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부평교회 수양회 8.3-6, 2006
나의 모교인 인천 부평교회의 소백산 수양회에 초청을 받았다. 우리는 부평교회에서 김 형제 차를 타고 소백산으로 떠났다. 가는 길에 우리는 서로 간증을 나누는데 통하는 데가 있어서 우리의 교제는 화기애애해졌다. 이천 지방에 이르자 이천 쌀 백반으로 이름난 식당에서 이천 쌀 백반을 사주셨는데 산채 나물과 아울러 밥맛이 좋았고 인상 깊었다. 수양회에는 학생들과 함께 250여 명이 왔다. 매일 저녁은 홍성철 교수가 복음을 전하고, 결심 초대를 하고 우리가 개인 상담을 하였는데, 전에 우리가 하던 방법과 같아서 너무 좋았다. 나는 매일 저녁 강 형의 동창생과 한방에서 지나면서 개인 전도하는 일을 했다. 그가 기독교에 나가는 것은 자식들이 잘 되기를 바라서가 이유였다. 장로교에서 세례도 받았지만, 구원 문제는 뒷전이었다. 진은 노 자매들과 함께 쉬면서 좋은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Dr. 홍성철 교수는 부천에 있는 기독교 성결교신학교의 교수로 지금은 은퇴하고 명예교수로 있었다. 신학교에 전도학을 가르치는 훌륭한 전도자가 있다는 것이 귀했다.
이 분은 대학 시절에 구원을 받고 대학생 Joy Club 활동을 하신 분이다. 고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New Zealand로 유학을 가서 형제교회에서 형제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믿음 생활을 하다가 박사 학위를 받은 뒤에 New Zealand 모임의 천거 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어느 한 주일에 New Zealand 모임에서 소개해 준 서대문 모임의 전신인 아현동 모임에 나가서 천거 서를 보여 주었다는데, 불행하게도 아현 모임의 형제들이 Dr. 홍성철 형제에게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홍 형제는 한국 모임과 멀어지게 되었고 부천 성결교신학교 교수로 임용되면서 그곳의 목사가 되었다. 그 뒤로 New Zealand 모임 형제들이 한국을 방문하였지만, 한국모임 형제자매들과는 교제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형제 모임의 문제점은 바로 이런 데 있었다. New Zealand 모임의 지체로 몇 년 살다가 그곳 모임 장로들의 천거 서를 가지고 왔는데, 왜 아현동 모임의 형제들이 떡을 떼지 못하게 했는지, 대답을 듣고 싶다. 물론 형제들의 생각을 조금은 짐작한다. 우선 낯선 얼굴이니까 시간을 조금 더 두고 보려는 것일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 형제교회의 성찬 예배는 폐쇄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천거서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성찬은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옛날부터 나의 생각이다.
◈ 같은 경우가 1996? 쯤에 인천 모임에서도 있었다.
내가 토론토에서 공부하고 있으면서 가끔 뉴욕에 있는 형제들의 모임과 교제할 때 미국 필라델피아 대학에서 교통공학을 공부하던 형제가 드디어 교통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형제는 뉴욕 한인 모임에서 교제하다가 인하대학에 교수로 나가게 되자 인천 모임을 천거하여 주었다. 형제 부부는 한 주일 인천 모임에 나가서 뉴욕 형제 모임에서 교제하다가 온 사실을 알렸다. 예배 시간에 떡과 잔이 오다가 이 형제자매 차례가 오자 건너뛰어 다음 사람에게로 가므로 떡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자 당혹스럽고 쑥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왜 미리 떡을 뗄 수 없음을 말해 주면 될 텐데, 왜 그렇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 교회가 그런 전통을 가지고 있다면 미리 알려주어야 가든지 머물든지 결정할 것이 아닌가! 그분들은 결국 인천 모임만이 아니라 형제교회 자체를 떠나게 되었다고 들었다.
◈ 이와 비슷한 일이 속초 모임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소아과 의사 형제가 속초에서 개업하게 되었다. 형제는 내가 잘 모르지만, 부인된 전 자매로 서독을 다녀온 부평교회 식구로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다. 부평교회가 나누어지기 전에는 다 한 형제자매로 교제하다가 나누어진 뒤로 강봉기 형제가 이끄는 부평교회는 한국 형제교회와 교제가 멀어졌다. 형제는 연세대학교 의대를 나와 소아과 전문의사가 되었다. 형제자매는 속초 형제교회에서 교제하기를 원하여 찾아갔다. 그러나 부평교회 식구여서 인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떡과 잔의 참여를 거부당하고는 다시는 교제하지 않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 내가 캐나다에서 완고한 모임에서 경험한 똑같은 현상이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어서 한심했다. 전도출판사 발행인을 하는 캐나다 이치일 형제가 주로 교제하는 모임이(Gospel Hall, 가운데서 극단적인 폐쇄주의) 성찬 예배의 정책이 폐쇄적이어서 같은 모임의 형제자매라도 자기네가 인정하는 계통이 아니면 일단 참여를 제한하고 있다. 내가 여러 번 참석해 본 결과 그들은 Plymouth Brethren 가운데서도 바리새적인 형제들의 대표적인 모임이라고 보았다.)
오늘 점심은 부평교회가 강사들을 특별히 대접한다고 송어 양식장 식당으로 갔다. 소백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에서 송어를 키우고 있었다. 송어회를 쳐서 먹을 수 있어서 신선하고 좋았다. 그리고 그 뼈로 끓인 탕은 한 맛을 더해 주었다. 이 자리에서 홍 교수는 나에게 20일 주일 자기 교회에서 설교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자기가 그 주말에 대만에 가기 때문이라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오늘은 토요일 특별활동으로 일부는 소백산 등산, 노인들은 소백산 주위를 도는 여행이었다. 나도 소백산을 오르고 싶었지만, 신발도 없고 등산 준비가 안 되어서 노인 팀과 함께했다. 내가 부평교회 초기 구원받을 때 계시던 자매들도 계셔서 더 친근감이 있었다. 맑게 흐르는 시냇물과 자갈로 이루어진 강변이 높은 소백산을 두르고 있어서 정말 아름다웠다. 영주, 풍기, 단양으로 돌면서 우리 조상들이 살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영주에서 식사하고, 단양에서는 방랑시인 김 삿갓의 고향에 가서 유적지를 돌아보는 재미도 있었다.
♣ 이 지역은 우리 예안(宣城) 김씨 조상들의 뿌리가 있는 곳이다. 세종 때 천문학자로 조선의 천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김담(金淡)은 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로 이 지방의 자랑스러운 선비이며 우리 선조이시다. 조선은 그동안 중국의 달력을 사용하여서 실제로 시차가 있어 정확지가 않았다. 이런 잘못을 고치려고 이순지와 김담은 연구 끝에 칠정산(七政算) 내외(內外)편, 즉 조선에 맞는 달력을 만들어 냈다. 2016년은 김담 천문학자의 탄신 6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천문학회는 영주 지방 정부와 협력으로 영주시 향토문화 사업의 하나로 축제를 열었다. 아울러 국제적인 천문학자들을 초청하여 국제 천문학 심포지엄을 열어 역사의 재조명에 힘썼다. 특히 영주 무섬에는 그 자손들의 일부가 조상들의 터를 지키고 있다고 하여서 한번 가보고 싶다.
저녁에는 구역들의 연출 시합이 있어서 나를 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모두 준비도 잘했고 잘들 했다.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수양회 마지막 날은 주일 성찬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수양회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 “구원의 확신”에” 관해서 전했는데 반응이 대단히 좋았다고 한다. 강 형이 내가 시간을 십 여분을 초과하였다고 지적하는 메모지에 적어서 보내 주었다, 내가 설교 가운데 시간이 조금 더 가드라도 미리 양해를 구했는데도 꼭 그렇게 지적을 해야 하는지! 점심 뒤 강 목사와 장로들이 내 방에 오셔서 오랜만에 좋은 교제의 시간이 되었다고 격려하여 주면서 선교비 50만 원을 주시어서 고마웠다. 돌아올 때는 Dr. 지형 부부가 우리를 원주 터미널에 데려다주었다. 강릉 진리로 내려와 출렁이는 푸른 바다에 몸을 맡겼다.
산돌교회 방문 8.20 주일.
소백산에서 홍성철 교수가 부탁한 대로 이화여대 부속 여자 중학교에 갔다. 홍 교수가 개척하는 산돌교회가 중 학교 강당을 빌려서 모이고 있었다. 1부 교사들을 위한 모임이 있었고, 2부 전체 예배는 큰 교실에서 모였다. 이 귀한 시간에 나는 왜 복음 전도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간증과 중국 선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00여 명의 식구가 모두 지식인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식당에서 점심들을 나누고 교제 20만을 주었다.
김제화
jewha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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