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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여행기/1.독일한인선교

제1차 독일 선교 여행 1979(1)

☞제1차 독일 선교 여행 6.28-8.20, 1979

 

독일은 어떤 나라?

정치 : 의원 내각제,  연방공화국

나라 크기 : 357.168㎢(1978)

인구 : 약 8100만

돈 : DM(Deutsche Mark) ☞ Euro

말과 글 : 독일어

 

역사

고대에 여러 게르만족이 살던 독일 땅은 게르마니아로 알려져 있었으며 게르만족의 땅은 1806년까지 존속한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부를 이루었다. 16세기에 북독일은 루터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된 종교 개혁(Reformation)의 핵심부로 자리 잡았다.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이 끝날 때까지 많은 사건이 있었다. 1315년에 대기근이 일어나고, 1348-1350년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인구가 크게 줄었다. 1517년 로마 가톨릭 신부였던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 루터의 파문, 농민전쟁, 에라스뮈스의 자유와의 의지론을 둘러싼 논쟁을 거쳐 인문주의와의 결별로 루터교회는 1530년 뒤로부터 유럽의 여러 나라의 공식 교회가 되었다. 기독교와 가톨릭의 30년 전쟁으로 독일은 황폐해졌다. 이렇게 백성을 괴롭히던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멸망하고, 1871년 독일은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어 근대적인 국민 국가가 되었으나,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주관하는 나치당에 의하여 중앙집권적인 전체주의 나라를 되었다. 그리고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을 피비린내 나는 아비귀환의 세상을 만든 독일은 연합국에 의해 1945년 5월 8일 패망하면서 엄청난 젊은 이들이 희생되었고 나라는 황폐해졌다. 

 

전쟁의 결과

패전의 결과로 1945년 6월 포트담 회의에서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선 문제를 결정지으면서 독일 땅이던 오데르-나이세션 상 유역의 땅을 잃었다. 아울러 독일은 승전국인 연합국의 네 나라(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의해서 나누어져 통치되었고, 독일의 중심이며 서울인 베를린도 네 지역으로 나누어졌다. 1949년 5월 23일에 연합국 점령지 세 지역은 하나로 통합 되어서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이 되었고, 10월 7일에 소련 점령지는 독일 민주공화국(동독)이 되었다. 베를린도  세 지역은 통합되어 서베를린이라고 하고, 한 지역은 동독의 서울로 동 베를린이 되었다. 서독은 서울을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600Km 떨어진 Bonn을 임시 수도로 삼게 되었다.

 ▽ 세계 이차 대전의 주범인 독일은 나라가 조각나고 분단된 상태로 45년간을 지내다가 1990년 10월 3일 동서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은 갑자기 통일이 되었다.

     

독일 형제교회의 한인 사역

1950경에 민간 차원에서 독일에 여성 의료 인력(간호사 ·간호조무사)이 소극적으로 보내지다가 1966년해외 개발공사와 독일 병원협회와 계약을 맺음으로 적극적으로 1969년부터 대량으로 송축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광부들도 송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한국의 딸들이 서독에 의료 인려으로 송출될 때 독일 형제교회에서는 발빠르게 한인 여성들을 영적으로 돌 볼 두 국내 여성 선교사를 임명하게 된다. 하노버를 중심으로 서독 전역을 위하여 수간호사 엘리자벳자매를, 그리고 서베를린 지역을 위하여 수간호사 요한나 자매를 임명하였다. 나의 독일 방문 사역은 이미 내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주님께서 준비해 주셨다. 파독 간호사들이 귀국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일하던 독일 국내 선교사 엘리자벳자매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우리는 서로 알게 되었다. 하노버 선교부에서는 내가 영국 학교에 있는 동안 초청하여 주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요한나 자매는 내가 베를린을 방문할 때까지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에서의 사역 내용

독일 사역은 1979에서 1980까지 방학이나 휴가 때마다 초청하여 주어서  네 차례에 걸쳐  하노버를 중심으로 하는 남독과 서베를린 사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주님께서 부족한 이것을 계속 쓰시고 계셔서 감사한 일이었다. 독일에서의 사역은 베를린과 하노버에서 한 번씩 주말 수양회를 했고, 그리고 그때그때 소그룹의 성경 모임은 모여지는 대로 모였고, 개인 심방 전도 상담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엘리자벳과 요한나 자매가 한국의 딸들을 영적으로 돌보아는 주지만, 근본적으로 언어와 문화의 간격을 메워주지 못하여 생기는 어려움들이 있어서 나를 초청하게 된 것이다. 내가 하는 사역은 짜인 공식적인 집회보다는 자연스러운 다양한 만남이었다. 그 만남은 때에 따라 한 사람 또는 한 가정 그리고 여러 사람이었다. 장소도 가정 집, 병원 기숙사, 공원, 교회, 등 그때 그때 사정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만남, 모임을 가졌다. 엘리자벳과 자매는 공식적인 집회외에는 매일 오전 오후 또는 저녁 나에게 누군가를 만남게 해 주려고 수고를 많이 했다. 나를 놀리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서베를린은 동독에 둘러 쌓여 있어서 서 베를린 자체 안에서만 활동하고 있어서 요한나자매는 엘리지벳 만큼 바쁘지 않아서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또 두분의 성격도 달랐다. 엘리자벳은 비서 타잎으로 좀 날카롭고 깐깐한 반면 요한나는 푸근하고 털털하여 함께 지내기가 더 편했다.  그러나 하노버를 중심으로 하는 엘리자벳의 사역은 남부 독일 전체를 망라하고 있어서 일이 많았다. 베를린을 방문할 때는 주로 정한 곳에 머물면서 활동하지만, 하노버는 하노버 지역만이 아니라  왕복 1500-2000Km 정도의  선교여행을 계획한다. 한번 선교여행을 떠나면  한주 또는 두 주 정도 여기저기 한인들과 독일 교회를 방문하면서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정처 없이 떠 도는 나그네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다. 두 번에 걸친 남부 독일의 방문으로 여러 도시를 방문하여 그곳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경험한 아름다운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독일 방문 사역

베를린(Berlin)

조각난 나라, 그 안에 조각난 베를린은 동독 땅안에 떠 있는 섬과 같다. 베를린 저체의 1/3일 차지하고 있는 서베를린도 동쪽으로는 동베를린 장막이 가로막고, 북서남은 동독 장벽에 에워싸여 있으니 하나의 수용소나 다름 없었다. 

 

1. Berlin 사역  June 28 - July 9, 1979

1879년 1월부터 나는 영국에 있는 Chelston Bible College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백덕심 자매로부터 전화가 왔다. 베를린 한국 자매들의 모임에서 나를 초청하고 싶다면서 하노버 가기 전에 먼저 베를린을 들려 달라고 하여서 그렇게 하기도 했다. 베를린을 방문한다는 것은 꿈에서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주님께서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길을 열어 주셨다. 학교의 여름휴가가 시작되자 먼저 베를린을 찾았다. 공항에 내리자 요한나와 몇 자매들이 맞이하여 주는 데, 모두 처음 만나는 자매들로 반가웠다. 오늘부터 베를린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전에 한 번도 만나 교제해 본 적도 없는 식구들은 거의 모두 자매들이고, 독일을 처음 온 나는 말도 모르고 이곳의 습관이나 문화를 잘 몰라서 조심스러웠다. 이곳에서 말로만 듣던 사촌 처제인 홍경표 자매가 인사하러 찾아와 주어서 반가웠다. 오늘 이곳 자매 대표들로부터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하게 될 일들을 들었다. 오후에 여러 자매와 교제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한 병원의 기숙사에 갔다. 자매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매들이 풍성한 한국 음식으로 저녁을 준비하여 함께 나누는데, 나는 여섯 달 만에 먹어 보는 고국의 음식이어서 몹시 반가웠다. 십여 명의 자매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면서 주님의 구원해 주신 은혜를 찬양했다. 나는 베드로후서 1장의 말씀을 나누고, 늦게까지 교제하면서 첫 상견례를 하였다. 밤이 늦어서 병원에서 버스를 타고 오다가 지하철로 갈아타고 돌아왔다. 오늘 베를린의 시내버스와 지하철을 타 보는 첫 경험을 하였다. 한국의 딸들이 여기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해 가고 있어서 자랑스러웠다. 오늘 오전은 윤영자 자매 병원 기숙사에서 성경 모임을 했다. 윤정신 자매와 다른 두 자매와 함께 요한나 집으로 돌아와서 교제하는데 돌아가지 않고 있어서 알고 보니 두 자매가 오늘 밤 당번이란다. 혼자 사는 요한나 자매 집에 내가 머물게 되므로 어떨까 하여서 당번을 정하여 머물게 하고 있었다. 재밌는 일이다. 

 

베를린 장벽과 동베를린에 갇힌 아파트촌

동서독 장벽은 베를린 사람들에게는 재앙이었다. 심지어 주택과 주택 사이 그리고 아파트 단지가 나누이면서 갑자기 가족과 이웃이 동서족으로 나누어지면서 서로 마주 보면서도 오가지 못하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베를린 교회  7. 1 Sun

요한나 자매님과  함께 교회로 가는 길에, 동서가 나누인 붉은 담의 국경선으로 가더니 차를 세우고 전망대로 나를 데리고 올라갔다. 그곳에서 동베를린 안을 볼 수 있었다. 분단의 아픔이 한국만이 아니라 여기도 있다는 현실에 마음이 서글퍼졌다.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인생들이 살면서 하는 일들이 허망하기만 하다. 동독에서 탈출하다가 희생된 장소에는 십자가와 꽃다발이 쓸쓸히 놓여 있었다.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독일 형제교회는 분단의 장벽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이 교회가 내가 독일에서 처음 참석해 본 교회였다. 몇몇 한국 자매들의 얼굴들이 보여서 반가웠다. 40여 명의 노인이 대부분이며, 형제들은 앞에 있는 만찬상 양쪽으로 마주 보며 앉았고, 자매들은 앞쪽을 보고 앉았다. 기도할 때는 모두 일어나는 습관이 영국과 달랐다. 예배 뒤 말씀 시간에 나에게 간증을 해 달라고 하여 나의 간증을 요한나 자매가 통역했다. 예배가 끝나고 모임에서 선물 봉투 하나를 주셨는데 100마르크였다. 독일에 와서 교회로부터는 처음 받아 보는 선물이었다. 이 교회는 동서 베를린의 장벽이 세워지면서 바로 저 담 너머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하면서 저 담이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회당과 가까운 곳에 사는 문내순 자매가 자기 아파트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여 주었다. 7층 아파트에 오르니 창문으로 동베를린 안쪽을 환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으며, 동독 경비병과 손짓도 할 수 있는 거리였다. 저쪽  붉은 담 안에는 세 겹 철조망으로 되어있었으며, 그 안에 갇혀 사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문자매가 맛있는  점심을 하여주어서 고마웠다. 오후에는 또 다른 지역의  국경선 장벽을 돌아보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한 10여 명의 자매들이 모이는 모임에서 말씀을 교제하였다.

 

베를린 시내 돌아보기 7. 2 Mon

KADEWE 백화점

오늘은 베를린에 온 뒤 처음 쉬는 날이다. 몇 자매가 나에게 베를린 시내를 구경시켜 주었다. 요한나 자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럽에서 제일 크다고 소문난 KADEWE라는 백화점이 있어서 돌아보았는데 엄청나게 컸다. 그땐 아직 한국에 이만한 백화점이 없던 때여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er) 개선문 

베를린의 중심 Hitler 광장에 이르자 브란덴부르크 개선문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브란덴부르크  개선문은 독일의 역사와 정신이 담긴 웅장한 건축물로 평화를 상징하는 그리스 여신 에이레네와 그녀를 이끄는 승리의 '콰드리가(Qurdriga)' 마차가  문 위에 조각되어 있었다. 이 문은 원래 1734년 국왕 빌헬름 1세가 베를린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을 쌓으면서 18개 성문을 건설하였는데 지금의 브란덴부르크 문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1780년대에 이르러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북유럽의 강국으로 성장한 프로이센(독일 ) 왕국의 국력을 과시하고 평화의 상징으로서 베를린에 새로운 랜드마크 (상징적인 건물 )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면서 원래 있던 브란덴부르크 문을 허물고 1988년에 착공하여 1791년에 지금의  새로운  브란덴부르크 개선문을 완공하였다. 지금은 베를린의 18개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관문으로 도시의 영광을 상징하는 승리의 랜드마크(상징)였으나, 동서독의 분단으로 동서분할을 상징하는 문이 되었다. 문을 막은 담 넘어 광장에는 소련 군인들이 경비하고 있었다. 원래 승전 탑 위에 있는 4두 마차(Qurdriga)는 서베를린 쪽을 향하여 있던 것을 동독 수상이 자기네 쪽인 동 베를린으로 돌려놓았다.

이 사두마차는 1961년 장벽이 세워진지 28년 뒤인 1989년 동서의 장벽이 무너지므로서 다시 서쪽으로 제자리로 돌려졌다.

 

홍경표 자매 초대
홍경표 자매는 내 아내의 친척 동생으로 처제가 되는 데 셈인데 여기서 처음 만나게 되어서 반가웠다. 경표가 점심을 초대하여 우리 모두 그의 집에 가서 식사하면서 오전에 돌아본 일들을 나누며 즐거운 교제들을 나누었다. 경표 처제가 슬라이드 필름과 우표가 든 봉투를 주었는데 방에 돌아와서 보니 봉투에는 DM 100의 선물이 들어 있어서 좀 놀랐다. 요한나 집으로 돌아와서 문내순과 정해월 자매들과 교제했다. 이 집에는 내가 머무는 동안에는 언제나 당번을 서는 자매들이 있어서 나 홀로 조용한 시간을 가지기가 어려웠다.

 

베를린 박물관  7. 3 Tue

자매들이 오전에는 계획이 없다고 무엇을 하면 좋겠냐고 물어서, 나는 박물관에 가자고 했다. 오전에 우리는 먼저 이집트, 바벨론 앗수르 등 중근동 박물관에 가서 성경과 관계있는 고고학 자료들과 역사를 돌아보면서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이집트박물관(Egyptian Museum)  7. 5 Thu

 

오늘은 문내순과 홍경표 자매와 함께 이집트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그동안 글로만 읽고 흑백 사진으로만 보던 자료들을 실물로 보게 되어서 감격스러웠다. 모세 시대 이후의 역사를 한 눈으로 보는 것이 꿈만 같다. 유리관에 든 미라를 보는 것은 더욱 신기한 일이었다. 몇 천 년 전의 사람이건만 얼굴 머리카락이 그대로 있지 않은가! 요 며칠 너무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고 있어서 내가 선교지원을 왔는지, 중근동 역사를 공부하러 왔는지 잠시 헷갈리기도 하였다. 내가 한국에서 감히 어떻게 이런 인류의 위대한 고대 유산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기적 같고 축복이요 행운이었다. 서구 열강들이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서 그 나라의 국보급의 귀한 역사적 유물들을 이렇게 약탈하여 가지고 와서 자기 나라에 버젓이 전시하여 놓고 자랑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었다. 마치 왜국이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하여 고분을 도굴하고 우리의 고귀한 문화재를 마음대로 약탈하여 간 일본군국주의자들의 만행이 떠 올랐다. 마음 흐뭇한 관람을 마치고 박물관을 나서자 두 자매가 수군거리더니 나를 데리고 Kadewe 백화점으로 갔다. 경표는 여름 난방과 베를린의 슬라이드와 필름을 사주었고, 내순은 Y-Shirt를 두 개 사주어서 고맙기도 하고 미안했다. 

 

나귀 장로님 초대

점심은 지난주 처음 참석한 베를린 형제교회의 ‘나귀’ 장로님 댁에서 초청하여 주셨다고 하여 그 댁으로 갔다. 이 분은 한국을 다녀 오신분으로 한국을 잘 이해하는 사람통이라고 했다. 두 분만 살고 계시는 아파트는 문 자매 아파트와 가까웠다. 내외분들이 우리를 반겨 주셨고, 노 자매님이 음식을 준비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셨다. 식탁은 독일식 음식으로 노란 옥수수와 밥, 등을 섞어서 마치 복음 밥같이 한 것이 맛이 있었다. 특이한 것은 교회의 장로님이 담배를 즐겨 피우시고 계셨다. 또 독일 형제자매들은 식사 때는 맥주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금주 금연의 전통에 매여 있는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좀 거슬리는 일이기는 하나, 먹고 마시는 습관이야 나라와 민족에 따라서 여러 가지일 것이며, 실제로는 신앙의 본질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며, 어디까지나 개인의 기호, 또는 건덕상의 문제이다. 사람이 정한 규칙이나 제도가 오래되면 마치 성경의 가르침인 양 착각하기도 하는데 한국 기독교가 그런 것 같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기독교는 금주 금연을 삼가지만, 법을 만들어 통제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한국 기독교회의 금주 금연법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짧게 옮겨 본다.

 

▶한국의 금주 금연 법
한국 기독교의 금주 금연 법은 평양에 와서 선교하던 초교파적인 선교사들의 모임에서 만들어졌다. 선교사들이 평양에서 조선 사람들을 관찰하니까 남자들이 너무 술을 즐기고 가정에서 행패가 심한 것을 보고 조선 사람들이 개종할 때에는 금주 금연을 하게 하자고 동의했다. 그래서 금주 금연 법이 만들어져 장로교 선교사 마펫 선교사의 응접실에서 공포할 때 선교사들이 위스키를 들면서 축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초기 한국 감리교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도 담배를 피웠고, 서양에서는 개인적 기호에 불과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술을 절도 있게 작은 양을 마시는 반면 조선 사람들은 분수가 없어서 사회와 가정에 피해가 컸다. 이러한 무절제하고 무법한 조선 개종자들을 위하여 금주 금연 법을 만들어 좋은 그리스도인들로 키우고자 했다. 그러나 그 법도 오래 지켜지며 강조하는 동안 전통을 넘어서 율법과 같이
되어서 마치 바리새인들의 전통같이 되어버린 것은 옳은 것 같지 않다. 

  

‘나귀’ 자매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셔서 고맙다고 말하고 있는 나에게 나기 노형은 나에게 선물 봉투 하나를 주셨다. 오늘 요한나 집의 당번은 내순과 경표였다. 요한나는 독신으로 살기로 선서한 기독교 자매회 출신으로 수간호사였다. 한국의 딸들이 독일에 간호사 또는 간호조무사로 많이 들어올 때 독일 형제교회는 그들을 전도하고 도와주기 위해서 베를린에서는 수간호사 요한나자매를, 서독을 위해서는 하노버의 수간호사 엘리자벳스를 국내 선교사로 세워서 일하게 하여 오늘날 이런 좋은 열매들을 가져왔다. 요한나 자매는 베를린 교회가 연합으로 후원하고, 엘리스는 하노버를 중심으로 서독의 여러 교회가 그의 사역을 후원하고 있었다. 독일교회가 한국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고자 베푼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돌아오는 길에 텅 빈 독일의 국회의사당을 둘러보았다. 지금은 동서로 갈라져서 서독의 서울이 남쪽 본(Bonn)으로 내려가서 의사당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통일이 되면, 독일의 의사당으로 다시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Hildgar Strass Gemeinde(힐드가 교회)  7. 4 Wed

오늘은 저녁에 독일교회에 가는 계획밖에는 오전 오후에는 아무 계획이 없었다. 쉬는 자매들이 종일 요한나 집에 와서 오전 내내 교제를 하고 나니 피곤도 하였다. 기분전환을 위해 자매들이 나를 데리고 Dahlem Museum에 가서 아프리카, 동남아의 유물들을 돌아보게 해 주었다. 그리고 점심으로는 자매들이 이태리 스파게티를 사주었는데, 처음 먹어 보는 것인데 맛이 좋았다. 오늘은 수요일 저녁으로 모임에는 한국 자매들이 주로 나가는 Hildgar Strass gemeinde(모임)에 가서 참석하였다. 저녁시간이어서 많이는 나오지 않았지만 모이기를 힘쓰는 열정이 보았다. 

독일 형제교회도 교회란 독일어 ‘Kirche’를 쓰지 않고 ‘모임(Assembly)'이라는 ‘Gemeinde’를 쓰고 있었다. 

 

빌헬름 황제 기념교회  7. 6

이차대전 때 베를린은 연합군의 폭격을 집중적으로 두드려 맞아 전 시가지가 초토화되었다. 베를린  중심에 자리 잡은 빌헬름 황제 기념교회당도 폭격을 받아 타다 남은 교회당은 전쟁의 유물로 남겨져 있었다. 그곳은 항상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이제는 관광객들과 오가는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어있었다. 나는 그곳에 잠시 들려 쉬면서 음악을 감상하는 좋은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자매들이 베를린 동물원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때는 한국의 창경원 동물원이 유일한 동물원이었는데 아직 환경이 열악할 때여서 베를린 동물원은 비교가 안될 만큼 크고 다양한 동물들이 선을 보여주고 있었다. 백덕심 자매가 저녁을 초대하여 주어서 그의 병원 기숙사에서 자매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정성스레 만든 음식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김 형제의 차로 돌아오다가 분위기 좋은 곳에 들려 차와 함께 음악을 들으면서 교제하다가 자정이 넘어서 돌아왔다. 

 

한인 성경모임  7. 7 Sat.

지난 며칠 동안은 자매들만 만나다가 오늘에야 남녀가 함께 모이는 성경 모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Mr. 서란 분이 저녁을 초대하여 주어서 몇 사람이 함께 아리랑 한국 식당으로 가니, 한국 가요가 흘러나오는데 오랜만에 이국에서 듣는 가요는 고국의 향수를 느끼게 해 주었다. 식사와 함께 여기서 살고 있는 한국 남자분들의 형편들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Mariendorf Gemeinde (마리엔돌프 교회) 7. 8 Sun

오늘 주일은 Mariendorf 모임에 참여하였다. 성찬은 한 분이 주관하고 있었고. 만찬 예배가 마친 뒤에는 형제와 자매들이 자유롭게 간단하게 기도하는 것이 특별했다. 자매들이 교회에서는 절대로 기도할 수 없다는 완고한 모임에 비하면 자유로운 모임으로 좋은 인상을 받았다. 형제들이 주관하는 만찬 예배 밖에는 자매나 형제나 같으며 서로 기도하는 일이 퍽 자유로운 것 같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나에게 교회에서 선물 봉투를 선물로 주었다. 법관으로 있는 하페 장로님이 요한나, 문내순, 나를  자기 집으로 점심식사 초대를 하여 주었다.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하페 형제는 갑자기 나에게 마태복음 5:1을 열어 왜 예수님이 산에 오르셔서 앉았겠느냐고 물으셨다. 조금은 나를 시험해 보려는 의도가 있어 보였다. 키가 큰 아들은 의대생으로 영어가 되어서 잠시 사귀어서 그의 방을 둘러보았다. 고마운 점심 대접을 받고 요한나 자매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10여 명의 자매가 모여서 교제하다가 한국에서 우리가 활동하는 환등을 보여 주었다. 그 환등은 적어도 2-3년 전에 찍은 것이었는데, 어떤 사진 속에 입고 있는 Y-Shirt가 지금 내가 입은 것과 같은 것을 보고는 어떤 자매가 슬쩍 지적하기도 하는 장난꾸러기들도 있었다.

 

Nazarus(나사렛) 병원 기숙사 성경모임  7.9 Mon

성경 모임에 가는 길에 동서 베를린 국경선을 이루고 있는 다리를 보여 주었다. 마주 보면서도 오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야 오죽하게ㅛ냐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동서독은 허가를 받아 친척 방문을 위해서 오갈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사렛 병원에는 몇 자매들이 일을 하는 곳인데, 인천 부평에서 온 경순 자매 기숙사에서 성경 모임으로 모였다. 마침 딸을 보러 오신 경순 자매의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했다.  모두 말씀을 사모하고 있는 마음들이 귀하였다. 나올 때 경순 자매가 교제의 선물을 주었다.  

 

요한나 자매님의 불평

저녁에 요한나 자매님이 나에게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 해서 자연스럽게 교제하는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서로 다 영어가 완전하지 못하지만 서로를 듣고 이야기하느라 마음을 썼다. 그는 입을 열어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박옥수 형제와 교제하는 일들로 모임 형제들과의 불편한 일들을 말하였다. 한국 형제교회의 실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문제였다. 또 요한나 입장에서 보면 독일에서 예수님을 믿고 돌아간 자매들을 방문하여 그들이 나가는 교회와 또 누구와 교제하던지 그것은 요한나의 자유로운 입장이다. 그런데 요한나가 양쪽을 오가며 끼치는 어떤 영향 때문에 모임 형제들이 말이 좀 있었던 것 같다. 사실 개인적으로 요한나 자매는 박옥수를 무척 좋아하고 있었다. 요한나자매가 한국에서 양쪽 진영을 함께 자유롭게 교제하는데서 오는 불편한 영향에 대해서 한국 나름대로의 사정을 잘 이해하도록 말해주었다.

 

어제저녁에 백덕심 자매가 엘리자벳 자매님에게 나의 하노버 가는 일정을 의논하였다고 하였다. 오늘 아침을 먹고 커피를 나누며 여러 자매들과 교제하는데 하노버에서 엘리자벳의 전화가 왔다. 마침 문내순 자매가 전화를 받았는데 내일 안 오면 하노버 자매들이 실망할 것이라는 엘리자벳의 성난 말을 전해 주어서 미안했다. 하노버에는 방문일정이 정해져 있는데 그날 가면 되는데, 왜 그렇게 신경을 쓰고 재촉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를 않았다. 내가 자기들 보다 먼저 베를린을 방문한 데 대해서 좀 서운해하는 것 같은데 그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것은 지난날 어떤 일로 서로 교제하지 않는 냉전 관계에 있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자기들 일로 아무것도 모르는 나만 좀 어려운 처지가 된 셈이었다. 한 10여 일 처음 만난 여러 자매들과 영적 교제의 즐거움도 누렸고, 베를린 분단의 장벽에서 우리 민족의 아픔도 깊이 느껴 보았다. 그리고 중동의 여러 나라 박물관에서 고대 성경역사와 관계있는 유물들을 통해서 이전에 가지지 못했던 넓은 세계를 맛보았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이었다. 이제 베를린을 떠나도 되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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