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방문 기간 남은 시간은 하노버 수양회를 인도하고 함부르크와 발트해 그리고 알렌 광부촌을 방문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8.9 -8.20, 1979
하노버 수양회 8.10(금)-12(일) 1979
오늘부터 2박 3일의 한인 수양회가 시작되는 날이다. 수양회 장소는 Bach Strass 교회당의 아래층이다. 이 교회가 바로 서독의 한인들을 위한 선교를 주관하고 후원하는 교회이다. 이 독일교회에는 한인들이 20여 명이 나오고 있었다. 이 교회 지도자들은 하노버에 한인 인구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한인들만의 교회를 세우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유는 다음 세대는 어차피 독일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라 독일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 시대는 수십 년 뒤의 일이고, 독일에서 정착하는 일 세대의 신앙생활과 전도를 위해서도 민족교회가 필요하다. 또 2세대가 일 세대와 함께 살면서 독립하여 나갈 때까지 신앙과 민족 교육도 필요하다고 본다면 반세기가 지나 거의 한 세기가 걸리는데 독일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한인이 있는 곳에는 언어와 문화 때문에 민족 교회는 꼭 필요한 것 같다.
오후 3시경에는 수양회를 시작할 계획이었는데 다른 지역에서 사람들이 오지를 않아서 기다려야만 했다. 오후 4시가 넘어서야 Hamburg, Berlin 자매들과 그리고 남부에서 5명의 광부 아저씨들도 왔다. 저녁을 먹은 뒤에야 수양회가 시작되었다. 하노버 식구들과 한 30여 명이 모였으니 이곳 형편으로는 제법 모인 것이다.
남부에서 온 광부 아저씨들은 사실은 신앙보다는 색싯감을 만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었다. 내가 개인 전도를 하고 나면 그들은 나에게 장가들게 자매들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하곤 했다. 믿는 아가씨를 만나려면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면, 소개만 해주면 잘 믿겠다는 대답을 하고 있었다. 모두 30대 중반이 되어가는 젊은 청년들이 외국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어서 가정이라도 이루면 안정이 될 텐데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렇다고 한국 여성들이 없어서가 아니다 잘 이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2박 3일 집회에 그들은 젯밥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매일 한 번 이상 그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믿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설득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회개시켜 주시기를 기도했다.
반가운 조카들의 만남
수양회에 왔던 모든 분이 떠나가고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후를 쉬고 있는데 영남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베를린 축제에 갔던 영남 사촌 오빠들이 지금 왔다고 하면서 아저씨를 보고 싶어 한다고 지금 오라고 한다. 전철을 타고 영남 병원 기숙사에 가니 처음 만나게 되는 종씨 집안 두 조카를 만나게 되어 정말 기뻤다. 같은 종씨라고 해서 반가워하는 모습들이 남달랐다. 나이는 나하고 4~5살 차이지만 조카들 아버지와 내가 같은 학열이기 때문에 형 동생 해도 될 사이에 내가 아저씨 벌이 되는 것이었다. 친형제가 함께 독일 광부로 와서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예수님 믿기를 전하면서 즐겁게 지냈다. 그들은 김 성현 형제가 일하고 있는 Allen 탄광촌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고, 서로가 잘 아는 사이들이어서 반가웠다. 그곳에 한인이 40여 명이 있다고 하였다.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Allen 탄광촌을 한번 방문하도록 계획해 보기로 했다.
놀라운 축복들 8.13 Mon
오전에 김복림 자매가 한국에서 다니러 온 조카들을 데리고 수양관으로 왔다. 우리는 함께 식탁에서 잠시 성경을 보았다. 잠시 뒤에 조형제가 전도관에 물든 한 아가씨를 데리고 와서 말씀으로 치료해 주느라 애썼다. 오후 복림 차로 세 조카와 함께 하노버 시내 구경을 갔다. 하노버는 병참기지가 있던 이곳은 이차대전 때 심하게 폭격을 받아 전 시가지가 폐허가 된 곳이다. 오직 유일하게 남겨 놓은 것이 시청인데 아름다운 건물에는 총상이 벌집 쑤시듯이 나 있었다. 오후에는 약속대로 상미 자매 병원 기숙사에 가서 약혼자에게 복음을 전했다. 상미 자매가 나를 전차로 수양관까지 데려다주고 선물 DM 100을 주었다. Allen 광산촌에 있는 김 형제가 금요일 방문해 달라고 청하여서 가기로 했다. 내 방에 돌아오니 놀라운 한 통의 편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Hawaii에서 Mr. Hockaday가 학비에 보태어 쓰라고 $500의 수표를 보내왔다. 주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큰 선물을 축복해 주시는지 놀랍고 놀라웠다. 주님의 은혜가 크실 뿐이었다.
자매회 선물
엘리스 자매님의 아침 식탁에는 자매들이 함께하였다. 김학열, 김천자, 김천자, 춘자 자매들이 며칠 뒤에 떠날 나를 위하여 약과 머큐롬, 비타민, Q-Tips, 등을 가져다주어서 고마웠다. 식사 뒤에 차를 나누며 잠시 성경 교제를 하였다. 그리고 박춘옥 자매가 한국에서 약혼자를 데려오는 문제와 한국 가정에서 생긴 사고들을 들으며 상담했다. 저녁은 조 형제 집으로 가서 모인 식구들과 식사하고 말씀 교제를 했다. 박춘옥 자매가 DM 50, 자매 모임에서 그동안 수고했다고 DM 600의 선물을 주었다. Allen에서 김성현 형제가 늦게 올라왔다.
Hamburg 방문 8.14-16,1979
앞으로 며칠은 우리가 Hamburg로 가서 교제할 예정이다. 이번 수양회에 온 Allen 김성현 형제와 Hamburg에서 온 강 자매와 나는 12:10 기차로 Hamburg로 떠났다. 나는 차 안에서 18년 만에 헤어진 어머니를 만나러 오는 동독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분단의 아픔은 여기에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는 그래도 가고 올 수 있는 길이라도 있어서 한이라도 달래고 있건만, 남북은 가도오도 못하는 이 답답한 아픔을 어찌할꼬. 우리가 Hamburg 역에서 내려서 잠시 기다리니 베를린에서 내려오는 문내순과 윤정신 자매를 만났다. 모두 정창숙 자매가 일하는 병원 기숙사로 가서 교제하기로 했다. 나는 전창숙 자매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전 자매가 우리 일행을 여기 병원 기숙사에서 며칠 머물도록 준비해 주었다.
◐ 레베 강의 석양
우리는 저녁 식사 뒤 레베 강 언덕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레베 강변은 검은 갯벌로 뒤 덥혀 있었다. 바다가 가까운 강은 밀물의 영향으로 강물이 불어나고 있었다. 바다 저 건너편 서녘으로 넘어가는 붉은 해님을 보려고 많은 사람이 강 언덕으로 오고 있었다. 유달리 붉은 해님은 수고 많은 인생에게 편히 쉬라고 손짓하면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석양이었다. 해님이 사라진 레베 강에는 어두움이 깃들면서 그 많던 사람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나는 아름다운 해님을 마음에 담은 채 돌아왔다. Hamburg에 사는 신 형제 김명섭 자매 부부가 와서 반가웠다. 역시 내가 처음 만나는 형제자매였다. 교제해 보니 김명섭 자매는 내 자매와 같은 고향이어서 더 반가웠다. 노량진교회에서 생활하다가 독일로 왔다고 했다. 여러 사람이 나에게 내일 계획을 물어서, 여러분들이 세운 계획이 있으면 그대로 따르겠다고 하니 아무 계획이 없다고 했다. 나는 내일 심방이나 상담 등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내일은 아무 계획이 없다고 하면서 그동안 독일에 와서 너무 일정에 매여서 지내느라 바빴을 것이고 며칠 뒤면 또 Allen 광부촌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야 하므로 여기서는 며칠 쉬라고 권해 주어서 고마웠다. 나는 할 수 있으면 내일 바다 수영을 좀 하고 싶다고 했더니, 내일은 모두 독일 최북단에 있는 Baltic Sea(발트해)로 수영을 가기로 했다.
Baltic Sea 8.15
오늘은 서독 북단에 있는 Baltic Sea로 수영 가는 날. 간밤에 비가 내렸고, 먹장구름이 끼고 날씨가 쌀쌀해졌다. 아직 8월 중순인데 날씨가 이렇게 쌀쌀하다니 바다에 가서 수영할 기분이 아니다. 가는 길에 모두는 Budic 형제님 댁에 들려서 차를 나누며 잠깐 노형의 간증을 들었다. Budic 형제 부부는 원래 소련 출생으로 친척 방문으로 소련 갈 때마다 성경을 한 가방 가지고 들어가다가 걸리기도 하고 간신히 가지고 들어간 일들과 강제노동 수용소 담 구멍으로 들어가 전도하다가 잡혀서 강제 추방당한 용감한 사역들은 스릴 넘치는 간증들이었다. Budic 노형은 정말 믿음의 용사셨다. 나는 노형에게 선교에 쓰도록 DM 20을 드렸다.
우리는 두 대의 차로 Lubeck으로 해서 서독의 최북단 Baltic Sea에 맞닿은 Rostock 도시에 도착해서 이름나 있는 아름다운 Beach로 갔다. 여기서 배들이 이 발트해를 건너서 Scandinavia 반도, 즉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그리고 핀란드로 가고 있었다.
먹구름은 걷혔지만 쌀쌀한 북쪽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바다에는 Surfing을 즐기는 몇 사람들만 있었고, 수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이 넓은 모래밭에는 한국 나그네들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두 형제에게 바다에 들어가자니까 꺼린다. 어저께 오늘날이 안 좋아도 수영하기로 약속하고 왔으니까 자매들 앞에서 사나이의 용기를 보이라고 했더니 모두 마지못해서 수영복을 갈아입었다. 수영은 내가 하고 싶어서 모두를 데리고 온 것이니 나는 어떤 경우에도 바닷물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독일에서의 추억도 남기고 싶었다.
♠ 그리운 얼굴들 ♠
이제 70대의 할매와 할배들이 되었을 형제자매들이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 소식을 듣고 싶다. 멀리서 오는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나는 지금 캐나다에 살고 있다.(jewhakim@daum, net/ 1-647-870-8180, 카톡)
형제들에게 따라 들어오라고 하면서 바다로 뛰어들어 갔다. 바다가 워낙 얕아서 한참이나 들어가야 무릎에 물이 찬다. 바닷물은 살을 에듯이 차다. 그러나 미친 듯이 뛰어들어 물속에 들어갔다. 그리고 뒤를 돌아다보니 신 형제는 몇 발자국 들어오다가 달아나 버렸다. 김성현 형제는 아예 자매들 주위만 맴돌고 있었다. 한 10여 분 지나니까 몸에 열이 나서 이젠 견딜 만했다. 내가 수영하는 데 저만치에 대단히 큰 호화 여객선이 유유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내가 손짓을 하자 응답의 손짓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한번 타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북반구의 푸른 하늘 아래 이 넓은 바다에 수영하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한 30분 하다가 나오니 모두 손뼉을 치면서 대단하다고 해서 기분이 괜찮았다. 우리는 시내에 들어와서 따뜻한 차와 음식을 나누면서 즐거운 교제를 나누었었다.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와 피로를 푸는 좋은 하루여서 모두의 지원과 친절이 고마웠다. 근무시간 때문에 함께 가지 못한 김과 전 자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Allen 김성현 형제가 미리 내려가서 광부 촌의 성경 집회를 준비해야 하는 일로 저녁 열차로 내려갔다. 윤영신과 문내순 자매들도 늦게 교제하다가 자정이 지나서 Berlin으로 떠났다.
Allen 탄광촌 방문 8.16 - 18 Sat
나의 Allen 방문을 위하여 Hamburg 김 형제가 수고해 주기로 했다. 10시경 그동안 수고 많았고 친절했던 전창숙 자매를 뒤로하고 신형제의 폭스바겐 차로 Allen으로 떠났다. 공랭식으로 된 차는 이제 너무 낡아서 열을 받으면 김이 올라와서 쉬면서 가야만 했다. 그러나 형제와 함께 쉬어가면서 또 다른 지역의 풍치를 즐기는 좋은 여행이었다. 이 차는 히틀러 시대에 가장 연료가 작게 드는 독일 가정을 위해서 만든 차였다.
도착하자 김성현 형제와 두 조카가 나와서 환영해 주었다. 말만 듣던 독일 한국인 광부들이 사는 촌인 아파트에 왔다. 광부들이 살아서 광부촌이지 한국의 탄광촌 하고는 근본 다른 세상이다. 시설이 좋은 아파트 주거단지였다. 여기서는 석탄이라는 것은 볼 수가 없다. 멀리 떨어져 있는 탄광으로 통근버스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저녁에 퇴근한 분들이 모여 와서 한 방에서 성경 모임을 이루었다. 나는 근본 죄인인 우리가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를 깊이 그리고 온 힘을 다하여 전했다. 집회 뒤에 차와 과일들을 나누면서 광부 생활의 애환들을 들으면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반갑고 즐거운 하루였다.
오늘은 낯에 쉬는 분들이 많아서 오전 성경 모임에는 15여 명이 함께했다. 독일에 와서 그동안 주로 여성들과만 모임을 하다가 여자가 없는 남자들만의 성경 모임을 하게 되어서 또 별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이지만, 여기에 온 보람이 있었다. 나는 단지 돈벌이를 위해서 여기에 온 대한의 젊은 청년들에게 세상의 부만이 아니라, 구원을 받아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영생을 가지고 마음의 부유함을 가지고 살자고 전했다. 주님은 이 부족한 자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셔서 한없이 고마웠다. 바로 이 젊은 노동 전사들(광부, 간호사)에 의해 한국 경제발전의 밑 걸음이 되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잠시 쉬고 있는데 정문에서 김성현 형제에게로 어떤 여자분이 찾아왔다는 전화가 왔다고 내려갔다. 내가 마음이 짚이는 데가 있어서 아파트 창문으로 정문을 내려다보니 배추 색 차가 보인다. 베를린서 문내순 자매가 그 먼 길을 혼자 달려 내려온 것이다.
토요일은 거의 모두가 쉬어서 오늘은 넓은 곳에서 성경 모임으로 모였다. 이곳 주위 한인교회는 주로 자유주의와 해방신학에 물들어 있어서, 나는 그리스도 구원의 진실성과 영생의 문제를 깊이 설교했다. 듣는 모두의 마음들이 진지해지고 있는 것 같아서 전하는 나도 힘이 더 났다. 끝나고 나서 몇 사람은 이런 구원의 설교는 처음 들어본다고 하면서, 여기서는 이런 설교를 듣지 못한다고 하였다. 문 자매와 광부 아저씨들이 함께 점심 준비를 하였다. 갈비구이를 하였는데 맛이 좋았고 김치 맛도 베를린과 하노버 자매들이 만들어 먹던 것과는 근본 달랐다. 모두 남자들만 사는데도 반찬과 음식이 수준급이었다. 김치가 왜 그렇게 맛이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분들이 김치를 만들 때는 도살장에 가서 소 내장과 뼈를 사다가 푹 삶아 우려낸 국물로 만든다고 한다. 독일 사람들은 내장과 뼈를 버리므로 도살장에 가서 고기를 좀 사면서 그냥 가져온다고 한다.
오후에는 사고로 입원해 있는 한국 청년 세 사람을 문병했다. 이국에서 가족도 없이 병상에서 외로움을 달래면서 병마와 싸우고 있어서 마음이 안되었다. 나는 그들을 위로하면서, 영원한 삶을 주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살도록 부탁하고, 주님께서 건강 주시도록 기도해 드렸다. 김찬봉 형제가 여행길에 식사나 하라고 DM 100을 주었다. 오후 3시가 넘어서 잠시 정든 조카들과 Allen 식구들과 헤어져야만 했다. 우리는 돌아오다가 한 휴게소에서 잠시 차를 나누며 쉰 뒤에 김 형제는 Hamburg로 가고, 문내순 자매와 Hannover로 가고 있다고 엘리스에게 알렸다. 어두워질 무렵 우리는 너무 피곤하여서 한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했다. 휴게소 너머 오솔길 양옆으로 추수를 앞둔 밀밭 사이로 휴식하는 여러 사람이 거닐고 있었다. 어두움이 깃드는 한적한 밀밭 오솔길은 고향의 향수(nostalgia)를 느끼게 했다. 어둠이 깃든 이국의 하늘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지만 나그네의 길은 바빴다. 다시 떠난 차는 130Km가 넘게 고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페달을 밟는 그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고 있는 듯하였다. 어두움을 밟고 달려서 12시가 넘어서야 하노버에 돌아왔다. 엘리스는 우리가 늦게 오니까 문에다 열쇠가 화단 화분에 있다는 메시지를 부쳐 놓았다.
배구 시합 8. 20일 Sun
Back Strass Gemeinde에서 함께 예배를 드린 뒤에 하노버 한인 식구들이 엘리스 집에서 식사하고 뒤 뜰 테이블에 앉아서 교제하는데 수양관 직원들이 나와서 함께 공치기를 하다가 한독 배구 시합을 하게 되었다. 열전 끝에 우리가 이기기는 했지만 즐거운 경기였다.
내일은 내가 떠나는 날이어서 그런지 Steinberg 장로님이 저녁 초대를 하여주셨다. 마침 엘리스는 다른 일이 있어서 함께 갈 수 없어서 우리만 갔다. 즐거운 식사 교제 가운데 Steinberg 장로님이 1월 휴가에도 오라고 청해 주어서 고마웠다. 아마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좋은 모양이었다. 정 자매는 비누 한 Case와 DM 20을 주었다. 김학열, 문내순 자매와 돌아오다가 내일 헤어지겠기에 잠시 쉬었다 가자고 해서 숲 속의 Bar에서 Snack과 Bier들을 들면서 교제하다가 돌아왔다.
Hannover를 떠나는 날 8.21 월
오늘은 독일의 공식 일정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문내순 자매와 김성현 형제가 점심 준비를 한다고 장보러 가더니 갈비와 점심거리를 가득 사 왔다. 엘리스는 엄청나게 많이 사 온 부식에 눈이 둥그레졌다. 역시 손이 큰 사람들이었다. 모두 함께 도와서 한 상 가득히 차렸다. 8~9명의 형제자매들이 들러 앉아서 즐거운 식사를 나누며 교제를 하는데, 엘리스가 옆에 있는 한국 자매와 수군거리더니 살며시 하노버 산 Bier 한 병을 냉장고에서 조심스럽게 내놓는다. 내가 의아하게 보고 있으니까, 엘리스는 나에게 형제가 여기 올 때 사다 놓은 것인데 그동안 나에게 주기를 망설이고 있었다고 하면서, 한 잔 권하기에 받아주었더니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다. 오후 3시 50분 영국으로 돌아가는 나를 위하여 여러 형제자매가 전송을 나와 주었다. 주안에서 어디를 가든지 이웃이 있고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주안에서 우리는 결코 ‘홀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고맙고 친절했던 형제자매들의 흔드는 손길들을 뒤로하고 나는 도버해협을 건넜다.
런던 Heathrew 공항에 내려 London 북부에 있는 Logos Language School에서 준비해 놓은 Velson Road에 있는 하숙집을 찾아가니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늘부터 여기서 한 달 자치를 하면서 부족한 영어를 배우게 될 것이다. 시간이 없어서 더 오래 배울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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