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대학살(南京大屠杀, Nanking Massacre) 1937.12.12.-1938.2.
남경대학살은 왜군이 난징을 함락시킨 1937.12.12.부터 1938.2 이르는 6주간에 일어난 참혹한 일이다. 남경은 1937년 12월 12일 왜군에 의해 함락된다. 점령군 왜군 총사령부의 허락 아래 여섯 주간 동안 천인공노할 만행이 저질러진다. 이것은 왜군의 승전 축하의 한 방법으로 전투에 참여한 장병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베푸는 일종의 보상이다. 예로부터 전쟁에 이긴 자의 특권은 노략과 약탈이었고, 전쟁에 진 백성들은 그 피해를 감당해야 했다. 왜군의 승전 축제는 강간 살인 약탈 그리고 방화였다. 이 승전 축제의 패악은 6주간이나 이어지면서 남경 인구 60만의 절반이 학살되었다. 여성 가운데 2만 명 이상이 강간을 당하였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남경의 집과 건물 1/3이 불타고 파괴되었다. 잔악한 왜군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남경을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난징(南京)의 난민 수용소
왜군의 상해 점령은 곧 불어 닥칠 남경의 비극을 예견하고 있었다. 1937년 4월 14일 일본의 첫 공습이 시작되자, 난징에 머무는 외국 공관과 기관들은 자국민들의 귀국을 서두르고 있었다. 떠나지 않고 머무는 외국인들이 뜻을 모아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1937. 11일 15일 난징 안전지대 국제위원회(ICNSZ)를 조직하여 중국과 일본 정부에 안전지대의 보호를 보장해 달라는 요구를 한다. 일본은 “그 안에 중국군이 발견될 때에는 중립 지대를 무효화한다는 조건을 달면서” 안전지대의 보호를 승인하였다. 국제난민위원회의 구성원은 여러 나라의 외교관 선교사 의료인 사업가 등 남경에 머물고 있던 외국인들이었다. 왜군으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는 안전구역 25곳을 만들었다. 안전구역은 모두 난징 주재 외국대사관, 병원. 진링여자대학교 시설들에 설치되었다. 난민들을 위한 안전지대는 적 십자기를 달아 왜군들을 경계했다. 안전구역을 관리하는 모든 직원은 살인마 왜군의 학살로부터 중국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이 국제 난민 수용소는 25만 명이 넘는 중국인을 보호하였다. 생명을 내놓고 인류애를 보여준 남경 국제난민위원회 모두에게 머리 숙여 경의를 드린다. 그 가운데 몇 분을 소개해 본다. 난민위원회 회장에 선출된 독일 사업가 존 라베와 진링 여자 대학교의 학장 미니 보트린 그리고 외과의사 윌슨이다.
존 라베(John Heinrich Detlev Rabe, 1882. 11.23~1950.1.5)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라베는 1908년에 그는 중국에 도착하여 수력발전소 부품을 생산하는 지멘스 AG(Siemens AG)의 지사장으로 남경 근무하고 있었다. 왜군이 난징을 폭격하기 시작하자 많은 외국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그도 귀국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려고 할 때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회사 직원들을 보고는 차마 떠날 수가 없어서 머물기로 한다. 라베는 자신의 집을 개조해서 650명이 넘는 사람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하면서 가진 모든 재산을 쏟아부었다.
왜군들은 수용소 안의 여성들을 탐내어 여러 명목으로 여성의 노동력이 필요하다고 얼마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라베는 독일은 일본과 동맹국이어서 나치 당원인 그는 나치 완장을 차고 활동하면서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나치당원 증명서를 보여주면서 왜군의 악행을 막아보려고 노력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한번은 수용소 안에 중국 군인들이 숨어 있다고 수색을 하려고 하자 거절하면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탱크로 담을 부수고 들어온 왜군 앞에서 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중국 남자들은 군인으로 오인하여 총살하고 수용소는 삽시간에 성에 굶주린 왜군들에게 짓밟히는 여성의 울부짖음이 하늘을 찔렀다. 연약한 생명들은 억울한 한을 않고 부서져 갔다. 그는 방공호에 왜군의 폭격을 막기 위해서 거대한 붉은 나치당 깃발인 ‘하켄크로이츠’를 덮어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왜군들의 압박과 협박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추방되어서 독일 돌아가게 되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전쟁이 끝나자, 라베는 나치당원 전력으로 체포되어 연합군의 조사를 받은 뒤 1946년 6월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는 독일에서 일본의 난징학살을 고발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는 말년에 요양원에서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는데, 중국 정부가 그의 선행에 대한 보답으로 달마다 정기적으로 재정 지원을 하여 주었다. 라베는 1950년에 뇌졸중으로 죽었다. 중국 정부는 1997년에 베를린 그의 무덤에 있는 비석을 난징으로 옮겨와서 난징학살 기념지 안의 "영예로운 곳"에 안장하여 중국인을 사랑한 그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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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Robert O. Wilson(1904.10.5.~1967.11.16.)
Dr.Wilson과 부인 Merry는 미국 의료선교사로 난징 대학의 병원에서 수술 의사로 일하다가 남경이 함락될 때까지 몇 달간 상처를 입은 군인들을 돌보느라 남경을 떠나지 못하고 남게 되었다. 그리고 라베와 보트린과 함께 난민수용소를 만드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대학 병원도 피난처가 되어서 많은 환자들과 어린이 여성들이 보호하였다. 그는 일본 패망 뒤 극동 국제 전범 재판소에 나가 왜군들이 저지른 만행들을 중언하였다. 그가 남긴 일기에는 난민 수용소에서 믿기지 않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남기고 있는데 몇 가지를 들어본다.
한번은 왜군의 한 떼가 와서 숨어 있는 중국 군인들을 찾는다고 들어와서 남자 환자들은 닥치는 대로 쏴 죽였다.
남경학살 기간 윌슨과 그의 동료들의 전력을 다하여 왜군에게 죽었을 수많은 민간인과 포로의 생명을 구했다. 그의 일기장 몇 쪽에는 강간과 민간인의 끔찍한 학살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군이 청소부들이 쉬고 있는 곳에 들어와 이유 없이 일곱 명 가운데 다섯 명을 죽이고 두 명을 상처를 입히고 떠났다.
또 지난 이틀 동안 생긴 몇 가지 일들은; 어젯밤, 이 대학의 중국인 직원 한 명이 침입해 그의 친척인 두 명의 여성을 강간했다. 다른 난민 수용소에서는 16살 두 소녀가 강간을 당하는 사고가 생겼다. 대학의 중학교 수용소에는 8,000명이 수용된 그곳에, 어젯밤에 왜군이 10번이나 담을 넘어 들어와서 음식과 옷을 훔치고 여러 여성이 강간을 당했다. 왜군은 두 소년을 총검으로 찔러 죽였고, 5명을 배를 가르는 악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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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링(金陵) 여자 대학교
1937년 12월 둘째 주 국제 난민위원회의 간부인 미니 보트린Vautrin) 학장은 학교를 난민구호소로 만든다. 그리고 왜군이 난징이 함락되어 살인과 강간 방화로 도시가 생지옥으로 변하자, 아이들과 여성들이 이 피난소로 몰려들었다. 그녀는 1837~1840년까지 중국인 아이들과 여성들 일만 명을 보호하였다.
왜군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보호소에 있는 여성들을 욕심내기 시작하였다. 왜군은 여성들이 가득한 이 학교에 쳐들어와 여성들을 끌고 가려고 할 때마다 이를 막아내려고 악전고투했다. 말로 듣지 않자 100명을 내놓지 않으면 양식과 물 그리고 석탄 공급을 끊겠다고 위협하였다. 추운 겨울 어린아이들과 모두 살아남으려면, 모두를 위해 누군가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갈림길에 서기도 했다.
한번은 왜군들이 와서 창녀를 찾아내 데리고 가겠다고 해서, 이들이 창녀만 데리고 나가면 다른 여성들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허락했는데, 속은 것이며 착각이었다. 왜군을 잘 모르는 그녀는 이렇게 크게 속았다. 그들은 여성들을 강간하고 폭행이 이루어지면서 수용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보트만은 이런 악행으로부터 왜군을 막아내다가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공포로 심신이 허약해 질대로 허약해진 그녀는 1940년 미국으로 돌아가는데 태평양에서 몇 번 자살하려고 했다고 한다. 오하이오 요양원에 입원하여 전기치료도 받으며 조금 좋아지자 인디아나 폴리스에 있는 기독교 선교 연합회에서 일하였다. 그녀는 스트레스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수용소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지켜내지 못한 자책과 돌아가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염원을 그의 일기장에 남겼다. 스트레스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41년 5월 그녀가 난징을 떠나온 지 일 년이 되는 날 창문과 문틀을 막아 놓고 가스를 틀어놓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살인적인 공포 속에서 주님에게 이렇게 기도했다.
오 하나님, 오늘 밤 난징 왜군들의 잔인한 짐승들을 통제해 주시고,
오늘 무고한 아들들이 총에 맞아 상처 입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로해 주시고,
오늘 밤의 긴 고통의 시간 동안 젊은 여성과 소녀들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더는 전쟁이 없는 날이 오도록 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왕국이 올 때 당신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미니 보트린(Minnie"Vautrin 9.27,1886–5.14, 1941)+
일리노이 주립 대학 졸업한 그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활달한 그녀는 결혼하는 대신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한다. 고등학교 선생을 하던 그녀는 1912년, 기독교 선교 연합회에서 선교사 겸 교사로 중국에 파송되어 중국 안후이성의 작은 Luchowfu에 여학교를 세워 7년 동안 교장으로 교육발전에 힘썼다. 그녀는 귀국했다가 다시 외국인 선교 협회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1942년 중국으로 파송된다. 그녀가 중국에 파송될 때는 1차 아편 전쟁으로 중국과 영국이 체결한 불평등 조약에 의하여 중국 전역에 기독교 선교의 문이 열리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중국에서 28년 동안 여성들을 위한 교육자로 사역하였다. 난징(南京)을 중심으로 중고등학교와 진링여자대학(Ginling Women College)을 설립하여 학장으로 봉사하였다. 1941년까지 약 6000여 명의 선교사가 중국에 파송되었는데 보트린은 미국에서 파송된 세 번째 선교사이다. 중국 선교지에서 약혼자를 만나서 결혼을 약속하였지만,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의 영혼 구원과 교육을 통한 사회발전을 위하여 결혼을 포기하였다. 그러다가 난징 대학살을 맞이하여 난민구제에 총력을 다했다. 포악하고 난폭한 왜군의 만행을 그쳐 달라고 일본 대사관에 요청했다가,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난징 철수를 권유를 받았지만, 지금은 떠날 때가 아니라고 거부했다. 그녀는 중국에 알려진 몇 안 되는 서양 사람 가운데 한 분으로 중국 정부는 그녀의 헌신에 감사하면서 훈장 남옥 장(Emblem of the Blue Jade)을 수여하였다.
난징 대학살의 책과 영화
남경대학살의 생생한 모습들은 영화로 그리고 책들로 나와서 왜국의 잔혹성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남경 대 학살(南京大屠杀) 영화
10월 1일은 공산당이 부패한 장개석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인민 공화국이 세워진 날이다. 이때가 되면 어김없이 남경대학살 영화를 극장에서 상영한다. 이 영화는 대만과 합작으로 만든 것으로 우리는 1966년 목단강에서 보았다. 이 영화를 통해서 왜인이 저지른 만행의 지극히 일부를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진링의 13 소녀(The Flower of War)
미니 보트린 선교사가 남긴 일기와 통신문, Terror in Minnie Voutrin’s Nanjing and Diaries and Correspondence (1937-39)에는 난징 대 학살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이 자세하게 나타나 있는데 책으로 만들어졌다. 이 일기에 영감을 받은 중국 소설가“옌거링('严歌苓)”이 '金陵十三钗( 진링의 13 소녀)라는 제목으로 소설화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중국 영화감독 장예모가 “진링의 13 소녀”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서양에는 “The Flower of War”라는 제목으로 왜군의 만행을 널리 알렸다. 이 영화는 잔악무도한 왜군의 치하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누구보다“ 비참하게 살았던 13명의 어린 소녀들은,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다.”이다. 이 소설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난징의 의로운 사람(Der gute Deutsche von Nanking, The Good Man of Nanking)
라베가 난민 구제 활동을 하면서 왜군의 악행을 보고 경험한 것을 남긴 그의 일기가 책으로 출판되었고, 또 “난징 대학살”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왜군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
중국계 미국 여성 Iris Chang이 1937년 12월부터 1938년 사이 여섯 주간에 일어난 난징 대학살을 실화로 쓴 책으로 1997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저자는 '난징의 강간'을 통해 일본 정부가 1931년~1945년 사이에 전쟁 범죄를 부끄러워할 만큼 충분히 사과하지 않았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난징의 강간'은 난징 대학살을 서구에 처음으로 소개한 영어로 쓰인 중요한 책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일본에서 한 출판사가 번역출판을 하려다가 일본 우익세력들의 출간 저지 압력으로 못하다가 2007년에 출간되었다. 아이리스 창은 일본 우익세력으로부터 전화와 메일, 시위 등의 방법으로 끊임없는 협박을 받으면서 우울증을 견디지 못해 2004년 11월,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으로 아까운 생을 마감하였다.
김제화
jewha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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