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New Year) 1.1 Tue 1980
1980 새해는 서독 Hannover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새해에는 주님께서 이 부족한 것을 어디로 데려가실지 기다려지는 마음이다. 이스라엘 방문과 유럽 여러 나라 방문,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서 한국으로 가는 것이 기도의 제목이요 바람이다. 새해 아침은 너무 피곤해서 아침 식사를 건너뛰고 점심때까지 쉬고 싶었으나 떠나는 현대건설 두 사람 때문에 9시에 식탁에 함께 해야 했다. 이용현도 Boccum 탄광촌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와 교제하기를 원했다. 이 형제가 있는 교회의 소란한 이야기를 나에게 말하면서 나를 자기네 목회자로 초청하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세배
오후 4시경 모두 한복들을 입고 Steinberg 장로님께 새해 인사드리러 갔다. 마침 나는 김문봉 형제가 빌려준 한복을 입었다. 자매들이 모두 한복으로 입으니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지! 역시 한국의 여인들은 한복이 그 아름다움을 더 해 주고 있었다. 내가 먼저 대표로 새해 축하 세배를 드렸더니, 장로님이 기념주화 DM 10을, 자매님이 DM 1짜리 두 개를 주었다. 그리고 모두 단체로 세배를 했다. 내가 한국 할아버지 역할을 하고, 전통 한국 가정에서의 세배 풍속을 장로님 댁 식구들에게 보여 주면서 모두 즐겁게 지냈다.
양양 자매 문어 반찬
저녁 식사는 강원도 양양에서 온 김 자매 집에서 준비했다. 자매가 생각지도 않은 문어 반찬을 해서 식탁에 올렸다. 너무 오랜만에 먹어보는 것이어서 맛이 있었다. 역시 강원도 양양 아가씨라 문어 반찬을 할 줄 아는 것이 마음에 들었고 고마웠다. 그곳에 함께 하는 두 독일 자매를 위하여 나는 히브리서 12: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말씀으로 교제를 했고 김학열 자매가 통역했다. 주로 나의 간증을 중심으로 영국에 오기까지, 여기 이렇게 함께하기까지, 앞으로의 계획들을 쏟아놓았다. 특별히 앞으로의 계획 가운데 이스라엘 방문에 대한 것에 대해서 엘리스가 관심을 가지고 자기도 기도해 주겠다고 계속 믿음으로 나아가라고 격려해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간증이 새해 첫날 모두에게 힘이 되는 것 같아서 고마웠다. 이 한해를 위하여 주님은 나에게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는 시편 31:24”는 말씀을 주셨다. 저녁부터 내린 눈은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었다.
새해에 우리 가정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새해 둘째 날에도 아침부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화분 하나를 사 가지고 감기몸살을 앓고 있는 영남 조카에게로 갔다. 가족 하나 없이 쓸쓸한 시간을 보내다가 내가 가니 반가워했다. 찬양과 함께 주님께서 건강을 축복해 주시도록 기도를 드렸다. 밖은 눈이 펑펑 내리고 음악이 흐르는 집안에서 따뜻한 부켄 차를 나누면서 그가 살아온 인생사를 들었다. 조카의 집은 태백이며 강릉 간호 고등학교를 나오고 독일에 와서 마취사 전문 간호사 공부를 하여 마취 전문 간호사가 되었다. 또한 독일에 와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었다. 조카가 한국식 잔치 국수를 했는데 먹으면서 집 생각이 났다. 저녁은 김문봉 형제 가정에 모두 모여서 떡 만두 국을 만들어 먹으면서 모두 정초 기분들을 느꼈다.
바람난 큰언니
하노버 자매들을 주관하고 있는 Big Sister 김정애 자매, 노처녀가 바람이 났다. 그동안 사역하는 엘리스와 요한나 지매 님들이 독신들이라 그분들의 영향을 받은 Big Sister가 그동안 아래 자매들에게 결혼에 대하여 은근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오로지 영적으로 주님과만 살기를 바라면서 이성과의 교제를 반대하고 말리는 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자기가 이성에 눈이 떠지더니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의 남자 친구는 광부 출신으로 서 씨 성을 가지고 있었다. 김 자매가 신앙상담을 위하여 나에게 Mr. 서를 소개하여 주었다. 교제하여 보니 잘 못 믿고 있었다. 말씀을 함께 찾아보면서 바로 믿도록 교제해 주었더니, 그의 반응이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 유승지 자매가 DM 30이 든 선물 봉투 하나를 주어서 고마웠다. 김정애 자매 친구 Mr. 서를 만나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말씀을 찾으면서 전 했더니 믿음의 확신을 가지는 듯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이들은 그 뒤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
다투는 부부 1. 4-6
오늘은 뜻하지 않게 또 Hamburg로 가게 되었는다. 그것은 K자매 부부가 이혼하려고 다투고 있는데, 나와 상담을 하고 싶다고 엘리스에게 요청해 와서 엘리스가 나에게 다녀오도록 부탁하였다. 한 번 만난 만남을 왜 제대로 잘 살지 못하고 헤어지려고 하는지 답답할 노릇이다. 엘리스 자매님도 큰 언니로서 그들의 좋은 상담역이기는 하지만 결혼해 본 적이 없고, 정서적으로 외국인이다 보니까. 한국 사람인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였다. 오늘 Hamburg으로 기차로 가려고 하는데 마침 문내순 자매 차로 함께 갈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서 방문한 오빠와 함께 하노버에서 온 문내순 자매가 오후에 Hamburg으로 가는 길이었다.
부부 상담
오후에 찻집에서 K자매와 남편 S형제를 따로따로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자매는 형제의 성격상 모순을 크게 들었고, 형제는 원래 불임여성인 줄 알고 결혼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살면서 자기 부모를 욕하는 데는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하면서 성격상 차이 때문에 살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들은 서로 존중한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서로 조금만 이해하고 참으면 될 일들을 서로가 이기적이었다. 결국은 사랑과 이해가 없으니까 미움이 생기고 싫어지게 된 것이다. 심한 권태기를 겪고 있었다. 오늘 다시 두 사람 만나 그들의 가정불화를 조정하는 일을 했다. 자매를 따로 만나, 형제의 말을 무조건 거슬리고, 반대하면서 이기려고 하지 말고, 우선 좋게(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생각하면서 의논하도록 하라고 권하고, 남편 부모나 가정에 대해서 쉽게 말하지 말도록 도움말을 주면서, 남편에게 그 점에 대해서 사과할 수 있겠느냐 했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또 형제를 따로 만나서 자매가 형제에 대해서 왜 그렇게 하는지를 먼저 이해를 하도록 하라고 하면서, 아내를 존중해 주라고 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일들을 물어보고 의논하면서 서로 합의에 이른 후에 한 걸음씩 나아가라고 권했다. 형제는 지금 자존심이 상하여 자매에게 막대하는 불손한 태도가 있었다. 또 자매는 경제적인 면에나, 인격적인 면 등에 형제를 무시하는 태도인 것 같았다. 지금 형제는 광부 일을 그만두고 부인이 근무하는 병원 기숙사에서 함께 사는 환경이 안정이 없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두 사람을 다 불러 놓고 부부의 관계성과 윤리에 대해서 한 30분간 교제한 뒤에 자매가 먼저 사과했다. 그리고 형제는 자기 마음 문은 항상 열려 있는데, 또 자매가 습관적으로 그렇게 할까 봐 두렵다고 했다. 서로는 한 10여 일 시험 기간으로 지내보라고 하니 좋다고들 했다. 최악의 경우는 잠시 별거도 해 보라고 했다.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 생각해 보는 시간도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글로서 실을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에 감정적으로 서로 화나게 하는 웃기는 일들도 있었다. 잠시 머물고 떠나가는 나그네를 위하여 창숙 자매가 DM 40을 선물을, 김 자매 Parker 볼펜 하나, 신 형제 한국 달력 하나를 주었다.
다시 하노버로
마침 오빠와 함께 Hannover로 다시 내려가는 문내순 자매 차로 돌아오자, Frankfurt에서 목회활동을 하는 김창환 목사가 집사 한 사람을 데리고 나를 만나러 왔다. 형제교회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해서 역사와 교리 적인 면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 가운데 자기들이 형제교회의 건물에서 한인 교회를 하고 있는데 그 모임 장로님이 감기가 들어서 약을 먹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기도하면 낳을 텐데,라고 하면서 좀 비판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목사님은 감기 정도는 기도로 낳으시는 모양이지만 독감이나 중병에 걸리면 항생제도 먹고 수술도 하지 않겠느냐고 물으니, 그건 그렇다고 얼버무렸다. 그는 신비주의에 가득 차서 민중을 얼리고 있는 성령 파 사람이었다. 늦은 밤 그들은 떠났다.
Steinberg 장로님 초청 Jan. 6 Sun
Steinberg 장로님 댁에서 저녁 초청을 해 주셨다. 그곳에는 독일 손님들이 와 있었다. 장로님은 나를 자기 손님들에게 좋은 말로 소개해 주셨다. 나는 식탁에서 혹 영어를 좀 하는 분들이 무엇을 물으면 한두 마디 나누고는 말이 안 통하는 여러 형제자매와 웃음을 나누면서 함께 저녁을 먹었지만 좀 힘든 자리였다.
서독 중부 선교 여행 Jan. 8-10. 1980
오늘은 엘리스와 나는 남부 몇 곳을 방문하기 위해서 오후에 길을 떠났다. 먼저 우리는 탄광 도시인 Allen로 와서 광부들의 아파트로 가자, 기다리고 있던 두 조카들과 김석련 형제를 만나서 잠시 교제를 나누고 이제 떠나면 다시 못 볼 조카들에게 예수님 믿는 생활을 잘하도록 부탁하고 헤어졌다.
Wetten, Yuling 장로님
전에 방문하여 잠시 머물렀던 Yuling 장로님 댁에 여장을 풀었다. 그곳 교회의 저녁 집회에 참여했다. 한국 슬라이드와 한국 교회 소식을 듣기원하여 우리가 활동하던 슬라이드를 보여주고 엘리스가 통역을 했다. 그리고 합동으로 기도할 때에는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자유롭게 오래 동안 기도하는 것이 은혜로웠다. 사회하시는 형제님께서 다음 주일에는 한국 선교를 위해서 특별 헌금을 한다고 광고를 하셨다. 다음 날 그 옆에 사는 율링 미망인을 찾아뵈었더니 잔 포도로 만든 Johana란 Bier를 주어서 같이 마시면서 그분의 긴 간증을 들었다. 나올 때 DM 50 선물을 주셨다. 돌아와 응접실에서 탄자니아에서 선교 사역을 하고 돌아온 Yuling형제가 영어를 어느 정도 하시는 분이라 우리는 한참 동안 교제했다. 이쪽 지방으로 오면 두 차례나 머물렀던 Yuling 가족의 따뜻한 사랑과 친절을 베풀어주셨던 가족과 헤어졌다. Yuling 장로님이 DM 50을 선물로 주셨다. 다음 주헌금이 모아지면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셔서 고마웠다.
New Life Mission Jan. 9 Wed
오늘 엘리스는 나를 데리고 Altenkerchen에 있는 New Life Mission을 찾아갔다. 아주 아름다운 자연 가운데 수양 관이 있었고 그곳에 새 생명 선교회 본부가 있었다. 이 선교부에 여행 부에서는 일 년에 두 차례 성지 여행을 주관하고 있었다. 우리는 오는 4월에 있는 성지 여행단에 한국 팀을 끼워 줄 수 있는지를 의논하러 온 것이다. 우리는 여행 담당자를 만났는데, 그분은 모임의 형제분이었다. 우리의 요구를 제출했다. 이미 엘리스가 다 의논하여 놓아서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선교회에서 의논한 끝에 한인 Team을 독일 성지 순례단 250여 명의 Team에 끼워 주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나를 Team Leader들 가운데 Korean Leader로 이름을 올려놓을 테니 10명 이상을 모집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10명 이상이면 Leader 한 사람은 Free이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언어가 다른 민족 팀을 이렇게 끼워주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여서 특별히 배려해 주는 것이 고맙기만 했다. 주님께서 엘리스를 통해서 한국서부터 기도하고 있는 나의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역사해 주시고 계셨다. 성지 여행이 눈앞에 닦아오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Allen에서 간호사 부인을 잠시 만나 주님의 은혜를 나누었다. Minden에서 독일 침례교 목회자와 결혼하여 사는 이 자매 가정에서 교제하며 음식 대접을 받았다. 자매가 오순절 교파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해서 그들의 정체를 잘 설명하여 주었다. 5시 40분경 하노버에 돌아왔다. 이번 우리의 전도 여행은 905Km를 달려 중남부 독일을 돌아온 셈이다. 약 한 주간의 긴 여행을 통해서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는 독일 의 형제자매들, 그리고 엘리스의 헌신적인 사랑과 노력은 감동적이다. 나 자신도 많은 것을 배우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여행이었다. 안전한 여행과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이다.
하노버에 돌아오자마자 한복으로 갈아입고 유형제 가정에 가서 저녁을 나누고 목요 한인 성경 모임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중국 선교사 Dr. Bill Wallace of China
오늘 나는 내 방에서 쉬면서 미국 의사인 중국 선교사 전기인 "Bill Wallace of China" 책을 읽으면서 중국 사람을 사랑하다가 순교한 그의 높은 믿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돈이 없어서 수용하고 있는 환자들을 먹이기 위해서 닭 한 마리를 푹 삶아서 모두 퍼주고 자기는 먹지를 않고 있다가, 환자들이 먹고 버린 닭 뼈들을 모아서 물을 붓고 다시 삶아서 그물을 마시고 살아가다가 영양실조로 주님께로 가게 되셨으니, 부자의 나라의 외과 의사, 세계적인 남침례 교단의 의료 선교사가 영양실조로 사망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때의 중국은 통신과 물류 유통이 어려운 때여서 필요가 그때그때 원활하게 공급되지 못한데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중국인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이 분이 바로 성자가 아닌가!
오전에 성경 모임을 가졌다. 곽 자매님이 점심을 초대하여 주어서 문내순 오빠와 함께 가서 교제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문 선생이 체육 교사라 이곳 중고등학교에 가서 체육 관계 시설을 돌아보고 싶어 해서 한 독일 자매님의 소개로 학교에 가서 돌아보고 왔다. 저녁 김복림 자매 집에서 초청하여 다시 교제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교제하다가 좀 늦게 전차로 돌아왔다. 오늘도 주님은 DM 150을 축복해 주셨다.
오씨네 한국 식품점 개업
오늘은 한국식품점을 개업하는 오 씨네 가게에 가서 개업을 축하해 주었다. 인삼차 한 봉을 샀다. 최영 형제가 기뻐하는 모습으로 내게 닦아왔다. 이 인생도 사정을 들어보면 동정이 가기도 했다. 잘못 만난 여성으로 인해서 인생을 절망하고 있던 그가 새로운 인생을 향해 가고 있음이 보기에 좋았다. 이혼 서류가 잘 마무리가 되었다고 기뻐하면서 선물 봉투 하나를 주었다. 내순 자매도 선물 봉투 하나 주고 오빠와 남부로 떠났다.
영국으로 Jan. 13 sun
오늘은 영국 학교로 돌아가는 날. 영국에서 학교 휴가로 다니러 온 김갑숙 자매와 엘리스를 중심으로 한 3주 같이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는 나를 아주 피곤하게 했다. 김 자매는 여기 하노버에 간호조무사로 와서 일하다가 영국에 가서 성경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어서 자매들이 기도해 주고 있었다. 이 자매는 나와는 여기서 처음 만나게 되었고 아무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공사를 막론하고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 방문에 메모를 붙인다든지, 눈총을 준다든지, 뚱하고 말을 하지 않는다든지, 스토커 같이 나를 아주 불편하게 했다. 이곳은 모두 고국과 가족에 대한 향수 그리고 이성에 대한 그리움들을 지닌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주로 자매들만의 모임이어서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베를린서 처음 병원 기숙사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10여 명의 자매들이 모였다. 성경 말씀을 하기도 전에 노랑 옷을 입은 나이 먹은 포항 자매가 선교사님 꽃밭에 앉으셨네요, 하고 짓궂게 농담부터 하기도 했다. 오늘 이렇게 신경 쓰이는 사람과 헤어지게 되니 속이 후련해지고 있었다.
독일 초청장
내가 학생 신분이 끝나고 다시 서독을 방문하려면 해외 체재 기간을 연장해야만 했다. 여권 기간 연장을 위해서 Bach Strass교회의 초청장을 공증해서 Steinberg 장로님이 주셔서 고마웠다. 아직 나라 힘이 약한 우리로서는 그저 초청장이니 재정 보증 서니 하는 종잇장들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유 자매님 DM 50과 Slide 필름들을 선물로 주었고, 최영이 DM100, 자매 모임 DM 100, Bachstrass 모임에서 DM 500, 자매모임에서 추가 교통비라고 해서 DM 60을 더 주었고, 다시 DM 50은 우편으로 보내주겠다고 해서 너무 고마웠다. 가벼운 학생의 주머니를 주님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채워주셨다.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가득히 안은 채 하노버를 떠났다.
돌아온 영국
오후에 하노버에서 런던으로 돌아와서 기차를 타고 New Milton으로 오는데 마침 옆자리에 독일 여성이 앉아서 함께 이야기하면서 Southampton까지 오는데, 내가 목감기 기운이 있어서 불편해하자 자기 손가방에서 캔디 같은 것을 꺼내어 주면서 목감기에 좋다고 빨아먹으라고 한다. 고맙게 받아서 입에 넣고 빨아먹는데 그 맛이 하도 독하고 고약한지 그 여자 모르게 배타 버렸다. 얼마 후 몇 알 남은 것을 주면서 가지고 가서 먹으라고 해서 기가 찼지만 고맙게 받았다. 아주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것은 박하 Halls 종류인데 그것은 정말 맛이 지독한 것이었는데 그 독일 여성의 입맛에는 맞는 모양이었다. 그때 그런 것들은 한국에 없었다. 저녁 늦게 학교에 돌아오니 반가운 친구들과 새로 온 얼굴들이 나를 맞아 주었다. 그리고 많은 편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를린 요한나 자매가 £ 25를, 그리고 윤정심 자매가 보낸 Parker 만년필이 기다리고 있어서 반가웠다.
김제화
'선교 여행기 > 1.독일한인선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차 독일 선교 여행 1979(1) (0) | 2021.05.01 |
---|---|
제1차 독일 선교 여행(2) (0) | 2021.05.01 |
제1차 선교 여행(3) (0) | 2021.04.30 |
제2차 독일 선교 여행(1) (0) | 2021.04.29 |
안네 프랭크 (0) | 2021.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