더미들

왜군은 왜 그렇게 중국에서 참혹한 살인극을 벌였을까                                                                              왜군의 그런 극악무도한 살육의배경에는팔굉일우(八紘一宇)’라는 일본의 파시즘의 핵심 사상에 있다팔굉일우(八紘一宇(はっこういちう, 핫코이치우)는 일본 백성이 신으로 받들고 있는 왕권의 파시즘(독재전체주의)의 핵심 사상으로, 일본이 세계 정복을 위한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구호이다. "전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보고 "세계만방이 모두 일왕의 지배 밑에 있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가 일왕의 지배 밑에 복종하게 하려고 벌리는 무자비한 침략 전쟁을 저들은 성전(圣战) , 신인왕을 위한 거룩한 전쟁이라 한다. 그러므로 저들의 신을 위해 저지르는 모든 일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하기 때문이다. 아시아 정복이 저들의 일차 꿈이었고 나아가서는 세계 정복의 야욕을 가지고 겁도 없이 미국을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패망의 쓴잔을 마시게 되었다. 일본 국민은 역사적으로 저들의 왕이 신의 아들이라는 체면에 취해서 신인왕을 위하여 한목숨 초개같이 버리며 살아왔다.

 팔굉일우라는 말은, 1940년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의 시정 연설에서 유래되었다.‘팔굉(八紘)은 전 세계’‘일우(一宇)는 하나의 집으로 "세계만방이 모두 일왕의 지배 밑에 들어오게 하기 위한 세계 정복전쟁을 뜻한다.

이런 일본인들의 정신을 깨우쳐 준 분이 일본을 정복한 맥아더 장군이다. 전쟁에 패하자 일본 군부는 왕을 살리려고 연합국에전쟁의 책임을 왕에게 묻지 않는다는 항복 조건으로 왕의 면죄를 받았다. 맥아더 사령관을 방문한 쇼와(昭和) 왕에게 신이냐? 고 묻자, 아니라고 대답했다. 왕은 전 국민에게 담화를 발표하면서 자기는 신이 아니고 인간이라고 말하자, 통곡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의 모습을 온 세계에 보여 주었다.

 

 

◈ 왜군은 왜 강간하고 잔인하게 죽였을까?

두 가지 미신적인 설이 있다. 첫째는 처녀와 관계하면 신비한 용기를 얻고, 둘째는 여성의 체모를 지니면(부적같이) 다치지 않고 보호받는다. 는 어리석은 미신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그런데 왜 죽이느냐이다.

 

오, 하나님! 이 땅에 어떻게 왜족(矮族)이나 게르만 같은 잔인한 민족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왜 이런 참혹한 만행을 보고만 계십니까? 억울하게 죽어가는 저 생명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하나님은 정의와 의로우시다면서 어찌 이런 일을 보시고만 계십니까?라고 대드는 하박국의 마음이 내 마음이다. 역사의 현장에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나는 하나님께 투정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 이교의 나라 백성들을 향하신 뜻은 무엇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나는 독일에서 게르만 민족이 저지른 만행과 한국과 중국에서 섬나라 군국주의자 왜군 저지른 만행의 흔적들을 자세히 보았다. 타락한 인생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악하고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때 살인마 왜군들 그리고 성적변태자들인 왜군들이 저지른 살육들과 여성들에 대한 강간의 현장들은, 이 일을 저지른 왜군들이 기념으로 찍어서 고향에 보내거나 자기네 신문 잡지에 실려진 것이 남아 있고. 그 현장을 목격한 외국 사람들, 특히 선교사들의 사진 자료와 생존자들의 증언 때문에 남경의 비극이 역사 가운데 살아나 조명을 받게 되었다. 섬나라 미치광이들, 군국주의자들이 조선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저지른 만행들은 이 세상 끝날까지 아시아 민족의 가슴에 아픈 역사로 남게 되었다. 근세에 들어오면서 가장 잔인한 두 민족, 왜구와 게르만 민족이다. 이차 세계대전 때 게르만 민족이 유대인에게 저질은 민족 말살 정책으로 유대인 600만 명이 독가스실에서 처참하게 학살했다. 그러나 게르만 민족이 왜족과 다른 것은 전쟁에서 지고, 새로운 국가 경영팀이 게르만 민족이 저지른 죄악을 깊이 반성하며 사과하고 보상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음으로써 유대민족에 대한 위로와 민족 단합에 힘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국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면서 그러한 만행을 부정하고 오늘날까지도 저들은 동남아에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 국가적으로 사과하지 않고 있어서 끊임없는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 얼마나 악독하고 잔혹한 민족인가.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은 이런 인생도 사랑하시니,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이런 악독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로우신가!!

하나님은 천인공노할 이런 살인자들도 구원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높고 깊고 넓고 풍성하신가!!!

 

난징 참사의 극동 군사 재판

 

1937년 12월∼1938년 1월 당시 중국의 수도 난징과 그 주변에서 왜군의 중지파견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휘하의 왜군이 자행한 중국인 포로 일반 시민 대학살 난징사건이라고도 한다. 왜군이 중국 만주에서 산둥성 지난을 거쳐 난징으로 진격 중에  30만 명을 살해하였고 난징 점령 뒤에  4만 2000명을 살해했다. 전후 극동 군사재판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2개의 자선단체가 난징에서 매장한 유기 시체만도였고, 그밖에 양쯔강에도 대량의 시체가 버려졌다. 학살은 기관총에 의한 무차별 사격과 생매장, 또는 휘발유를 뿌려서 불태워 죽이는 등 극히 잔학한 방법으로 자행되었다. 또한, 여성들에 대한 강간과 약탈 방화도 자행하였다. 피해는 중국인에게만 그치지 않고 미국 영국 독일 등의 외교관 저택도, 그리고 중국인을 보호하였다는 이유로 미국인이 경영하는 병원 학교와 교회 등도 약탈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뒤 극동 군사재판에서 당시의 총사령관인 마쓰이가 이 대학살의 책임자로서 사형에 처했다. 또 당시의 제6사단장 하세 히사오[長谷壽夫]를 포함한 여러 명이 난징의 법정에서 전쟁범죄자로서 사형되었다.

 

◈ 남경학살의 만행을 저지른 왜국은 결코 인정하거나 사죄하지 않는다.

“왜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학살했으며, “어린이는 물론 늙은 사람까지 잔인하게 강간한 뒤 잔인하게 살해했다.” 강간 직후 여성들은 즉시 살해됐는데, 주로 수족을 절단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라고 생존자들은 전하고 있다. 일본의 일부 양심적 나라 지도자와 지식인들은 일본국국주의자들이 아시아에 저지른 만행에대해서 사과하여왔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보상하기는 커녕, 오히려 극우파들은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역사 교과서에서 난징 대학살은 기술하지 않고 있다. 왜국은 저들이 저지른 역사의 만행들을 미화하거나 감추고 왜곡하는 일에 총력을 다하여 왔다.  

 

난징 대학살 희생자 국가추모식

 

 

중국 정부는 2014년부터 당시 일본군의 난징 진주와 함께 학살이 시작된 12 13일을 국가 애도일로 지정하고 국가 추도식으로 기념하면서 세계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있다. 난징대학살 1937 12 13일부터 1938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이뤄졌으며, 1939 4월에는 1644 부대가 신설되어 생체실험 등을 자행하였다.

제화

jewha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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