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동 수양관
한국 형제교회는 아주 천천히 발전해 가고 있었지만. 특히 사후동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는 2~3년 안에 몇 교회들이 개척되었다. 1968년 한국 형제자매들의 수양회를 통해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한 매카피 선교사는 수양관을 지을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수양관이 지어질 곳으로는 오산으로 넘어가는 고개 왼쪽 막장 골짜기에 있는 땅을 샀다. 이 골짜기를 살 때 외국 사림인 매카피 이름으로는 살 수가 없어서 김흥자 이름으로 샀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이 외로운 골짜기에 새로운 숨결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수양관은 자금 사정으로 여러 해가 지나서야 겨우 건물이 다 지어질 수 있었다. 건물이라고 해야 시멘트 벽돌에 아이빔(I-beam)을 얹어 짓는 값싸고 볼품없는 창고 모양의 건물이다. 수양관 건물이 어지간히 완성되자 나는 수양관 조경에 마음을 쓰게 되었다.
나는 여러 형제와 의논하여 수양관 조경하는 일을 돕기 위해서 전국 모임에 수양관 조경을 위하여 후원금을 보내 달라는 글을 보냈다. 얼마 뒤 모인 기금으로 김종승 형제와 병점 농원에 가서 나무들을 사 왔다. 돈이 많지 않아서 원하는 만큼 살 수가 없었다. 유평 박상호 형제가 은행나무 30주를 주어서 도움이 되었다. 나는 김종만, 조병현 등 사후동을 중심으로 하는 몇몇 형제들과 나무를 심고 수양 관 뒷산에 나무와 풀을 베면서 등산로도 내었다. 자금 사정으로 이태가 지나자 수양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목수인 쿤지(Kunzi) 노형도 노구를 이끌고 돕느라 애를 많이 쓰셨다. 그리고 미국에서 수영장 재료를 가지고 와서 작은 수영장도 하나 만들었고, 보기에 낭만적인 Cottage도 여러 채를 지었다. 미국 모임에서 배관 전문 노형이 오셔서 수영장과 반 수세식 화장실을 만들어 주시느라 수고가 많으셨다. 산골이어서 자연환경은 좋았으나, 교통이 너무 불편하였다. 높은 고개를 택시들이 편하게 들어오도록 좀 깎아내리기도 했으나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첫여름 여름 수양회를 막상 시작하자 큰 문제는 물 부족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매년 수백 명이 모인 여름은 언제나 물 부족으로 애를 태워야만 했다.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관정을 깊이 박으면 되련만 자금 때문인지 매카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록 한국 형제교회에 오래 남을 만한 기념비적인 건물은 아니지만, 창고 같은 건물이기는 해도 어려웠던 그 시절에는 그것도 대단한 것이라고 해야 하겠다. 한국에 수양관이 그리 많지 않던 그 시절에 한국모임에 주시는 주님의 귀한 축복의 선물이었다. 매카피 선교사는 이 수양관을 누군가 운영을 해 줄 손길이 필요하였다. 매카피 선교사가 사천진리와 강릉의 두 개 교회를 개척하면서 목회하는 나에게 수양관을 맡아서 운영해 주기를 바라는 요청을 하셨지만 나는 사양하였다. 다음 해에는 나에게 노량진 지복흥 형에게 수양관운영을, 나에게는 성경학교를 맡아 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수양관을 한국모임의 형제들에게 운영해 달라고 내어 주지도 않고, 아니면 당신이 스스로 조직을 해서 운영할 형편도 아니고, 수양관운영은 아무 계획 없이 어정쩡한 가운데 있었다.
수양관을 외부에 개방할 만큼 시설을 갖추지 못한 채 형제교회 위주로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쓰고는 일 년 내내 비워두는 비효율적인 것이 되었다. 그 뒤 수양관은 매카피 선교사의 개인 문제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더 발전하지 못하였다. 여러 해 뒤에 매카피 선교사가 다시 한국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면서 수양관은 한국 형제교회에 기념비적으로 남겨지지 못한 것은 몹시 아쉬운 일이었다. 사후동 수양관은 강림 장로교회에게 팔렸고 그 자금은 매카피와 몇몇 손길들에 의하여 처리되었다. 사후동 수양관을 사들인 강림교회는 건물을 다 헐어버리고 관정을 박아 물 문제도 해결하고 수양관 다운 건물을 지어서 잘 운영하고 있어서 보기 좋았다. 비록 지금은 사후동 골짜기에 한국 기독교 선교부와 그때 그 교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 흔적 위에 여전히 기독교가 살아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캐나다 토론토에 유학을 가서 Central Gospel Hall에서 6년이나 함께 생활하는 동안 그 교회에서 사후동일을 위해서 적지 않은 헌금을 보낸 것을 알게 되었다. 가끔 노 자매님들이 내가 매카피 선교사와 함께 일한 것을 알고 우리가 병원, 학교, 수양관을 위해서 모금을 해서 보냈는데 지금도 학교, 병원, 수양관이 잘 있는지를 묻는 질문들은 나에게는 번거로운 일이었다.
김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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