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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여행기/1.독일한인선교

안네 프랭크

                                        Bergen-Belsen concentration camp(유대인 집단수용소)  1.7, 1980

 

아침 식사를 마치고 차를 나누면서 우리는 경건의 시간을 가졌다. 동생을 방문하고 있는 내순 자매 오빠 문 선생을 집중적으로 전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하루 일정을 이야기하다가 나는 “안네의 일기” 주인공이 잠들어 있는 Bargel Belsen 유대인 수용소를 가보는 것이 어떠냐고 했더니 모두 좋아했다. 나는 오늘 특별한 일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엘리스에게 오늘 우리는 Belsen Memorial Museum을 보러 간다고 알려주자, 썩 반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문내순 차로 우리 5명은 Celle를 거쳐  60Km 거리에 있는 Belzen 유대인 수용소에 도착했다. 

 

                            Nazi Bergen-Belsen Concentration Camp(나치 베르겐-벨젠 유대인 강제 집단수용소) 

유대인이라는 것 때문에 고통 가운데 죽어간 한이 서려 있는 수용소는 Celle에서 북쪽으로 약 17km 떨어진 베르겐 벨젠의 남쪽 작은 마을에 있었다. 독일 나치 군부는 1940년에 수용 인원 4만 명 규모의 다목적 수용소를 지어 1943년까지 전쟁 포로와 유대인 그리고 정치범, 로마니(집시), 범죄자, 여호와의 증인, 동성애자 등을 수용하던 곳이다. 1945년 초 북쪽 전선의 영향으로 유대인들이 옮겨와 모이므로 약 37,000명의 유대인을 수용하게 된다. 이 무리 속에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언니도 있었다. 열악한 위생 상태, 식량과 식수 및 수용 공간 부족으로 인해 장티푸스, 결핵, 이질 등의 질병이 창궐하여 몇 달 만에 안네의 가족을 포함하여 수만 명이 죽는다. 1945년 4월 15일 영국군이 독일 수용소 가운데 제일 먼저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해방한다. 수용소에는 수천 구의 시체가 매장되지 못한 채 버려져 있었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6만 명에 달하는 수감자들이 살아있었는데, 그 가운데 13,000명 이상은 해방에도 불구하고 심한 영양실조와 질병들로 살아남지 못하였다. 수용소는 장티푸스 등 질병 방지를 위하여 모두 태워버려서, 그때 그 모습의 흔적은 하나도 없는 허허벌판이 되어버렸고, 영국군이 와서 만든 긴 무덤들만이 빈들을 지키고 있었다.      

 

유대인 30,000여 명이 학살당한 이 Bergen-Belsen Concentration Camp는 독일 정부의 예산으로 유대인 공동체 주관으로  Jewish Memorial Park과 Memorial Museum으로 만들어졌다. 들어가는 문 앞에는 특별히 안네 가족의 희생에 대한 안내판이 우리 눈길을 끌었다. 이곳은 유대인들의 고통과 눈물 그리고 한이 젖어 있는 곳이다.

 

긴 무덤들

독일이 항복하고 나서 영국군이 이곳에 왔을 때 묻히지 못한 만여 구의 시체들이 온 들에 널려있었다. 영국군은 긴 무덤들을 파고 불도저로 밀어 넣어서 묻었다. 이 시체 더미에 안네와 언니와 어머니도 함께 있었을 것이다.   

 

문을 들어서면 긴 무덤들이 우리를 맞아준다. 원혼들의 울부짖음이 서려 있는 유대인들의 공동묘지로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300-500의 시신들을 마구잡이로 집단 매장한 긴 무덤들은 우리를 숙연하게 해 준다. 그 긴 무덤들 위에는 피었다 져버린 "Heather"라는 보라색 풀꽃들이 쓸쓸하게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날을 잊지 않으려고 만들어진 박물관은 게르만 민족이 유대민족에게 저지른 잔혹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럽에서는 게르만 민족이, 아시아에서도 섬나라 왜국(일본)이 짓밟은 곳은 어디든지 이런 참상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차 세계 대전의 두 원흉 독일과 일본이 저지른 만행과 저들이 받은 멸망의 저주는 씻지 못할 인류의 비극으로 남았다.                 

 

긴 무덤들 위에는 추위에 말라버린 'Heather'라는 보라색 풀꽃들이 쓸쓸하게 뒤덮고 있었다. 나는 무덤 위에 피었다 져버린 Heather 몇 줄기를 기념으로 꺾었다.     

                                                                             긴 무덤을 덮은 채 년 년이 피어나는 꽃, Heather 

 

 “안네의 일기” 의 주인공 안네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가 함께 바로 여기에 갇혀 있다가 1945년 3월 엄마와 언니 마고가 영양실조와 장티푸스에 걸려 먼저 죽고 며칠 뒤에 안네도 죽은 곳이다. 어렸을 때 안네의 일기를 읽고 또 영화도 보고 마음에 많은 아픔을 느꼈었는데, 여기 어디엔가 그녀가 잠들어 있다니 마음이 숙연해 짐을 느꼈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그런 못된 짓을 할 수 있는지 게르만 민족도 섬나라 왜국과 다른 바가 없었다. 이런 악행을 하나님은 그대로 두시지 않았다. 이차대전 말기에 서독의 모든 젊은이는 전선으로 끌려가서 수도 없이 죽었고 나라는 망했으니 저주의 벌을 받았다. 역사는 게르만 민족 저지른 만행을 길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많은 젊은이가 전선에서 희생되었고, 아울러 홀로 된 많은 여인이 그 뒤에 남게 되었다.

 

                                                                Jewish memorial Site(유대인 추모비)                     

 

 

수용소 가운데에는 다윗의 별을 머리에 이고 있는 추모비가 서 있다. 수용소 해방 일주년을 맞이하여 유대인 희생자들을 추모하려고 1946년 4월 15일에 세워졌다. 돌비 윗단에는 "이곳에서 나치의 손에 의하여 30,000명의 유대인이 죽임을 당했다"라고 새겨져 있고. 아랫단에는 “Earth conceal not the blood shed on thee”라는, 유대민족의 결의에 찬 선언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 쓰인 “Earth conceal not the blood shed on thee”는 구약성경 욥기 16장 18절의 전반 말씀이다. 

땅이여, 내 피를 가리우지(덮지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이다.

 

"Darby Bible"은 이 대목을 “땅은 흘린 피를 드러낼 것이며, 더는 그의 죽음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번역하였다.  땅이여, 숨기지 말라” 는, 욥의 이 말은 자기를 비난하는 '엘리바스'에 대하여 자기의 무죄함을 변명하는 말이다.

유대인의 학살현장에 세워진 비문에 욥의 이 말을 새긴 뜻은 무엇일까? 욥이 자신의 흘린 피를 덮지 말고 그대로 놔두라는 것은, 아벨이 형 가인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을 때, 울부짖는 아벨 피의 호소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가인을 심판하신 사실과 관련이 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 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세기 4:8-11”

피의 호소를 신학적으로 살펴보면,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 값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로마서 6:23. 억울한 생명을 해친 자는 그 피의 호소를 통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다, (사 26:21; 겔 24:8). 그러므로 “피를 덮지(숨기지) 말라”는 것은, 억울함을 풀어주시기를 호소하는 탄원의 표현이다. 게르만 민족, 독일 나치 정권이 저지른 만행은 엄청난데, 그 가운데 유대 민족이 당한 집단학살의 억울함이 있다. 유대민족이 당한 그 억울함을 하나님은 어떻게 게르만 민족에게 갚으셨는지를 이미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비문은 권선징악의 경고 메시지이기도 하다.

"Darby Bible"은 영국 형제교회의 초기 지도자 John Nelson Darby에 의해 원어에서 번역되어 영국에서 출간되었다.

권선징악(勸善懲惡)-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 encouraging good and punishing evil)

 

▶ 이스라엘에 대한 빌라도의 예언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부터 무조건 항복한 1945년 4월까지 12년 동안 나치 독일은 유럽에 각 지역에 유대인 수용소를 오천 개나 세웠으며 학살한 유대인은 약 6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150만 명이 어린이었다. 역사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의 재난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에서 비롯되었다. 유럽에서 당한 유대인의 민족적 수난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들의 죄에서 건지시려고 보내신 메시아를 거절하고 죽음에 넘겨준 대가라고도 할 수 있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마태복음 27:24-25)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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